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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도화지 위에 번지는 조미료 없는 연기

[김은성의 연극데이트] 배우 백익남

김은성 _ 극작가

웹진 34호

2013.10.24

가난에 지쳐 진학을 포기한 고3은 우연히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고 연극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때로는 3주, 때로는 8개월, 극단 언저리를 맴돌며 방황하던 청년은 스물일곱이 되어 만난 연기 스승에게 슬프지 않은데 슬픈 척하지 말고, 눈물 안 나는데 우는 척하지 말고, 기쁘지 않은데 기쁜 척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받는...

  • 가난에 지쳐 진학을 포기한 고3은 우연히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고 연극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때로는 3주, 때로는 8개월, 극단 언저리를 맴돌며 방황하던 청년은 스물일곱이 되어 만난 연기 스승에게 슬프지 않은데 슬픈 척하지 말고, 눈물 안 나는데 우는 척하지 말고, 기쁘지 않은데 기쁜 척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받는다. 느낀 만큼만 정직하게 무대에 오르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을 하얗게 비워야 한다고 믿는 극단 코끼리만보의 배우 백익남을 만났다.

    배우 백익남
배우 백익남
  • 조미료 없는 침묵과의 만남

    요즘 어떻게 지내는가?
    11월 8일에 국립극단 소극장판에서 개막하는 <천국으로 가는 길> 연습 중이다. 스페인 작가 후안 마요르가와 김동현 연출이 다시 만난 작품이다.

    후안 마요르가는 <다윈의 거북이> <영원한 평화> <피리 부는 사나이>로 극단 코끼리만보와 인연을 이어왔다. 이번 작품 <천국으로 가는 길>은 어떤 내용의 작품인가?
    유대인 수용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나치가 수용소의 유대인들이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을 홍보하기 위해서 연극을 만든다는 이야기다.

    지난여름 <말들의 무덤>과 <라긴>에 출연했다. 우선 <말들의 무덤> 이야기부터 가보자. 어땠나?
    연습과정이 즐거웠다. 팀워크가 무척 좋아서 즐거운 시간이었다. 한국전쟁을 일반적인 상식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공부를 하면서 더 깊이 들어가다 보니 아무 이유 없이 죽어갔던 사람들이 정말로 이렇게 많았나...... 가슴 아픈 현대사를 다시금 느끼게 됐다.

    한국전쟁 전후의 비극을 겪고 목격했던 당사자들의 녹취록, 증언자료 등을 토대로 작품을 만들어갔다고 들었다. 갖가지 사연을 가진 증언자들의 목소리와 만나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김동현 연출이 슬픔을 슬픔으로만이 아니라 자료에 있는 그대로의 상태로 재연해보자는 방향을 잡았고 배우들이 그 의도를 잘 따라갔다. 그래서 작품이 가려던 방향으로 잘 갔던 것 같다. 연기해야 하는 인물을 만나는 과정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것을 배운 느낌이 든다. 꼭 이 작품만이 아니라 다른 작품을 할 때도 도움이 될 것 같다.

    공연을 보면서 사건 당시로부터 시간이 오래 지난 후 녹음되거나 기록된 그들의 증언을 재연하겠다는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실존인물들이 겪었던 그 당시의 상황으로 몰입시키지 않음으로써 사건이 일어났던 시간과 기록이 이루어졌던 시간 사이의 긴 침묵의 시간을 음미하게 만들고자 하는 공연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상이나 녹취록에 있는 그대로 재연해보자는 이유에는 그러한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배우가 자료의 인물을 캐릭터로 분석했다면 이런저런 조미료를 가미시키게 됐을 거다. 그 비극적인 사건을 덤덤한 목소리로 증언하는 분들을 그대로 재연해보자는 작업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나뿐만 아니라 모든 배우들이 좋은 기운을 갖고 작업을 할 수 있었다.

    <라긴>은 어떤 작업이었나?
    연습과정은 조금 힘들기도 했지만 공연이 올라간 이후에는 재밌게 했다. 맡았던 캐릭터가 재밌었을 뿐더러 남명렬 선배와의 호흡이 좋았다. 앙상블이 잘 맞아서 즐겁게 했다.


    배우 백익남


    진학을 포기한 고3, 고도를 만나다

    연극과는 언제 어떻게 처음 만났나?
    고등학교 3학년 끝나갈 무렵에 연극을 처음 봤다. 대학교 진학도 포기하고 뭘 하고 살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었다. 어떻게 우연찮게 산울림소극장에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게 되었는데, 공연이 너무 좋았다. ‘고도가 있다는데...... 나한테는 고도가 뭐지?’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블라디미르 역을 전무송, 에스트라공 역을 주호성 선생님이 하셨는데, 그날 저녁 집에 와서 기억나는 대사들을 따라해 봤던 기억이 난다.

    고3 학생이 진학도 포기하고 뭐하고 지냈나
    고등학교를 빨리 졸업하고 돈을 벌고 싶었다. 집이 너무 가난했다. 원래도 좋은 형편이 아니었는데 고등학교 진학할 때는 더욱 좋지 않아져서...... 글쎄, 조금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사실 고1 때부터 대학진학을 포기했다.

    학교는 왜 다녔나?
    그냥 다녔다. 왔다갔다. 맨날 내 짝이랑...... (웃음) 짝도 나랑 비슷한 그런 애여서 ‘우리 졸업하면 어떤 장사할까?’ 그런 이야기나 하면서 보냈다.

    그래도 뭐 관심사나 그런 게 있었을 것 아닌가?
    전혀 없었다. 아무 것도 없었는데, <고도를 기다리며>를 본 후로 공연을 많이 보러 다녔다. 굳이 연극을 꼭 하겠다는 마음은 없었지만 혹시 할지도 모르겠다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졸업 후에 대학 대신에 극단을 찾아갔을 것 같은데?
    그렇다. 군대에 가기 전, 그러니까 그게 96년 이었을 것이다. 신문 단신에서 단원모집 공고를 보고 모 극단에 들어갔다.

    집에서 반대는 없었나?
    왜 없었겠나? 반대하시는 아버지에게 최소한 극단에 들어가면 거기서 먹고 자고 할 수 있을 거라고 큰소리치며 집을 나섰다.

    그래서 극단에서 먹고 자며 지내게 된 건가?
    그런 환경은 아니더라. 들어갔더니 사무실 청소하고, 포스터 붙이러 다니고...... (웃음) 너무 힘들어서 3주 정도 있다가 극단을 나왔다. 극단을 나온 후에는 바로 군대를 갔다.

    군대 다녀와서도 계속 연극을 기웃거리게 된 건가?
    그렇다. 지하철역에 붙은 포스터를 봤다.
    「극단 산울림 단원모집」
    오디션을 보고 산울림에 들어가게 됐다. (웃음) 이번에는 한 8개월 있었나?

    그래도 3주에서 8개월이면 굉장한 변화다. 왜 나왔나?
    당시 내가 의정부에서 자취생활을 하고 있었다. 전철을 타고 산울림소극장이 있는 신촌으로 향할 때면 그 부푼 희망이 솟아오르곤 했었다. ‘아, 나는 무대에 언제 서게 될까?’ 그런데...... 그런 상황이 안 되니까...... 포스터 붙이고 전단 돌리고......

    연극에 대한 갈망이 한풀 꺾였을 것 같은데?
    그렇지는 않았다. 안국동에 있었던 한 연기교육원에 다녔다. 황동근, 채승훈, 류근혜, 류진규 선생님들이 강사로 계신 곳이었다. 원장 박찬빈 선생님께 신체훈련을 비롯해서 호흡, 발성 등을 배웠다. 그때 배운 것들이 지금도 많은 도움이 된다.

    연기교육원에서 힘을 많이 받았던 것 같은 느낌인데?
    그렇다. 가난한 학생들 사정 봐주느라 이후에 교육원은 없어졌지만 그곳에서 연극의 인연을 이어갈 수 있었다. 교육원에서 만난 황동근 선생님이 이끌던 극단 서울연극앙상블에 들어갔고, 거기서 좋은 선배를 만나게 됐다. 현재 창작공동체 아르케의 김승철 대표를 만나게 된 거다. 덕분에 대학로 무대에 안착할 수 있는 힘을 얻었고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로 데뷔하게 됐다. 그러고 보니 지금 인터뷰를 하는 이곳 동숭아트센터에서 데뷔를 했다.


    배우 백익남
배우 백익남
  • 스승 예수정을 만나다

    이후의 행보는 어땠나?
    <해바라기> <사운드 오브 보이스> <의자들> 같은 작품에 출연했다. 극단 활동을 하면서 공연예술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됐다. 스물일곱 때였다. 정말 참 좋은 시간이었다. 연극의 기술이랄까? 공부도 공부지만 2년 동안 과연 연극이라는 게 뭔가, 나는 뭔가, 그런 고민을 많이 했던 시간이었다. 연극에 임하는 자세도 많이 배웠던 것 같다. 특히 연극 인생의 큰 스승을 만나게 됐다.

    어떤 분인가?
    예수정 선생님이다. 그분에게 많은 걸 배웠다. 선생님을 너무 좋아했다. 선생님 성함으로 삼행시를 지을 정도였다.
    술보다
    정보다
    말로 아름다운 (웃음)

    인터뷰를 정리하면서 백익남의 이름으로 삼행시를 지어보았다.
    지에서 출발하는
    어가는 연기 뒤에
    모르는 노력 있죠
    더 좋은 삼행시는 독자 여러분들의 몫. 댓글로 달아주시길!

    정말 좋아하고 존경하는 기운이 팍팍 느껴진다.
    수업시간에 그분이 작품에 대한 설명을 하면 그것 자체가 연극이었다. 쑥 빠져들어 집중하게 되고.
    “무대에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슬프지 않은데 슬픈 척하지 말고, 눈물 안 나는데 우는 척하지 말고, 기쁘지 않은데 기쁜 척하지 말고, 무대에서 느낀 만큼만 해라”
    그런 것들이 지금 내가 연극을 하고 있는데 정말 많은 도움이 된다.

    그녀도 백익남을 좋아하는가?
    글쎄...... 그럴 것이다. (웃음) 졸업한 이후에도 어려운 작품을 만날 때면 “선생님 저 힘들어요” 전화를 드렸다. “익남아, 너랑 나랑은 재주가 없는 사람들이야. 그래서 노력해야 하는 스타일이야. 성실하게 노력을 해야 해” 말씀을 해주시곤 했다.

    공연예술아카데미 졸업 이후에는 어떤 작품과 만났나?
    2000년 5월에 공연된 <오월의 신부>에서 김현식 역할을 맡았다. 오디션을 봤는데 덜컥 주인공으로 캐스팅이 되어 부담이 정말 컸다. 예술의 전당 야외무대에서 광주항쟁 20주년 기념으로 올라간 대작이었다. 내 나이 서른, 연극을 잘 모를 때였을 뿐더러 이런저런 점에 주눅이 들어서 정말 못했었다. 너무 못해서...... 지금도 작가인 황지우 선생님에게 죄스러운 마음이 남아있다.


    배우 백익남


    흰 도화지를 가지고 다시 새 인물을 만나러 간다

    극단 코끼리만보와의 인연은 언제부터?
    <오월의 신부> 때 조연출이었던 김동현 형이 워크숍 공연을 올린다고 오랜만에 연락을 주셨더라. <생각나는 사람>이라는 공연이었다. 공연도 좋았지만 만난 사람들이 너무 좋았다. 그 후로도 계속 인연이 되어서 어울려 지냈다. 그러다가 함께 극단을 하게 된 거다.

    백익남에게 코끼리만보는 어떤 곳인가?
    안에 있을 때는 모르겠는데 밖에 나가서 외부작업을 할 때는 극단 작업이 그립다. 집 같다고 할까? 우리집?

    지금까지 만났던 역할 중에서 어떤 인물이 가장 기억에 남는가?
    하일호 연출이 극단 76에서 올렸던 <루나자에서 춤을>에서 만났던 마이클이라는 역할과 배삼식 작, 김동현 연출 <하얀앵두>의 윤조안 역할을 꼽고 싶다.

    연극하면서 사는 거 만족하는가?
    그렇다.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다양한 삶을 살 수 있어서 좋다. 연극하는 사람은 그 어떤 배역을 맡으면 항상 새로워진다. 항상 새로운 걸 하는 느낌이다. 그게 내 삶을 살아가는데 많은 에너지를 준다.

    배우는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는가?
    (웃음) 아이고 진짜 어렵다. 그런 건 잘 모르겠고. 배우는 환경에 잘 적응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양한 연출가들을 만나고 다양한 스타일의 작업방식을 만나는데 거기에 잘 적응을 해야지 좋은 작품이 나오는 것 같다.
    배우는 흰 도화지 같아야 된다. 나는 그 말을 믿는다. 어떤 캐릭터가 들어왔을 때 그 캐릭터로 색깔이 채워져야 하는데 자기 것이 강하면 그게 잘 채워지지 않는다. 늘 백지로 시작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연기를 하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무대 위에서 내가 무대의 인물이 되는 순간. 나와 그가 딱 만나는 순간이 있는데. 바로 그 지점, 그 순간에 가장 행복하다.

    백익남에게 연극은 뭔가?
    연극은 나에게 있어서...... 나에게 일이다. 직장이다.
  • 배우 백익남
  • 백익남 (배우)

    수상경력 2010년 동아연극상 유인촌신인연기상 수상
    주요작품 <라긴><말들의 무덤><농담><피리부는 사나이>
    <그을린 사랑><마라, 사드><하얀앵두>
    <예술하는 습관><착한사람 조양규>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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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성

김은성 극작가
극단 달나라동백꽃 대표
주요작품 <로풍찬유랑극장><뻘><목란언니><연변엄마><순우삼촌><시동라사>외 다수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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