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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과를 하지 않을까요?

연극평론가 김미도

부새롬_연출가, 무대디자이너

제144호

2018.07.19

지난 6월 말 종료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 위원회’(이하 조사위)의 민간위원이었던 김미도 평론가를 만났다. 이번 연극데이트는 ‘블랙리스트 사태’라는 사안에 초점을 두고 진행됨을 미리 밝힌다.

이 인터뷰를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어렵네요. 읽는 사람에 따라 관심도나 알고 있는 정보의 수준이 다 다를 거라서요.
아직도 블랙리스트야, 하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맞아요. 또 그 얘기야, 정권 바뀌었는데 다 해결된 거 아니야, 그러기도 하겠죠. 우선 블랙리스트 문제 관련해서 선생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 그 얘기부터 좀 해주세요.
제가 왜 이 일에 휘말리게 됐는가를 설명하면 답이 될 것 같은데요. 2015년에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예술위)의 사업, 창작산실 연극분야 심사에 참여하게 됐어요. 오랜만에 예술위 사업의 심사를 하게 된 거였어요. 나중에 조사위 발표를 보니 당시 저도 블랙리스트라 심사위원에서 배제되고 있었더군요. 그런데도 제가 14년도 명동극장에서 창작산실 희곡심사를 했었기 때문에, 15년도에 그 사업이 예술위로 이관되면서도 심사의 연속성 때문에 창작산실 실연 심사를 하게 된 것 같아요. 15년 4월 중순에 닷새에 걸쳐서 심사를 했는데, 마지막 날 뜻밖의 얘기를 들었어요. 당시 예술위 창작지원부장이었던 장00이 나타나서 박근형 연출(이하 박근형)의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를 빼줄 수 없느냐고 했어요. 이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얘기인데 5명의 심사위원 중에 (故) 김동현 선생이 굉장히 화를 내면서 뛰쳐나갔어요. 저도 화가 많이 났지만 아직 2팀이 오후에 심사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진행을 해야 된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이런 식으로 심사 과정에 관여를 하고 압력을 가하면 마지막에 사인을 할 수 없다고 항의를 했죠. 김동현 선생이 뛰쳐나갈 때는 안 붙잡더니, 저까지 그러니까 그 사람들도 심각함을 느꼈던 것 같아요. 심사위원들이 이렇게 완강하게 거부해주시면, 자기들이 오히려 편하다, 그러면서 수습을 해갔어요. 김동현 선생도 다시 모셔오고요. 최종적으로 8작품을 지원작으로 결정했고, 아무래도 좀 찜찜해서 이례적으로 심사평 안에 8편의 제목을 다 넣자고 했어요. 그 사건을 겪으면서 14년에 있었던 서울연극제 대관탈락 사태가 떠오르더라고요. 그 사태 때문에 대학로 엑스포럼까지 생겼는데, 그때만 해도 많은 연극인들이 검열이라고 까지는 인식을 잘 못했어요.
저도 검열은 좀 오버다, 라고 생각을 했었어요.
물론 연례적으로 해오던 연극제를 갑자기 대관 탈락시킨 것에 대한 비판도 많았지만, 서울연극제와 서울연극협회에 대한 비판 여론이 오히려 더 강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 퍼즐이 맞춰지더라고요. 아, 서울연극제도 검열이었구나, 검열에 대한 인식이 들더라고요. 그날 장00부장이 무용 쪽에서도 이런 문제가 있어서 발표가 많이 지연됐다, 라는 얘기도 했어요. 검열이 있다는 걸 시인한 거죠. 그 후 창작산실 선정작 발표가 두 달 넘게 지연됐고, 대학로에 온갖 소문이 돌았죠. 사실 내가 소문을 좀 내기도 했어요. 그즈음에 박근형의 공연을 보러 갔다가 술을 한잔했는데 본인이 다 알고 있더라고요. 자기 때문에 발표가 안 나고 있는 거 아니까, 자기 빼고 가래요. 싸워야지 왜 그러냐, 그랬는데 그는 이미 많이 지쳐 있었어요.
그때 박근형 선생님 비겁하다, 라는 여론이 꽤 있었죠.
잘 모르는 사람들도 많을 텐데 박근형은 개인적으로 감사도 받고, 이상한 데 불려가서 조사도 받았던 거예요. 하나는 학교로 들이닥친 건데, 개인 박근형을 털었다고 하더라고요. 기껏해서 나온 게 국립대 교수가 외부 작업을 너무 많이 한다, 그래서 학교의 특성상 이런 게 실적이다, 해명을 하고 지나갔대요. 그리고 하루는 남부터미널 근처로 오라고 연락이 왔대요. 갔더니 누가 나와서 간판도 없는 어느 건물로 데려가서는, 수상한 방에서 조사를 받았대요. 모 문화재단과 원래 계약서상에 없는 숙박을 왜 했느냐, 특혜 아니냐, 그런 거였대요. 공연 시간이 이른 시간이어서 셋업을 그 전날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해명을 하고 넘어갔대요. (웃음)
정말 치졸하네요.
저는 박근형이랑 또래니까, 70~80년대에 우리는 갑자기 끌려가서 고문당하고 의문사 당하고, 그런 시대를 살았잖아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느꼈을 공포가 너무 이해가 되고 자기를 빼고 가라는 심정도 알겠더라고요. 그렇지만 공식적으로는 발표를 연기하고 있는 거니까 일단 기다려보자고 했죠. 바로 그 직후에 김동현 선생한테 전화가 왔어요. 예술위에서 박근형을 빼달라, 안 그러면 발표를 못한다고 연락이 온다고. 최소한 두 명 이상의 심사위원한테 개별적으로 접촉을 했던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러고는 그 날짜도 안 잊히는데 15년 6월 18일에 예술가의 집에 심사위원들을 다 불러놓고 심사결과를 번복해 달라 했어요. 처음에는 심사위원들이 다 반발했죠. 제가 끝까지 버텨서 발표가 안 나면 어떻게 되나 보자, 그랬어요. 그러면 연극판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테고 무슨 수가 나겠지, 싶었죠. 그런데 나머지 7개의 작품도 지원을 못 받고, 창작산실이라는 지원제도 자체가 없어질 수 있다, 그러니까 심사위원들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어요. 연출가 두 분이 공연은 해야 된다, 쪽으로 먼저 기울기 시작하더라고요.
지원 못 받는 다른 팀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죠. 창작산실이 제일 큰 지원금이기도 하고요.
내가 평론가라서 현장의 절박함을 이해 못하고 너무 원칙적인 얘기만 하고 있나, 갑자기 혼란스럽더라고요. 결과적으론 다 알려졌다시피, 심사 결과를 바꾸진 않았지만 직원들이 박근형을 찾아가서 얘기를 해보는 것에 암묵적인 동의를 한 거죠.
그 회의를 녹취하셨던 거죠?
분명히 그런 얘기들이 나올 것이고, 언제 어떻게 쓰일지, 폭로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중요한 증거가 될 거니까,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 걸 처음 해봤어요. (웃음) 나중에 박근형이 술 한잔하면서 그러더라고요. 내가 당신이 싸운다고 하면 같이 싸워주겠다, 동료들도 같이 싸워줄 꺼다, 그랬대요. 나는 잊고 있었는데 동료들이 같이 싸워줄 거라고 했단 얘길 듣고 좀 울컥했어요. 나머지 7개 단체한텐 좀 미안한 얘기지만, 검열이 폭로되면 그 단체들이 공연을 포기할 거고 그들을 포함해서 연극계가 같이 싸워줄 거라고 생각하고 했던 얘기였거든요. 7개 단체는 공연 포기 문제를 심각하게 논의했다지만 결국 공연이 올라갔죠. 저는 그 7개 공연을 일부러 다 가서 봤는데 평론 한 줄도 남기지 못했어요.
녹취는 어떤 과정으로 폭로가 된 거죠?
6월 18일에 회의하고 2~3일 뒤에 장00부장이 상의할 일이 있다고 해서 다시 만났어요. 박근형이 포기하기로 했다길래 당신네들이 원하는 대로 됐는데 무슨 할 얘기가 또 있냐, 그랬어요. 위에 보고를 했더니 각서라도 받아 와야지, 그 말만 믿고 그냥 왔냐고, (질책을 받은 거죠.) 도대체 그 위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그냥 위래요. 도대체 어디까지 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에 너무 화가 나서 막 소리를 질렀어요. 당신네들 이미 충분히 예술가를 모독했다, 그런 식으로까지 하면 가만 안 있을 거라고, 녹취가 있다는 얘기는 안 했지만 말로 막 협박을 했어요. 그러면 안 찾아갈 줄 알았죠. (그들은 결국 찾아가서 포기각서까지 받았다. -필자 주) 그러고 시간이 흘렀어요. 내가 증거를 갖고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대학로가 시끄러워졌죠. 이양구, 이해성이 박근형을 찾아가서 이런 일 있으면 싸워야지, 말이 되는 일이냐, 그랬는데, 아까 얘기했던 공포 때문이었는지 박근형은 못한다고 한 거죠. 그러니까 나한테 와서 선생님이라도 폭로를 하셔야죠, 그러는데, 나 스스로도 어려운 일이지만 박근형이 동의하지 않는 상황에서 그럴 순 없다, 그랬죠. 그리고 혼자서는 7개 단체가 지원금을 받은 이후에 폭로를 하면, 그 단체들에 피해가 가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했어요. 결국 폭로를 하게 된 건 도저히 넘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어요. 도종환 의원실에 녹취를 넘겼고, 15년 국정감사가 시작되기 며칠 전, 15년 9월 9일, JTBC에 폭로 방송이 나가게 된 거죠. 제가 먼저 인터뷰를 한 후 박근형을 설득했어요. 나한테 증거가 있다 했더니 박근형이 너무 놀라면서 용기를 냈고, 인터뷰가 성사됐어요. 자기도 더 이상 물러설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나중에 방송을 봤는데, 15년 9월 그 시점에, 위에 청와대가 있다, 그런 얘기를 막 하더라고요. (웃음) 그거 보고 저도 되게 당황했어요. 지나고 보니 그 보도에서 블랙리스트, 청와대 등 핵심적인 얘기는 다 나왔던 거죠. 그 이후론 다 알겠지만, 연극인들이 천명 가까이 서명을 하고, 온갖 성명서와 시위들이 이어지면서 난리가 났었죠. 그런 게 다 모여서 국회에 전달이 됐어요. 당시는 ‘블랙리스트가 있다’, 가 아니라 ‘검열이 있다’가 이슈가 됐는데, 곧 역사 교과서, 싸드 문제가 터지면서 완전히 묻혀버렸죠.
아이고, 그때부터는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다 기억하기도 힘들어요.
연극계에 ‘검열’은 다 알려졌지만 어떻게 싸워야 할지 동력이 떨어지고 있는 참에 <권리장전2016_검열각하>가 그 불씨를 살렸어요. 정말 자랑스러웠어요. 후배들, 젊은 연극인들 21팀이 모여서 <권리장전2016>을 5개월간 했고, 절묘하게도 그게 끝나갈 무렵에 16년 국정감사가 시작됐는데, 도종환 의원실에서 문제의 예술위 회의록을 찾아낸 거죠. 그것도 재밌어요. 사실 그걸 찾으려고 한 게 아니라, 그때가 ‘미르재단, 케이스포츠, 최순실 사태’가 막 터져 나올 때여서 그 관련 자료를 찾았는데, 거기에 ‘블랙리스트’ 얘기가 있었던 거예요.
그렇게 16년 국정감사에서 이 이슈가 다시 재점화가 됐죠.
이제는 이슈가 ‘검열’이 아니라 ‘블랙리스트’ 가 된 거죠. 도종환 의원이 정식으로 10월 10일 국정감사에서 블랙리스트 문제를 제기했고, 10월 12일 한국일보에 9473명의 명단이 공개가 됐어요. 나중에 조사를 해보니까 그게 다는 아니었지만. (웃음)

이후는 온갖 일들이 터지고, 촛불 들고, 정권 교체되고, 정말 드라마틱했죠. 작년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 위원회’ (이하 조사위) 가 꾸려졌고 거기 참여를 하셨어요.
전말을 다 알고 있는 사람이 저고, 결자해지를 하고 싶은, 이 끝이 어딘지를 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그 전에 민간에서 먼저 ‘검열백서위원회’가 만들어져 있었고 굉장히 많은 분들이 열심히 활동을 했죠. 조사위가 꾸려지는 단계에서 당시 다수 연극인들의 공론장이었던 ‘블랙타파’를 통해서 저랑 이양구가 추천되어서 조사위에 들어가게 된 거죠. 조사위는 조사팀이랑 제도개선팀으로 이원화가 돼있었는데 후자 쪽에는 김소연씨가 들어가서 활동을 했어요. 전체 전문위원이 25명이었는데, 아무래도 조사 일이 너무 많으니까 다수가 그 쪽 일을 하고, 제도개선 쪽은 전문위원이 2명밖에 안 되었는데 김소연 연극평론가가 팀장으로 굉장히 큰일을 한 거죠. 연극계뿐만 아니라 모든 장르의 제도 개선 문제를 다뤘으니까요. 나중에 기록 보시면 알겠지만 엄청나게 많은 토론회, 포럼, 연구 모임 등등이 있었어요.
조사위 활동에 대해서 얘기 좀 해주세요.
앞으로 백서가 나오면 알겠지만 전체 조사에서 최소한 절반 이상이 공연, 공연 중에서는 대부분이 다 연극이었어요. 조사위의 조사관들은 세월호 특조위나, 과거사, 의문사를 다루는 곳에서 전문적으로 조사를 했던 분들이거든요. 조사에 관한 업무에는 탁월하시지만 문화예술계 사정을 잘 모르시는 거예요. 다행히 민간에서 검열백서위원회가 1, 2차에 걸쳐서 내놓은 책들이랑 평론가협회에서 <세월호 이후의 한국연극>이라고 검열 및 블랙리스트 관련한 글들을 모아서 낸 단행본, 이 세 권의 책이 있어서, 상황을 신속하게 파악하고 조사의 밑그림을 잡는 데 큰 도움이 됐어요. 그게 참 뿌듯했어요. 그리고 이양구 연출가(이하 이양구) 얘기를 안 할 수가 없어요. 연극 쪽 조사 업무가 정말 많았는데, 연극계 상황을 교육(?)하는 일까지 하면서 공연계 조사 업무를 진두지휘하고 동시에 본인이 스무 건이 넘게, 제일 많은 건수를 맡아서 조사하고 보고서를 썼어요. 일 년 동안 거의 매일 야근하고 주말도 없이 일했어요. 원래 몸도 약한데 저러다 쓰러지지 않을까 늘 걱정했죠. 이 조사위에서 이양구의 역할이 너무나 절대적이었고, 공로가 지대했다는 걸 꼭 알리고 싶어요. 조사위 업무량이 정말 많았어요. 특히 예술위는 워낙 건수가 많았고, 말단 실무자부터 그 위쪽으로 쭉 있는 상관들의 지시 여부, 엇갈리는 진술들을 다 확인해야 했으니까요. 그리고 예술위 안에서는 본부장이 높은 급이지만, 결국은 예술위는 문체부의 실무자급으로부터 지시를 받은 거거든요. 그런데 그 문체부 안에서도 위선에 윗선, 윗선이 또 있잖아요. 다 조사를 하기에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어요.
조사위 활동하시면서 들었던 생각이나, 소회라고 할까요? 어떠셨어요?
우리가 박근혜한테도 그렇게 사과하라고 그랬잖아요. 왜 그렇게 사과하기가 힘들까… , 그 생각을 많이 했어요. 잘못했다고 하면 되는데, 그래야 누그러지든, 용서를 하든, 할 텐데. 조사위 활동을 하면서 저도 돌아보게 됐는데, 박근형한테 점점 미안해지는 부분이 있었어요. 원칙대로 갔어야 되는 거 아냐? 나도 결국 그 때 타협을 했다는 생각이 들고 후회가 됐어요.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서 바로 폭로를 할, 그렇게 전면전을 할 용기가 없었던 거죠. 상상도 못했던 규모의 피해사실을 접하면서, 박근형같은 피해자가 너무 많았어요. 7개 단체를 구제할 게 아니라 한 사람의 피해자가 생기지 않게 했어야 하는 거죠. 저는 나름대로 폭로의 과정을 거치면서 어느 정도 상쇄를 하고도 이렇게 미안한 마음이 남는데 다른 분들은 왜 그런 미안한 마음이 안 들까요? 이양구가 조사업무를 하면서 정말 분개하는 지점이 뭐냐면, 김미도가 검열을 폭로한 15년 9월 9일 이전과 이후는 너무나 다르다는 거죠. 그 이전엔 워낙 그 프로세스를 교묘하게 해뒀기 때문에 검열인지 아닌지 몰랐다고 해도, 그 이후에는 문화예술계에서는 누구나 검열이란 걸 알 수 있었는데, 연루된 심사위원들은 한결같이 부인을 하는 거죠. 심지어 직원은 리스트를 불러줬다, 미리 만나서 협조를 구했다, 진술을 하는 데도요. (참고로 심사위원은 평론가뿐만 아니라 작가, 연출가, 프로듀서, 국공립 단체의 고위 간부나 기관장 등 다양하게 섞여 있다. -필자 주)
정말 몰랐다면, 그 무지에 대해서도 미안해해야죠. 그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이면.
특히나 반복적으로 연루된 사람들은 그래야죠. 최소한의 미안함과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것에 정말 분노하게 돼요. 공개된 회의록을 보면 블랙리스트에 대한 인지가 2014년 3월까지 거슬러 올라가잖아요. 정대경 한국연극협회 이사장, 오정희 소설가 (최근 국립한국문학관 설립추진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었다가 블랙리스트 관련 문제로 사퇴. -필자 주) 등, 예술위 위원들은 일찌감치 검열을 인지했단 말이죠. 당시 아무도 항의하거나 예술위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서 현장에 와서 의논하거나, 그러질 않았죠. 오정희는 가장 악질적인 배제가 있었던 검열, ‘2015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사건에 가담한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이 박명진 위원장 사퇴 후 예술위 위원장 권한대행까지 했죠. 우리가 정대경 이사장에게 지금이라도 사과하라고 그렇게 촉구하는데 안 하고 있죠. 예술인복지재단에서도 블랙리스트 실행이 있었는데 당시 기관장은 사과 안 했죠.
사과할 사람이면 진작에 했을 거예요. 그런 부역자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려운 문제인 것 같아요.
확실한 위법 사실이 있거나 상관으로서 블랙리스트 실행을 지시한 정황이 확인된 사람들만 조사위의 수사 의뢰 대상이든, 징계 권고안에 들어갔어요. 당시에는 어떤 직책에 있었으나 지금은 아닌 경우, 정황은 충분하나 증거가 확보되지 않은 경우 등 여러가지 경우가 있어서 우리가 확실히 적극 부역자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수사나 징계 대상자가 아닌 경우도 많아요. 징계 권고 대상자가 아니더라도 본인이 책임 있는 위치에 있었다면 사과를 해야 할 텐데, 사과를 하지 않으니까 용서할 수도 없고 화해할 수도 없는 거죠. 청산도 되지 않을 거고. 조사 끝나고 백서 나온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에요. 이렇게 남은 앙금과 분노, 이런 것들이 언제쯤 아물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덧붙여 말씀드리고 싶은 건 최대한 많이 처벌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는 거예요. 문체부에서는 국장 이하 실무자급을 처벌하고 싶어 하지 않았어요. 근데 그러면 산하기관인 예술위나 영진위의 누구도 처벌할 수가 없는 거예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예술위에 지시를 내린 건 문체부의 실무자급이니까요. 현장에서는 바로 맞대면하고 있는 예술위에 엄청나게 분노하고 있잖아요. 이해는 충분히 되지만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그 지시를 내린 문체부에 대해서, 그 윗선으로 올라가면서 더 화를 많이 내야 되는 거죠.
다시 조사위 얘기로 돌아가서요. 한계나 아쉬운 점이 있으시다면요?
애초에 특별법이 만들어졌으면 좋았겠지만 세월호 특조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법 제정이 너무 어려운데 그사이에 블랙리스트 문제가 잊힐까 봐 걱정이 됐어요. 대통령령으로라도 만들어졌으면 우리가 조사할 수 있는 범위가 더 넓어질 수 있었겠죠. 그것도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했어요. 결국엔 장관 훈령으로 만들어졌는데 가장 큰 문제는 강제조사권이 없다는 거였어요. 그러다 보니 장관이 인사권을 쥐고 있는 문체부 산하 조직의 협조는 그나마 받을 수 있는데 그 외의 조직, 기구에 대해서는 한계가 많았죠. 예를 들면 한국일보에서 기사화한 블랙리스트 9473명은 세월호 관련, 문재인 지지, 박원순 지지 등에 서명한 명단을 단순히 긁어모은 거예요. 진짜 블랙리스트는 언제부터 내려온 지도 알 수 없는, 국정원에서 만들어서 정무수석실로 간 리스트가 있어요. 이게 어떻게 만들어진 건지 알려면 국정원을 조사해야 되는데 (웃음) 저희가 그럴 수가 없잖아요. 그리고 또 하나 예산 문제가 컸어요. 올해 예산이 야당의 반대로 국회에서 통과가 안 됐어요. 저희는 처음부터 1년은 해야 된다고 했지만 6개월을 기본 기간으로 하고 3개월씩 연장을 해가는 걸로 됐는데, 올해 1월이 되니까 예산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한 거죠. 3개월을 한 번 연장하고, 마지막 2개월은 예산이 없어서 일부 조사관을 해고하고 백서 발간 비용을 당겨서 썼어요. 조사관이 조사를 하다가 예산이 없어서 중도에 그만둔 조사도 있는 거죠. 그걸 남아있는 조사관이 이어받아 마무리하려니까 작업이 더 어렵고. 결국 예산상의 문제로 일찍 문을 닫게 된 거예요. 25명의 조사관이 처음부터 7월 말까지 1년이라도 쭉 활동을 같이 할 수 있었으면 지금처럼 미진한 상태로 끝나진 않았을 거고, 이렇게 아쉽진 않을 것 같아요. 물론 제한된 시간과 예산 안에서는 정말 놀라운 작업을 해냈다고 생각해요. 조사위가 모이면 “우리가 거지야?” 이런 자조를 많이 했어요. 지난 4월에는 예산 없으니까 무조건 방 빼라는 얘기를 듣고, 점거농성하자, 우리를 끌어낼 거야? 그런 얘기도 하고요. 이 정부가 어떻게 출범을 했으며, 지금 도종환 장관이 어떻게 그 자리에 있는 건데, 문체부에서 그렇게 말을 할 수 있는지 (화가 났죠.) 조사관들이 야근할 때 밥을 먹는 식당이 있는데, 어느 날 거기에 있는 식대 장부가 사라진 거예요. 너무 치사하고 비굴하고 굴욕적인 순간들이 많았죠.
참, 밥이 사람 제일 속상하게 하는 건데요. 그럼 백서 발간은요?
우리가 문체부에 원고를 넘기면 다른 예산으로 발행하게 되는 것 같아요.
백서 나오면 모든 게 종료되는 건가요? 더 이어지는 무언가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요.
우선은 중간 단계의 후속 기구를 만드는 걸 권고했고, 하기로 했어요. 지금 조사에서 미진한 부분도 보충해야 하고, 이의 신청 같은 것도 받아야 하니까요. 근데 지금껏 문체부가 저희를 대했던 태도를 보면 신뢰가 가지는 않아요. 최종적으로는 표현의 자유와 예술가의 권익을 위한 상시기구가 생겨야겠죠.

문제가 워낙 오래전에 시작돼서 지금까지 온 거라 인터뷰가 많이 길어졌습니다. 여기까지 읽어 주신 독자분들 감사하고요. (웃음)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씀 있으세요?
처음에 내가 왜 이 일에 휘말리게 됐는지, 얘기를 시작했는데요. 많은 사람이 가만있었던 것처럼 나도 가만있었으면 조용히 잘 살았겠죠. 이양구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처음엔 소수만 알고 있었다고 생각을 했는데, 조사를 하다 보니까 너무 많은 사람이 알고 있었으면서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고요. 내가 3년 동안 이 문제와 관련해서 겪은 고통도 여느 피해자들 못지않다고 생각해요. 결과적으론 정권이 바뀌어서 조사위가 꾸려지고 많은 진실이 드러나게 됐지만, 그 때는 무지 겁났어요. 폭로를 결심하면서 내가 잃을 수도 있는 것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었어요. 그럼에도 마지막에 결심을 했던 지점은, 나는 과거에 오랫동안 검열의 시대를 살았고, ‘공연윤리위원회’라는 검열기구가 공식적으로 폐지되는 걸 봤던 사람으로서. 그런 일이 다시 반복되고 있다는 걸 참을 수가 없었어요. 표현의 자유가 없는 나라에서 내 아이들을 살게 하고 싶지 않았고, 문창과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칠 수가 없었어요. 이런 보수 정권이 이어진다면 이 나라에서 더 이상 살 수가 없다고 생각을 했어요. 폭로 후 불이익이나 신변의 위협이 닥치면 이 나라를 떠나려고 했으니까 애국자는 아니에요. (웃음) 저한테는 그렇게 절박한 문제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런 문제를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 지금까지도 너무 속이 터져요. 주변의 일부 연극계 선배들도 블랙리스트는 옛날부터 있었던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요. 이렇게 어마어마한 양의 조사를 해서 백서가 나온다고 한들, 예술가가 아닌 사람들의 표현의 자유에 대한 인식이 근본적으로 바뀔까, 의문이 들어요. 표현의 자유는 사실 공기 같은 거 잖아요.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서도 자기가 하고 싶은 말, 쓰고 싶은 글을 쓸 수 없다는 건 끔찍한 거죠. 예술가만 겪는 일, 나랑 상관없는 일이 아니거든요.
말 그대로 공기처럼 알 듯 모를 듯, 느끼고 있지 않을까요?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김미도

2014 여석기 연극평론가상

2003 PAF비평상 수상

1995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연극부문 수상

저서
『무대너머, 상상과 해석』 『한국 현대극의 전통 수용』 『한국연극의 새로운 패러다임』 『연극배우 박정자』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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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새롬

부새롬 연출가, 무대디자이너
달나라동백꽃 대표
주요작품 <뺑뺑뺑> <달나라연속극> <로풍찬 유랑극장> <뻘> 외
puromy@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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