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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님 가마 탄 봉련이, 3막 1장에 서다

[김은성의 연극데이트] 배우 이봉련

김은성_극작가

웹진 13호

2012.12.06

배우 정인겸
  • 지리멸렬한 삶이 재미없었던 여고 신입생 정은이는 자퇴를 하고 찾아간 검정고시 학원에서 당구와 다방의 맛에 눈을 뜨고 세상을 알아간다. 열여덟 여대생 제갈봉련은 기록사진에 빠져 사라져가는 풍경에 천착한다. 스물넷에 대학원까지 속성으로 마친 봉련, 이번에는 배우가 되기로 결심한다. "너도 얼굴 고쳐서 올 거니?" 아버지는 덧붙이셨다. "그 얼굴로도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을 거다"
  • 임금님 가마에 오르다


    이봉련. 이름이 강렬하다. 무슨 '봉'의 무슨 '련'을 쓰는가?
    봉황새 봉에 가마련. 봉황새 장식이 된 가마. 임금이 타는 가마를 뜻한다.

    임금이 타는 가마라? 지금으로 치면 청와대 1호차가 아닌가? 이름이 보통 쎈 게 아닌데?
    가명이다. 진짜 이름은 이정은. 아름다울 정에 언덕 은을 쓴다. 대학로 무대에 데뷔할 즈음 이름이 이정은인 선배가 몇 분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이봉련'으로 활동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도 두 분의 이정은 배우를 알고 있다. 둘이 함께 출연한 공연 포스터에 관한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다. 이정은이 두 번 반복되어 오타로 오해를 받았다고.
    그 공연은 뮤지컬 <빨래>다. 나도 함께 출연했었다. 내가 이름을 바꾸지 않았더라면 포스터에 '이정은, 이정은, 이정은' 이렇게 올라갔을 것이다. (웃음) 그나마 내가 이름을 바꾼 덕에 이정은, 이봉련, 이정은으로 올라갔다.

    여배우가 탐낼만한 다른 이름도 많을 것 같은데 왜 하필 봉련으로 바꿨는가?
    사실 봉련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한 건 꽤 오래된 일이다. 이십대 초반, 학교에 다닐 때 바꿨다. 우연히 이름을 바꾸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다큐멘터리 방송을 보게 됐다. 봉련이라는 이름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중학생을 보고 있는데 봉련이라는 이름이 내 귀에는 너무 예쁘게 들렸다. '아, 저 이름을 내가 가져다 써야지' 생각이 들더라. 사진과에 다니면서 사진전과 퍼포먼스를 많이 했을 때였는데 활동이름으로 쓰기 시작했다. 당시의 활동명은 '제갈봉련'이었다.
  • 그놈의 경상도사투리가 준 선물


연극<빨간버스>

연극<전명출 평전>
  • 요즘 박근형 작, 연출의 청소년극 <빨간버스>에 출연 중이다. 어떤가?
    나는 청소년기를 조금 정신없이 살았다. 작품을 준비하면서 그때를 다시 돌아볼 수 있어서 좋다. 재밌다. 중고등학생들이 연습을 참관하러 온 적이 있었는데 그 친구들이 작품이 어둡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해피엔딩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현실을 그대로 보고 있는 것이 불편하니? 묻고 싶은 마음도 들었고,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게 하는 것 또한 연극의 힘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당장은 불편하고 어색하겠지만 해결할 수 없는 그들의 문제를 그대로 제시해서 보여주는 것이 그들에게 어떤 선물이 되었으면 좋겠다.

    올해 여러 작품에 출연하고 있는데?
    좋다. "올해만 같아라!" 할 정도로 여러 팀들과 좋은 작업을 많이 했다. 네 편을 하고 나니까 일 년이 훅 갔다. <식구를 찾아서> <전명출 평전> <삼국유사 프로젝트 - 꿈> <빨간버스>까지 숨차게 달려왔다.

    특히 어떤 작품이 기억에 남는가?
    <전명출 평전>을 연습하던 그 여름이 기억난다. 덥고 비도 많이 오던 여름에 새로운 인연들을 많이 만났다. 전혀 몰랐던 배우들을 만난다는 것에 대해 부담감이 컸었다. 생각만 해도 불안하고 떨렸었는데 정말 즐겁게 놀면서 연습했다. 두고두고 꺼내볼 추억을 선물 받은 느낌으로 남아있는 공연이다.

    <전명출 평전>은 연극 팬들에게 이봉련의 경상도사투리를 각인시킨 공연이다.
    음… 나는 경상도에서 태어난 경상도 사람인데, 사실 경상도사투리 때문에 극심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나는 서울말을 너무 잘하고 싶었다! (웃음) 늘 무대 위에서 내 말에 사투리가 섞여있을까 봐 조바심을 버리지 못했던 배우였다. <전명출 평전>을 하면서 나의 고향, 나의 말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콤플렉스를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게 정말 큰 공부가 된 거다. 나의 부모, 나의 핏줄, 나의 고향에 대해서 사실상 처음 생각하게 됐던 거다. 고모, 이모, 작은아버지, 고향에 살고 있는 그들을 다시 돌아보게 된 거다. 경상도사투리를 왜 그렇게 부끄러워했었는지, 돌아보고 털어버리게 해준 고마운 작품이다.

    무기력한 자퇴생


    경상도 어디에서 태어났는가?
    아버지의 직장 포항제철이 있는 포항에서 태어나 열여섯까지 살았다. 소심하고 내성적이며 공부도 못하는, 무작정 쏘다니길 좋아하는 아이였다. 남 앞에 서는 거 싫어하는 수동적인 아이였다. 그런 내가 어떻게 배우가 됐는지 나도 궁금하고 부모님도 믿겨하지 않으신다.

    중고등학교 시절은 어땠는가?
    중학생이 되어도 공부는 계속 안했다. 화끈하게 놀지도 못했다. 그저 그런 따분한 삶을 살아가는 사춘기였다. 지리멸렬했다. 무기력했다. 무엇에 열광했던 적이 없었다. 학교를 다니기도 싫었다. 결국 고등학교 입학 한 달 만에 자퇴를 했다.

    자퇴를? 아무리 따분해도 그렇지 겁도 없다. 대체 이유가 뭔가?
    그때 내가 왜 그랬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무기력으로 무관심으로 사춘기를 보냈다. 아직도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

    부모님 반응은 어땠나?
    학교를 가지 않겠다고 하니 집에서는 난리가 났지 뭐. 그런데 그 즈음 대구로 이사를 갔다. 졸업장은 따라는 부모님의 간절한 마음까지 져버릴 수는 없더라. 학원을 다니면서 검정고시 패스를 했다. 검정고시 학원을 7-8개월 다녔는데 거기서 만난 사람들과 즐겁게 놀았다. 당구장과 다방에 어울려 다니면서 신나게 놀았다. 다양한 나이에 다양한 직업을 가진 다양한 얼굴들을 많이 만났다.
  • 사이비 예술영재, 기록사진에 빠지다


    사진을 전공하게 된 이유는?
    그냥 고등학교에 무난하게 다녔던 것보다 결과적으로 2년이나 일찍 대학생이 됐다. 열여덟에 대구에 있는 예술대학의 사진과에 들어가게 됐다. 본의 아니게 학교 최연소 합격자가 됐는데 동기생들은 예술영재인 줄 알더라. (웃음) 사실 사진과에 입학하게 된 것도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엄마랑 친한 동네언니가 다니는 학교에 놀러갔는데 대학생들의 삶이 좋아 보였다. 뭘 특별하게 준비하지 않아도 돼서 사진과를 선택한 거였다.

    사진공부는 재미있던가?
    다큐멘터리 사진을 전공했는데 정말 재밌었다. 그때는 평생 사진을 할 거라는 생각을 했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광고사진이나 예술사진을 추구했는데 나는 기록사진이 좋았다.

    기록사진이라면?
    최민식 선생님의 사진을 생각하면 된다. 있는 그대로를 그대로 찍는 것. 음… 길게 말하자면 한이 없다. 포항에 가면 송도해수욕장이라는 곳이 있다. 영화 파란대문의 무대가 됐던 곳인데 그곳이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사라지기 전, 매일 찾아가 사진을 찍었다.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기록. 나에게 기록사진은 그런 것이었다.

    당시 이봉련이 찍었던 사진들 중에서 가장 아끼는 사진을 한 장 꼽자면?
    바람이 몹시 불던 날이었다. 바닷가로 한 무리의 아이들이 갑자기 뛰어왔고 한 여자아이가 뛰놀며 들고 있던 꽃잎을 바람에 날려 보내더라. 그 순간을 포착해서 찍을 수 있었다. 잊지 못할 순간이다.

꽃을 날리는 소녀

  • 사진에 꽤 깊이 빠져있었던 것 같은데?
    맞다. 사진 공부를 더하고 싶어서 대학원에 진학을 했다. 이때부터 서울에서 살게 되었다.

    고등학교 자퇴생이 결국 대학원까지 갔다.
    잘 마쳤다. 4학기 수료했다. 대학원까지 마치고 나니 스물넷이었다.

    다시 심심해진 삶, 무대가 부르다


  • 사춘기 시절, 무기력하고 소심했던 소녀가 아니라 또래들과 놀기에 심심했던 애어른이 아니었을까 의심된다. 초고속으로 스물넷에 대학원까지 마쳤는데 아직까지 연극이야기는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있다.
    대학원을 마칠 무렵 다시 삶의 무료함이 찾아오더라. 심심했다. 뭐 재밌는 일 없을까 하던 참에 집 가까이에 있는 대학교의 사회교육원에 들어가게 됐다. 뮤지컬과에 등록했다. 그때 선생님으로 오신 분이 <환상동화>의 김동연 연출가였는데 <러브레터>라는 여고 동창생들을 다룬 뮤지컬을 함께 만들게 되었다. 그 인연으로 후에 <환상동화> 조연출로 참여하게 되면서 대학로 무대에 첫발을 디디게 되었다.

    연극은 재미있었나?
    프로배우들이 연습하는 현장을 처음 목격했는데 배우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구나 생각했다. 배우들의 즉흥적인 연기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내가 하기에는 불가능한 일로 생각됐다. 스텝을 하면 재밌겠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하고 있을 무렵 극단 오늘 위성신 연출의<사랑에 관한 다섯 개의 소묘> 배우 오디션이 있었는데 운이 좋아 언더로 뽑혔다. 원래는 영화에 출연하게 된 배우의 이틀 공백을 메울 예정이었는데 그 배우의 영화 출연기간이 길어지면서 내가 한 달을 출연하게 됐다. 운이 좋았다. 그 이후에 극단 오늘에서 3, 4년 꾸준하게 작업했다.

    사실상 극단 오늘에서 연극을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 위성신 대표님은 나를 대학로로 내보내주신 분이다. 나에게는 친정아버지 같은 분이다. 극단 단원은 아니지만 새로운 팀과 만날 때마다 항상 이야기 한다. 저 위성신 연출님이랑 오래했어요.

    이후에는 어떤 작품들을 했는가?
    2008년에 오디션 봐서 뮤지컬 <빨래>팀에 들어가게 됐다. 주인할머니 역할로 3년을 출연했다. 경쟁률이 낮을 것 같아서 할머니 역할에 지원했는데 막상 되고 보니 미칠 것 같았다. 이정은 언니랑 더블이었는데 정은 언니가 많이 도와줬다.

    <빨래>이후에는 어떤 작품들을 해왔는가?
    오경택 연출의 <로베르토 쥬코>, 이상우 연출의 <올모스트 메인>, 김수진 연출의 <백년 바람의 동료들>, 김동현 연출의 <벌>등이 기억에 남는다. 뜨거운 가슴을 가진 여러 선생님들을 만날 수 있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특히 <벌>. <벌>에서 만난 김동현 연출가에게 고마운 마음이 있다. 연습 중에 한참 헤매고 있을 때였는데 "뭐가 힘드냐?"며 다가오셨다. 봉련이 네가 그동안 어떤 연기를 잘 하는지 봐 왔다고 하시면서 내가 너랑 하고 싶었던 이유는 네가 잘 하는 희극적인 표현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너의 새로운 모습을 보고 싶어서였다고 하시더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힘이 되는 격려로 남아있다.

    아름다운 얼굴


  • 그동안 함께 출연했던 배우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배우를 꼽자면?
    조민정 언니가 기억난다. 오승수 작, 연출의 <내가 가장 예뻤을 때>라는 작품을 하면서 만났던 선배다. 내가 딸 역할을 했었고 언니가 엄마 역할을 했었다. 돌아보면 언니에게 너무 미안하다. 정말 철없이 설쳤다. 그때그때 너무 라이브하게 했는데, 언니는 나 때문에 얼마나 공연이 살얼음판이었을까, 이제 생각해 보면 너무 미안하다. 나는 어쩜 그렇게 약속을 안 지켰을까? 내가 어디로 튈지 몰라서 얼마나 언니는 마음을 졸였을까? 그런데 그 언니는 다 받아줬던 거다. 후에 다른 팀에 가서 비슷한 경우로 엄청 깨진 적도 있다. "어제 그렇게 했잖아요? 왜 똑같이 안 해?" 상대배우의 원망을 듣고서야 내 상태가 똑바로 보이더라. 그제야 민정 언니가 얼마나 참고 견뎌줬는지 알게 된 거였다. 언니에게 고맙다고 했더니, 아니야, 난 아무렇지도 않았어, 정말 괜찮았어, 하더라. 더 고맙게 느껴졌다.

    꼭 한 번은 만나고 싶은 배우는?
    <빨래>에서 더블캐스팅으로 함께 출연한 적은 있었어도 아직 한 번도 같은 무대에 서 본 적이 없는 이정은 언니랑 만나고 싶다. 존경하고 좋아하는 선배다. 언니가 어떻게 작업할 지 궁금한 게 많다. 언니에 대해서 사람으로도 많이 알고 싶다.

    만나고 싶은 연출가가 있다면?
    이상우 선생님을 한 번 더 뵙고 싶은 마음이 계속 있다. <올모스트 메인> 할 때는 선생님이랑 함께 하는 즐거움이 뭔지 몰랐다. 지금은 뭔가 재밌게 즐겁게 작업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때는 경험부족이라서 힘들었었는데 이제 잘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얼마 전에 낭독공연으로 이양구 연출가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혜화동 1번지 동인 작업에도 관심이 많다. 그들을 보면 왠지 기록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들이 떠오른다.

    해보고 싶은 연극, 탐나는 역할은 무엇인가?
    아버지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다닌다. 아버지에게 배우를 하겠다고 말씀드렸더니 "너 어느 날 얼굴을 고쳐서 올 거니?" 하시더라. "니가 니 얼굴로 할 수 있는 게 많을 거다. 니가 니 얼굴로 할 수 있는 역할이 많이 있을 거다." 하시더라. 평범한 여자, 주변의 여자, 할머니, 아줌마, 이웃집 여자,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많다. 헛꿈 꾸고 가랑이 찢어지다가 시간이 훅 가는 거다. 욕심을 부리면 괴로워진다.
  • 연극은 계속 할 것인가? 사진처럼 하다말고 튀어버리는 것 아닌가?
    계속 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나는 그냥 이걸 하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든다. 꾸준히 잘 했으면 좋겠다. 너무 길게 평생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그런 일은 꼭 실패하더라. 일단 마흔까지 하는 게 목표다. 조금씩 끊어서 생각하기로 했다.

    이봉련에게 연극은 무엇인가?
    그거 진짜 어려운 질문이다.
    모르겠어요. 아직 정말 모르겠어요.
    음… 모르겠어요. 그게 뭔지… 진짜 모르겠어요.


  • 이봉련 (배우)
    주요 작품
    <빨간버스><삼국유사 프로젝트- 꿈><전명출평전> <벌>
    <백년, 바람의 동료들><올모스트 메인><로베르토 쥬코>
    <술집- 돌아오지 않는 햄릿><빨래><식구를 찾아서>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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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성

김은성 극작가
극단 달나라동백꽃 대표
주요작품 <로풍찬유랑극장><뻘><목란언니><연변엄마><순우삼촌><시동라사>외 다수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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