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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꿈꿀 수 있기를

배우 백현주

부새롬_연출가, 무대디자이너

제146호

2018.08.23

<비평가> 막바지 연습 중인 백현주 배우를 연습실에서 밤늦게 만났다.

한동안 연극판에서 자주 못 뵀던 것 같아요.
재작년까지는 공연이랑 좀 멀어져 있었는데, 작년부터 공연을 하고 있어요. 뮤지컬 <식구를 찾아서>를 다시 했고, <랭귀지 아카이브>, 낭독 공연, 쇼케이스도 했어요.
2017년 전에는 매체 활동하시느라 좀 멀어지셨던 건가요?
애매한 시간들이 좀 있었어요. 12, 13년도쯤에는 예술강사 하면서 수업을 많이 했고, <엄마를 부탁해>, <식구를 찾아서> 같은 뮤지컬을 했어요. 극장도 대학로 중심에 있던 게 아니어서, 내가 연극 그만뒀다더라는 얘기도 들었어요. (웃음) 15년 하반기부터 방송을 하게 됐고 한동안 스케줄 문제 때문에 공연을 못 했었죠.
떠나있다가 돌아오시니까 어떻든가요? 한 2년밖에 안 됐으니까 별다르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하고요.
굉장히 연극이 하고 싶었어요. (웃음) 드라마에서 맡았던 역할 때문이기도 했는데, 정말 촬영장에 이를 악물고 가야 했던 시간들이 있었어요. 처음이랑 두 번째 맡았던 역할은 어려운 점도 있었지만, 캐릭터가 재밌었어요. 그다음에 주말 드라마의 도우미 역할을 하게 된 거예요. 대사 부담도 좀 적고 쉬엄쉬엄 할 수 있을 것 같았죠. 1주일에 한 번 한 씬이나 두 씬을 찍기 위해서 기다리는데, 이건 긴장을 풀 수도 없고 안 풀 수도 없고… 누가 되면 안되니까 어쩔 땐 대사 한 줄, 두 줄 때문에 정신을 차리고 있는데 정말 끔찍했던 거 같아요. 속에 막 답답증이 생기면서 종영 날만을 기다렸어요. 그때쯤부터 연극이 너무 하고 싶다, 그랬죠.
이거 나가도 되는 거예요? 감독님들이 보면 캐스팅 안 되는 거 아녜요?
솔직히 상관없어요. 누구를 탓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어떤 선택을 했어야 했는지 크게 배운 시간에 대한 얘기니까요.
어떤 욕구를 갖고 있는 배우인지 깨닫는 시간이었던 거네요.
그렇죠. 그러고 <식구를 찾아서>를 다시 한 거죠. 이 작품을 5년을 했는데, 이번에 또 다른 걸 경험했어요. 나이를 먹어가면서 다른 것들이 보였지만 그전에는 시도해보지 못한 게 있었거든요. 공연이 하고 싶었던 욕구만큼 이번에는 다 해보자, 그랬어요. (해석에 있어서) 내 선택을 바꿨는데, 그 그릇을 받아들이기에는 인간 백현주가 너무 힘든 거예요. 설명하기가 좀 힘든데, 이런 거예요. 2008, 9년에 <금녀와 정희>라는 작품에서 엄마 역을 했는데, “알았다”라는 대사가 굉장히 많았어요. 딸이랑 여행을 가기로 했는데, 둘이 계속 티격태격해요. 딸이 무슨 말을 해도 엄마가 다 “알았다”라고 하니까, “알았다”가 다 다르겠지, 라고 생각을 했어요. “알았다”를 “그래 너 잘났다”, “그만해”, 정말로 알았다… 여러가지 의미로 연기를 했는데, 최진아 작가이자 연출이 어느 날 “알았다”가 그냥“알았다”였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서브텍스트가 너무 많다는 건가요?
좀 달라요. 그만해라, 너 잘났다, 가 아니라 정말로 수긍의 “알았다”라는 거예요. 근데 저는 그렇게는 말이 안 나오고 막 따지고 싶은 거죠. “알았다”라고 할래니까, 목울대가 막 아플 정도였어요. <식구를 찾아서>를 다시 하면서 제 캐릭터를 그런 식으로 바꾼 거예요. 예전에는 단순하게 말해서 ‘옹졸한 캐릭터’로 해석해서 코믹한 면도 있었는데, 17년도에 다시 하면서 상대를 그냥 묵직하게 받아들이는 인물로 해석을 바꾼 거죠. 그게 그렇게 힘들더라고요. 상대역이랑 잘 안 맞거나 그런 게 아니라, 백현주가 그 인물을 따라가지 못해서 공연이 끝나면 너무 외로운 거예요. 첫 런쓰루를 한 날은 운전하고 가다가 감당이 안 돼서 숨을 막 몰아쉬고 있고, 그랬어요. 원래 하던 대로 할 걸, 내가 왜 이렇게 한다고 했을까? 그런 생각이 들 만큼 나한테 안 맞는 싸이즈를 선택해놓고 뒤쫓아가기가 힘들었던 거죠. 그러고 났더니 한동안 연극 안 해도 되겠다 (웃음) 갈증이 좀 풀리더라고요. 그리고 나이를 좀 더 먹으면 모르겠는데 한동안은 내 깜냥으로 이 역할은 못 하겠다, 팀원들한테도 얘기했어요. 근데 그러고 났더니 연락 오는 데가 없네? (웃음) 좀 지나서 <랭귀지 아카이브>제안을 받았고 시간 있을 때 하자 (웃음) 그러고 했고, 이후에는 계속 연극을 하게 됐네요.

인물을 새롭게 보게 된 건 인간 백현주가 나이를 먹었기 때문일까요? 아님 다른 계기도 있었나요?
나랑 상대역 하는 언니 둘 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생각이 달라지고 바꿔보고 싶다는 욕구가 계속 쌓여왔던 거죠. 만약 나 혼자만 생각이 바뀌었으면 그렇게 못했을 거예요. 내가 이렇게 바꿔보고 싶다고 하면 언니도 그럼 나도 이렇게 해볼게, 서로 맞춰가면서 한 거죠. 어느 순간 내가 못 따라가게 돼버렸지만요. 연습 전에 만나서, 아님 끝나고 둘만 남아서 연습하고 그랬어요. 참 재밌는 게, 전에는 어떤 디딤돌이 없으면 안 넘어가지는 것들이 어느 순간에는 없어도 쉽게 넘어가지고, 어떨 때는 너무 안 넘어가져서 이유를 막 찾다 보면 너무 사소한 거고… 그렇더라고요.
연극 만들기가 그렇죠. (웃음) 실제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역할을 할 때 오는 어려움도 있는 것 같아요.
20대 때는 노역을 해도 괜찮았어요. 어차피 모르잖아요. 그때는 대사 밑에다가 배우의 블랙 다이얼로그를, 이 역할이 하고 있는 생각을 빼곡하게 써놓고 거의 대사처럼 외웠어요. 모르니까 엄마한테 물어보고, 책 찾아보고, 그렇게 추측해보는 작업을 많이 했죠. 그리고 어린 애가 노역을 하면 몸, 소리 쓰는 거로도 노력했다고 봐줘요. 아유, 애가 어린데 깊이도 있네. (웃음) 칭찬을 받거나, 어린데 뭔 노역을 하니, 욕을 먹든가, 둘 중 하나예요. 실제 나이를 먹어가니까 애매해지는 거죠. 나이에 맞지 않게 엄마 역을 자주 하게 되면서 내가 이제 좀 아나, 그런 착각이 들 때도 있죠. 그렇지만 한 쪽으로는 이미 거덜도 나고 재미도 없어지더라고요, 어느 게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 노역을 하면서 강조해서 쓸 수 있는 몸을 한 번 다 써버리고 나면, 또 하는 게 재미가 없죠, 그렇다고 덜 하는 것도 이상하고. 어릴 때는 노역을 표현하기 위한 테크닉을 구사해보는 것도 재밌었지만, 이제는 새로운 이유를 찾기 전까지는 그냥 창피할 뿐이죠. (웃음) 솔직히 말하면 모르니까요.
여선배님들 인터뷰하면 이 얘기를 매번 하게 되는 것 같은데, 역할이 너무 한정적이다 보니 엄마 역할을 빨리, 자주 맡게 되는 것 같아요.
어느 후배 작가한테 몹쓸 말을 한 적이 있어요. <금녀와 정희>를 하고 있을 때였는데, 전화가 와서 스케줄을 물어보더라고요. 대뜸 노역 주면 나 안 해, 라고 해서 그 친구가 많이 당황했어요. 결국 그 작품을 하긴 했어요. (웃음) 역할이 어떠냐를 떠나서, 배우한테 오는 피로감이 있는 것 같아요. 나도 그렇게 바로 그런 말이 튀어나올 거라고 생각을 못했어서 당황스러웠거든요. 그것도 그 공연장에서요. 나 자신이 조그맣고 날카로워져 있었던 거 같아요.

잠깐 쉬는 시간.

옛날 얘기로 가볼까요? 어떻게 연극하시게 됐어요?
18살, 고2 때 처음으로 성당에서 연극을 했어요. 성당에서는 보통 성극을 많이 하잖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대학동아리를 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연극반은 맡았는데 성극을 하기엔 본인이 재미가 없으니까 <방황하는 별들>을 가지고 온 거죠. 어떻게 연습했는지, 이런 건 기억이 안 나는데 공연날 생각이 나요. 환하게 커튼콜 조명이 들어오고 인사를 하는데 심장이 그때부터 엄청 쿵쾅거리는 거예요. 이걸 한 번 더 해보고 싶다, 느껴보고 싶다는 감정이 들었죠. 집에서는 공부하고 대학가서 선생님을 하거나, 평범하길 바랐어요. 고3을 앞둔 어느 일요일 무료한 오후 시간에 식구들이 다 같이 TV를 보고 있었어요. 용기를 내서 “연영과를 가볼까?” 슬쩍 말을 꺼내 봤죠. 시선은 화면에 고정돼있고. (웃음) 3초 정도 침묵이 있다가 동생이 먼저 너무 어이없어 하면서 크게 웃었어요. 전 얼굴이 새빨개지고. 실은 동생 때문에 엄마, 아빠가 한숨을 돌린 거죠. 농담처럼 넘어갈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말을 제대로 꺼내 보지도 못하고 큰 좌절. (웃음)
그러고 대학을 갔어요. 과 친구가 연극동아리인데 연습 구경을 한 번 오래요. 굳이 안 가도 되는데 꼭 기억하고 있다가 (웃음) 찾아갔죠, 너무 궁금하니까. 그냥 구경을 간 거였는데 대본을 주더니 인원이 부족하다고 무슨 역할을 읽어달래요. 엉겁결에 읽고 났더니 캐스팅을 발표한대요. 작은 역도 아니고 법정 재판극인데 변호사 역이 된 거예요. 그때는 부모님 허락을 받아야 했어요. 근데 엄마가 순순히 “이번 한 번만 할 거지? 해봐.” 그러더라고요. 그때는 서울지역대학극연합회 (서대극련) 이라는 게 있어서, 서로 공연도 보고 교류도 했어요. 공연 끝나고 다 수고했다, 그러는데, 다른 학교 남자선배 하나가 “어우, 사람이었네, 마네킹인 줄 알았어.” (웃음) 동아리 선배들이 “아니야, 잘 했어.”라고 달래주는데, 그러니까 상황이 더 분명하잖아요. 너무 창피했죠. 그러고 나서부터는 줄창 했던 거 같아요.
귀엽네요. 어머님이 많이 후회하셨겠는데요.
그 이후부턴 몰래 숨기고 했죠. 아, 재밌는 일이 한 번 있었어요. 한 선배가 자기가 쓴 작품으로 공연을 하기로 했는데, 각자 원하는 배역의 전사를 모놀로그로 써와서 발표를 하고 배역을 토론을 해서 정하자고 했어요. 그때 전 이미 엄마 역을 했어요. (웃음) 그 발표하는 날 같이 했던 사람들이 다 어떤 감동, 분위기에 취해서 연출네 집에 몰려가서 작품 얘기를 막 하고 거기서 잤어요. 그러고 집에 갔어야 되는데 안 가고 학교로 바로 갔고, 수업 끝나고도 안 가고 연습을 하고 늦게서야 집에 들어간 거예요. 외박이 허락이 안 됐으니까 전화를 하면 집에 가야 되잖아요. 그냥 집에 들어가서 혼나자, 싶어서 전화도 안 했던 거죠. 들어가자마자 엄마가 저를 막 때려요. 근데 엄마 입에서 내가 전전날 전사로 발표했던 대사가 그대로 나오는 거예요. “엄마, 죄송해요” 하면서 막 맞고 있는데, 그 대사가 딱 나오는 순간, “내가 제대로 했구나!” (웃음) 인물의 리얼리티를 찾았다, 내가 뭔가를 해냈다는 생각에 소름이 쭉 끼치면서, 그다음 맞건, 뭘하건 (웃음) 나중엔 학생운동 하던 거, 연극 몰래 하던 거 다 들키고 대학교 4학년 땐 가출도 했어요.
이후에 한참 운동권 내에서 문화 관련 일을 하다가 연극이 하고 싶어서 그만둘까, 하고 있었는데 선배한테 오디션 보라는 연락이 왔어요. 오디션에 됐고, 그렇게 해서 극단 ‘한강’에 들어가게 된 거예요.
얼렁뚱땅 프로 데뷔를 한 거네요?
그렇죠. 선배들도 많았는데 그 역할을 내가 하게 돼서 눈치가 많이 보였죠.
연극 배우를 해야겠다, 생각을 하고 오디션을 본 거였어요? 아니면 선배가 봐보라니까 한번 해본 거였어요?
그때쯤 우리 선배들이 날 공연을 하게 꼬시려고 한 번 불러낸 적이 있어요. 선배들이 하는 얘기에는 그냥 그랬는데, 그 자리에 배우 박명신씨가 있었어요, 그 언니가 너무 아무렇지 않게 “너희 왜 그렇게 얘기해? 야, 하기 싫으면 하지 마, 네가 원하면 하는 거야” 그러는데, 그 말이 계속 맴도는 거죠.
선택에 대해서 고민을 하게 했네요.
그날 밤새 고민하고 꼭두새벽부터 일하던 데 가서 사람 오기만을 기다렸어요. 누가 오자마자, 저는 연극해야겠어요, 하고 나왔어요.

그렇게 극단 생활을 시작하셨군요. (사이) 왜 그렇게 아련한 표정을 지으세요?
극단이 해체될 때 아주 힘든 시간을 보냈어요. 내가 있었던 동아리도 그랬고, 우리끼리 공부하고, 훈련하고, 모든 걸 다 같이 하는 풍토가 한강에도 있었어요. 내가 들어가고 나서 선배들이 한번 빠져나가고 새 대표가 ‘한강의 연극 언어’라고 해서 새롭게 체계를 잡아가고 있었죠. 다른 극단이랑 차별화되는 색깔을 가지려고 노력을 많이 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말이 안 되긴 한데, 오전 8시부터 웜업하고 만들어둔 프로그램에 따라서 스트레칭하고, 개인 기록해가면서 근육 단련하고, 호흡과 발성은 프로그램이 다 안 짜져서 각자 알아서 하고, 이거 하고 나면 12시였어요. 오후에는 작품 연습하고, 1인 1스탭제라고 해서 각자 맡은 영역에서 일도 하고, 정말 바빴어요. 일반인들의 연극 접근성을 높이려고, 극단이 갖고 있었던 공동창작 방법론을 알리는 교육도 많이 다녔어요. 예술강사 같은 게 생기기 전에, 그런 역할을 했던 거죠. 그러면서 술도 열심히 먹었어요. (웃음)
근데 다들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있었고 정체돼있던 당시 단계를 넘어가야 하는데 잘 안 되고 있었어요.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가를 두고 만나서 공동창작 작업을 해가는 과정에 대한 우리의 이상향은 있는데 도달이 잘 안 되는 거죠. 리드하는 선배는 선배대로 답답해하고 후배는 후배들대로 힘들고. 그러다가 문제가 한 번 크게 생겼고 극단을 정말 대대적으로 재정비하게 됐어요. 그 과정에서 다들 생채기가 너무 크게 나버렸죠.
저도 어느 순간 발길을 끊게 됐어요. 기존의 것을 재조합한 거지만 우리만의 작품 분석법이 있었거든요. 안 쓰면 잊어버리니까, 그런 방법들을 정리하는 모임은 해나가고 있었어요. 주변에서 후배들은 나한테 극단을 새로 만들라고 하는데, 도망을 갔어요. 내가 결별한 그 사람들이랑 예전에 집에 가는 지하철 안에서 이거 하면 재밌겠다, 나중에 그거 한번 꼭 해보자, 그랬던 시간들이 있었어요. 그 사람들이랑 못 이룬 꿈을 이 새로운 사람들이랑 뭘 어떻게 해야되는지… 그 사람들이랑 함께 그 꿈이 끝났다고 생각을 했던 거 같아요.
연극하는 문화가 정말 많이 달라졌네요. 물론 안 그런 팀도 있지만, 지금은 보통 모여서 작품 연습하고 헤어지는데요.
그때는 하루 종일 같이 있었어요. 극단 내에서 교육도 이루어졌고, 사람을 책임지면서 가는 시스템이었죠.
그런 공동체 문화가 계속 이어질 수 없었던 건 2000년대 들어서면서 사회가 바뀐 것도 있는 것 같아요.

90년 중반부터 있어온 대학을 포함한 사회의 변화, 대학로에서 벌어져 왔던 젠트리피케이션, 제작비의 상당 부분이 극장 대관료로 극장주에게로 들어가고, 결국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뻔하지만 속상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연극하는 사람들 자취방도 대학로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죠.
그렇죠. 별로 질문도 안 한 것 같은데 이미 분량이 넘치는데요. 덧붙이고 싶은 얘기가 있으시다면요?
솔직히 요새는 옛날 얘기는 술술 할 수 있겠는데, 현재에 대해서는 입이 잘 안 떨어져요. 나이 먹었다는 걸 피할 수가 없잖아요. 아까 얘기했던 대학로 땅값 문제, 연극인들 인건비 문제, 미투에 관련된 문제, 이런 온갖 문제들에 대해서 손가락질받을 나이가 된 거죠. 아직 이 판에 있다는 건 개인적인 걸 포함해서 온갖 문제를 뚫고 어쨌든 버텼다는 거거든요. 이게 다르게 말하면 피해왔거나 망각해왔다는 얘기일 수도 있어요. 현재 뭔가를 해보려는 사람으로 있었으면 모르겠는데 그렇지는 않아서… 누가 나한테 물어보진 않지만 어떤 상황을 맞닥뜨리면 얼굴이 빨개지거나 무안해지거나 그래요. 할 말이 없는 거죠.
저도 점점 느껴요. 예전에는 선배들 뭐 했어, 어른들 뭐 했어? 이러면 됐는데 이제는 대답해야 할 나이가 돼가는 거죠.

마지막 연극데이트 공식질문입니다. 백현주한테 연극이란?
(한숨, 그리고 침묵) 극단에서 나온 게 나한테 생각보다 굉장히 힘든 일이었더라고요. 몇 년이 지나고 나서도, 오랜만에 한 번씩 한강 사람들을 만나면 다들 “솔직히 나…”라고 하면서 비슷한 얘기를 했어요.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자다가 벌떡 일어나고, 갑자기 숨이 막혀오고, 정말 끝도 없는 분노가 치밀어오른다고. 나중에 돌아보니까 우울증이었던 거 같아요. 당시에는 그걸 모른 채 그 상태로 꽤 오래 지나왔죠. 아까는 그냥 같이 꿈꿨던 사람들과 결별하고, 라고만 얘기했지만, 연극에 내가 뭘 기대해도 되는지, 이걸로 뭘 더 할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 사람들하고는 사회의 어떤 면을 보자, 남들이 안 하는 얘기를 찾자, 우리의 비전에 대해서 같이 얘기할 수 있었죠. 비슷하게 공유하고 있었던 베이스가 진짜 폭파가 돼버린 거예요. 정말 서로 다른 베이스에서 만나는 사람들하고 무슨 얘기를 같이 할 수 있는 건지, 이럴 때 나한테 연극이 뭔지, 찾아다니는 시간이 길었는데 쉽지는 않더라고요. 사람한테 상처받기도 하고, 뜻이 맞을 줄 알았는데 아니기도 하고, 이런 생각을 계속하고 있는 것도 너무 힘들고 피곤하고. 내가 만들 용기는 없지만, 다시 같이 모여서 뭔가를 하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또 나도 내가 만족할 만한 사람은 아니고. 어쩌면 누군가 손을 내밀었는데 내가 무서워하기도 했을 거고. 이렇게 되었으니 연극을 하고는 있으나 이걸 통해서 내가 바라볼 수 있는 미래가 있는지는 나한테 매번 어려운 질문이 돼요. 계속 뭔가를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에 와서 보면 뭘 하고 있었던 건지… 그런 상태에 있는 거죠. 잠깐 떠났다가 돌아와 보니 공연을 많이 못 본 새에, 대학로에 새로운 흐름도 생긴 것 같은데, 문외한이 돼버린 느낌이 있어요. 이십대 때는 뭘 모르면 앞으로 알아가면 될 것 같았는데, 이제는 어디서부터 물어야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중간에 붕 뜬 느낌이랄까요?
현재는 연극이 모호하고 미래는 아직 보이지 않지만, 매일 매 순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상상하는 즐거움을, 어떤 지향과 거대하고 뜨거운 포부는 잃어버렸지만 대신 즐기는 법을. 연극이란 놀이터를 마음속으로 확장해가면서, 번듯한 극장이 아니어도, 꼭 세트 조명 음악이 없어도 가능한 것까지 포함해서요. 그리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면서 천천히… 후배들한텐 부끄럽고 미안할 따름이지만 그래도 제 버릇 개 못 주고 혼자서 작고 희미하게나마, 나이에 맞게 길고 오래 할 연극을 가끔씩 그려보면서, 내 안에서 새롭게 고개 쳐드는 꿈을 기다리고 있어요.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백현주(배우)
2006 아시테지 주관 서울연극제 연기상 수상
1994 민족극 한마당 신인연기상
주요작품
<식구를 찾아서> <랭귀지 아카이브> <변두리 멜로> <그 봄, 한낮의 우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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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새롬

부새롬 연출가, 무대디자이너
달나라동백꽃 대표
주요작품 <뺑뺑뺑> <달나라연속극> <로풍찬 유랑극장> <뻘> 외
puromy@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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