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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음(知音)_풍경 소리.wav

[이 편지는 연극에서 시작되어] 임서진 X 목소

목소, 임서진

제259호

2024.08.08

[이 편지는 연극에서 시작되어]는 두 편지글로 이루어진 대화입니다. 사운드 디자이너 목소가 누군가에게 보낸 편지, 그리고 그 누군가로부터 도착한 답장을 함께 싣습니다.

기사의 제목인 “***_***.wav”는 두 필자가 제목으로 선택한 말들을 나란히 놓고, 사운드 파일의 확장자를 붙인 형태입니다. 서로는 서로가 어떤 말들을 선택했는지 모르고, 기사의 제목은 편집부가 그 말들을 수신할 때 완성됩니다.

목소 님

오겡끼데스까!! 이 편지는 가족여행 차 방문한 일본 북해도의 작은 연안 도시인 오타루의 한 케이크 집에서 쓰고 있습니다. <러브레터>라는 영화의 무대가 된 동네이기도 합니다.
벼르고 벼르던 1년 만의 짧은 가족여행인데도 비행기를 타러 가기 전까지 밤새 꼬박 음향 파일 몇 개를 작업해 보내고, 돌아간 다음 날엔 두 군데의 스태프 회의와 상견례를 가야 하는지라··· 분명 관광지에 있지만 전혀 느긋하지 않아요. 목소 님 SNS를 보면 어느 달은 매주 한 편씩 공연을 올리는 기염을 토하는 작업량임에도, 자주 여행지 풍경도 올라오던데 사실 목 님과 소 님으로 이루어진 2인 크루 아닌가요? 대체 어떤 스케줄을 사시는 겁니까? 그동안 너무나 궁금했던 터라 처음부터 하소연과 성토로 시작하고 말았네요.

음향감독은 경찰이나 소방관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사고가 나지 않게 하는 게 임무이고 그게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사고가 나지 않는다면 굳이 언급될 일이 없는 거죠.
전 자주 연극 제목에 ‘음향’이라는 단어를 같이 검색해보는데요. 어쩌다 음향 얘기가 나오면 ‘음향이 도중에 끊겼다, 마이크 음향에 노이즈가 꼈다’하는 사건사고 위주라 귀에 거슬릴 때야 비로소 이게 음향이었구나, 깨달을 때가 있는 거죠. 그래서 오히려 원래 거기서 나는 것처럼 자연스러워서 몰입을 깨지 않는 음향이라면 잘 된 음향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로 했답니다.
그런데 사실 작업을 하면서도 음향을 표현하는 언어가 참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곤 해요. 마치 공연음향이라는 소수 언어를 이해시키기 위해 번역기를 켜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기분이 들 때도 있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관극 전 로비에서나 셋업 현장에서 목소 님을 스치듯 만나면 이산가족 상봉하듯이 부여잡고 반가워하는 거죠. 타지에서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을 만날 때 안도하고 위로받는 기분. 그때마다 “우리 따로 만나서 날 잡고 수다 떨어요!” 하면서 한 번도 약속을 잡은 적이 없었네요. 이럴 수가···
이 편지 길어져도 되나요? 우린 허심탄회하게 진작 수다를 떨었어야 했단 말입니다.

사실 저는 목소 님을 공연장에서 마주칠 때면 알지도 못한 어린 시절부터 따로 떨어져 자란 자매 같은 애틋한 그리움 같은 게 느껴진답니다. 제가 아는 대부분의 창작진들은 목소 님과 함께 작업을, 그것도 여러 번 함께해봤는데, 정작 같은 일을 하는 저는 목소 님과 함께 작업하거나 심지어 마주칠 일도 없다니 이게 무슨 안타까운 일인가요.
전에 우연히 둘이 같은 셋업 현장에 있었다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기념사진 찍힌 것 기억나시나요? 아마 나희경 피디님이 찍어줬던 것 같은데···
전 영화 음향 전공이고 그런 경우 대개 졸업 후 영화, 게임 쪽에서 일해요. 영화 엔딩 크레딧 올라갈 때 눈여겨보시면 눈치채셨을 테지만, 사운드 파트가 꽤 세분화되어 있고 전문 인원 여럿이 함께 작업합니다.
연극에서는 한 작품을 한 명의 사운드 디자이너가 원맨 밴드처럼 책임지는 시스템인지라 지금은 어느덧 익숙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문득 외로울 때가 있네요. 그럴 때는 목소 님이 작업하신 극을 보러 가서 관극 시작하기 전 하우스 음악을 들으며 곳곳에 배치된 스피커를 찾아보고 분명히 같은 천장 아래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있구나, 하고 깊이 안도합니다. 비록 같은 극에선 만나지 못하지만, 이곳에서 시간과 보내고 공을 들였을 감독님을 생각하곤 해요. 이 소리 어떻게 만드셨을까 짐작하면서, 그 공간에서 울리는 모든 소리들의 크기, 길이, 들고 나는 타이밍이 모두 섬세하게 1dB, 1sec 조율되고 의도되고 있음을 경건하게 느끼며 듣습니다.

‘음향디자인’이라는 일은 극장의 음향시스템을 설계하고 다루는 테크니컬한 일이면서 동시에 작품에서 들려야 할 소리를 제작해야 하는 두 가지 일인데, 이게 사실 굉장히 다른 일이잖아요.
저는 그래서 요새 여건이 허하면 ‘음향효과제작’이라는 타이틀로 프로그램 북에 이름을 올리는 경우가 종종 있답니다. 한번은 다른 음향감독이 맡으신 작품에 음향효과만 전담해서 제작해본 적이 있었는데요. ‘문 열리는 소리’라는 일견 단순한 사운드에 ‘1800년대 석조로 된 3층 저택. 2층에 있는 가장 큰 서재 방, 층고가 높고, 바닥엔 두터운 카펫이 깔려있고, 문은 양문형에 크고 두껍고 무거운 목재, 잘 관리되어 있고 고급스러운 손잡이와 경첩, 밀어서 열릴 것으로 생각한다’라고 말씀드렸더니 척척 잘 통해서 정말 즐겁고 신난다고 하시더라고요. 공연예술 예산이 훨씬 더 풍요로워지는 어느 날, 음향 파트도 좀 더 세분화되어 고퀄의 작품을 위해 다수의 전문 인력이 모여 소통하며 작업하면 얼마나 재밌을까 상상해봅니다.

그나저나 목소 님은 혹시 사운드 디자이너로서 직업병이 있으신가요? 전 공간 속 울림에 꽂히면 눈치가 없어질 때가 있어요.
서대문형무소에 갔다가 사형집행장 뒤로 뚫린, 시체를 옮기던 좁은 통로에서 울리는 소리를 듣겠다고 계속 굴속에다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나무람 당한 적도 있고요. 심지어 4.3평화공원 위패봉안실에서는 손뼉을 짝짝 치며 돌아다녀서 같이 간 여행 동료들에게 제지를 당한 적도 있어요. 해놓고 보니 너무 경우 없는 짓이라 스스로도 깜짝 놀랐는데, 목소 님이라면 거기서 제가 왜 그랬는지 납득하실지도 모르겠네요. 어지간해선 들어보기 어려운 반사음들이었거든요.
지금 여행 온 타국의 지하철역 알림음 중엔 교통약자를 위해 따로 마련된 엘리베이터 근처 개찰구 앞에서만 울리는 독특한 비프음이 있어요. 잦고 가벼운 수많은 알림 속에서도 훨씬 낮은 빈도로 들리는 중저역 대의 소리였어요. 출구만 30개가 넘는 지하도에서도 어느 방향인지, 그 울림만으로 찾아갈 수 있겠더라고요.
그리고 저는 그림을 보면서 그것을 소리로도 표현한다면 어떻게 구성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는 게 재밌어요.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 속 녹아버린 시계에선 어떤 초침 소리가 들릴까?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이 연극의 무대라면 어디에서 어떤 소리가 들릴까?
또, 다른 음향 디자이너님이 작업한 연극을 보면서도 이런 소리를 넣을 생각을 하시다니! 나라면 어땠을까, 감탄하며 공연과 맛있게 비벼 듣습니다.
소리는 빛이나 냄새처럼 즉각적이진 않지만, 우리가 살아오면서 누적해온 경험 속에 환기되고 또 작동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억에 기대어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짧은 암전 중에 들려오는 소리로 어떠한 무대전환도 없이, 연극이 단번에 그 배경으로 관객을 끌고 가는 순간이 즐거워요.

커다란 에어컨 앞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색색의 유리 풍경들이 매달려 있다. 풍경들은 동그란 구 모양으로 푸른색과 붉은색, 노란색 등의 투명하거나 반투명한 색깔이다. 에어컨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의 잔상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사진이다.

이곳 오타루는 오르골 박물관이 있고 유리공예로 유명하다네요. 그래서 그런가, 거리의 가로등마다 유리로 된 풍경이 달려있어요. 산들산들한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리는 게 좋아서 구입해볼까 하고 매장에 들어가 보니 글쎄 에어컨 앞에 주르륵 풍경을 매달아 놓았더라고요. 소리를 녹음해봤는데 에어컨 가동 소리가 방해가 됐어요.
풍경소리를 즐기려면 자연의 바람이 필요할 테니 통풍이 잘되는 창이나 처마가 있는 공간을 갖춰야 하나 싶고··· 문득 납작한 공연장 무빙 조명기 옆에 매단 스피커로 자연의 소리를 틀면서 풍성한 울림을 기대하는 저를 보는 것 같아서 씁쓸하게 웃었습니다.

너무나 긴 편지 분량이 걱정되네요. 아, 아직 못다 한 말이 많지만 목소 님 부디 건강하세요.
어둠 속에서 계단 조심하시고요. 사다리, 전선 조심하시고 손목, 허리, 어깨 건강하시기예요!
모든 셋업이 요정처럼, 모든 큐가 비단결처럼 되시길요! 나머지는 만나서 떠들어요!

임서진 드림





서진 감독님에게

감독님! 이 얼마나 유쾌하고 반가운 편지인지요. 학창 시절 받은 친구의 쪽지처럼, 서랍에 넣어 뒀다 몰래 키득거리며 읽는 기분으로 몇 번이나 보내주신 편지를 다시 펼쳐보았습니다. 특히 연습실에서, 셋업 중에, 정말 크고 환한 힘이 되었어요.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하고 멋진 일인지 새삼 느꼈답니다.
감독님의 편지는 제가 쓴 것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어요. 평소에 품고 있던 고민이 표현만 조금 다를 뿐 그대로 옮겨져 있었거든요. 저 또한 종종 자조를 담아, 성공한 음향이란 공연이 끝난 후 소리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이라고 말하곤 해요. 특히 저는 형광등 소리나 문이 열릴 때의 바람 소리 같은, 관객이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치기 쉬운 소리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가끔은 외로움을 느낄 때도 있어요. 그 소리들이 관극 경험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작동했을 것이라 믿고 있지만, 그럼에도 공연에서 제가 의도한 음향의 의미나 문법을 알아채 주길 바라는 건 아직도 많이 부족한 작업자의 욕심이겠지요? 저도 감독님이 참여하신 공연을 볼 때면 레벨, 팬, 페이드 타임까지 전부 놓치지 않고 들으려 노력해요. 그러면서 페이드 커브 하나에도 공들여 많은 고민을 하셨을 감독님의 시간을 상상해보곤 합니다. 서로가 서로의 좋은 청자가 되어주고 있다는 것이 문득 큰 힘이 되네요!
감독님의 직업병 이야기를 읽고서는 큰 소리로 웃었어요. 아마 제가 함께 있었다면 모른 척 뒷걸음질 치며 귀를 쫑긋 세웠을 거예요. 혹시나 그럴 일이 있다면 반사음을 몰래 녹음해 보내드릴 테니, 저의 모른 척은 용서해 주세요.
저의 직업병은 가끔 환청처럼 머릿속에 작업 중인 소리가 불쑥 재생되는 것이에요. 갑자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서 흠칫 놀란 후, ‘아, 이 소리는 어느 라이브러리 몇 번째 폴더에 있는 음원이구나’ 깨달을 때가 있는 거죠. 문 두드리는 소리는 혼자 사는 저에겐 좀 무서우니 작업할 때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직업병으로는, 아마 감독님도 비슷하시겠지만 녹음에 대한 강박이 있어요. 남국의 바다에 가도, 파도 소리를 녹음해야 할지, 그렇다면 어느 위치에서 어떻게 담고 편집점은 어디로 잡을지 생각이 복잡해져요. 그러나 집에 앉아 먼 데서 데려온 소리들을 듣고 있으면 끝나지 않는 여행 안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경험 안과 밖의 다양한 순간을 쉬이 현재로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은 음향 디자이너가 누릴 수 있는 소중한 마법이겠지요.

세로로 긴 영상. 화면 가장 위쪽으로는 무성한 푸른 잎 사이로 커다랗고 붉은 열매가 매달린 나무가 드리워져 있고, 그 아래로 수평선이 뻗어 있다. 바다는 화면 아래, 모래사장에 가까워질수록 짙푸른색에서 엷은 옥색으로 바뀌고 모래사장 경계에는 듬성듬성 바위가 드러난다. 화면 가장 아래쪽으로는 라탄 의자 두 개가 놓여있고, 그중 하나엔 큰 토트백이 얹어져 있다. 영상이 재생되는 동안 바람이 불어 나무가 흔들리고 파도가 밀려와 하얗게 부서진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제가 생각했을 때 소리는 경험에 대한 링크가 강하면서도 약해서, 우리를 순식간에 어딘가로 데려가지만 때로는 전혀 다른 목적지에 도착하게 하기도 해요. 마치 차 소리를 파도 소리로 종종 착각하기도 하는 것처럼요. 전 그것이 소리의 또 다른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농담이(아니)야> 공연 중 등장인물인 아성이 문성의 머리를 잘라주는 장면이 있는데, 저는 그 부분에 시계 초침 소리를 넣었어요. 아시다시피 초침 소리는 가위 소리와 비슷해서, 머리를 잘라주는 행위를 표현하는 동시에 고여있던 시간이 풀려나는 것을 들려주고 싶었던 거예요. 그런 은유의 가능성을 소리의 시적인 힘이라 생각하는데, 제게는 가장 중요한 작업의 동력 중 하나인 듯합니다.
감독님이 적어주신 ‘문 열리는 소리’에 대한 디테일을 보며 언젠가 함께 만들 수 있는 하나의 프로젝트를 마련하고 싶다는 마음을 굳게 다져 보았어요. 다짐과 생각을 용감하게 쌓다 보면 그날이 곧 오겠죠?
목이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소가 모르게 하라는 마인드로, 오늘도 저는 근교로 잠시 바람을 쐬러 떠납니다. 짊어진 백팩에 맥북과 외장하드, 헤드폰이 가득 들어있다는 것은 소에게 아직 비밀이에요. 극장을 훌쩍 벗어나 들려오는 주변의 소리들에 대해 아무 말이나 깔깔대며 실컷 늘어놓을 수 있는 날을 기쁘게 기다려 봅니다. 그날까지, 같은 극장에서 만나진 못해도 항상 평안하고 즐거운 나날 보내시길 바라요!

2024년 7월, 목소 우정인 드림





[사진·영상: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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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

목소
듣기의 연습을 통해 ‘들리는 것’과 ‘듣는 것’에 대한 질문을 수행 중이다. <앨리스 인 베드>, <홍평국전>, <우리는 농담이(아니)야>, <스푸트니크> 등에 사운드 디자인으로 참여했다.
인스타그램 @morceauxx

임서진

임서진
사운드디자인. 귀를 열고 소리를 많이 포착하고 그것을 감각적으로 재현해 보는 일을 열심히 해보려 하고 있습니다. <더 라스트 리턴>, <커튼>, <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 <정희정>, , <큰 가슴의 발레리나>, <빵야> 외.
인스타그램 @sheo_sh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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