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어제의 미래였으니까
[무엇을, 어떻게, 왜] 우미화 X 이청 X 성수연
성수연(파이리)
제261호
2024.09.12
[무엇을, 어떻게, 왜]는 배우이자 창작자인 성수연이 진행하는 대화입니다. 동시대 창작자들이 무엇에 주목하고, 어떻게 작업하며, 그 일을 왜 하는지 들어봅니다.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다들 올 여름을 잘 보내셨는지요?
저는 배우입니다. 배우는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일까요? 물론 연기하는 사람이지만, 그 ‘연기’ 에는 어떤 일들이 구체적으로 포함될까요?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일 또한 촘촘히 달라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저는 최근 ‘시대를 비추는 거울’에 비치지 않았던 존재들을 무대에 드러내는 일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어요. 그와 더불어 누군가의 말을 담고, 기록하고, 저장하고, 다시 전달하는 존재로서의 배우의 일에도 마음을 많이 쏟고 있습니다. 그런 일을 하는 배우들, 창작자들의 말을 기록한 이 ‘무엇을, 어떻게, 왜’ 코너를 진행하며 기록을 쌓는 일의 의미를 더 만났습니다.
저는 어제와 내일과 연결된 지금을 살며 계속 저의 방식대로 기록하고, 창작하고, 연기하겠습니다. 동료님들, 관객님들 모두 응원하고 존경합니다. 또 ‘안녕’히 만나요.
배우 우미화 님, 이청 님과 대화를 나눈 기록입니다.

- 성수연
- 안녕하세요. 저는 성수연입니다. 배우로 활동하고, 창작 작업 또한 하고 있습니다. 앞날에 대해서도 배우들의 일에 대해서도 여러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 이청
- 안녕하세요. 저는 이청입니다. 배우로 활동하고, 최근에는 접근성 작업도 하고 있습니다.
- 우미화
- 안녕하세요. 저는 우미화입니다. 연극을 오래오래 하다가 지금은 드라마도 하고, 영화도 하고, 부르는 곳은 어디든 가고 있는(웃음). 이번 주에 연극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수다
- 성수연
- 오늘 이렇게 두 분을 모시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우리는 각자 데뷔한 시기도 다르고 활동한 기간도 다르잖아요. 각자의 시간대에서 우리 사회의 여러 일들을 만나왔을 텐데, 연극계 안에서도 여러 사건들로 인한 변화들이 있었잖아요. 혹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히 생기는 변화들도 있었을 테고요. 저는 세월호 참사, 검열사태, 연극계 미투, 팬데믹 등의 영향을 받아 연극에 대한 인식과 연극계의 문화가 바뀌는 것을 여러 각도에서 감각하고 있는데, 동시대 여성 배우들이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연극계를 어떻게 만나왔는지 구체적인 경험을 나눠보고 싶었어요. 사실 이런 질문들을 띄워놓고 그저 수다를 떨어보고 싶었어요(웃음).
- 우미화
- 지면에 남는 수다로군요.
- 성수연
- 제가 우리의 수다를 잘 기록해보겠습니다(웃음). 저는 2008년에 데뷔했어요.
- 이청
- 저는 2017년에 데뷔했어요.
- 우미화
- 저는 1998년에 데뷔했어요. 와, 10년 단위네? 1998년, 2008년, 2017년.
- 이청
- 우와. 신기하다.
- 성수연
- 미화 배우님은 1998년에 <민중의 적>으로 데뷔하셨지요?
- 우미화
- 네. 그때 운 좋게 서울시립극단의 연수단원 1기로 들어가게 됐고, 또 운 좋게 배역이 주어져서 데뷔를 했지요.
- 이청
- 저는 졸업과 동시에 대학로에 나왔어요. 그러고 보니 갑자기, 입시를 준비할 때 연극영화과가 너무 많아서 어디에 지원해야 할지 고민하던 게 생각나요. 저희 때는 쿼터제가 생겨서 여섯 군데에만 지원할 수 있었거든요.
- 우미화
- 여섯 군데도 많은 것 아닌가요?
- 성수연
- 그러게요. 저희 때는 세 군데였던 것 같아요, 정시에서는. 가군, 나군, 다군.
- 우미화
- 저는 학력고사 세대라 전기, 후기.
- 성수연
- 우미화 배우님은 제가 오래전부터 여러 공연을 보며 정말 좋아하고 존경했어요. 종종 인터뷰도 찾아봤는데 굉장히 멋있다고 생각했고, 꼭 만나 뵙고 싶었어요. 이청 배우님과는 작년에 어떤 일을 같이 했었는데, 정말 많은 일들을 잘하시더라고요. 어떻게 그렇게 연기도 잘하면서 다른 일들도 잘하냐고 놀라움을 표했더니 어떤 분께서 “이 세대 분들은 이렇게 해야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라고 하셨는데, 그게 오래 기억나더라고요. 10년 전의 저나 제 친구들의 선택과는 또 다르구나, 싶고.
- 우미화
- 저도 마찬가지예요. 우리 세대의 배우들은 연출이 만든 판에서 무대에 서는 일을 한다고만 생각했지, 스스로 판을 만들거나 하고 싶은 방향을 잡아서 주체적으로 뭔가를 만들어내는 일을 하진 않았던 것 같거든요. 제가 보기엔 두 분도 같은 세대라고 느껴지는 점이 있는데, 우리 세대와는 달라서 존경스럽고 부럽기도 했어요. 어쩜 그렇게 본인들이 하고 싶은 방향을 잘 잡아서 주체적으로 창작하고,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을까. 그런데 지금 수연 배우님이 청 배우님 세대를 보면 또 더 다르게 느껴지시겠지요.

- 성수연
- 저는 배우들이, 특히 여성배우들이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창작하고 연기하는 일이 연극계 미투 이후에 좀 더 활발해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전에는 사례가 아주 많지는 않았기 때문에 하고 싶은 분들도 선뜻 하기가 어려웠을지도 모르겠어요.
- 이청
- 저도 데뷔하자마자 연극계 미투를 정점에서 겪으며 ‘내가 내 이야기를 해도 되는구나’ 하는 확신을 얻게 됐어요. 우리가 모여서 목소리를 내는 것 자체가 충분히 작품이 될 수 있다는 생각도 했고요. 그전에는 삶과 작품이 동떨어져 있다고 느꼈던 것 같은데, 연극계 미투를 겪으면서는 삶에서 일어나는 일을 원동력 삼아 충분히 우리 이야기를 작업으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 우미화
- 저도 ‘연극이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세월호 참사와 연극계 미투를 전후로 많이 바뀌었다고 느껴요. 그리고 그 방향성이 바뀐 연극을, 저와 다른 세대의 연극인들은 제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방식으로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보여요. 가끔은 ‘이제 내가 낄 자리가 있을까?’ 싶을 만큼 급변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우리 세대는 서사를 중심으로 하는 연극에 익숙했고, 그 연극들이 연출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배우들이 먼저 소리를 내서 뭔가를 만들어내지는 못했어요. 저도 어릴 때부터 배우 또한 자신의 연기에 대한 일종의 연출을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배우로서 작품을 분석하고, 해석하고, 내 방향을 찾는 것도 개인의 연출이라고 생각했는데, 혼자 독립적으로 하나의 창작물을 만들 용기는 없었던 것 같아요. 마음은 있었지만 결국 하지 못했어요. 그런 일을 하는 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 성수연
- 연극의 형식이 다양해지면서, 프로덕션 내에서 배우들이 흔히 ‘배우의 창작’이라고 말하는 영역을 한참 벗어나는 창작을 하는 경우도 많아진 것 같아요. 그 과정에서 자신의 작업을 만드는 근육을 개발하기도 하고요. 실제로 배우들이 점점 더 많은 일들을 하고 여러 담론을 만들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실험적인 창작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연극이 익숙한 문법의 연극처럼 연출가 중심으로 아카이빙되는 관습이나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창작에 기여하는 참여자들이 기존의 크레딧대로 이해되는 관습 또한 안팎으로 여전히 강력한 것 같아요.
모두에게 더 익숙하고 편안한 어떤 프레임이 있는데, 달라지는 것들이 여전히 그 안으로 흡수되어 버리는 느낌이요. 그걸 조금씩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창작 작업도 하는 배우 친구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이건 결국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더라고요. 저는 배우라는 직업이 결국 삶을 타의에 의탁하게 되기 쉬운 속성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만 살지 않기 위해 여러 근육들을 개발하는 경향이 생기고 있죠. 그렇다면 드러나지 않았던 그들의 성취가 기록을 통해 증명이 되어야 살 방법도 다양하게 생길 거예요. 길도 많아지고요. 그래서 저도 목소리를 계속 내고 있어요. 배우들을 응원하는 목소리를 내는 동시에 이런 경향을 담아내 달라는 목소리도 조금씩 내고 있고요. 사례가 잘 쌓여야 또 누군가가 시도할 수 있으니까요. - 이청
- 제가 접근성매니저로서 작업을 할 때도 그런 생각을 해요. 기존의 연극 문법이 너무 견고해서,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는 작업을 계속하게 되거든요.
- 우미화
- 기존의 틀을 깬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잖아요. 저는 접근성 관련한 작업은 몇 년 전에 구자혜 연출님의 공연에서 처음 봤고, 의미 있는 작업들이 시작되고 있구나 싶었어요. 그런 작업이 많아지는데, 배우들이 자막을 처음 접할 땐 사실 불편함도 있을 수 있잖아요. 공연 중 대사를 하는데 자막이 나오면 매번 조금 다를 수도 있었던 말을 똑같이 해야 되기도 하고. 접근성 관련한 여러 환경들을 만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어요.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또 조금 다른 방향으로의 변화도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도 많이 나눴고요.
- 이청
- 이제는 창작자들이 말씀하신 방향대로 좀 더 확장된 고민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최근에 동료들과 “우리가 접근성을 마련했으니 오세요”가 아니라 “이 공연이 당신에게 어떻게 닿을지 궁금해요”라는 태도로 다가가 보자는 이야기를 자주 나눠요. 자막에 관해서는 저도 배우니까 배우 입장에서 생각을 하게 돼요. 자막이 있으면 배우가 대사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 수 있죠. 그런데 우리는 사실 영화 자막에 익숙해져 있어요. 영화 자막은 이미 찍어놓은 영상물에 자막을 넣는 후작업이기 때문에 당연히 똑같을 수밖에 없죠. 연극은 라이브인데 어떻게 늘 똑같겠어요. 배우들이 매일 다른 감각을 느끼고 다른 호흡을 쓸 수도 있는데, 크게 맥락이 달라지는 일이 아니라면 자막과 배우가 조금씩 다르더라도 이들이 같이 공연하고 있다는 감각에 익숙해져보면 어떨까 싶어요. 배우와 자막은 서로 경쟁하는 관계가 아니라 함께 연기하는 동료라고 생각해요. 자막을 디자인하는 사람도, 오퍼레이팅하는 사람도 모두 배우와 같은 숨을 쉬려고 노력하거든요.
- 우미화
- 무조건 해야 한다는 당위성보다는 누구를 위한 일인지에 대한 ‘정확함’이 더 있으면 좀 더 다양해질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음성해설이나 문자통역은 결국 소리 정보와 시각 정보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공연을 잘 전달하기 위해 마련하는 일인데, 다수의 관객들은 정보가 너무 많으니까 불편함을 느끼기도 하겠지요. 그렇지만 동시에 또 내가 지금 이런 불편함을 느끼듯이 어떤 사람들은 늘 불편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하고요.
- 성수연
- 맞아요. 하는 연습과 보는 연습을 같이 하는 시기라고 늘 생각하고 있어요.
- 우미화
- 저도 처음엔 낯설고 신경 쓰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자연스러운 감각이 됐거든요. 몇 번의 작업을 통해서 제가 달라졌다는 것을 느껴요. 지금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서 또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까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아마 접근성매니저로서 고민을 많이 하시겠지요?
- 이청
- 네. 지난 몇 년 이런 작업들이 많아지면서 관객들도 창작자들도 조금씩 적응해가고 있는 게 느껴져요. 처음에는 기존의 견고한 문법을 뒤집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 낯선 경험에 익숙해지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이런 작업을 하는 창작자들이 더 밀어붙인 부분도 있었다고 생각해요. 뭐든 해보지 않으면 질문이 생기기 어려우니까요. 여전히 접근성 작업은 더 많아져야 하고, 관객들과 창작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제는 고민을 확장시켜 문자통역이나 음성해설 장치를 나열하는 방식이 아니라 적재적소의 감각을 찾아 배치하는 방향으로 좀 더 가봐도 되지 않을까 싶어요. 점점 더 이런 고민을 함께 하는 창작자들이 생기고 있어요. 대학교에서 접근성 수업을 하고자 하는 분들도 계시고요. 함께 고민하는 창작자들이 더 많아지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결국 접근성 작업은 창작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거든요.

- 성수연
- 우리가 지금 배우들의 창작활동과 접근성 작업 등 달라지고 있는 연극계의 생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여러모로 즐거운 공유의 대화라는 생각이 들어요.
연극계 미투와 세월호 참사 등 우리의 인식과 감각을 크게 바꾼 일들을 통해 연기자로서 구체적으로 어떤 고민들을 하셨고 또 하고 계신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요. 저는 아주 오래 전에, 기존의 희곡들에 있는 여성 배역들을 하기엔 제가 좀 이미지도 삶도 어딘가 어긋나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 여자 역할은 엄마 역할 아니면 애인 역할 뿐이라는 말도 있었잖아요. - 우미화, 이청
- 맞아. 맞아.
- 성수연
- 그런 틀에 맞추려고 스스로를 좀 괴롭히고 원망한 적도 있었던 것 같아요. 연극계 미투를 계기로 엄마나 애인에 어울리지 않는 제가 잘못된 게 아니라 이 세계가 여성을 그려낸 방식이 잘못됐었다고 더 많이 생각하게 됐어요. 요즘은 여성 배역을 그려내는 방법도 다양해지고 있다고 느껴져서 정말 좋아요. 성별 이전의, 구체적이고 입체적인 인간으로요.
- 우미화
- 여성서사도 많아지고 있고, 기회가 전에 비해 더 많이 생긴 것 같아요. 저는 어릴 때, 제가 평범하다고 생각해서 고민이 많았어요.
- 성수연
- 네?
- 이청
- 세상에, 평범하다니.
- 우미화
- 배우가 갖고 있는 장점이 도드라져야 어떤 배역이 주어지는데, 제가 생각했을 때 저는 그냥 평범한 거예요. 그러다 보니 ‘나에게 무대에 설 기회가 생길까?’, ‘나에게 주어지는 배역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사실 무대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연극을 계속한 거죠. 오히려 나이가 들면서 배우로서 주체적인 생각을 갖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돌아가신 김동현 선배님과의 작업이 저에게는 터닝 포인트였어요. 캐스팅이 되고 싶다거나, 좋은 역할을 맡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넘어서서 내가 연극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함께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시기로 넘어가게 됐어요. 그런 시기에 세월호 참사가 있었고, 또 한참 후에 연극계 미투를 만나면서, 배우로서 내가 나를 어딘가에 무조건 맡기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이 작품을 통해 무슨 질문을 던질 수 있는지, 내가 그 질문을 던지기에 적절한지, 이 작품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더 많이 생각하게 됐고요.
- 성수연
- 김동현 연출님과 하셨던 작업 중 그런 생각을 많이 하셨던 공연이 어떤 공연인가요?
- 우미화
- 2013년에 <말들의 무덤>이라는 연극을 했는데, 2년 전부터 자료 조사를 하고 워크숍도 하며 사전 작업을 오래 한 작품이에요. 제주 4.3사건 등 여러 전쟁 때 벌어진 학살들에 대해 조사를 했고, 그 과정에서 하게 된 녹취를 무대 위에서 그대로 전하는 작업이었어요. 그때 동현 선배가, 어떤 할아버지께서 말하는 영상을 보며 최대한 그 영상과 똑같이, 그러니까 재현하지 말고 재연에 가깝게 하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사실 아무리 내가 그 할아버지와 똑같은 말투, 똑같은 몸짓, 똑같은 눈빛을 행하려고 해도 결국 무대 위에 있는 사람은 나잖아요. 그런 과정에서 되게 오묘한 순간을 만나게 되더라고요. 어떤 사람의 어떤 순간을 똑같이 재연하려고 하는 동안 제 안에는 수많은 부딪힘이 있고, 수많은 과정이 지나가잖아요. 그러므로 무대 위에 드러나는 것은 ‘그 사람’이라기보다는 ‘우미화가 만난 그 사람’이겠지요. 그 사람도 나도 아닌 어느 지점에서 또 다른 에너지가 발생되고, 그로 인해 이야기가 확 커지는 느낌이 있었는데, 그게 굉장히 강렬했어요. 모든 인물연기에 다 통용되는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하고요. 그때 시작한 재현과 재연에 대한 질문을 그 후로 계속하고 있어요.
- 성수연
- 저도 비슷한 질문을 갖고 있어요. 본격적으로 그 고민을 시작한 작업이 2016년에 했던 <그녀를 말해요>라는 연극이었는데, 세월호 참사로 딸을 잃은 어머니들께서 해주신 말을 그대로 전하는 부분이 많은 연극이었어요. 누군가의 말을 그대로 전하는 연극은 그전에도 했었지만, 연대자로서 당사자들의 말을 무대에서 전하는 일은 또 굉장히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는 감각이 있었고, 재현과 재연에 대한 고민을 그때 시작하게 됐어요. 당시에 제가 미화 배우님을 사적으로 알았다면 찾아가서 여쭤봤을 수도 있겠어요. 어떻게 해야 하냐고…
- 우미화
- 나도 어렵다고…
- 이청
- 힘들겠다고…
- 우미화
- 그래도 해보면 좋을 거라고…
우리의 눈물
- 우미화
- 예전에는 제가 연극을 통해서 개인적인 질문을 던졌다면, <말들의 무덤> 이후에는 사회를 짚어보는 이야기나 역사적인 이야기들에 더 관심이 많이 갔어요. 매 작품이 다 소중하지만 나에게 또 다른 의미가 생기는 작품들이 있잖아요. 올해 제가 세월호 참사 10주기 영화 <목화솜 피는 날>이라는 작업에 참여했어요. 굉장히 의미 있는 작업이었어요.
- 성수연
- 그 영화 관련해서 하신 인터뷰를 읽고 왔어요. 끝까지 울지 않으려 했다는 말씀을 하신 걸 봤는데 그 이유를 자세히 여쭤보고 싶었고요.
- 우미화
- 처음엔 제가 이 작품을 배우로서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지 감히 상상할 수가 없었어요. 우리 모두에게는 세월호 참사를 같이 목격한 슬픔이 있잖아요. 인물의 감정을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는데, 그걸 미리 계산하는 일을 못 하겠더라고요. 하지 않았던 것에 가까워요. 기본적으로 울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제가 눈물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 역할을 연기하면서 울면, 그것은 우미화의 눈물이 될 것 같았어요. 우미화가 연민하고 우미화가 슬퍼하는 일을 하게 될까 봐 오히려 울지 않으려고 했어요.
- 성수연
- 제가 <그녀를 말해요>를 할 때 했던 생각과 비슷해서 여쭤보고 싶었어요. 당시에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는데 울면 가짜가 된다는 감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나중에 생각해 보니, 당사자의 말을 그대로 전하며 목격자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 이상했던 것 같아요. 말 뒤에 있는 헤아릴 수 없는 깊이의 감정을 딱 제 그릇만큼 작게 만들거나, 어떤 당사자성을 전유해버리는 일을 하고 싶지 않다는 감각이 아니었을까 지금은 생각해요. 그런데 그건 그런 형식의 연극과 연기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고민이었다고 생각했거든요. 배우님께서 극영화에서 인물연기를 하면서도 그런 생각을 반영하셨다는 점이 놀라웠어요.

- 우미화
- <목화솜 피는 날>은 저에게 정말 소중한 작업이었어요. 우리의 첫 번째 관객은 세월호 유가족분들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분들의 이야기가 담긴 작업이니까요. 상영을 앞두고 많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분들이 이 영화를 어떻게 볼까, 위로가 될 수 있을까, 누가 되는 건 아닐까 등등. 그런데 보신 분들께서 굉장히 좋아해주셨고, 오히려 얼마나 힘들었냐며 저를 위로해주셨어요. 그 후로 자주 뵐 기회도 생기고, 어느 뒤풀이 자리에서는 “어머, 언니!”, “미화야!” 하기도 했어요.
그러다 보니 또 다른 생각도 들었어요. 그러니까 내가 그분들을 더 가깝게 느꼈다면, 눈물이 날 때 울었어도 사실은 상관없었겠다고요. 그분들의 슬픔과 고통을 가늠할 수 없다고 그냥 거리만 둔 게 아닐까, 배우로서 경계를 너무 세웠던 것이 아닐까, 그게 오히려 약간의 대상화를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어요. 영화 마지막에 제가 맡은 인물의 남편이 “눈물 나면 눈물 나는 대로 살아”라는 말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 말을 듣고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었어요. 이태원 참사의 유가족분들께서 단체 관람을 하신 날, 어떤 분께서 영화를 통해 굉장히 위로를 받았고 정말 울고 싶을 땐 이제 울 거라는 말을 해주시더라고요. 눈물 나는 대로 살아도 된다는 말이 정말 좋았다고 하시면서요.
- 이청
- 셋이 엉엉 울어. 이게 무슨 일인가요.
- 우미화
- 어쩌면 제가 머리로만 이해하던 어떤 일이 조금 가슴으로 내려온 듯한 느낌이에요. 늘 기억하고 잊지 않겠다는 말의 의미도요. 실제 유가족분들을 자주 만나면서 이게 정말 내 이웃의 일이고, 내 친구의 일이고, 나의 일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더 가슴으로 느껴졌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작업을 한 게 저에게 되게 소중했어요.
- 이청
-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며 제가 2018년에 했던 공연 때의 기억이 떠올랐어요. 위계 폭력과 관련된 내용의 연극이었는데 제목이 <그냥 청소하는 것도 필모그래피가 되나요?>였어요.
- 우미화
- (웃음) 재미있는 제목이네요.
- 이청
- 그때 제가 맡은 배역이, 굉장히 많은 일을 하면서 위계폭력도 당하는 조연출 역할이었어요. 어느 날 연습 도중 갑자기 눈물이 너무 나는 거예요. 그러다 저도 갑자기, 두 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울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지만 충분히 울 수 있는 상황이고, 이 사람은 울 수도 있지 싶어서 우는 것을 선택했는데, 그 공연을 보신 어떤 분이 저에게 예쁘게 운다고, 왜 항상 젊은 여성 캐릭터는 그렇게 캔디처럼 울어야 하냐고 하시더라고요. 당시에는 그 말을 듣고 약간 얼어서 대답을 못 했어요. 우는 행위에 대해 고민했던 순간과 그분이 하셨던 질문이 오랫동안 깊이 남아 있었어요.
그 공연 후로는 피해자 역할을 맡았을 때, 사회적으로 말하는 ‘피해자다움’을 수행하지 않는 배우의 선택을 좀 더 전면적으로 드러낼 필요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끝까지 울지 않음을 선택하려고 노력한 작업도 많았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돌아보니 제가 어떤 위계폭력이나 성폭력에 노출된 피해생존자 역할을 계속 맡고 있더라고요. 연기를 할 때마다, 말씀하셨던 것처럼 울음을 참고, 이게 배역이 우는 건지 이청이 우는 건지 모르겠고, 내가 이렇게 괴로운데 보는 사람들에게는 괜찮으려나 싶기도 하고. 그래서 그런 배역을 그만 맡고 싶다고 동료들에게 말하기도 했어요.

- 우미화
- 어쩌면 눈물이라는 건 그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니니까요. 아까 이야기한 <말들의 무덤>에서 제가 맡았던 할아버지의 녹취된 말들은, 제가 들을 땐 눈물이 철철 나는 말이었지만 막상 그 할아버지는 조금의 울음도 없이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연습 중 그 말을 재연하다가 저는 또 울고(웃음). 그런 과정을 거쳤어야만 했던 거죠. 어떤 방식으로든 그 이야기와 그 인물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제 감정을 통과하는 일이요.
- 이청
- 맞아요.
- 우미화
- 연습이라는 게 결국 그런 거잖아요. 그저 한 번 해본 것을 사람들 앞에서 보이는 것이 아니니까. 연습 과정 동안 내가 맡은 인물과 감정이 수없이, 수없이 많은 방식으로 나를 거쳐 지나갈 것이고, 그렇게 만들어진 최종 결과물도 공연을 거치며 또 바뀌고. 그런 고민의 과정은 거쳐야만 하는 것 같아요.
- 성수연
- 네. 계속 고민하며 변화하는 인식을 연기에 반영하려 애쓰는데, 그런 일이 또 배우가 시민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연기는 사람과 세계를 드러내는 일이니까. 성별이나 어떤 당사자 정체성 등으로만 납작하게 드러나던 존재들, 이 세계가 의도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지우고 있는 존재들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동안 거울에 비치지 않았던 이 세계의 모습을 드러낼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예를 들어, 소위 수동적인 여성으로 등장하는 캐릭터의 경우, 사회에서 강요된 수동성이나 여성성을 수행하지 않는 방식으로 연기하는 시도도 가능하지만, 또 어떨 땐 그 선택이, 그런 삶을 살았거나 살고 있는 수많은 여성들에 대한 기만 아닌가 싶어 걱정될 때도 있어요. 어떤 경우엔 ‘피해자다움’을 수행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혹시 인물이 불쌍해 보이지 않아서 사람들이 연대 안 해주면 어쩌나 걱정될 때도 있고요. 결국 작품의 전체 맥락이 중요하겠지만요.
- 우미화
- 맞아요. <목화솜 피는 날>에서 제가 맡았던 역할도 사회에서 생각하는 ‘유가족다운’ 인물이 아니었어요. 저도 그 작품을 만나고 더 많이 알게 됐어요. 모두가 같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슬픔에 대처하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견디고 계시겠구나, 그 일을.
- 이청
- 맞아요. 저도 지금은 제가 맡은 인물을 대표하는 정체성보다는 결국 그 사람만의 고유한 삶을 더 들여다보게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피해 상황을 연기할 때의 배우의 감각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고요. 그 상황을 생생하게 그려서 정서로 접근하는 방식 외의 다른 연기 방식을 찾기도 하고, 역할을 입는 것만큼 잘 벗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도 알게 됐고요. 연극계 미투나 세월호 참사 이전, 연극을 동경하는 학생이었을 땐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우리의 연극
- 이청
- 저는 제 할머니의 인생으로 창작극을 만들어볼 생각이 있어요. 할머니가 6.25 때 이틀 동안 쌀통에 숨어계셨다는 이야기를 처음 듣고, 언젠가 꼭 할머니의 이야기를 작업으로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고등학생 때였어요.
- 우미화
- 훌륭해, 훌륭해. 이렇게 훌륭한 사람으로 자랐군요.
- 이청
-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어떤 시대의 여성을 대표하는 순간들이 우리 할머니에게도 있는 거예요. 그래서 몇 년 전부터 계속 할머니를 관찰하며 기록하고 있어요.
- 우미화
- 저도 가끔 엄마랑 이야기하다가 녹음을 할 때가 있어요. 엄마들의 이야기가 정말 무궁무진하거든요. 담아놔야 할 이야기들이 정말 많고, 언젠가 작업으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생각만 하고 실천을 못 하고 있어요.
- 이청
- 저도 언제 할지 모르겠어요.
- 성수연
- 와, 저도 저희 어머니 이야기를 종종 녹음해요. 그럼 같이 할까요? 제가 지원서를 한 번…
- 우미화
- 좋다.
- 이청
- 너무 좋아요. 손 좀 모아주시겠어요? 증거를 남겨야 하니까.
- 성수연
- 혈서 같은 건가요?
모두 웃음


- 성수연
- 그러고 보니 두 분 다 <세자매> 를 하셨더라고요.
- 우미화
- 와, 진짜? 언제 하셨어요?
- 이청
- 저는 2016년에 ‘이리나’ 역을 했어요.
- 우미화
- 저는 2013년에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올가’ 역을 했어요.
- 성수연
- 저는 공연을 한 적은 없지만 학교 다닐 때 수업시간에 ‘마샤’를 한 적이 있어요.
- 우미화
- 어?
- 이청
- 어?
- 우미화
- 세 자매네요.
- 이청
- 셋이서 <세자매> 해야겠어요. 정말 신기하네요. 어떻게 딱 이렇게 올가, 마샤, 이리나.
- 우미화
- “어떻게든 살아가야지…”
모두 웃음
- 성수연
- 신기하더라고요, 겹치는 배역도 없고. 그래서 사실 제가 <세자매>의 마지막 페이지를 준비해왔어요. 그냥 재미 삼아 오늘 헤어지기 전에 한번 읽어보면 어떨까 해서요.
- 성수연
- 저는 지금 의미 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오가는 수다라고 느끼고 있어요. 두 분은 어떠세요?
- 이청
- 저도 그래요. 언제 이런 이야기들을 이렇게 또 나눠보겠어요.
- 우미화
- 인터뷰 제안은 항상 고민되는데, 저는 오늘 두 분의 이야기를 듣는 게 의미 있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왔어요. 제 이야기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고요.
- 이청
- 아닙니다.
- 성수연
- 중요합니다.
우리의 극장
- 성수연
- 지금까지 어떤 사건들로 인한 인식의 변화를 어떻게 우리의 일에 반영해왔는지 수다를 떨어보았는데요. 혹시 또 큰 영향을 받았다고 느끼는 일들이 있으세요? 저는 남산예술센터를 사용할 수 없게 된 게 많이 아쉽고, 그 영향을 받고 있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 이청
- 갑자기 또 눈물이. 저는 한 번도 못 서봤거든요.
- 우미화
- 저는 공연도 했었고, 낭독공연도 몇 번 했었어요. 정말 좋은 극장인데 창작자들이 사용할 수 없는 게 아쉽네요.
- 성수연
- 저는 아까 말씀드린 <그녀를 말해요>도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했고, 그 후에도 몇 번 더 공연을 했어요. 당시 남산예술센터의 라인업이나 프로그램들을 통해서, 그러니까 극장의 행보를 통해서 드러나는 관점들이 좋았어요. 거창하게 말하자면 연극의 사회적 역할을 계속 생각할 수 있었거든요. 상업적인 가치를 추구하지 않아도, 또 다른 가치를 추구하면서도 생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든든함을 느끼기도 했고요. 중요했던 맥락 하나가 툭 빠져버린 것도 같아요.
- 우미화
- 정말 슬픈 현실인데, 지원금을 받지 않으면 공연을 올리기가 어렵죠. 상업적인 가치를 추구하지 않고서는, 지원금이 없으면 수익을 낼 수 없는 구조니까요. 아무리 열흘 보름 꽉 채워서 공연을 해도 매표 수익만으로는 대관료를 내는 것도 쉽지 않잖아요. 이게 10년, 20년, 30년이 지나도록 똑같다는 사실이 참 신기하기도 하네요.
- 이청
- 극장 이야기를 하다 보니 생각났는데, 저는 이태원 참사 이후로 극장에서의 안전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고 있어요. 동료들과 논의를 하며 비상시 대피요령도 다시 점검해보고 있고요. 비상상황이 발생하면 각자 어느 문으로 대피하라고 알려주는 것뿐만 아니라, 담당 스태프들이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지 미리 알려주며 그들을 믿고 단체로 행동할 수 있게끔 극장 안에서의 신뢰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멘트를 만들어보기도 했어요. 그리고 장애인 관객들을 위한 대피 요령도 제대로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최근에 여러 논의들을 하고 있어요. 공연법 자체에 구멍이 많다는 것도 발견하고 있고요.
- 우미화
- 모든 삶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잖아요. 대처 방법을 잘 만드는 것만큼 또 중요한 것이 안전을 위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미리미리 점검하는 일인 것 같아요. 시스템을 잘 구축해야 하는데, 그게 개개인의 능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 성수연
- 긴 사이.
- 이청
- 모두 하늘을 본다.
- 우미화
- 다음 단락으로.
우리의 두려움
- 성수연
- 미화 배우님께서는 매체에서도 연기를 많이 하고 계시잖아요. 저는 아직 몇 번 해보지 않았기에 막연한 두려움이 있는 것도 같아요.
- 우미화
- 저도 아직 적응 중이고, 여전히 연극 무대가 더 편안하고 좋고 에너지도 더 얻어요. 제가 오랫동안 연극을 하면서 쌓은 감각은, 연기는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내 재능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과정 속에서 동료들과 함께 만드는 일이라는 감각이에요. 저에게 연극은 사실 98%가 ‘과정’이에요. 그런데 매체에서 연기를 할 땐 과정 없이 결과물만 내고 있는 저를 자꾸 발견하게 되더라고요. 과정이 없는 그 느낌이 불편했어요. 스스로를 못 믿게 되고. 연극을 할 땐 긴 연습 과정 안에서 스스로를 믿을 수 있게 만드는 요소들이 계속 발생하고, 그로 인해 힘을 얻으며 저를 완성하는 것 같거든요. 저에게 있는 근육은 그런 근육인데, 그런 과정을 거쳐서 인물을 만났다는 확신이 없으니 자꾸 스스로를 못 믿게 되는 거죠.
- 성수연
- 확신할 수 있는 방식으로 시간이 쌓인 게 아니라서요?
- 우미화
- 맞아요. 그리고 카메라라는 관객이 제 코앞에 있는 것도 낯설었어요. 저는 무대에서도 관객들의 얼굴을 잘 안 보거든요. 좀 두렵기도 하고요. 근데 정말 저에게 가장 큰 차이는 과정을 사람들과 함께 하지 않는다는 점인 것 같아요. 어쨌든 이제는 그런 차이들을 받아들이고 있어요. 그리고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계속 힘들어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요. 뭘 준비해야 하는지 알아야 하는 거죠.
- 성수연
- 함께 하던 과정을 혼자 할 때 어떤 방법을 사용하세요? 그건 완전히 다른 근육일 것 같아요.
- 우미화
- 사실 연극 연습하듯 계속 들여다보고 자주 생각하고 반복해서 연습하는 것 말고는 뾰족한 수가 없어요. 어렵긴 해요. 제가 스스로 연극배우의 정체성을 빌미로 현장에 제대로 발 디디지 못하는 핑계를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 이미 이렇게 다양한 현장에서 하고 있고 이 일도 나의 일인데, 더 이상 현장에서 낯설다는 핑계를 대지 말자고 생각했어요. 이 현장이 나의 공간이라고 느끼려 노력 중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제가 자꾸 그곳에 잠깐 가는 손님 같은 거예요. 나는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그런 생각을 많이 많이 해요. 그렇게 느끼기 위해 자꾸 들여다보고 반복하는 거죠. 방법이 없어요, 방법이 없어. 늘 사람들 앞에 서는 건 낯설고 부끄럽고 힘든 일이죠.
- 성수연
- 무대에서 관객들을 바라보는 것도 두려우시다고 했는데.
- 우미화
- 제가 또 시력이 좋거든요(웃음).
- 성수연
- 저도 시력이 좋아서 관객들의 얼굴이 정말 잘 보여요.
- 우미화
- 왠지 수연 배우님은 다 보면서 할 것 같아요. “너 거기에 있구나” 이렇게(웃음).
- 성수연
- 늘 그렇게 하고 싶은데, 그런 척을 할 때도 있는 것 같아요.
- 성수연
- 떨고 있을 때도 들키지 않는 근육이 발달된 것 같아요.
- 우미화
- 그러니까요. 그게 우리의 싸움이지요. 나는 벌벌 떨고 있는데 사람들은 다 몰랐다고 하고(웃음).

- 이청
- 맞아요. 사실 누가 어디에 앉아있는지 다 보이고.
- 우미화
- 네. 정말 아직까지도 힘들거든요. 이 일을 20-30년을 해도 안 바뀌는 것 같아.
- 이청
- 그러고 보니 저 20대 초반에 한창 매체 오디션 정말 많이 봤었거든요. 그때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이 못생겼다는 말이었어요.
- 이청
- 그때 외모 강박이 굉장히 심해졌었어요. 그러다 연극을 하러 가면 정말 행복한 거예요. 외모에 대한 고민보다는 작품에 대한 고민을 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다가 다시 매체 오디션만 보러 가면 그들이 원하는 어떤 모습에 내가 도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정말 크게 스트레스를 받고 힘들어했던 시기가 있었어요.
- 우미화
- 제가 2017년쯤에 처음 매체 연기를 시작했는데, 이미 주변에서 선후배들이 많이 매체를 오가고 있었어요. 저도 여기저기서 “미화야, 너도 곧 기회가 올거야”라는 말을 듣곤 했죠. 그게 화가 났었어요. 내가 연극을 이렇게 오랫동안 해온 건 매체에 가려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 아닌데, 너‘도’라는 표현은 모든 연극인들을 마치 그것만을 꿈꾸고 있는 사람들로 만드는 것 같았어요. 모든 연극인들을 그렇게 보는 시선이 불편했던 거죠. 매체에 가기 위해 연극을 해온 게 아니잖아요. 물론 기회가 닿아서 하면 좋지요. 무대와는 또 다른 곳이고 다양한 연기를 하면서 살면 좋잖아요.
- 성수연
- 네. 연극은 연극이고, 매체는 또 다른 일로서 하면 좋지만, 무대를 발판 삼아 어디론가 가려고 기웃거리는 사람들로 여겨지는 건 슬퍼요. 연극이 정말 좋아서 정말 열심히 하고 있는 거니까. 두 분은 연극을 왜 시작하셨어요?
- 이청
- 저는 결국 관객을 만나는 일이 좋아서 연극을 시작했어요. 접근성 작업을 하는 것도 결국 더 많은 관객들에게 저와 제 동료들의 공연이 닿길 바라기 때문이고요. 매체 연기를 하게 된다면 결국 또 다른 관객이 생긴다는 맥락에서는 좋은데, 연극을 관문으로만 여기는 사람들도 있긴 하겠지요.
- 우미화
-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죠. 그래도 우리는 정말 이 일이 좋아서 시작한 사람들이잖아요. 그래서 저는 하루하루를 정말 행복하고 즐겁게 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하루하루가 쌓여서 우리의 시간이 되는 거니까. 지금 이런 만남도 내가 예상치 못했던 만남이고, 그래서 또 정말 재밌고 행복하고, 이런 시간들이 쌓여서 또 내가 되어가고.
- 이청
- <20세기 블루스> 때 제가 접근성 매니저로 참여했잖아요. 배우님을 포함해서 중년 여성들로 꽉 찬 무대를 바라보는 일이 정말 꿈 같고 행복했어요.
- 우미화
- 우리도 그랬어요. 배우들끼리 그런 얘기를 했어요. 우리가 언제 이렇게 다 같이 만나서 이런 공연을 할 수 있겠냐고. 정말 소중했어요.
우리의 미래
- 성수연
- 청 배우님은 올해 보니까 아예 접근성 작업을 하는 회사를 꾸리신 것 같더라고요. 대표 이청. 어떤 결정이나 선언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멋있었어요.
- 이청
- 저는 창작하는 사람이고 접근성매니저 일도 제 예술의 연장선 안에 있는 일인데, 어디에도 발 디디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 고민을 할 때도 있었어요. 연기 언제 할 거냐는 말도 진짜 많이 들었거든요. 계속하고 있는데(웃음). 올해 초에 자랑스럽게 ‘겸업하고 있다’고 얘기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저의 정체성을 스스로에게 정립할 필요도 있었고요. 수연 배우님께서 아까 “이 세대 분들은 이렇게 해야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라는 말을 들었다고 하셨는데, 회사를 차린 것도 일종의 새로운 ‘생존 방식’이에요. 저만의 고유한 전문성을 찾아 나가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느끼기도 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소속의 필요성을 느끼기도 했어요. 최근에 교육 일을 많이 하게 됐는데, 어딜 가나 제 소속을 물어보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공무원 사회에서 프리랜서라고 하면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부분이 늘 있었어요. 물론 회사명보다 더 우선으로 ‘배우’라고 말하고요. 회사를 차리는 것은 제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이었지만 대외적으로 크게 달라진 것은 없어요. 동료들과 같이 이 작업을 할 수 있는 플랫폼을 하나 만들어놓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 성수연
- 멋있어요. 우리는 연극배우이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또 그 일을 확장시켜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또 어떻게 우리의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지, 같이 미래를 한번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혹은 각자가 바라는 미래가 있을지.

- 이청
- 저는 셋이 공연하고 싶어요.
- 우미화
- 저는 사실 미래를 계획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하루하루 눈앞에 있는 일들과 관계 맺기를 하며 살고 있어요. 저는 이 자체가 미래인 것 같아요.
- 성수연
- 그러고 보니 ‘미래’를 말하면서 이렇게 허공을 봤어요. 이상하네요. 그만큼 막연하거나, 여기에 없는 것을 미래라고 생각했었나 봐요.
- 우미화
- 오늘도 어제의 미래였으니까.
- 이청
- 그러네요. 저는 이렇게 두 분과 이야기하는 자리가 있을 줄 상상도 못 했었어요.
- 성수연
- 저도요. 하루하루 내가 쌓은 것들이 우리의 시간이 되는 것이라고 하신 말씀이 또 다르게 지금 확 와닿아요. 지금 정말 좋아요. 오늘이 어제의 미래였다.
- 우미화
- 우리 그런 말들 많이 하잖아요. 지금은 어제의 미래고 내일의 과거라는.
- 성수연
-
우문현답. 막연한 미래를 질문했는데, 오히려 ‘지금’을 확 느끼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정말 깊이 감사한 시간을 함께 보냈네요. 어제의 미래였던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수다를 통해 지금 떠오른 질문을 서로 주고받은 후, 그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 <세자매>를 낭독하는 것으로 이 자리를 마무리해볼까 합니다. - 우미화, 이청
- 감사합니다.
우리의 질문
- 성수연
- 연기를 하는 한 관객은 늘 두려울까?
- 이청
- 우리와 관객들은 지금 어느 시간에, 갑자기 어디에 서 있는 걸까?
- 우미화
- 곧 관객을 만날 텐데 이번엔 어떤 느낌이야?
- 성수연
-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이 연극계는 계속 달라지잖아. 그런 일들에 적응하며 계속 새로운 질문을 찾는 게 힘들 때도 있어?
- 이청
- 나는 앞으로 힘들 때 오늘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래도 괜찮을까?
- 우미화
- 너는 힘들 때마다 혹시 떠올리는 사람이 있어?
- 성수연
- 보고 싶은데 지금은 볼 수 없는 사람과의 연결감을 느끼고 싶을 때, 혹시 하는 행동이 있어?
- 이청
- 혹시 가끔 세상과 나의 연결이 끊어져 있다고 느낄 때는 없어?
- 우미화
- 햇빛이 쨍 내리쬐는 어느 순간, 그냥 하늘을 보고 그냥, 그냥 좋았다고 생각할 때 있어?
.
.

- 성수연
-
자매는 서로에게 꼭 기대고 서 있다.
“오, 음악 소리 좀 들어봐! 그들이 우리로부터 멀어져 가. 한 사람은 완전히, 영원히 떠나갔어. 그리고 우리만 남겨져서 다시 우리의 삶을 시작해야 돼. 살아야 돼. 살아야 돼.” - 이청
- “어째서, 무엇을 위해서, 이 모든 일을, 이 모든 고통을 겪어야 되는지, 언젠가는 우리 모두 알게 될 날이 올 거야. 모든 비밀이 밝혀지는 날이 올 거야. 그동안은 그냥 살아가야 돼. 일을 해야 돼. 일을. 내일 나는 혼자 떠날 거야.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할 수만 있다면, 날 필요로 하는 모든 이들에게 내 모든 삶을 바칠 거야. 지금은 가을이고 곧 겨울이 오면 세상은 눈으로 덮이겠지. 하지만 난 일할 거야. 일을 할 거야.”
- 우미화
-
“저리도 명랑하고 씩씩한 음악 소리를 듣고 있으니 살고 싶어져. 오, 하느님. 세월이 지나가면 우린 영영 떠나가고, 결국엔 잊히겠지. 우리의 얼굴, 목소리, 우리가 몇 명이나 있었는지 다 잊힐 거야. 하지만 우리의 시련이 우리 뒤에 살아갈 사람들에겐 기쁨으로 바뀔 거야. 이 세상에는 행복과 평화가 오고, 사람들은 지금의 우리를 따스한 말로 기억하면서 우리에게 감사할 거야.
오, 사랑하는 내 동생들아. 우리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살아가는 거야. 음악이 저리도 명랑하고 즐겁게 울리는 걸 들으니 우리가 왜 사는지, 왜 고통을 받는지 알게 될 날도 머지않은 것 같아. 그걸 알 수만 있다면, 알 수만 있다면.” - 성수연
- 음악이 점점 잦아든다.
- 우미화
-
“그걸 알 수만 있다면, 그걸 알 수만 있다면.”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