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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만고만한 한국연극을 비웃으며 도도하게 비상하는 군계일학

연출가 윤서비

김정_연출가

제141호

2018.06.07

인터뷰하러 오면서 그 문장이 잘 생각이 안 나서 찾아봤어요. <로봇을 이겨라>에서 내건 ‘캐치프레이즈’라고 해야 하나. 그 문장. ‘고만고만한 한국연극을 비웃으며 도도하게 비상하는 군계일학의 연극!’
서비
지금 연극계로 조금씩 진입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 말을 좀 가려서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어요.(웃음)
이제 내부자로 들어오실 생각이세요? 아, 안 되는데...(웃음) 연출님까지 진지해지면 재미없어 지는데. (웃음)
서비
(웃음) 사실 저도 막 자란 스타일이 절대 아니거든요. 저도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도시에 살면서 흙 한 번 밟아 보지 못하고, 2박 3일 집 한 번 떠나 본적이 없고, 한 번도 부모님이랑 떨어져 본적이 없는 초식남 중에 초식남인데... 제 안에도 어떤 동경이 있잖아요. 야성에 대한 동경. 그런 것들이 예술에서 풀어내지는 거죠. 누군가 나를 제지하지도 않았고 모든 게 그저 재밌는 세상이었어요. 대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그러다보니 뭔가 진지하게 고민해야 된다는 걸 최근에나 생각해봤지 한 30대 넘을 때까지 내가 진지해야 된다는 걸 생각해 본적이 없거든요. 그렇게 한 십여 년 동안 풀어져 있었던 게 나한테 지금까지 조금의 자유로 남아있는데... 요즘은 그런 것 마저 좀 경직되어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왜 요즘에는 또라이가 없냐.’ 하는 말들을 누군가는 하더라고요. 그런 질문에 누군가는 ‘요즘에는 너무 또라이가 많아서.’라고 하더라고요.(웃음) 예를 들면 유튜브에 ** 같은 친구들 정도 되지 않으면 또라이로 취급되지 않으니까. (나는) 그것까지는 못 가겠고... 어쨌든 요즘은 또라이의 수준이 너무 높아졌다.(웃음)
아, 그런 생각을 해보진 못했는데 그런 것에 우리가 영향을 받을 수도 있겠네요.
서비
누군가는 특이 행동으로 도발을 하고 누군가는 그것으로 충격을 받고 누군가는 킬킬대고 그냥 그렇게 소비되다 보니까 그 자체가 식상하기도 하고. 그 충격이나 재미를 사회현상으로 느끼기 보다는 그냥 ‘튀려고 그런다’, ‘돈 벌려고 그런다’ 뭐 이런 쪽으로 약간 비아냥거리기 시작한 것 도 있고. 전반적으로 또라이들의 순수한 정신세계가 위축된 부분들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실제로 또라이들이 사업적이기도 하고.(웃음)
저도 오랜만에 예전 생각났어요. 옛날에 그런 이야기 많이 하고 다녔던 것 같아요. 제가 워낙에 평범하게 자라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에 대한 거부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은데. ‘나는 진짜 또라이가 되고 싶어.’ 이런 말을 하고 다녔던 것 같아요.(웃음)
서비
누구나 연극을 하겠다는 마음을 먹을 때... 특히나 우리나라에서 연극한다는 것은 일탈 같은 거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은데, 저는 반대로 그 부분에 대해서 이제 고민이 많아요. 연극을 함에 있어서 내가 좋아하는 것, 포기할 수 없는 지점들이 그런 낭만적인 부분(일탈, 반할)이기도 하고 내가 연극을 하고 있는 뿌리에 그 낭만이 있다는 것은 분명해요. 하지만 우리가 너무 낭만성이라는 것에 연극을 뭉쳐놔서 사실 거기 있어야 될 리얼리스틱함이 빠져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리얼리스틱함과 로맨틱한 것 이 두 가지가 반대급부에 있는 것이라고 본다면 ‘우리가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고 계산적인 것들을 너무 배제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마치 연극쟁이는 해서는 안 되는 일처럼 여기는 건 아닌가. 그런 생각들이 30대 이후의 저에게 많이 들어온 것 같아요. 군계일학이니 뭐니 오기를 부리는 것도 실은 낭만을 자랑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낭만을 비아냥거리는 언어로 되돌려 주고 싶은 그런 마음들의 표현 인 것 같아요.(웃음) 저 역시 마음속에 낭만적인 풍운아가 되고 싶은 욕망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자기반성을 포함한) ‘그런 류의 또라이 만이 또라이는 아니야. 어떤 면에선 그것 때문에 연극이 굉장히 후져지고 있어.’ 라는 이야기를 반드시 면전에다 던져놓고 싶은 마음도 같이 있는 거죠. 항상. 그래서 항상 이중적인 것 같아요. 낭만적인 열정에 빠져서 내가 해야 될 당연한 일들을 잊어버리기도 하고 광기에 휩싸여서 밤을 지새보기도 하고, 글을 쓰다 사랑에 빠져서 몇 일 밤을 보내기도 하고... ‘이런 광기와 열정의 세계가 연극이다.’ 라는 것에 되게 흐뭇하다가도 우리가 그런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런 것만 보이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요. 예를 들면 다빈치의 광기와 괴짜스러운 면은 대단히 흥미로운데 다빈치가 얼마나 성실하게 스케치 연습을 했느ㄱ냐에 대해서는 우리가 덜 재밌어 한다는 거죠. 배우들이 무대에 올라가서 자기의 감수성을 폭발하는 것들에 대해서 굉장히 즐거워하면서 집에서 가갸거겨고교구규 하면서 매일 발음 연습하는 것에 대해서는 둔감한 것. 이런 것들에 대해서 계속 꼬집고 싶은 거죠. 우리가 너무 멋있는 것만 하려고 하는게 아닌가.
누군가 저에 대해 말하기를 굉장히 오만하면서도 자기비하 역시 강하다고 이야기 하더라고요. 되게 맞는 말이라고 생각 하는데.(웃음) 저는 어느 순간 굉장히 오만하거든요. 예를 들어 머릿속의 나를 어떻게 순위 매기고 있냐하면 ‘나보다 못하면 예술을 하면 안 돼.’ 그런 전제는 내가 꼴찌라는 이야기잖아요. 하지만 다시 생각하면 나부터 예술가라는 이야기기도 한 거죠. 이게 오만과 자기비하를 함께 갖고 있는 저를 잘 보여주는 것 같아요.(웃음) ‘나보다도 못하는데 무슨 예술을 하니.’ 하는 오만함과 진짜 예술가들이랑 일대일로 붙으면 내가 제일 밑바닥일 것이라는 두려움. 이 두 가지를 같이 가지고 있는 거죠. (연극계에서) 더 새롭고 앞서나가겠다는 강박과 함께 한국 연극에 대한 미움도 같이 갖고 있는 것 처럼요. 거장에 대한 부러움과 그들이 저지른 적폐 이 두 가지가 강렬히 맞물린 그 가운데 제가 끼여 있는 것 같아요.

중략. <로봇을 이겨라> 시리즈에 대하여-

서비
<로봇을 이겨라 3>에서 사랑을 비판하다 보니까 자꾸 자가당착에 빠지는 거예요. 우리가 사랑을 아나. 우리가 사랑이라고 대충 얼버무리면서 ‘좋은 게 좋은 식이다.’라고 뭉개고 있지는 않나. 그런데 왜 사랑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게 중요하냐면.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것 외의 것을 배척한다는 의미를 같이 갖게 되는 것이거든요. 예를 들면 (요즘은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지만) 내가 이 자유대한민국을 너무 사랑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싫어하는... 그 사람은 한편으로는 증오 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기도 하더라고요. 그 지점을 꼬집어보고 싶어서 이야기 했던 거예요. 우리의 사랑이 얼마나 허술하고, 우리 사랑이 얼마나 ‘그때그때 달라요.’인지 말하고 싶었어요. 그랬는데... 문제는 이전의 <로봇을 이겨라>1,2 에서 정의라든지 연기라든지 이런 부분은 이전에 우리가 생각보다 고민이나 의심을 많이 안했던 문제라는 것에 대해 확신이 있었거든요. 근데 사랑을 주제로 하니까. 우리가 알고 있더라고요. 우리가 사랑에 대해서 얼마나 모순적인지. ‘맞어. 우리가 언제 사랑이 완벽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어? 사랑이 늘 모순이었지. 하지만 그 모순에 빠지는 것을 우리가 피할 수 있어? 그래서 그 사랑에 빠지는 것을 거부할 자신이 있어?’ 그것에 대해 답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작업과정에서 선회했죠. 사랑을 갖고 로봇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로봇에게 사랑을 가르치는 쪽으로 선회해보자. 그리고 거기에 조금 더 섞어보려 했던 것은 혐오 문제 였어요. 사랑과 항상 쌍으로 붙어 다니는 혐오문제를 함께 녹여보려 했는데 사랑에 대해 선회하다 보니까 날카로운 공격포인트 들이 잘 안 생기더라구요. 연습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좀 더 시적으로 접근 하려고 하는 것도 있었고, 날카롭지는 못하지만 모호하더라도 음악처럼 가보자 이런 방향으로 가게 되었어요. 그러다보니 결과적으로 확실히 1,2 편에서 펀치를 날리던 힘들이 약해져서 아쉬운 점이 좀 있더라고요. 그러면서도 전 3편에서 일종의 희망 같은 것, 로봇 시리즈가 이렇게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구나. 단지 시의성에 입각해서 그 때 그 때 비판을 하기 위한 비판. 이런 식으로 날림으로 만들어진 공연이 아니라 좀 더 철학적이고 근본적인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도 얘기 해 볼 수 있겠구나 하는 힌트를 얻게 돼서 지금 4편으로 죽음을 다뤄보려고 하고 있어요. 죽음과 곁다리로 종교 이야기도 함께 가보려고요. 그렇게 되면 펀치도 강해질 거고. ‘인간이 갖고 있는 죽음에 대한 기본적인 두려움에 대해서도 다룰 수 있겠구나.’ ‘작품이 제대로 도전해 볼만한 부피를 가질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을 갖고 급하지 않게 2년 혹은 3년을 두고 해보려고 하고 있어요. 공격을 하다가 결국 그 공격의 밑바닥에 닿아서 뭔가 힌트를 얻게 되고 ‘이제 나는 공격보다는 (내가 공격을 하려 했던) 그 본질에 대해서 더 충실했으면 좋겠다.’ 그러면서 반성하게 되는 부분이 생긴 거죠. ‘나도 똑같이 시류에 편승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시류에 편승하려는 이들을 비판하면서 나도 좀 떠 보려고 했었던 (웃음) 그런 것도 분명히 있었을 테고 그것에 돌 던지려 했던 나도 돌 맞아야 되는 부분도 당연히 있었던 거고. 이것이 결국 시류에 편승하려는 예술의 문제들이구나. 결국에는 나 역시 큼직하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구나.’ 이런 생각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거죠. 근데... 이게 지금 이해가 되는 말들을 내가 하고 있는 건지...(웃음)
저는 이해가 되는 것 같아요.(웃음)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가 지금 드는 생각. <로봇을 이겨라>가 연출님의 작품 세계에서 굉장히 중요한 길인데. 세 가지(<로봇을 이겨라1,2,3>의 주제)가 굉장히 큰 주제로서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데 결국엔 같은 주제처럼 느껴져요. ‘연출님은 결국 로봇이 되고 싶은 건가?’(웃음) 그런 생각도 들구요. 그게 뭐냐면 로맨틱함에 빠지고 싶지 않은 마음과 그 반대로 진짜 로맨틱함을 찾고 싶은 느낌이 뒤섞인 것 같은? 그래서 궁금한 것은 지금처럼 ‘이 가짜 로맨티스트들아!’ 라고 손가락질 하고 있는 모습 이전에 연출님도 로맨틱함에 빠져서 작업하던 적이 있었을까 궁금해져요. 어떤 모습이었을까 궁금하고.
서비
우리 단체가 ‘열혈예술청년단’ 이잖아요. 이 이름자체가 되게 이중적이에요. 2000년에 이 이름을 지을 때 그 당시 분위기가 뭔가 불필요한 엄숙함들을 코미디로 승화시키는 게 유행이었어요. 그 당시에 가장 유행 했던 단어가 ‘엽기’였거든요. 예를 들면 홍대에 클럽이 있는데 클럽 이름을 궁서체로 ‘명월관’으로 붙인다던지 이런 식이었는데. 우리도 그런 추세 속에서 ‘그럼 우린 열혈!’ 뭐 이렇게 붙여버린 거죠. 웃기자고 만든 이름. 그래서 우리도 막 빨간색 글씨로 한자로 쓰기도 하고.(웃음) 근데 지금 현재 우리의 모습은 되게 순진한 열혈(웃음) 진짜 열심히 하고 진짜 피가 뜨거워져 있는 사람들. 처음엔 그걸 비웃으면서 ‘우린 쿨 해. 우리는 열혈이란 이름을 붙였지만 사실을 되게 쿨 한 사람들이야.’ 라고 시작 했지만. 엄청 뜨거운 느낌이 되어 버렸어요. 이게 내가 갖고 있는 이중성 인 것 같아요. 뜨거운 낭만성과 이성적인 쿨 함이 뒤섞여서 계속 싸우고 있는 중인 거예요.(웃음)
2004년 정도부터 (우리 팀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 같은데. 그때 우리가 뭘 했냐 하면. 이화동에서 1km가 좀 더 넘는 길에 포인트 별로 10개 정도의 무대를 만들어 놓고 관객들과 함께 돌아다니는 연극을 했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사이트 스페시픽 (site-specific - 특정 장소에 설치하기 위해 제작된) 이라는 말이 뭔지도 모를 때여서 학교에서 배운 대로 ‘환경연극’ 이렇게 이름을 붙였거든요. 이화동 꼭대기에서부터 골목골목 꺾어지면서 그 공간이 무대가 되는 방식이었어요. 거기서 <로미오와 줄리엣>을 했어요. 예전엔 거기 분위기가 굉장히 거칠었어요. 오래된 동네였는데 청소년 양아치들이 담배피고 본드 부는 그런 곳이었어요. 그 공간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을 부랑자의 이야기로 바꾼 거예요. 우리 또래들이 젊었을 때 많이들 좋아했던 <퐁네프의 연인들>이라는 영화가 있는데, 그 때 공연 준비를 하면서 그 영화를 많이 떠올렸던 것 같아요. 막 사는 애들의 이야기. 동네 골목에서 (배우들이) 담배도 피우고 기타 치면서 노래도 하고 오토바이도 타고 다니고 그런 공연이었어요.

그때 저도 젊었지만 배우들도 20대 초반 이였는데 얼마나 신났겠어요. 길거리에서.(웃음) 나무를 주먹으로 치다가 진짜 피가 나고, 오토바이 타다가 사고도 나고. 그런 작업을 하다 보니 ‘열혈이란 애들이 어디서 이런 공연을 하고 있데.’ 이런 식으로 우리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더라고요... 보기만 해도, 듣기만 해도 낭만적이잖아요.(웃음) 저는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 때 까지 공연을 정말 많이 봤어요. 그리고 대학교 때는 공연을 정말 많이 올렸구요. 공연 보는 게 일이었어요. 그러다보니 좀 지겹더라고요. 공연장 안이 갇혀 있는 것처럼 답답할 때도 있고. 그러다보니 뭔가 좀 더 리얼한 공간, 숨통 트이는 공간을 찾고 싶다는 명분으로 거리극을 시작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작업을 어느 정도 하다보니까. 거리극 쪽이랑 좀 맞지 않는 게 생기더라고요. 그리고 그것 말고도 ‘이것조차 그렇게 리얼한 건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리얼 한 척을 더 세게 할 뿐.’ ‘어차피 허구인 것을 내가 왜 이렇게 여기까지 와서 이 고생을 하고 있나.’하는 생각이 들어왔어요. 그전에는 영화 촬영현장에 와있는 기분을 내는 것만으로 너무 재밌었지만 몇 번하다보니까 재미가 없는 거예요. 완성도는 더 높일 수 있지만 내가 꿈꿔왔던 것들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면 ‘연극이 갖고 있는 허구, 일루전 이라는 것이 뭐지.’ 이런 쪽으로 생각이 옮겨가면서 <불안하다> 시리즈가 나오기 시작했죠. 여기서 말하는 ‘불안하다’는 마음이 불안하다가 아니라 연극이라는 그 허구가 믿어지지도 그렇다고 안 믿어지지도 않는 불안전한 상태를 이야기해요. <불안하다 시리즈> 부터 ‘연극의 문법들을 깨보자.’ 하는 생각으로 (의식의) 흐름에 따라 이상한 짓을 하기도 했다가 극장 안에서 공간도 이동해보고 연극이 가지고 있는 허구, 일루전 등을 가지고 관객이랑 게임을 하듯 공연을 했죠. 그런 작업을 하면서 다시 ‘(무대에서) 연기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과 문제의식들이 나에게 촉발 됐어요. 가끔 배우들이 그런 얘기하잖아요. 자신이 진정성을 갖고 있다면 관객들도 그 진정성을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난 그 말을 절대 믿지 않거든요. ‘그게 무슨 텔레파시 같은 소리냐. 그럼 연기자는 초능력자라는 소리냐.’ 이렇게 약을 올리는 거죠. 그러면서 공연에서 텔레파시로 진정성을 전달해 보기도 하고... 대부분 실패했지만 어쩌다 성공하기도 하고(웃음) 또 그런 이야기들을 하려다 보니까 뇌 과학에 대해서 교양서적을 읽게 되었고 그러면서 뭔가 좀 더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싶어지다 보니 로봇까지 가게 된 거죠.
(윤서비 연출은 <불안하다>시리즈를 시작해 <불안하다 ver.4 로봇을 이겨라>에서는 로봇에게 연기평가를 받거나 로봇과 연기 대결을 했고, <로봇을 이겨라2>에서는 정의에 대해 로봇에게 점수 매김 당하는 등 어설프고 불안정한 감수성을 팽개치고 자로 잰 듯 한 과학연극을 표방하며 시리즈를 이어가고 있다.)
이 긴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나는 계속 낭만성과 합리성 사이에서 이쪽 편 들었다가 저쪽 편 들었다가 그러고 있는 것 같아요. 누군가 작년 3월에 했던 제 공연을 보고 ‘야, 넌 꼭 사춘기 소년 같다.’라고 하더라고요. 그건 순수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결정을 못 한다.’라는 얘기였어요. 그게 되게 좋게 느껴지기도 하고 반성하게 되기도 하고 뭔가 되게 절묘하게 저에 대해 진단 해준 말이었다고 생각했어요. 나도 이제 마흔 셋인데. 뭔가 이제는‘이게 맞습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렇게 결정을 못하고 자꾸 이거 했다가 저거 했다가. 이게 맞냐. 저게 맞냐. 너무 왔다 갔다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죠. 근데 한편으로는 그게, 그 모습 자체가 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더 확실해 지더라구요. 로봇시리즈의 마지막은 항상 ‘몸’ 이거든요. 결국엔 인간이 뭔지는 모르겠고 로봇을 이길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마지막엔 최선을 다해서 땀을 흘리고 관객 앞에서 발가벗고 별 짓 다하잖아요. 그 모습이 우리 공연의 매력이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응원은 좀 받겠지.’하고 생각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수준의 발악이 아직은 그 정도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고. 그렇게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아요. 현재로서는. 앞으로는 ...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어요.(웃음)
저는 연출님 이야기 듣다보면 어떤 캐릭터 같은 게 그려져요.(웃음) 어릴 때 어떤 종교에 빠졌다가 거기에 배신당하고 나와서 ‘이건 허구야!’라고 외치면서 그걸 밝히려고 하는 그런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웃음)
서비
그것도 커요. 종교. 유아세례를 받고 16살 때 입교한 이후로 교회를 정말 열심히 다녔거든요. 고3때까지 일주일에 4,5번씩 교회에 가고 찬양단도 하고, 철야기도까지 했었어요. 고3인데도 공부 안하고.(웃음) 근데 대학교 가자마자 교회를 안다녔거든요. 다니기 싫어서가 아니라 귀찮고 바쁘니까. 대학이 너무 재밌으니까. 그렇게 안다니기 시작했는데. 사실을 <불안하다 시리즈>를 하면서 과학서적들을 보게 되고 ‘이거 내가 너무 이상한 걸 믿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의심해 봐야 되는데 안했던 것. 한편으로는 게을렀던 것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무서웠던 것이기도 하고...(웃음) 지금은 ‘의심’이라는 것을 굉장히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있어요. 어느 순간 의심이 들면 용감하게 그 의심을 끝까지 해봐야지. 지금까지 내가 믿어왔던 것들이 다칠까봐 의심을 거둬들이는 일은 하지 말아야겠구나.
뭔가 그 의심이 연극으로 옮겨온 느낌이 드네요.
서비
괴짜기질, 또라이 기질이나 튀고 싶은 욕구, 종교나 이런 것들에서 왔던 엄숙함에서 벗어나보려는 몸부림, 어려서부터 연극을 시작하다 보니까 연극이라는 거에 꽉 묶이고 싶지 않은 마음들... 이런 것들이 날 이탈하게 하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의 모든 작업들과 인생의 키워드 중 하나를 꼽으라면 ‘의심’이라고 생각해요. 현재의 나, 현재의 현상들, 현재 내가 믿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의심하는 것.(웃음) 어쨌든 누가 뭐라고 하든 아닌 쪽으로, 계속해서 아닌 쪽으로 가는 삐딱선이라고 할 수 도 있지만 그 의심은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연극이라기보다는 예술이라는게 늘 ‘우리가 이렇게 생각했었어.’ 하는 것들에 대해 의심의 문을 열어주는 선구적인 작업들이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요즘 동시대 연극이라고 하는 것들, ‘연극이 시대의 표상이다.’라는 말들. 그것도 맞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한편으로 너무 시대와 함께 어깨동무하고 가려는 건 아닌가. 좋게 말하면 함께 가는 것이고 보듬는 거지만 나쁘게 말하면 시대와 너무 쉽게 타협하는 것 아닌가. 조금 더 앞서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작업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윤서비에게 연극이란
서비
진짜 어려운 질문인 것 같아요. 연극이란 무엇이다...
무슨 얘길 해도 멋있는 척하는 것 같아서 이게 좀 부끄러운데...(웃음)
음... 연극은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철학적 틀 같은 것 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24시간 매순간 연극을 철학적으로 고민하고 있는 인간은 아니예요.(웃음) 흐물흐물 하고 흐트러져 있는 편이고 일상에서 항상 진지하고 멋있게 고뇌하고 살아가는 스타일도 아니고 대체로 평범한데... 그래도 꽤 긴 시간 연극이라는 것에 녹아난 나의 진지함이 있을 테고 그 진지함이 요 몇 년 사이 (저한테) 드러나고 있는 것 같아요. 그게 바로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틀이 아닐까. 내가 그 틀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것을 이해하고 그것에 대해 공부한 결과물로서 연극을 내놓기도 하고... 그리고 이건 좀 다른 이야기 일 수 있는데...(웃음) 나는 배우들한테 ‘연극을 자신을 위해서 해? 관객을 위해서 하는 거지.’ 라고 말하지만 사실 난 정말... 사실은... 나를 위해 연극을 하고 있고.(웃음) 나 좋자고 하고 있고, 관객도 나를 닮은 관객이 오길 바라고...(웃음) 웃기잖아요. 다 자기야. 내 세상인거지.(웃음) 개인주의. 보수주의자. 오만방자. 유아독존... 맞네. 군계일학이네.(웃음)
연극은 연출님을 그렇게 만들어 주는 세상이군요.(웃음)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윤서비(연출가)
주요작품
<불안하다> 시리즈, <로봇을 이겨라> 시리즈, <로미오와 줄리엣>, <오이디푸스>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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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

김정 연출가
'프로젝트 내친김에' 연출

주요작품 <광장의 왕>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 <꿈> <손님들> 외
shinji840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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