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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끝줄 관객

공연기록가 강일중

부새롬_연출가, 무대디자이너

제148호

2018.09.20

어쩌면 관객분들 중 누군가는 이 분을 이미 만난 적이 있을 지도 모른다. 조그만 소극장 제일 뒤쪽에 카메라를 설치해두고 있는 나이 지긋한 남성분을 본 적이 있다면 강일중 기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손에 꼽히게 몇 번 해본 적은 있지만 인터뷰 대상이 된다는 게 굉장히 어색해요.
주로 ‘인터뷰어’셨겠죠.
내가 무슨 얘깃거리가 될 수 있나? (웃음)
저는 사실 얘기를 많이 들어볼 수 없는 분들의 얘기가 궁금하더라고요. 연출, 작가, 배우들은 인터뷰를 그래도 자주 접하잖아요. 기자를 인터뷰 해보는 건 처음이라서 재밌을 것 같은데요. (웃음) 연극인들한테는 기자님이 친숙한데 일반 독자분들한테는 낯설 것 같아요. 소개 좀 부탁드립니다.
기자이고, 평론가이기도 하고, 공연애호가이기도 하고, 어떻게, 연극에 초점을 맞춰서 얘기해야 되나요?
꼭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이름이 몇 차례 변경되긴 했지만 요즘 사람들한테 알기 쉽게 얘기하면 현재의 연합뉴스의 전신인 언론사에 1977년에 입사해서 2010년에 정년퇴직 했고, 이후에 3년간 공연전문기자를 했어요. 그러니까 36년간 연합뉴스 기자로 일을 한 거죠. 입사하고 몇 년간은 여러 부서를 돌면서 경험을 쌓았고, 이후엔 경제 산업 분야 관련 분야에 있었어요. 경력에 관련해서는 특별하게 얘기할 게 없어요. 문화부에 있었던 적도 없어요.
정말요?
2005년 당시 논설위원실에 있었는데 제 업무를 선택할 수가 있어서, 그때 문화 쪽을 선택했던 거죠. 처음엔 공연계, 여성계를 포함해서 문화계 사람들 인터뷰를 했는데, 범위가 너무 넓더라고요. 조금 지나서는 공연 관련한 취재랑 인터뷰만 했어요. 리뷰도 쓰고 공연계의 중요한 이슈에 관련한 기사도 쓰고요. 공연전문기자까지 포함해서 2013 년까지 그 일을 한 거죠. 지금은 대학에서 ‘공연예술 리뷰 워크숍 과정’의 강사를 하고, ‘여성신문’의 공연전문기자를 하고 있어요.
한 번도 여쭤본 적은 없지만 당연히 문화부 기자시겠거니 했어요.
많이들 오해해요.
왜 갑자기, 뒤늦게 문화 분야를 선택하셨어요?
긴 얘기지만 좀 요약해서 얘기하면, 사회인, 직장인, 생활인으로서 생활을 하다보면 어느 시기에 정점에 달하거든요. 대개는 그 시기를 피부로 느끼게 돼요. 뉴욕특파원을 거쳐서 국장을 했는데, 언론사에는 국장을 한 다음에는 임원이에요. 임원은 회사 경영과 관련된 일을 하게 되는데 내가 경영과 맞나, 경영과 안 맞다면 국장 이후에 내가 과연 뭘 해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한 거죠. 국장을 하기 직전에 2000년에서 03년까지 뉴욕특파원을 했어요. 원래는 경제부 기자로 간 건데, 뉴욕이 공연 예술의 메카잖아요. 거기서 회사에서 시키지도 않았는데 뮤지컬, 오페라, 현대무용과 관련한 문화 기사를 독자적으로 많이 썼어요. 나중에 경제 국장을 하면서 시각예술까지 합쳐서 뉴욕 예술계를 소개하는 『뉴욕 문화가 산책』이라는 책도 썼고요. 이런 경험들이 2005년에 미래에 해야 할 일을 결정할 때 영향을 끼쳤죠. 제2의 인생 비슷하게, 나머지 인생동안 할 수 있는 일이면서 조금은 공적인 보탬이 될 수 있는 일이 이쪽이라고 생각을 했고 매진을 하게 됐어요. 특별한 것도 아니고 누구나 다 생활인으로서 자기 미래에 대해 고민하고 결정하는 거랑 같은 거죠.
뉴욕에서 공연 예술, 시각 예술을 찾아다니셨던 건 원래 예술에 관심이 많으셨던 건가요?
있었다고 볼 수가 있죠. 원래 신문방송학이 전공이었고, 부전공이 영문학이었는데 부전공이 훨씬 재밌었어요. 내가 다닌 대학이 천주교 재단이라서 신부 교수들이 많았는데, 몇 분의 강의가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지금은 공연하는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셰익스피어의 <햄릿>, 브레히트의 작품, 연극 분야는 아니지만 스트라빈스키, 바그너, 소위 현대인들의 번민과 좌절을 예술적인 양식으로 잘 표현한 사람들에 대해서 명강의를 하셨어요. 거기에 감명을 많이 받았죠.
사실 원래 목표는 문화부 기자였어요. 그런데 내가 멋모르고 기자가 됐어요. 당시에는 기자 생활을 처음 하면 사회부에서 경찰 출입부터 시켰는데, 나도 관행에 따라서 5년 반 정도 했어요. 그걸 하다 보니까 예를 들자면 노숙자, 588이라고 불렸던 청량리의 창녀, 도둑, 살인마들의, 이 사회의 밑바닥, 어둠 속의 삶을 많이 알게 됐어요. 그런 경험이 기자라는 직업에 대한 만족감을 줬다고 할까요. 그리고 회사라는 곳이 내가 하고 싶다고 문화부를 하고 그런 게 아니니까, 몇 부서를 거쳐서 발령이 경제부로 나게 됐고, 하다 보니까 전문가가 돼버린 거죠. 나중에 원래 문화부를 하려고 들어왔는데, 언제 문화부로 가보지, 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때가 늦었던 거죠. 조직 생활에 대한 문제지만, 이미 문화부에서 젊은 시절부터 자리를 굳히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내가 뒤늦게 파고 들어가면 서로 불편해지게 되니까요. 아까 얘기했듯이 국장을 하고 난 이후에 논설위원실로 가게 되면서 대학로, 공연계 다니면서 취재하고 글을 쓰게 됐죠.

동료들이 기자님을 되게 독특하게 생각할 것 같아요.
맞아요. 공연 취재 때문에 좋은 카메라가 필요해서 회사에 요청을 했는데 문화부도 아니니까 논설위원실에는 지급을 안 해주는 거예요. 사비로 장비를 사서, 난 전문가가 아니니까, 셔터 누르는 것부터, 앵글 잡는 법, 어두운 공연장에서 찍는 법, 이런 것들을 다 쫓아다니면서, 같이 취재 다니는 사람들한테 배웠어요. 보통 공연 취재 기자들은 젊잖아요? 나이가 좀 있는 기자들은 낯익은 사람들이고, 다른 기자들이 보기에는 의아했을 거예요. 나이는 있는데 생소한 얼굴이니까.
내가 문화부 기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연극이나 공연, 그 세계에 진입해서 어울릴 수 있었던 것은 사진과 영상 이미지에 투자를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이미지로 기록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공연에 관한 글을 쓰고 직접 찍은 영상을 편집해서 사진이랑 같이 게재를 해왔는데, 그런 식으로 공연 취재를 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처음엔 저 나이 든 사람이 누군가 했다가도, 취재원들하고 금방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보통 신문에 실리는 리뷰랑 달리 긴 호흡의 평론을 기고해온 것도 도움이 많이 된 것 같고요.
경제부 기자를 하실 때도 공연을 많이 보셨나요?
뉴욕 특파원 가서는 많이 봤는데, 그 전에는 1년에 한두 편, 간혹 봤어요. 가을에 하는 공연예술축제의 양대산맥이 ‘서울국제공연예술제’랑 ‘SIDance(시댄스)’라고 ‘서울세계무용축제’가 있는데, 시댄스의 예술감독이 연합뉴스기자 출신이고 내 후배예요. 그 친구랑 문화적 소양이 잘 맞아서 친하게 지냈는데, 덕분에 시댄스 작품을 많이 봤어요. 고릿작 같은 얘기지만, 대학 때는 삼일로창고극장에서 <빨간 피터의 고백>, 실험극장의 <에쿠우스>, 당시 아주 유명한 연극은 몇 편 봤어요. 여자친구 환심 사려고. (웃음) 취미가 있었다는 건 분명하죠. 음악도 좋아했고, 공연 보는 것도 좋아했는데 직장 생활하다 보면 그런 것들이 다 생활에 묻히게 되죠. 문학 쪽에도 관심이 많았어요. 대학 때 공부를 굉장히 안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요인 중의 하나가 소설이나 시를 많이 읽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수업이 지겨워서 제일 뒷자리에 앉아서 <페스트> <이방인> 같은 당시 유행하던 실존주의 문학책도 많이 읽었고, <문학사상> 같은 월간 문학지를 몇 개씩 사다 읽고 그랬어요. 혼자서 평도 해보고 그랬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이런 경험들이 진로에 영향을 다 준 것 같아요.
지금은 예술 애호가라고 해야 할까요, 감상자의 위치에 계신데, 창작을 해보신 적 있으세요?
해본 적은 없어요.
생각도 안 해보셨어요?

해보고 싶기야 했죠. 고3 때 드럼을 배웠거든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클 때고. 불안감이 생기면 모든 걸 부정하는 경향이 생기잖아요. 그때는 학교를 왜 다니나, 대학을 가기 위해서 이렇게 고생을 해야 되나, 자꾸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죠. 결국 대학을 안 가겠다고 선언하고, 드럼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나름 괜찮은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대학을 안 간다니까 넌 학생이 아니다, 그래서 출석도 안 부르더라고요. 당시는 그랬죠. 결국엔 드럼을 그만두게 됐는데, 마음속에 있는 열정이랑 실제 구현할 수 있는 건 너무 별개더라고요. (웃음) 배우면서 늘고 주변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면 계속 자극을 받고 성장할 텐데, 자꾸 가르쳐줘도 왜 이렇게 못하느냐, 그런 소리를 들으니까 의기소침해진 거죠. 그리고 당시만 해도 예술가는 미래가 없는, 가난하고 못 배운 딴따라라는 인식이 강했던 시대니까 일단은 대학을 들어가자로 생각이 바뀌었죠. 대학에서도 한동안은 했는데, 역시나 (웃음) 음악을 즐겨듣는 것, 음악에서 영감을 받는 거랑 직접 하는 거랑은 다르다는 걸 깨닫고 중단했죠. 예전에 습작 비슷한 것도 해봤지만 내가 할 일은 아니다, 싶었어요. 성과를 알 수 없는 불투명한 미래에 거느니, 언론인으로서 글을 쓰고, 공연을 보고 나름의 시선으로 리뷰를 쓰고, 그런 게 나한테 맞고, 더 이상 욕심을 부릴 필요는 없는 거죠.
군대에 있을 때 영어공부를 하려고 영한대역으로 된 서머싯 몸의 <써밍업 The Summing Up>을 읽었어요. 자전적 에세이인데 젊을 때는 예술적 창작력이 불쑥불쑥 나타나기도 하고 좋은 결과물이 나오기도 하지만, 소위 영감과 예술혼이라는 것이 영속적으로 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심사숙고해서 자신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는 내용이 있어요. 나는 예술가 타입은 아닌 거 같다, 는 판단을 하고 진로를 결정할 때 영향을 많이 끼쳤어요. 현장에 가고, 누군가를 인터뷰하고, 분석해서 글을 쓰고, 일을 하면서 기자하길 잘 했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평생 정말 즐겁게 일했으니까 결정을 잘 한 거죠.

잠깐 쉬는 시간

저를 처음으로 영상 인터뷰하신 분이 기자님이셨어요. 정말 덜덜 떨었는데. (웃음)
내가 부 연출 극단 창단공연 때 인터뷰 했을 걸.
그때 저 같은 초짜 연출을 영상 인터뷰 해주시는 게 너무 신기했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여유가 되면 가능한 젊은 연출, 작가의 작품을 많이 보려고 하고, 보는 편이에요. 그중에 창의성이 두드러지고 앞으로가 기대되는 사람들이 보이고, 계속 눈여겨보게 돼요. 부 연출을 예로 들면 이전에 했던 작품들 자료를 쭉 모아둔 게 있어요. 그래서 신작을 한다, 그러면 이전에 뭐 했나, 다시 찾아보고 그래요. 2007년 공연부터 아카이빙을 시작해서, 2009년도부터는 웬만한 중요 공연들은 사진 자료, 보도 자료, 다 아카이빙을 해놨어요.
정말 공연에 애정이 많으신데, 밖에서 보는 한국 연극은 어떤 것 같으세요? 질문이 너무 넓은가요? (웃음)
내가 오랫동안 연극을 지켜봐 온 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걸 분석하고 평가할 위치는 아닌 것 같아요. 나름대로 지속적으로 발전해가고 있는 거 아닐까, 생각해요. 지난 일련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일들, 블랙리스트 사태 같은 외압을 겪으면서, 연극인들이 조금 더 단단해지고 사회적으로 해야 할 일을 더 분명하게 깨달은 것 같은데 긍정적으로 보여요. 평생을 통신사 기자 생활을 해서 그런지, 중립적인 시선으로 양면을 보는 습관이 있는데, 우리 연극계도 양면이 충돌하는 가운데 나아가가고 있다고 봐요.
긍정적인 면이 뭐가 있을까요?
해외와 문화예술적인 교류가 많아지면서 새롭게 자극받은 것들을 점점 촌스럽지 않게 소화하는 것 같아요. 예를 들기 좀 어려운데… 2009년엔가 오스터 마이어의 <햄릿>에서 영상을 적극적으로 쓴 게 우리 연출가들한테 영향을 많이 준 것 같아요. 처음엔 영상을 그런 방식으로 쓰는 게 좀 어설펐는데, 점차 지나니까 나름의 무대 미학으로 발전시켜 가더라고요. 근데 부 연출이 물어보는 건 흐름 속에서의 얘기 아닌가?
아니에요. 왜 만날 정치적인 얘기만 하느냐, 공동창작 지겹다, 시기에 따라 변하는 관객들의 리뷰를 보게 되는데, 지금 한국 연극은 어떻게 보일까, 궁금했어요.
공동창작 얘기를 하자면, 지금 큰 흐름 중의 하나라고 보여요. 여기에도 장단점이 있을 텐데, 그것들이 서로 엉키면서 나은 방향으로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작품이 안 좋았기 때문에 넌 그거 하지마, 또 어떤 작품이 좋았다고 해서 넌 앞으로 그것만 해, (웃음) 그건 아니라고 봐요. 그리고 어떤 추세가 있다면 그건 어떤 면에서는 관객의 수요이기도 하고, 욕망이기도 한 거예요. 많은 관객이 싫어하는데 추세가 될 수는 없어요. 큰 흐름 속에 관객의 욕구가 있기 때문에, 창작자들이 같이 가는 거죠.
그럼 부정적인 면은 뭐가 있을까요?
긍정적인 면의 뒷면이겠죠. 방금 얘기한 것과 관련해서는, 깊은 사유 없이 유행에 따라 작품을 만들게 되면 반작용이나 부작용이 있겠죠. 그리고 요즘 케이블 채널 같은 데서 우후죽순으로 드라마를 만들다 보니까 좋은 배우들이 많이 빠져나가는 것 같아서 좀 안타까워요. 예술에 대한 집념을 가진 전업 연극배우들이 많이 늘어나면 좋겠지만, 또 생활의 어려움을 생각하면 뭐라고 할 수도 없죠. 지원 때문에 연극 질이 나빠진다, 소액다건으로 하는 게 문제다, 지원에 관한 이슈도 오래됐고 자주 거론되죠. 정책을 만드는 사람이나 그 수혜자들, 양쪽이 모두 숙제로 안고 하나씩 풀어나가야겠죠. 근데 이런 것들에도 부정적인 면만 있는 건 아니에요. 나는 부정적인 것에 대해 얘기를 잘 못해요. (웃음)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좀 중복되는 질문일 수 있는데 연극계에서 이런 건 좀 바뀌었으면 좋겠다, 싶으신 게 있나요?
예술 활동에 대한 행정적인 측면에서 연극인들한테 부담을 주는 면들은 정책적으로도 고쳐져야 하지만, 연극인들 스스로도 어떤 면에서는 광의의 패배의식을 갖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자조적이거나 패배적인 의식에서 벗어나서 스스로 자신감을 가지고 커나갈 수 있는 힘을 좀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좀 막연하고 추상적인 얘기이긴 하죠. (웃음)

마지막으로 연극데이트 공식질문입니다. 강일중 기자님한테 연극이란?
나와, 나의 삶, 그리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세계를 되돌아볼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 기자 생활을 하면서 실제적인 삶의 현실 속에 있었다면, 그야말로 삶에 대해서 알 수 있게 해주는 게 연극을 포함한 공연예술인 것 같아요. 그래서 기자생활의 마지막과 그 이후를 이곳에서 보내고 있는 거죠.
하나만 더 질문 드릴게요. 앞으로 꿈이 있으시다면요?
알 허쉬펠드(Al Hirschfeld)라고 브로드웨이의 유명한 삽화가가 있었는데, 백살 생일이 되기 며칠 전까지 왕성하게 활동하다가 갑자기 쓰러져서 죽었어요. 나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계속하고 싶어요. 요즘 스스로 ‘공연기록가’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는데, 앞으로도 글, 사진, 영상으로 공연을 지속적으로 기록하면서, 사람들 만나고 공연 보고 그러는 거죠.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강일중(공연기록가)
기자, 평론가, 공연애호가.
저서: 『공연예술축제를 만드는 사람들』(연극과인간, 2009) 『뉴욕 문화가 산책』(연극과인간,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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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새롬

부새롬 연출가, 무대디자이너
달나라동백꽃 대표
주요작품 <뺑뺑뺑> <달나라연속극> <로풍찬 유랑극장> <뻘>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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