연극의 피
[연극인이 만난 사람] 김미란 X 김수정
정리_편집부
제237호
2023.07.13
- 미란
- 잘 지냅니까. 누구랑 인터뷰할까 생각해봤는데, 이때 널 불러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나 연출가 친구가 너 하나거든(웃음).
- 수정
- 고맙다. 불러줘서. 어떻게 지내?
- 미란
- 나는 <영지> 끝내고 좀 쉬고 있어. 쉽지 않은 작품이라, 보경 씨가 고생 많이 했지.
- 수정
- 얘기 많이 들었어. 둘이 헤어질 때 즈음 서로 익숙해졌다며?
- 미란
- 다 그렇지. 나도 신기했어. 영지 역은 초연, 재연, 이번 공연까지 매번 다른 배우들이 맡았는데, 세 번의 공연을 다 함께 한 배우도 있거든. 어느 날 무대를 보는데 세 번을 하니까 이런 호흡이 생기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신기했던 것 같아.
- 수정
- <영지> 너무 잘 봤어.
- 미란
- 나한테는 어려운 작품이야. 사람들은 내가 되게 잘 할거라고 생각하는데, 반대로 나는 풀지 못하는 숙제 같은 텍스트. 사람들한테 나는 이미지적인 연극을 하는 사람으로 각인되어 있나 봐. 그런데 나는 의외로 드라마 중심으로, 텍스트를 열심히 보거든. <영지>가 드라마가 아닌 건 아니지. 그럼에도 이미지가 없이 가기는 어려운 작품이잖아.
- 수정
- 이번 공연에서 병목안이라는 말이 들렸어.
- 미란
- 공연을 본 사람들이 병목안 이야기를 많이 해줘서 좋았어. 작가님이 살던 동네고, 거기서 출발한 이야기인데, 그 얘기가 들리면 좋은 지점이지.
- 수정
- 완전 고생했어. 잘 봤어.

- 미란
- 너랑 인터뷰한다고 이야기하면, 다들 깜짝 놀라면서 <김수정입니다> 이야기를 해. 연극 그만둔 거 아니었냐고. 그 시기에 내가 너무 바빠서 그 공연을 못 봤는데, 공연을 본 사람들이 ‘수정 연출님 연극 안 하신대요. 아세요?’ 그러는 거야. 그때 나 너한테 바로 연락했을걸.
- 수정
- “저는 이제 척하는 연극을 그만두겠습니다”라는 대사가 있었는데,
- 미란
- 그걸 다 오독 했구나.
- 수정
- 척을 하는 걸 그만두겠다는 뜻이었지. 잠깐 쉬니까 좋더라.
- 미란
- 그렇지. 일 년 쉬었나?
- 수정
- 일 년 쉬었지. 처음 쉬어봤어. 스무 살 이후로.
- 미란
- 그러네. 너는 작품을 많이 했으니까.
- 수정
- 좋더라.
- 미란
- 궁금해. 일 년 쉬고 나오는 작품은 어떤 내용일까.
- 수정
- 어떡하지, 아무것도 안 바뀌었으면.
- 미란
- 안 바뀌어도 안 바뀐 대로 의미있는 거 아니야?
머리부터 발끝까지 붉은색 피가 돌고 있었어
- 미란
- 우리 같이했던 연극부터 이야기를 해보면 좋을 것 같아서 정리를 해왔어. 질문이라기보단, 생각나는 그때 이야기를 나누면 좋지 않을까. 그래서 <안전가족> 이야기를 먼저 하려고. 너무 옛날인가? (웃음)
- 수정
- 진짜 옛날이다.
- 미란
- 되게 신기했던 것 같아. 살아있는 것들이 무대로 들어왔다는 감각이라고 하나. 오토바이 끌고 다니고, 강아지가 무대 위로 들어오고. 왜 수정이가 살아있는 것들을 무대 안으로 밀어 넣고 싶었을까, 그땐 공연 무대감독이라 정신없었는데, 지금에서야 궁금하더라고? 이때 작품들에서는 실제로 먹고, 마시고 했잖아. 이때도 척하는 연극은 아니었던 느낌인데.
- 수정
- <안전가족>을 했을 땐 연출을 시작한 거의 초반 시기잖아. 하지 말라는 걸 다 하고 싶었던 것 같아.
- 미란
- 극장에서 하지 말라는 거.
- 수정
- 연출로 전향을 했던 때잖아.
- 미란
- 안무가에서,
- 수정
- 배우였고, 다음에 안무가였고, 그리고 연출을 했는데. 그 당시엔 혈기 왕성해서 하지 말라고 하는 걸 무대 위에 다 섞어버리고 싶었어.
- 미란
- 맞아. 차 끌고 들어오지 마라.
- 수정
- ‘이게 왜 안돼?’라는 생각이 들면 다 시도해보고. 근데 문제는 점점 갈수록 용기가 없어져.
- 미란
- 극장 기술 감독님들이 한숨 쉬고 그런 모습이 생각나.
- 수정
- 너무 재밌었어. 언젠가 기회가 되면 꼭 재공연하고 싶은데.
- 미란
- 나도 다시 보고 싶은 작품인 것 같아, <안전가족>. 그다음이 <그러므로 포르노>였지?
- 수정
- 나도 모르겠다.
- 미란
- 사람들이 김수정에 대해 가진 어떤 인상, 오해나 편견 같은 게 있다고 느껴. 그걸 관객들에게 심어준 게 <그러므로 포르노>라는 느낌이야. 나는 이 작품에서 오히려 ‘김수정’ 같다고 느낀 건 ‘전환 장면’이었어. 꽃이었지?
- 수정
- 카네이션.
- 미란
- 말을 하는 사람이 목에 걸고 있었던 것 같은데. 벗어서 그다음 사람한테 전해주고, 전해주고.
- 수정
- 상대방한테 넘기면서 발언권이 주어지는, 마이크같은 느낌이었어.
- 미란
- 강렬한 이야기들보다 전환에 연출이 하고 싶은 말이 숨어있지 않나 생각했던 것 같아. 어떤 과정에서 나오게 됐나 궁금하기도 했어.
- 수정
- 이 시기에 내가 가부장제에 찌들어있다가, 토할 것 같아서 이 작품을 만들었거든.
- 미란
- 그래서 카네이션이었구나. 그때 당시에 가부장제에 엄청 집중해 있었구나.
- 수정
- 30대 초반에 목표가 가족관계에서 오는 것, 도제관계에서 오는 것, 선후배 관계에서 오는 것, 그것들을 거절하기였던 것 같아. 이 관계에 대해서 정말로 숨이 안 쉬어져서.
- 미란
- <그러므로 포르노>에서 비롯된 인상이랄까, 그 의견엔 어떻게 생각해? 유독 이 작품으로 사람들이 김수정 연출에 대한 인상을 가지게 됐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거든.
- 수정
- 그 당시에 내가 화나 있으니까, 그때 머리부터 발끝까지 붉은색 피가 돌고 있었어.
- 미란
- 첫 시작은 다 그런 것 같아.
- 수정
- 혜화동1번지 동인이 되고 첫 작품이라는 타이틀도 너무 부담스러웠던 것 같아. 이 작품을 거의 일 년 동안 준비했거든.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지 계속 질문하다가, 적당선을 타는 작품을 만들 건지 끝까지 가는 작품을 만들 건지 선택의 기로에 놓였던 것 같아.
- 미란
- 끝까지 가는 걸 선택했구나.
- 수정
- 그때 있던 팀원들도 끝까지 가자는 데에 동의했고. 공동창작도 처음이어서 당시엔 오히려 더 실험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했어. 공동창작이라는 개념을 처음 접한 게 윤한솔 연출님 작품에서 안무 작업하면서였거든. 이후에 혜화동1번지 동인이 되고, 다른 연출가들 작품들 보면서 이 형식을 흡수한 거야. 이때 하고 싶었던 건, 우리가 하고 싶은 얘기 다 넣자.
- 미란
- 런타임도 짧지 않았어.
- 수정
- 두 시간 넘었어. 진짜 많은 걸 시도하고 배운 작품인데, 하고 나서 평이 ‘되게 자극적이다, 폭력적이다’. 솔직히 상처 많이 받았지. 그땐 현장에 나온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얼마나 무서워. 이때는 리뷰를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안 되어 있었던 거야. 누가 나를 어떻게 평가할지 미쳐버릴 것 같은 거야.
- 미란
- 그럴 때 있잖아. 단어 하나에 ‘내가 진짜 이런가?’ 하면서 고민하게 되고.
- 수정
- 어쩔 수 없었던 것 같고. 그 기간이 한 일 년 정도 됐던 것 같아. 활동을 지속하면서 그게 하나의 스타일로 받아들여지니까 괜찮아진 것 같아. 스타일에 의도는 없었고.

김미란
- 미란
- 그다음에 <파란나라>를 했지. ‘김수정이 큰 극장을 만나서 작업을 한다면, 조금 더 대중들과 만나는 지점을 찾는다면 이런 느낌이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것도 물어보고 싶었어. <인간동물원초>도, <말 잘 듣는 사람들>도 그랬던가. <파란나라>도 객석에 있는 사람들을 배우들이 바라보는 장면이 있었잖아.
- 수정
- 작품마다 달랐는데, 관객 응시하기를 하는 이유는 뭔가 답답했던 것 같아.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그런 거거든. 어떤 공연을 보고 나왔는데 극장 문을 열고 나와서 내 삶이 펼쳐질 때, 연결이 안 되는 지점이 생기는 거야. 무대의 환상을 극장 밖에까지 갖고 오고 싶은 거지. 그러니까 사람 대 사람으로 서로 마주 볼 필요가 있었는데. 엔딩 장면을 만들려고 고민할 때마다, 관객을 응시하는 그 이상한 정적의 느낌이 최선으로 느껴졌던 것 같아. <이갈리아의 딸들> 때도 썼거든.
- 미란
- 캐릭터가 관객을 바라보는 느낌이 아닌 거지? 배우가 관객을 만나는 느낌인 거지?
- 수정
- 사람 본연의 느낌으로 서로가 서로를 마주 보게 되는 거지. 역할을 입고 서 있던 사람들이 탈을 다 벗어버린 모습으로 관계를 완성하는. 제일 길게는 십 분 정도 관객을 본 적도 있었거든.
- 미란
- 어떤 작품이야 그게?
- 수정
- <인간동물원초>
- 미란
- 맞아. 엄청 길게 봤어.
- 수정
- 때에 따라 타이밍도 방식도 다 다르긴 한데. 그때 발생하는 순간들을 좋아했어. 공연에서 무언가 발생한다는 게 너무 중요한데, 나한테는 잘 짜여진 연기 이런 거 말고, 그런 순간들에서 뭔가 발생하는 것 같아.
- 미란
- 배우들은 어땠어?
- 수정
- 내가 잘 설득한 경우엔 잘 따라와 줬고, 설득 못 하면 물음표를 갖고, 힘들다고.
- 미란
- 되게 자연스러운 반응이긴 하다. 누군가를 그렇게 오래 응시한다는 게 배우에게도 어렵고 불편할 수 있잖아.
- 수정
- 내가 그 불편함을 즐겼던 것 같아. 즐겼다기보다는, 그 불편함에서 몸에 들어 오는 감각이 극장과 극장 밖을 연결해준다고 생각한 게 아니었을까.
- 미란
- 맞아. 잘 없는 경험이잖아. 누군가가 나를 오래 쳐다보고 있는 게. 그래서 그런 장면들 되게 인상 깊은 것 같아. <인간동물원초>는 유독 그게 크게 작용하는 것 같아.

김수정
- 수정
- 이 작품의 원작 소설을 너가 나한테 추천해줬지.
- 미란
- 손창섭 작가 되게 좋아하거든. 소설이 진짜 맘에 들었단 말이야. 근데 내가 할 수 있는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때 네가 물어보더라고. “뭐 할 만한 거 없어?” 소설 처음 읽었을 때 느낌이 궁금하긴 해. 작품을 보고 나랑 다른 인상을 받았다는 느낌을 받았거든. 오히려 좋았고.
- 수정
- 솔직하게 말해도 돼? 처음 읽고 ‘뭐야 김미란이 날 이렇게 생각해?’
- 미란
- 어떤 부분이었어?
- 수정
- 소설을 처음 읽고 나서 불쾌했어. 그러고 두세 번 더 읽었어. 읽으면 읽을수록 뭐가 자꾸 떠오르는 거야. 뭔가 되게 날 것 같고, 재밌었어.
- 미란
- 손창섭 작가가 인간을 그리는 방식에 색깔이 있다고 생각해. 그런데 뭔가 그 작가가 그린 인간형을 네가 매력적으로 표현할 것 같았어. 네 공연을 볼 때마다 내가 항상 ‘끝까지 간다’고 표현했던 어떤 것들이 있던 시기였고, 그 작품은 그게 되게 필요한 작품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 수정
- 고마웠어. 김미란이 준 미션을 완료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어서 스릴 있고 재밌었어. 개인적으로 되게 많은 게 얽혀있는 작품이기도 하고.
- 미란
- 이 공연 보고 이상하게 많이 울었던 것 같아. 그냥 수정이가 고생 많이 했을 것 같다고 느낀 작품 중 하나야. 이유는 잘 모르겠어, 어떤 고생인지도 모르겠지만. 작업이 마냥 쉽진 않았겠다는 생각도 들고.
피의 색깔이 갈색이 됐단다
- 수정
- 예전에 내가 만들었던 작품을 영상으로 보면 ‘내가 이걸 만들었다고?’ 그런 생각 안 들어?
- 미란
- 내가 이렇게 과감한 사람이었나? 생각이 들 때가 있어.
- 수정
- 누구였지, 그때의 나는?
- 미란
- 그래서 나는 옛날 작품 다시 해보라고 하면 자신 없기도 해. 그때처럼 안 될 것 같은 거야.
- 수정
- 우리가 달라졌으니까. 피의 색깔이 갈색이 됐단다.
- 미란
- 최근에 <미친집으로 초대합니다>를 영상으로 봤는데, 내 작품을 영상으로 본 게 되게 오랜만이었거든. 내 초창기 작품이랑 다르게 차분하고 담담한 거야. ‘나 설마 관찰하는 것처럼 이 사람들을 만난 건 아니겠지? 아니면 혹시 연출자로서 온도가 없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무서웠어. 작업이 싫었다는 게 절대 아니야. 너무 즐거웠지. 같이 한 분들께도 감사했고, 나도 진심을 다해 한 것 같은데. ‘피가 갈색이 되었다는 느낌’. 나도 내 자신에게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 되게 날 것이었던 때가 있던 것 같아. 너무 멋모르던 때라서 그랬나, 그런 생각도 들고. 그래서 너나 나나 출구로써 다큐 연극을 찾아가나라는 생각도 들고.
- 수정
- 너랑 비슷한 것 같은데, 어떤 시점에서 더 이상 드라마로는 하고 싶은 걸 담아낼 수 없었어. 제일 큰 기점이 4.16이었다고 생각해. 그때쯤 동인들부터 시작해서 주변 사람들도 달라졌다고 하더라고. 그땐 나도 내가 그런 연극을 할 수 있을지 몰랐는데,
- 미란
- 그때가 <사랑하는 대한민국>이었나?
- 수정
- 그즈음이었던 것 같은데. 다큐 형식이든 드라마 형식이든, 하고 싶은 이야기에 적합한 형식이 있다면 그걸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
- 미란
- 나도 ‘이 이야기를 하려면 이 형식밖에 안 되는구나’를 인지하고 시작한 것 같아.

- 수정
- 내 다음 작업이 모큐멘터리거든. 너 『다큐의 기술』 읽어봤어?
- 미란
- 안 읽어봤어. 우리나라 책이야?
- 수정
- 김옥영 씨가 쓴 책인데, 나한테 다큐멘터리의 개념을 너무 잘 잡아줬어. 내가 하고 싶은 질문에 대해서 내가 직접 가서 본 걸 관객에게 전해주는 것. 현장성을 가지고.
- 미란
- 나는 다큐멘터리 연극할 때 배우 없이 하잖아. 나한테 제일 중요한 개념은 내가 처음 만나는, 날 모르는 사람 앞에서 내 이야기를 하기로 당사자들이 결심하는 것.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내 이야기를 정해진 만큼 해낸다는 게 나와 그분 사이에 정확하게 합의가 되고, 그걸 위해 둘이서 무언가를 만들어간다고 할까. 그게 엄청 중요한 지점이야. 지금까지는 사실 몇 작품 안 해서…
- 수정
- 나는 실제로 다큐 연극을 했다고 볼 수 없어.
- 미란
- 다큐멘터리도 종류가 다양하잖아. <생활풍경>도 <공주들>도 내가 보기엔 다큐 연극이야. 다만 이야기에 맞춰 연출적으로 형식을 조금 변형한 거지. 예를 들면 <공주들>은 여러 가지 실제 일어났던 사건들이 배우의 몸에 입혀지고, 그 배우가 몸을 통해 그걸 표현해내는 작업이었고. <생활풍경>도 <별들의 전쟁>도 나한테는 다큐멘터리 연극이라고 인지되는 것 같아.
- 수정
- 이 작품을 다큐멘터리라고 해석하는 건 처음 들어봤어.
- 미란
- 작업과정도 궁금했어.
- 수정
-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하기로 하면 배우, 스태프 안 가리고 써보는 거야. 각자 초고나 구성안을 써서 직접 장면을 연출하고, 그럼 우린 다 배우가 돼주고, 추가 스터디를 하고, 그중에 고르는 거지. 장면 발표를 미치도록 해. 보통 한 작품에 장면 발표를 거의 120개 정도 하거든.
- 미란
- 그중에서 선택하고, 배치하고,
- 수정
- <공주들>의 마지막 소녀상 장면에도 여러 가지 소스가 들어있었어. 마이크를 중간에 뺏고, 앉았다가 몸이 굳고, 누가 꽃을 가져다 놓고, 다 다른 아이디어야. 어떤 한 장면에서 나오는 게 아니고 다 섞여 있는 거지.
- 미란
- 공동창작을 통해서 디벨롭 되는 장면이구나.
- 수정
- 예전에 <안전가족>, <인간동물원초>, <말 잘 듣는 사람들> 할 때도 초고를 쓰고 배우들한테 말을 고치라고 했잖아. 당신의 입에 맞는 대사를 하라고. 그때가 처음 시작이었던 것 같고. 그 뒤 작업들에서는 더 적극적으로 했지.
- 미란
- 난 반대로, 항상 ‘공동창작이 아닙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시작하거든. 본격적인 연습은 마지막 2, 3주만 하고 출연자분들 인터뷰만 엄청 길게 해. 나는 계속 그 인터뷰를 들으면서 계속 배치하고 정리하고, 배치하고 정리하고.
- 수정
- 너 다큐 연극 뭐뭐 했어?
- 미란
- 다큐연극을 요청받았지만 나는 다큐연극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작품이 <한국무용?>하고 <탈춤의 목적–현대사회 속 탈춤의 형식적·실질적 의미와 지속 가능성에 관한 고찰>이야. 이게 내 나름의 모큐멘터리인데, 이 사람들의 인생을 듣고 거기서 내가 어떤 부분을 집어내고 디벨롭 시켜서 만들었어. 내가 딱 다큐 연극이라고 인지하는 건 <이것은 어쩌면 실패담, 원래 제목은 인투디언노운(미지의 세계로, 엘사 아님)>이랑 <강진만 연극단 구강구산 결과보고서: 극단 창업 교육훈련 참여자를 중심으로>, 그리고 <미친집으로 초대합니다>. 나는 주로 당사자들과 인터뷰를 하고, 인터뷰한 내용을 당사자들이 관객들 앞에서 반복하는, 일종의 다른 개념의 재현을 하거든. 너는 조사한 내용을 기반으로 배우들과 장면을 만들잖아. 고민이 깊어지거나 두려운 순간이 찾아오지 않아? 나는 어떤 때 보면 ‘내가 비겁한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거든. 당사자분들과 함께 작업하면 어떤 부분에서는 이분들이 나에게 주는 힘이 있으니까 오히려 나는 그분들 뒤에 숨어있는 것만 같은 거지.
- 수정
- <공주들>하면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인터뷰를 거의 다 찾아 읽었어. 근데 읽다 보니까 매번 똑같은 질문, 똑같은 내용이 반복되는 거야. ‘자료가 다 공개돼 있는데 이걸 왜 자꾸 찾아가서 또 물어보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 작업 처음 시작할 때는 실제로 한번 만나보려고 하다가, 겹치는 인터뷰들을 자꾸 보니까 내가 찾아가는 게 진짜 실례라는 생각이 들었어.
- 미란
- 그렇지, 올 때마다 같은 걸 묻는 거.
- 수정
- 그래서 작업을 우리끼리 하자고 팀원들과 이야기했고. 대신 인터뷰 내용을 가공할 때, 그 사람들의 워딩이 그대로 들어오면 안 되잖아. 다 수정을 할 수밖에 없었고,
- 미란
- 그대로 들어오면 안 된다는 게 어떤 뜻이야?
- 수정
- 그 사람이 발언한 인터뷰를 문자 그대로 연기한다고 말해야 할까? 무대 위에서 그 언어를 재현할 때 연기를 할 수도 있고, 텍스트를 발화하는 방식도 있는데 당시엔 직접 당사자가 오는 것 이외에는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말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도 물론 어떤 가치가 있지. 그런데 그때는 아니었어. 그래서 그 말들을 다 워싱하고 섞었고, 새로운 인물을 창조하고, 이게 그때 택할 수 있었던 최선의 방법이었어.
- 미란
- 무슨 느낌인지 알 것 같아.
- 수정
- 그리고 자문을 받아. 당사자를 인터뷰한 사람한테 자문받으면 원하는 내용은 얻으면서 당사자에게 피해 사실을 재차 묻지 않아도 되더라고. 그런데 <별들의 전쟁>하고 <생활풍경>까지 그런 작업방식을 택하다 보니까 나는 반면에 어느 순간 내가 비겁하다고 생각했어. 당사자들을 만나는 걸 내가 두려워하나?
- 미란
- 그럴 수 있지.
- 수정
- 네 작업들은 대개 개인에 대한 이야기잖아. 나는 어떤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완전 새로운 개인의 인물을 만날 때는 직접 만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어.
- 미란
- 맞아. 그분들을 누가 연기하는 걸 생각해보면 오히려 다른 지점이 더 불편할 것 같아. 그럼에도 어떤 순간은 내가 비겁한가 그런 생각을 계속하지.
- 수정
- 너무 많이 하지. 나는 개인적인 고민인데, 요새 제일 고민되는 게 접근성 문제. 2018년도에 미투 터지고 나서 우리 뭔가가 다 바뀌었잖아. 되게 많은 게 바뀌었다는 생각이 드는데, 지금도 난 그런 시기를 겪고 있다고 생각해.
- 미란
- 계속 겪는 중이지.
- 수정
- 궁금한 것도 많고, 되게 조심스러운 것도 많아. 그래서 난 또 자료에 파묻혀있어.
- 미란
- 공연 준비하면서 자료조사는 얼마나 걸려?
- 수정
- 시간은 다 다르지.
- 미란
- 몇 개월 이상을 배우들과 함께 자료를 읽고 공부하는 데 공들이잖아.
- 수정
- 처음엔 내가 먼저 준비를 해. 가이드를 잡아야 하니까. 솔직히 연극, 이런 작업이 왜 좋냐면, 나 어렸을 때 공부를 안 했잖아?
- 미란
- 연극으로 세상을 공부하는 느낌이구나.
- 수정
- 연극을 만들려고 책을 읽기도 하는데, 책 읽기도 많이 늘었고 재미있어. 나는 ‘마신다’고 표현하는데, 책, 자료를 마시고 대본을 뱉어내는 거지. 이때가 힘을 제일 많이 쏟는 시간인 것 같아.
- 미란
- 나는 인터뷰. 만나지 않으면 시작이 잘 안 돼. 항상 책을 읽고 공부도 하거든. 근데 만나는 순간 알아. 이게 더 중요했구나.
- 수정
- 너랑 나랑 섞이면 좋겠다. 중간 지점에서 작업하면,
- 미란
- 그니까.

도대체 뭘로 수혈을 해야 하지?
- 수정
- 난 쉬는 동안 다른 연출들은 어떻게 연습하는지가 너무 궁금했어.
- 미란
- 나도. 일 년 정도 조연출의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어. 최근에 나 <우리 읍내>를 보러 갔거든.
- 수정
- 나도 봤어.
- 미란
- 너무 따듯한 거야. 임도완 연출님은 한 번도 만난 적 없지만, 그 극 안의 사람들을 너무 사랑하시는 것 같은 거야. 그래서 보고 있는데 눈물이 나는 순간이 있더라고.
- 수정
- 요즘 왜 이렇게 눈물이 많아졌어?
- 미란
- 잘 안 우는데. ‘연극에서 사람들이 원하는 건 이런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옆에 앉은 관객 때문에 더 좋았던 것 같기도 하고. 나이 지긋하신 두 분이 ‘어머, 둘이 연애한다! 어머, 죽었나 봐!’ 하면서 보는데 옆에 앉아 있는 내가 너무 행복한 거야. 연극을 이렇게 봐야 하나? 이런 생각도 들고.
- 수정
- 뭔가 변화할 시점이 너에게도 온 것 같네.
- 미란
- 내가 연출로서 관객들이 행복하고 즐거웠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너무 안 가지나?
- 수정
- 나는 우리가, 시기가 유사할 때가 있는 것 같아. 너 조연출 해보고 싶다고 했잖아. 나 작년에 그랬거든. 그래서 몇 군데 연락했다가 거절당했어.
- 미란
- 나도 조연출 못해볼 것 같아. 지금 어떤 새로운 것에 대한 갈증이 있는 것 같아. 나 지금 다른 걸 해봐야 하는데 그게 뭐지? 여기저기 기웃거리게 되는 거야. 도대체 뭘로 수혈을 해야 하지? 그걸 찾는 시기인가 봐.
- 수정
- 노력해보자. 누가 먼저 누구 조연출로 들어가나.
- 미란
- 조연출을 하고 싶습니다, 연출님 구합니다. 정말 열심히 하겠습니다(웃음). 마무리 시간이다. 마무리 어떻게 해야 하지? 너 다음 작품도 얘기해야 돼. 모큐멘터리?
- 수정
- 본격 연습은 7월부터 들어가고. 프리프로덕션이 1월부터 시작됐어. 너는?
- 미란
- 0세에서 3세를 위한 공연을 만들고 있어.
- 수정
- 거 참 이상하다. 너 진짜, 다재다능해졌구나.
- 미란
- 우리 남은 일 년 건강하게.
- 수정
- 오랜만에 얘기 많이 해서 좋았다.
- 미란
-
두 시간 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