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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인이 만난 사람] 최윤석X전진모

극장에서, 극장을

전진모, 최윤석

제160호

2019.05.30

시각예술 작가인 최윤석을 알게 된 것은 신촌극장에서였다. 큐레이팅 그룹 '미팅룸', 황정인 큐레이터에게 소개를 받아 극장 라인업 작업을 같이하게 되었다. 그의 <이게 아니었는데>(2017) 작업은, 다소의 오브제와 영상, 그리고 짤막한 퍼포먼스로 구성된, 분명히 시각예술 특징의 작업이면서도, 전시 혹은 공연예술 중 어느 한쪽으로 쉬이 분류해 넣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저 작품 전반이 좋았고, 특히 극장 공간을 안팎으로 잘 활용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작가 활동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알고 있었던 그가, 연출이면서 극장을 운영하고 있는 나와 비슷하게도, 기획 일을 병행하고 있다는 것을 안건 꽤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다. 더욱이 (이미 퍼포먼스/극장 작업들을 활발히 하고 있는 작가들과 비교하자면) 시각예술 작가로서의 정체성이 뚜렷하다고 여겨졌던 그가 앞으로 ‘극장형 전시’를 기획하려 한다는 게 무척 흥미로웠다. 그리하여 시각예술 작가인 그에게 그가 경험하고 바라보는 ‘극장’에 관한 이야기를 청하게 되었다.
전진모
극장 작업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최윤석
일단 회화 작업으로 출발했다. 그림을 그리면서 좀 더 근원적인 형태의 것을 찾고 싶었고, 그게 드로잉이었다. ‘드로잉’에 퍼포먼스적인 요소가 많다고 생각했고, <무제 : 여덟 시간의 드로잉>(2011)이란 제목으로, 종이 위에 계속 선을 그으면서 그 소리가 종이 밑의 음향장비를 통해 증폭되어 공간을 채우게끔 하는 작업을 했다. 또 내가 갖고 있는 신체의 한계랄까, 내가 결코 닿을 수 없는, 살면서 평생 만져볼 수 없는 내 신체 부위가 있지 않을까란 질문에서 출발해 등에 드로잉을 하는 퍼포먼스, <메이킹 발라드 프롬 스크래치>(2011)를 진행하기도 했다. 전시공간이 극장으로 잠깐 바뀌는 경험들이었는데, 다만 너무 일회적으로 휘발되어 날아가 버렸다. 회차도 1, 2회로 한정적이었고. 그러다 두산아트랩 <유리거울>(2017)/신촌극장 <이게 아니었는데>(2017) 작업을 하면서, 보다 긴 호흡을 갖고 극장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최윤석
전진모
극장 작업은 퍽 최근에 시작되었다.
최윤석
극장 경험이 많지 않다.
전진모
이 대화에 보다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최윤석
(웃음) 어쨌든 조금 다른 얘기겠지만, 퍼포먼스를 하다 보니 기록을 위해 영상을 찍게 되었고, 그러다가 영상 매체로 넘어가고, 편집도 하게 되었다. 어쩌면 이 편집의 경험이 기획/연출의 경험으로 연결된 것도 같다.
전진모
관점의 이동 같은 걸까? 잠깐 앞으로 돌아가자. 드로잉에 퍼포먼스적인 요소가 많다고 했다.
최윤석
이를 테면 ‘유화’는 준비해야 하는 게 너무 많다. 캔버스, 물감, 붓... 하지만 ‘연필 드로잉’의 경우, 설령 메모 같은 것조차도 드로잉이라고 생각하는데, 정말 손에 잡히는 대로 생각하는 바를 바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보다 즉흥적인 요소가 많다고 해야 할까. 당시엔 준비가 많고 단계가 많은 작업들이, 장애물이 많은 것으로 여겨졌다.
전진모
그렇지만, 극장 작업에도 실상 많은 단계가 필요하다.
최윤석
어디까지나 당시 드로잉에 대한 생각이다. 지금은, 어떤 프로세스를 감내(?)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단계를 밟아가면서도 어떤 에너지나 온도를 잃지 않을 수 있는 노하우가 생기지 않았나 싶다. 단계와 절차 또는 사전계획이라는 것이 존재해야 작업이 된다는 경험이 쌓인 것 같다. 두산아트랩에서도 많이 배웠다. 독자적인 판단은 가능하지만, 독단적인 행동은 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유리거울>에서 나는 (아티스트 작업을 들여놓은 일종의 프레임을 만들었던 것이므로) 연출이라기보단 기획의 역할이 강했다고 생각하는데, 참여 예술가들이 원하는 제반 사항이나 요구사항들을 무리 없이 충족시키고 누수 없이 무탈하게 진행하기 위해선, ‘단계적 절차’, ‘사전계획의 치밀함 혹은 신중함’ 같은 것들이 필요하다는 경험을 했던 것 같다. 극장에 대한 경험의 부족이기도 했다.
전진모
‘극장형 전시’라는 건 뭘까? 일반 전시공간과 달라지는 게 뭘 지 궁금하다.
최윤석
뚜렷한 정체는 아직 모르겠다. 다만 달라지는 건 확실히 있다. 관객들을 머무르게 둔다는 것. 그래서 작가가 직접 자기가 짜놓은, 펼쳐놓은 판에 사람들이 머물며 물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모습을 본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준비한다는 것에서부터 다르다.
전시에는 전시의 가이드 격인 서문이란 게 있다. 미리 보건, 나중에 보건, 전시된 작품과 작품 사이 벌어져 있는 틈을, 전시 서문이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극장에선 그 이음조차 작품의 일환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점도, ‘극장형 전시’라는 것에서 기대하게 되는 부분이다.
전진모
작품과 작품 사이 이음새란 말을 들으니 생각나는데, 예전엔 시각예술 전시가 관객을 배려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었다. 한때 가졌던 생각이다.
최윤석
난 반대로 이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연극은 왜 이렇게 다 설명하려 들까?’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뭔가를 사러 갔는데 점원이 끝까지 쫓아다니는 듯 한 그런 경험? 친절과 불친절의 맥락에서, 우리는 충분한 틈을 벌려놓고, 설명을 생략해가며 말하는 데에 익숙한가 하면, 공연 쪽은 그 설명을 굉장히 명시하며 짚고 넘어가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했다. 작품을 어디까지 설명하고 어느 부분에서 말을 삼켜야 할지 그런 부분들은 늘 고민이 되고, 정말 한 끗 차이로 매력(호감)/비호감이 결정 되는 것 같다.
전진모
동의한다. 그런데 앞서 말한 시각예술과 공연예술이 관객과 맺는 관계란 건, 글쎄 이를테면 ‘관객을 책임지지는 않는다’, ‘나는 내 작업을 하고 있을 뿐이다’로 느껴지는 전시장의 분위기와 그와는 반대로 관객을 자신의 작업 안에 들여놓고 일정 시간을 같이 가야만 하는, 그래서 그 시간 동안 서로 어떤 동료가 되는 것 같은 공연장의 분위기와는, 역시 차이가 존재하는 것 같다.
전진모
최윤석
그러니까 무대와 객석이라는 게 모든 장르에 존재한다고 보면, 그 물리적인 거리가 서로 좀 다를 뿐이라고 생각한다. 미술 같은 경우는 그 거리를, 내가 기존에 작업하던 방식으로 보자면, 작업 자체에선 실질적인 거리에 대한 생각이 크게 없고, 디스플레이하는 과정에서 그 거리를 점점 좁혀가거나 넓히거나 하는 것 같다. 다만 연극은 작업 자체가 관객을 염두에 둬야만 하니까.
전진모
작업 자체가 갖게 되는 거리감과, 그것이 쇼잉(showing)될 때의 거리감을 좀 나누어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한편 연극의 맥락에서 보자면, 시각예술에서 작가의 작업은 텍스트 작업에 준하고, 디스플레이가 이를테면 연출/배우/디자이너 개념들을 포괄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작가가 디스플레이 과정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최윤석
연극에서는 이야기를 만드는 게 중요하지 않나? 서사? 일단 시간성을 가지고 이야기를 만들어나가고, 또 스토리텔링을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요소 아닌가?
전진모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과거엔 분명 이야기가 얼마나 흥미롭고 재밌는가만 보이던 때도 있었는데, 요새는 생각이 조금 다르다. 시간성과 얽혀 가장 중요한 요소는, 경험인 것 같다. 함께 하는 시간 동안 어떤 경험을 같이 쌓아나가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극장에서는 공간 전체가, 하나의 작품을 위해서 집중한 상태로 시간을 쓰는 것 같고, 그 점에서 전시와 큰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전시엔 동선이 존재하고 그 이동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다. 미술관에서의 경험을 떠올려보면, 전체가 묶이는 경험은 비교적 드물었던 것도 같다. 개별적인 작품이 마음에 남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 해야 하나?
최윤석
어떤 맥락을 만들고 하나로 묶어야 한다는, 미술 쪽에도 그런 강박이 분명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서문이 존재하고, 더 넓은 개념의 작가론을 만들고, 그 작가의 세계관을 하나의 덩어리로 귀결시키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엮는 방법이 확실히 다른 것 같고 또는 엮는 시점도 조금은 다른 것 같다. 공연 같은 경우엔 바로 그 자리에서 엮어 보여주고 싶어 하고, 미술 쪽에선 물론 그 자리에서 보여주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판단을 유보하고 싶어 하고, 의미 자체가 좀 이후에 형성되기를 바라는 그런 습성이 있는 것 같다. 그런 것들은 장르 불문하고 다 있다. 그러니까 판단을 유보하려는 버릇 같은 거. 묶을 수 있지, 그런데 살아있는 건 묶기 힘들다. 죽어야 한다. 현대미술에선 하나의 맥락으로 읽히는 걸 지양하는 경향도 꽤 크다. 그런데 내 개인적으론, 특히 최근의 개인전 <홈메이드>(2018) 같은 경우는 각각의 작품들이 서로 얽혀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아이들 놀이 중에 1, 2, 3, 4 점찍어 두고는 이으면 무슨 그림이 나올까 하는 그런... 꼭 그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그 강박에 대해 솔직하게 얘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물론 봤을 땐 또 동떨어져있는. 근데, 그건 빈 공책도 마찬가지이지 않나?
전진모
흰 공책. <그리고 흰 공책 가득 그것들이 씌어지는 밤이 왔다>(2018).
최윤석
빈 공책도 (웃음) 어떤 서로 잇기가, 어떤 단서가 굉장히 없었던 작업 같은데.
전진모
사실 이제 서사보다는, 경험 혹은 뉘앙스가 남는 작업을 하고 싶은, 그런 작업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다. 무언가 꽉 채우지 않더라도, 어떤 시간을 쭉 통과했을 때 형성되는 전반적인 무드 같은 작업. <흰 공책>은 분명 그런 욕구를 갖고 만든 작업이긴 하다. 아마 최윤석 작가와 나는 서로 반대편에서 같은 지점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최윤석
지난 개인전엔 확실히 머릿속에 극이 있었다. 어떤 이야기 같은. 나는 이제 묶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중인 것도 같다.
전진모
전시에서 그런 의도가 생겼을 때 관객이 뭔가 좀 달라지는 걸 느꼈는지? 어떤 서사가 구축되었을 때, 형성되는 관람 태도라든가,...
최윤석
없다. (웃음) 전시를 보는 사람의 관성도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전시를 좀 다르게 보게 됐다는 몇몇 반응이 있기도 했지만, 내 전시가 관객의 관성을 완전히 뒤바꿔놓을 건 아니었고. 오히려 술 취한 지인의 전화를 한번 받았다. 혹평인 듯, ‘전시가 너무 매끈해졌다’고. 허술함이나 느슨함을 기대했던 것 같다. 이런 생각도 드는데, 아마 어떤 서사가 있고, 여기서 삐죽삐죽 튀어나오는 것들을 미술적인 매체, 미술적인 언어로 드러내는 것이 인위적이거나 작위적이고 별로 효과적이지 않다는 얘길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러니까 혹자가 보기엔 설명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꼭 사족처럼. 작품이 너무 생각할 여지를 안 준다고 생각한 것 같다.
전진모
예전에 최윤석 작가가 연극에서 느꼈던 것처럼 너무 친절하다고 느낀 모양이다.
최윤석
그럴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발표를 하고 관객들을 초청하는 입장이라면 관객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순 없고, 다만 어떤 스탠스가 확실히 있어야 한단 생각이 든다. 예전엔, 이를테면 <올해의 질량>(2013)에는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쓴 영수증을 모아놓고, 갈아서 직조하는 작업이 있었다. 그때 나는 그걸 직조하는 데에만 몰두했다. 어떤 방식으로 전시할 것인지, 어떻게 효과적으로 보여줘야 할까에 대한 계획이 없었다. 이걸 직조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중요한 데 반해, 어떻게 걸고 하는 고민들이 무척 인위적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그땐 정말 그냥 놓았다. 바닥에 놓고 좌대에 놓고. 투박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다음 단계까지를 생각하려고 한다.
전진모
어떻게 보일까를 신경 쓰는?
최윤석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지금 다시 그 전시를 한다고 했을 때 뾰족이 다른 수가 있는 건 아니다. 또 여전히 ‘관객에게 어떻게 보일 것인가’에 너무 매몰되진 않아야 한다는 일종의 버팅김 같은 것도 있다. 어떤 텐션을 유지하면서, 관객에게 너무 가까지 가지는 않으려는. 작품과 관객의 적절한 거리감을 조정하는 데에 에너지를 많이 쏟게 되는 것 같다, 어떤 작업을 하든지.
전진모
무척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관객에게 내내 모든 걸 다 주고 있을 수만은 없다. 모든 게 관객에게 너무 편안하게 읽힌다면, 관객도 거꾸로 이걸 보고 앉아 있을 이유가 없다. 일종의 밀당이랄까? 그렇게 형성되는 리듬감이 더 중요한 걸 보게끔 하기도 할 테고... 아마 전시에도 비슷한 뭔가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전진모
다시 전시와 극장 얘기로 돌아가 보자. 지향이나 답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가 얘길 나눠온 바로는 전시는 어떤 느슨함, 그리고 극장, 그러니까 공연예술은 어떤 채움이라는 관성을 갖고 있는 걸까? 만드는 사람이건 관객이건?
최윤석
극장이, 아까 이야기가 나왔던 작품과 작품 사이의 어떤 간극조차도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러니까 누락되는 이야기들, 전시에서는 누락되는 이야기들을 극장에서는 끌어 올릴 수 있지 않나 생각한다. 물론 전시공간에서도 시도할 수 있다. 어떤 설치방법, 이를테면 좌대에 올린다거나... 그러나 화이트큐브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누락된 것들을 길어 올리는 일에 나는 대부분 실패했다. 예를 들어 신촌극장에서 올렸던 <이게 아니었는데>는, 내 개인적으로도 좋았고 또 사람들도 많이 기억하고 얘기하는데, 그 작업을 극장이 아닌 전시장, 화이트큐브에서 올린다고 생각했을 때, 거기서는 뭔가 투 머치가 된다는 생각이 든다. 신촌극장에서의 형식을 그대로 갖고 갈 때 과연 극장만큼 작동이 될 것인가, 아니면 극장에서의 경험이 없다고 전제하더라도, 작동 여부에 여전히 의심이 든다. 그게 왜 극장에서는 되고, 미술 공간에선 작동을 안 할까? 그건 잘 모르겠다. 다만 극장에선 누락된 것들을 길어 올리는 것이 가능하다. 극장은 그런 일에 확실히 작동을 잘한다. 반강제성 같은 것들도 크게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전진모
회차, 상영시간, 적정인원, 러닝타임 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다는 약속 같은 건가?
최윤석
그렇다.
전진모
화이트 큐브는 생략을, 블랙박스는 뭐랄까, 드러내는 것 혹은 채워내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는 말들로 들린다.
최윤석
그렇게 정리가 될 수도 있겠다. 나는 어떤 사례를 스스로 경험하면서 레퍼런스를 구축하는 편이라, 그냥 오롯이 나의 경험으로 보자면, 각각의 공간에는 각기 다른 체계가 존재하고 판도 전혀 다르다. 그 안에서 내가 놀면서 체득되는 언어체계라고 생각한다. 거기서 얼마만큼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개인 성향의 문제라고도 생각하는데, 그런 체계에 대한 반감도 또 결핍도 있지만, 내가 그걸 드라마틱하게 전복시킬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틀 안에서 미세한 차이에 미세한 수를 둬가면서 노는 것을 선호한다. 내 경우, 그 공간의 특성에서 비롯하여 발화방식이 좌지우지된다고 생각이 된다.
전진모
재밌는 건, 나 스스로 신촌극장 공간에 그림들이 걸려있고, 좌대 위에 뭐가 올라와 있는 그런 모습들을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다. 이상할 것 같고, 어색할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이 내가 이 공간을 극장이라고 지칭하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공간 자체가 그런 특성을 갖고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최윤석
그림이 어디서 보여 지는가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론 미술관에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림이 미술관이 아닌 공간에 걸릴 때에 실상 소품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이를테면 카페 전시를 봐도 그렇다. 거기에 대해선 극도의 회의감을 갖고 있고, 무슨 대가는 아니지만, 내 이름을 걸고 그런 전시는 하고 싶지 않다. 무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의 경우는 그렇다. 물론 어디에나 잘 어울리는 그림들이 상업적으로도 유리하겠지만. 그림은 정말 어려운 오브제고, 그걸 잘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미술작가의 작품 혹은 그의 생각 같은 것들이 극장에서 잘 구현되는 몇몇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이주요 작가의 <십년만 부탁합니다>(2017) 같은. 나는 그 작업이 너무너무 좋았고, 이렇게 풀 수 있구나 감탄했었다. 서사도 가지고 가면서, 그 안에서 미술적인 요소를 충분히 활용하고. 거기서 생긴 극장과 미술작가가 만났을 때 생기는 어떤 마찰이 몹시 기분 좋게 느껴졌던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다. 이주요 작가의 <십년만>이 극장에서 보여진다는 점에서 ‘굉장히 미술적이다’, ‘그런데 이게 굉장히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약간의 마찰을 일으키면서도, 미술 공간에서 보이는 어떤 생략의 미랄까? 이주요 작가의 작품 형태가 그랬던 것 같다. 그 마찰이 아주 분명하게 있었다.
최윤석 작가와의 수다는 길고 즐거웠다. 축약하는 중 대체로의 이야기를 어찌어찌 갈무리하였다고 생각하면서도, 빠진 몇몇 대화가 아쉽다. 혹은 본인의 작업과 기획을 병행하는 최윤석에 대한 질문들로 범주를 더 넓혔어도 좋았을 것이다. 이 지면에 미처 기록하지 못한 대화에서, 우리는 작가와 연출로서는 미처 다 담아내지 못할 순간들을 위한 하나의 함수 상자이자 프레임으로서 기획 일을 또 극장 운영을 하게 되었노라고 공감한 바 있다. 어쩌면 그러한 관점에서 물리적인 극장 또는 전시공간을 넘어선 보다 더 다채로운 대화들을 이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 대화를 단초로, 작가이자 기획인 그의 작업들 가운데 보다 흥미로운 순간들을 발견해갈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차오르기도 한다.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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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석X전진모

최윤석X전진모
최윤석_시각예술작가
최윤석은 현재 서울에 거주하며, 생활반경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영상과 소리, 짧은 메모나 드로잉 등으로 기록하여 사생활에 잠복하고 있는 예술의 순간을 포착하는 일을 하고 있다. 최근 퍼포먼스와 영상, 그리고 기획 작업에 주력하고 있다. 2015년 서울 성북동 스페이스 오뉴월에서의 개인전을 비롯해 <이게 아니었는데>(신촌극장.2017), <홈메이드>(플레이스막.2018), 예술가들의 사생활을 대중 강연의 형식으로 선보이는 <유리거울>(두산아트센터. 2017/플레이스막레이져. 2018)을 기획했다.
yoonsukchoi.com

전진모_연출, 신촌극장 대표, 극단 아어
연출이 본업, 가끔 쓰기도 한다. 요사인 무엇보다 신촌극장에 골몰하고 있다.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 (두산아트센터. 2018), <그리고 흰 공책 가득 그것들이 씌어지는 밤이 왔다>(신촌극장. 2018)로 2년여 만에 연출 활동을 재개하였으나 올해엔 별다른 작업 계획을 갖고 있지 않다. 작업에 치이지 않는 삶이 목표 중 하나이며, 이번 생을 어떻게 책임지며 살까는 늘 숙제다.
theatre.sincho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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