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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년 동안 무대를 지켜온 배우 이야기

배우 이호재

부새롬_연출가, 무대디자이너

제86호

2016.02.18

내가 대학에 들어가는 해가 사회적으로 좀 불안정할 때였어요. 61, 62년 한참 혼란스러운 때였는데 무슨 연유로 해서 학교를 못 다니게 됐어요. 도망을 다니다가 62년도가 됐는데, 다른 학교는 학기가 다 시작된 때야. 그래서 놀고 있는데, 가을쯤 됐어요. 9월쯤인가 그랬는데, 학생을 뽑는 학교가 있더라고. 거기가 바로 지금 서울...

배우 이호재

선생님, 연기하신 지 얼마나 되셨어요?
음… 63년도에 데뷔를 했으니까 햇수로 치면 53년 됐지.
와, 제가 산 시간보다 더 오래 연기를 하셨어요. (웃음) 어떻게 시작하셨는지 말씀 좀 해주세요.
내가 대학에 들어가는 해가 사회적으로 좀 불안정할 때였어요. 61, 62년 한참 혼란스러운 때였는데 무슨 연유로 해서 학교를 못 다니게 됐어요. 도망을 다니다가 62년도가 됐는데, 다른 학교는 학기가 다 시작된 때야. 그래서 놀고 있는데, 가을쯤 됐어요. 9월쯤인가 그랬는데, 학생을 뽑는 학교가 있더라고. 거기가 바로 지금 서울예대예요. 그때 처음 시작하느라고 가을에 시작했어.
그럼 개교하실 때 들어가신 거예요?!
응, 그때가 1기지. 그게 62년도였어요. 연극을 구경한 적도 없었고,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어요. 그러니까 연극을 가르치는 게 뭐고, 배우는 게 뭐고, 아무 것도 몰랐지. 그 때는 극장이 명동에 있는 지금 예술극장하고, 남산에 드라마센터(남산예술센터)하고 두 개 있었어, 원각사라는 극장이 있었는데 불이 막 났을 때였고.
원각사요? 연극사에 나오는 극장이요?

(인터뷰어의 무식이다. 연극사에 나오는 한국 최초의 서양식 극장인 ‘원각사’는 1914년에 불탔다. 찾아보니 여기서 선생님이 말씀하신 ‘원각사’는 1958년에 세워진 극장으로 최초의 소극장이었고, 부러 ‘원각사’의 이름을 따온 것이라고 한다. 이 ‘원각사’ 역시 60년에 불탔다.)

연극에 취미를 못 붙이고 대체로 명동에 가서 놀았는데, 드라마센터 근처에는 당시만 해도 중앙정보부 서울분실이 있어서, 술 먹고 놀만한 데가 없었어. 그 밑에 퇴계로로 내려와야 있는 거지. 퇴계로에서 길 하나 건너면 명동이니까 명동에서 주로 놀았어. 지금은 거의 은퇴한 음향 하는 ‘김벌레’라는 친구를 우연히 만나서 술을 먹는데 공연을 한편 하자고 그래. 지금이랑 다르게 그때는 친구들이 모여서 하는 동인제 극단이 많았어요. 걔네도 이미 극단을 만들고 있었고. 난 해본 적도 없고 어떻게 하는 지도 모른다, 그랬더니 그냥 대사만 외서 하면 된다고. 존스타인벡의 <생쥐와 인간>이라는 작품인데 거기 덩치가 좀 작아야 되는 리틀존이 나오고, 덩치가 좀 큰 역(원작의 레니)이 있는데, 그때만 해도 내가 덩치가 컸으니까, 날더러 그 역을 하래는 거야. 못한다고 하니까 매일 술 사줄 테니까 하라고. (웃음) 그때 김벌레 어머니가 술집을 했어. 거기서 맨날 술 얻어먹어가면서 연습을 했지.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도 모르고 했는데, 잘 한다고 그래. 아, 그래? 이렇게 하면 잘 하는 거야? 그러면서 재미가 붙기 시작했죠. 62년도에 학교를 들어가고 63년도에 데뷔를 한 거지. 드라마센터랑 전혀 관계없는 명동에서.
그러고 나서 (연극) 공부를 제대로 좀 해보자, 했는데, 벌써 2년제에 반은 다 까먹었지. 그 당시 졸업생이 한 23명 정도 됐나, 내가 22등으로 졸업을 했어. (웃음) 시험도 안보고 학교도 안 나가고 엉망이었지, 그래도 근근이 졸업을 했어. 그러고 나니까 동랑선생님(유치진)이 극단 드라마센터를 만들었어. 그때는 대개 국립극장에서 뽑는 연구생으로 들어가거나, 라디오 성우를 많이 했어. 텔레비전보다 라디오가 더 대중적이었으니까. 대학 연극동아리 출신들이 연극을 했고, 지금도 하고 있는 사람들 많잖아, 그 때도 그랬어. 동랑선생님이 연극을 전문으로 배운 사람들을 양성하고 싶었던 것 같아. 그래서 학교(서울예대)를 만들었던 거였고 졸업생이 나오자마자 극단 드라마센터를 창단을 했죠. 그렇게 시작한 거지.
처음에 학교 들어가실 때 연극에 관심도 없었는데 그냥 학생을 뽑으니까 들어가신 거예요?
집에서 돈 준다고 학교 가래는데, 들어갈 데가 있어야지.
부모님이 반대 안 하셨어요? 옛날에는 딴따라다 그랬잖아요.
아니, 학교에 간다니까 좋아하셨지. 그때는 학교도 아니고 연극아카데미였어. ‘연극’자 빼고 아카데미에 등록했다고. 연극인 줄 모르셨지. (웃음) 그 후에 학교 이름이 여러 번 바뀌었지.
그때 동기 중에 지금도 활동하고 계신 분 있으세요?
신구, 전무송, 반효정 씨, 근데 이 사람은 학교를 다니다가 텔레비전 쪽으로 가서 졸업은 안 하고.
쟁쟁하네요. 이후엔 극단에서 쭉 작업을 하신 거예요?
64년도에 졸업 하고 극단 활동을 하다가 66년도에 군대를 갔어요. 그 당시에 군대가 36개월이었다가 34개월까진가 줄어들고 있었는데, 김신조 사건이 있어가지고, 도로 늘어나서 꼬박 36개월 복무를 하고 69년에 제대를 했죠. 그때쯤 되니까 집에서 다 아는 거지. 다시 연극하지 마라, 그래. 우리 아버지가 친구네 회사에 날 집어넣었는데 벌써 고 사이에 연극에 재미가 들었던 거야. 그래서 한 보름 나갔나? 영 재미가 없어서 못가겠더라고. 회사에 간다고 하고 몰래 드라마센터에 나갔지. (웃음) 그때부터 계속 했죠. 한 달이 지나도 월급도 안 가져오고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가 친구한테 연락을 했더니, 걔 안 나온 지 오래 됐다고. 거의 쫓겨날 뻔 했지.

배우 이호재

그때도 연극하면 힘들지 않았어요?
그건 뭐,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나라나 다른 나라나 마찬가지야. 연극해가지고 먹고 살 수 있는 나라가 별로 없어요.
그렇게 회사 나가시면서 어떻게 먹고 사나, 걱정 안 되셨어요?
그래서 결혼을 늦게 했죠. 그 당시 내가 생각했던 게, 왜 연극하는 사람들은 생활을 하면서 연극을 할 수가 없나… 연극으로 벌어먹고 살 수 있을 때까지 결혼을 안 하겠다, 그래서 늦게 했어요. 방법이 있어야지? 출연료를 받아야 뭘 어떻게 하지. 당시에는 공연이 끝나면 수지 결산을 했어. 어느 날 보니까 세트 제작비, 운송비, 다른 거는 다 있는데 출연료가 세목에 없는 거야. 이게 어떻게 된 거냐? (그랬더니) 출연료는 산정을 할 수가 없다는 거지. 얼마를 줘야할 지도 모르고 얼마가 남을지도 모르니까. 혹시나 잘못되더라도 그냥 넘어가자 이거야. 말이 안 된다, 이거는. 그럼 출연료로 많이 책정해놓기 어렵다면 인건비라고 하자. (그랬어) 그래서 한동안 별명이 인건비였다고. (웃음) 연출들이 이호재는 인건비 달라고 하니까 출연시키지 말자, 말을 돌려가지고 거의 1년 반을 연극 출연을 못했다고. 인건비는커녕 출연도 못하게 생겼으니 라디오로 가서 한 십 년 진행했지. 먹고 살 수 있었고.
그럼 라디오 하시는 동안에는 연극은 안 하셨어요?
아니, 했죠. 라디오를 생방으로 했으니까 시간이 많이 남았거든. 대신 지방 공연을 못 다닌 거지. 86년부터 해서 IMF 터질 때까지 했어. IMF가 터지고 인원을 대폭 줄여야 되는데 스크립터를 자르겠다는 거야. 그러면 1시간짜리 프로그램을 하려면 PD랑 내가 하루 종일 일을 해야 돼. 섭외도 해야 되고, 원고도 써야 되고, 시간이 엄청나게 걸리는 거지. 그건 못하겠더라고. 차라리 내가 그만둘 테니까 작가를 고용하고 아나운서를 써라, 아나운서는 월급 받는 사람들이니까, 그래서 내가 그만뒀어요.
한국 역사가 막 지나가는 것 같아요. 예대 1기, 중정, 김신조, IMF… (웃음)
너무 오래 살았어. (웃음)
연극 그만두시고 싶었던 적 없으세요?
여러 번 있었죠. 어차피 연극이랑 생활, 두 가지를 병행할 수가 없구나, 알았을 땐, 그럼 결혼을 해야겠구나. (했지) 어차피 먹고살기는 힘들고 가정은 있어야 되니까. 그래서 결혼을 했는데 우리 와이프가 직장을 다녔어요. 그러니깐 내가 벌이가 좀 적어도 먹고살 순 있었는데, 아이를 낳고 보니까 이건 감당을 못하겠더라고. 그땐 이거 관둬야 되는 게 아니나, 그런 생각이 절로 들더라고. 아이가 클수록 생활비 더 들어가고. 더 문제는 양육을 하려니까 아내가 직장을 못 나가는 거지. 큰일 난 거지. 그래서 겸사겸사 라디오도 시작했던 거였고, 텔레비전 드라마도 하고. 그때까지만 해도 연극배우가 텔레비전 드라마에 출연한다는 건 자기 스스로 값을 깎는 거다, 연극배우는 특정한 극장에, 정해진 시간에 맞춰 가서 볼 수 있는 희소가치가 있어야 된다, 그런 게 있었어. 그래서 일부러 안했는데 근데 뭐 재주가 있어야지.
지금은 활성화가 됐는데, 그 당시만 해도 연극협회 산하에 연출가협회, 미술가협회 그런 게 있었는데, 연기자협회가 없었어요. 누군가가 나한테 귀띔을 하는데 연극협회 산하에 연기자 협회라는 분과도 있다는 거야. 그럼 우리도 모여야지, 그러고 다 모았어요. 초대 회장으로 오현경 형님을, 이 양반이 말을 잘 하니까, 하라고 했지. 근데 그 말 잘 하는 양반이 그런 데 가서는 말을 잘 못하는 거야. (웃음) 배우라 그런 거지. 그러다 흐지부지 없어져 버렸어. 나중에 다시 생긴 거야.
배우 권리나 그런 거에 관심이 좀 있으셨나 봐요.
내가 무슨 대표, 장 같은 건 해본 적이 없어. 그런 건 난 못해요. 난 연기나 하면 하는 거지. 그런 일을 하려면 거기에 전념을 해야 된다고 생각을 해요. 배우를 하면서 협회장 같은 걸 같이 하는 건 좀 못마땅하게 생각해요. 한 모임의 대표라는 건, 그 모임의 대표성도 있는 거지만 사회적으로 연계시킬 수 있는 능력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을 하거든.
협회 정관을 만들 때 제일 중요하게, 권익을 얘기했어요. 왜냐하면 배우 스스로가 권익을 찾지 않으면 누가 찾아주는 사람이 없더라고. 근데 나중에 정관 나온 거 보니까 그 말을 쏙 뺐더라고. 못하게 하더래. 그런 식으로 모일 거면 모이지 마라, 그러더래. 당시에 연극협회에서 권익이란 건 스스로 찾는 게 아니라 옆에서 찾아주는 거다, 그러더래.
시대가 그랬으니까요.

배우 이호재

기억에 많이 남으시는 작품, 너무 많으시겠지만, 뭐 있으세요?
내가 드라마센터에 있다가 75년도에 국립극단으로 갔어요. 생활이 안 되는데 동랑선생님이 도와주는 것도 한계가 있죠. 전무송 씨하고 나하고를 조교로 만들어줘서 극장 워크숍을 했어요, 솔직히 말해서 학생들하고 노는 거지 뭐. 한 달에 월급을 3천원 받았나, 지금으로 치면 돈 백만 원 될라나, 그것도 안 될 거예요. 너무 고생하니까 그렇게라도 해주셨죠. 당시 김의경 선생이 국립극장에 계셨는데 해마다 때만 되면 동랑선생님한테 와서 우리 좀 보내달라고 그랬어. 근데 1기 중에 남아있는 애들은 우리 둘 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우릴 꼭 붙잡고 있다가 나중에 안 되겠으니까 가라, 그러셨죠. 그래서 75년도부터 만 5년 동안 국립극단에 있었어요. 거기에서 했던 작품들이 <성당에서의 살인>, <페르퀸트> 그런 것들이 기억에 남아요. 왜냐하면 그건 지금도 다른 극장에서 하기 힘들 거예요, 워낙 스케일이 크니까. 마음껏 무대를 쓰고 했던 게 기억이 남고. 거기 가기 전에 드라마센터에서 했던, 지금도 그 연극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초분>(오태석 작, 유덕형 연출), <태>(오태석 작, 안민수 연출), 오태석 씨가 <스카펭의 간계>를 번안한 작품, 그런 게 기억에 남아요. 그때는 내가 체격이 커서 할 수 있는 역할들이었는데 지금은 못하니까. (웃음)
그 이후는요?
그때부터는 프리랜서로 있었는데 오태석하고 모노드라마 <약장사>를 했어요. 그 당시에는 극장에 냉난방 장치가 없었어요. 유일하게 공간사랑(공간 사옥에 있었던 소극장)이라는 극장에만 있었어요. 그러니까 보통은 정초에 공연이 없었어요. 하다못해 지금 명동예술극장도 객석에다가 난로를 피우고 그랬으니까. 아유, 불 피우면 연기가 나가지고… (웃음) 오태석하고 나하고 매년 정월 초에 공연을 하자, 그래가지고 했지. 그 전에는 ‘카페 떼아뜨르’라고 충무로에 있었는데, 거기는 요일마다 레퍼토리를 바꿔가면서 하는 거예요. 우리는 목요극장을 하다가 그 극장이 문을 닫는 통에 공간사랑으로 옮겨 간 거지. 매년 정월 초에 보름이나 이십일 정도, 4~5년 했나? 근데 그것도 힘들어서 못하겠더라고. 그래서 관두자, 그랬지. (웃음)
요일마다 공연을 어떻게 바꿔가면서 해요?
세트 없이 조그만 데서 하니까.
그러면 월요일마다 매번 똑같은 작품을 하는 거였어요?
응.
총 기간은 어느 정도 하는 거예요?
뭐, 다른 작품으로 바뀔 때까지.
재밌네요. 그때 관객이 많았나 봐요.
거긴 식당이니까. 살롱드라마라고 생각하면 될 꺼야.
오히려 지금보다 연극하는 방식이 다양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공연장소가 없었으니까. 그 당시엔 다방에서도 하고, 관객들이 올만한 장소, 특히 이대 앞에. (웃음) 다방에서 살롱 드라마랍시고 한쪽 구석에 무대 만들어놓고 그랬지. 이대생들이 많이 오니까.
선생님은 오래 연극을 하셨으니까, 관객이 좀 많았던 시기는 언제예요?
지금도 그렇지만, 작품에 따라서, 시기, 계절에 따라서 달라지니까… 그때도 그랬어요.
옛날에는 평일에도 2회씩 공연했다,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공연할 장소는 없는데 극단은 많으니깐. 한 극단이 3일에서 5일 밖에 공연을 못했어요. 냉난방이 안 되니까 한여름, 한겨울엔 못해요, 봄, 가을 요 시즌에 다 나눠놓으니까 많이 할 수가 없지. 심할 때는 앞에서 공연하고 있는데 뒤에서 세트 작업 하고. (웃음) 지금처럼 무대 세우고 조명하고 그럴 시간이 없는 거야. 밤새 세트 세우다가 다 못하면 공연 하고 있는데 뒤에서 망치질 하고.
관객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여건이었네요. 그때에 비하면 어떠세요, 연극하기에 더 좋아진 것 같으세요?
여건이야 좋아졌고 작품도 다양해지긴 했는데. 지금도 그 당시 같은 게 있고, 그 당시도 지금 같은 게 많았고.

배우 이호재

이제 선생님이 만나시는 작업자들이 거의 다 후배잖아요. 보시면서 예전에 이런 게 있었는데 없어져서 아쉽다, 그런 거 없으세요?
난 연극을 안 봐요. 전라도 어디에 우스갯소리라는데, 막내딸이 결혼식 날 준비를 하도 잘 못 하니깐, 엄마가, 얘 차라리 관둬라, 내가 가께. (웃음) 그런 얘기가 있어요. 어쩌다가 연극을 보면 쟤 빼고 내가 하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웃음) 몇 번 그러고 나니까 못할 짓이더라고, 그리고 끝나고 나면 대개 술을 한 잔 먹으면서 그 얘기를 꼭 하게 되고. 내가 왜 괜히 욕을 해가지고 또 내가 욕을 먹어? 걔가 속으론 뻔히 그럴 거 아냐. 저는 얼마나 잘한다고. 그럴 바에야 안 보고 말지, 그러고 아예 안 봐요.
같이 연기하시면서 후배한테 조언 같은 거 안 해주세요?
아유, 나도 못하는데 그걸 뭐, 무슨 얘기를 해?
그럼 말씀은 안 하셔도 이런 건 좀 후배들이 배웠으면 좋겠다, 싶은 건요?
연습 장소에선 말을 안 하고, 연출이 있으니까 연출이 하라 그러고. 술 먹으면서 내가 가끔 하는 얘기가 있어요. 배우들이 자기들끼리 좋고 어쩌고저쩌고 그러는데, 그게 관객이 봐서 좋아야지, 지네만 좋아서 어쩌자는 거야. 그리고 말들을… 우리말도 잘하면 참 괜찮은 말인데, 말들을 할 줄을 모르는 거야, 배우들이. 그래서 배워라, 그러는데, 속으론 그럴 거야, 너나 잘하세요. (웃음)
설마요. 오현경 선생님도 화술에 대해서 많이 말씀하시잖아요.
그 양반은 대단한 양반이지
선생님들이 요즘의 화술에 대해서 안타까워하시는 것 같아요. 연극계의 큰 선생님이시니까
인제 늙어서 쪼끄만 해졌어. 키도 줄고. (웃음)
연극계에 해주시고픈 말씀 없으세요?
우리 연극이 다변화되고 인원들도 많아지고 그런 건 참 좋은데, 누군가가 전체를 좀 아우를 수 있는, 쉽게 얘기하자면, 리더랄까? 근데 그게 한 사람으로 되는 건 아닌 것 같고. 어떤 구심점이 될 만한 모임이 하나 있으면 어떨까. 나이하고는 관계없이. 나이든 사람들은 자꾸 고리타분해져가지고 나는 그 사람들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힘을 모을 수 있는 사람들이 뒷받침도 되고 이끌기도 하고, 이런 게 있으면 어떨까 싶어요. 연극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져서 중구난방 다 따로따로 흩어져 있으니까. 또 이 사람들이 어디 순종하거나 그런 사람들이 아니잖아, 개성들이 강해놓으니까. 이런 걸 좀 모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근데 안 생길 것 같아. (웃음)

배우 이호재

마지막으로 연극데이트 공식질문입니다. 선생님께 연극이란?
술이지 뭐. (웃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어떻게 보면 연습장에서 연극이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술자리에서 허심탄회하게 얘기할 때, 그 때 생각이 바뀔 수도 있고 더 발전할 수도 있고, 상대방의 생각을 바꿀 수도 있고. 연습장에선 아무래도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얘기들을 주로 해야 되는데 술자리에선 안 그렇잖아. 아무래도 맘이 편하니깐.
선생님 술 좋아하시나 봐요.
아니, 나 술 한 잔도 못해요. (웃음)

선생님은 장난스런 거짓말로 인터뷰를 끝내셨다. 한참 후배인 나로서는 그냥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시간이었는데 독자들에게도 전달이 되었으면 좋겠다. 덧붙여 선생님께서 오랫동안 건강하게 무대를 지키시기를.

[사진: 장우제 woojejang@gmail.com]

배우 이호재

이호재(배우)
2011 보관문화훈장
2002 서울시문화상 공연부문
주요작품
<성당에서의 살인> <페르퀸트> <초분> <태> <스카펭의 간계> <세상을 편력하는 두 기사 이야기>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오장군의 발톱>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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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새롬

부새롬 연출가, 무대디자이너
달나라동백꽃 대표
주요작품 <뺑뺑뺑> <달나라연속극> <로풍찬 유랑극장> <뻘> 외
puromy@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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