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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가 만난 배우] 이리X김신록

삶과 무대와 객석과 사회의 접점을 통해 확보되는 ‘다중 현존’

김신록_배우

제166호

2019.08.22

이 글을 읽으시려는 독자님, 공연예술에 사용되는 ‘현존’이라는 용어를 들어보셨나요? 영어로는 Presence, 어원론적으로는 ‘누구 앞에 내가 있음/내 앞에 누가 있음’ 혹은 누군가 ‘나를 보고 있음’이라는 뜻을 지닙니다.1) 특히 연극에서 현존은 ‘배우의 현존’이라는 익숙한 문구가 드러내듯 주로 ‘배우의 연기술’ 측면에서 논의되어 왔으나, 퍼포먼스와 포스트드라마 등의 출현을 거치면서 보다 다층적으로 논의되고 있습니다. 극단 ‘여기는 당연히, 극장’의 이리 배우님을 만나 다양한 층위에서의 ‘현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았습니다.
‘여기는 당연히, 극장’(이하 여당극)의 작품들을 평할 때 ‘현존’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여당극 공연과 관련해 ‘현존’이 언급될 때 이를 어떤 의미로 이해하고 있나.
이리
우리 작품에 대해서는 ‘재현적 현존’이 아닌 ‘다른 현존’을 이야기 하는 것 같다. 재현적 드라마 안에서도 현존이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여당극 작품들, 특히 가장 최근작인 <21세기 연극...말이다>2)같은 경우는 허구의 재현 없이 배우가 바로 보이는 것에 대해서, ‘배우가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현존’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 같다. 드라마가 주는 일루전 없이, 배우가 그냥 무대 위에 서 있고, 크게 발화하고, 그게 바로 관객을 타격할 때 오는 소리의 물질성, 움직이는 배우의 물질성, 그 물질성 자체를 ‘현존’이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이리
<21세기 연극...말이다>의 경우, 공연이 장광설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동시에 신체적이라서 놀랐다. ‘한 명의 관객’이라고 설정된 한 인물의 말을 다섯 명의 배우들이 나눠서 각자 또 함께 발화하는 걸 보면서 어떤 방식으로 장면을 구축했는지 궁금했다.
이리
배우 각자가 ‘대사를 발화하는 기하학적인 구조’를 먼저 디벨롭했다. 극장에 들어갈 때까지 소위 ‘블로킹’은 하나도 안 나와 있었다. 극장 들어가서, 어쨌든 한 사람 대사를 다섯 명이 나눠서 한다는 컨셉은 있으니까 ‘한 명처럼 해보자. 그러니까 일렬로 서보자. 우리도 관객인데 관객 보면서 하면 이상하니까 무대 구석 쪽 보면서 하자.’ 하면서 빈 무대에서 대사를 발화했고, 연출이 밖에서 보면서 그 발화 구조에 기대어 전체 움직임을 조율하고 지시했다.
배우들의 말이나 몸이 갖는 기하학적 구조의 완성도나 에너지의 밀도가 높아서 바르바(Eugenio Barba)가 현존의 요건으로 제시한 ‘탈일상성(extra-daily)’, ‘전 표현성(pre-expressivity)’ 등에 대해 떠올렸다. 이런 요건들을 성취하기 위해 특별히 어떤 훈련이나 연습을 한 건가?
이리
이 공연을 준비하는 동안에는 도움받을 만한 엑서사이즈를 한두 번 정도밖에 안 했다. 대신 이야기를 많이 했고 그 결론으로 ‘감각을 인식하고, 인식을 감각하고자’ 했다. 이 극 자체가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생각이다 보니 배우와 관객의 ‘뇌 to 뇌’로 직접 전달하고 싶은데 그럴 수는 없으니까, 생각을 감각하는 것을 보여주고, 그 감각을 표현할 수 있는 발화방식을 찾았다. 거기에 더해 연출이 ‘~하는 듯’, ‘~적인 것’ 등을 발화할 때는 특징적인 포인트를 살려서 발화해 달라고 주문했다. 그런 힌트를 받고 나니까 말이 해체되기 시작했다. 관객‘들’, 배우사람‘들’처럼. 이렇게 하면 가만히 서 있지만 말에 따라서 몸이 같이 움직이게 된다. 몸이 곧 말이고, 말이 곧 몸이다. 서로의 말을 몸으로 감각하기도 했다.

(시계방향으로)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2016)©김도웅, <가해자탐구_부록:사과문작성가이드>(2017), <타즈매니아타이거>(2018), <7번국도>(2019)©이강물

말을 해체한다는 것, 말의 ‘의미’만큼이나 말의 ‘형식’에 집중하는 자체가, 배우에게 큰 표현의 자유와 물질적 현존의 가능성을 열어 주는 것 같다.
이리
맞다. 하지만 반대로, 배우가 아주 할 일이 많을 수도 있고, 그 양식 안에 갇혀야 한다는 점에서 어려울 수도 있다. 일례로, 배우가 인물이 아니라면, 나는 무엇인가. 한 명만 계속 이야기할 때 퇴장할 수가 없다면, 과연 나는 무엇으로 존재하고 있을 것인가. 이런 경우 여당극 배우들은 현타가 오지 않도록 자기만의 논리를 만들어 무대 위에 잘 존재하면서, ‘다른 사람이 뭐 하는지’ 잘 듣고 있는 것 같다. 그때 또 다른 의미에서 현존이 발생하는 것 같다.
잘 듣고 있는 순간 현존이 발생한다는 말에 동감한다. 식스 뷰포인트의 창시자 메리 오벌리(Mary Overlie) 역시 ‘자기인식(self-awareness)이 곧 현존’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자기인식이란 크게 자기 내부에 대한 인식과 외부에 대한 인식으로 나눌 수 있다. 내 안팎으로 일어나는 일을 잘 들을 때 현존하게 된다는 이야기인 것 같다. 여당극 공연처럼 말 그대로 상대방이 말하는 동안 그냥 가만히 잘 듣고 있어야 하는 그 순간, 본인은 배우 자신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나?
이리
작품마다 다르다. 이번 <21세기 연극...말이다>에서는 아예 ‘나는 누구냐. 여긴 어디냐. 배우와 인물 사이다.’라는 대사가 있다. 이런 ‘배우와 인물 사이의 존재 방식’은 다큐멘터리 연극을 주로 하는 ‘크리에이티브 바키’의 존재 방식과는 또 다르다. ‘관객’이라는 한 인물을 다섯 명의 배우가 함께 연기하고 있지만, 사실 이 ‘관객’은 구체적인 인물도 아니고 나라는 배우도 아니다. 다섯 명이 하나의 인물이면서 동시에 그 인물은 일종의 ‘보편인간’이다. 우리 극단 내에서 ‘인물연기’라고 부를 때 ‘인물’은 부조리극의 보편인간에 더 가까운 것 같다. 공연이 시작될 때부터 존재하고 공연이 끝날 때까지만 존재하는, 공연 상황에서 어떻게든 영향을 받는 인물 말이다. 인물을 연기한다기보다는 그 인물의 생각이나 말을 연기하거나 감정을 연기하기도 한다.
말, 생각, 감정을 분리하고 배우가 떨어져 나와 그걸 선택적으로 연기한다는 말인가?
이리
<7번국도> 같은 경우에는 감정이라는 요소를 더 많이 연기했다. ‘감정을 연기하는 것’과 ‘감정연기’는 다르다. 내가 연기하고자 했던 감정이란, 인물을 구현해 내야 하는 내 감정일 수도 있고, 우리 팀 전체, 혹은 제작자의 감정이었을 수도 있다. 그 인물의 실제를 보여주려고 노력하기보다 배우의 해석이나 공연 팀의 해석을 전면적으로 내세운다는 점에서 ‘현존’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있는 것 같다.
배우 혹은 창작진의 해석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확보되는 현존에 대한 논의가 흥미롭다. ‘극장/공연시간’이라는 폐쇄적 시공간 안에서 발생하고 사라지는 현존이 아니라, 창작 과정에서부터 준비되고 극장에서 전면적으로 제시되고 관객을 통해 극장 밖으로 이어지는, 시공간적으로 확장되는 현존에 대한 상상을 하게 된다.
이리
실제로 <7번국도>의 경우에는, 무대 위의 발화가 극장 밖까지 들리기를 바란다는 목적이 있어서, 대사를 상대가 아닌 관객에게 직접 프로젝션하면서 크게 소리를 지르는 형식으로 말하게 됐다. 사회적으로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주제, 공적으로 발화되어야 하는 주제를 다룰 때 압박이 심해서 극단적인 연기 방법을 택하게 되는 것 같다.
사실 연극이 가진 부정할 수 없는 현존의 가능성은 ‘배우가 관객 앞에 선다’는 직접성에서 온다. 그런데 여당극은 배우들이 관객을 향해 직접 프로젝션하는 경우가 많으니 무대와 객석 사이의 현존감이 발생하기가 훨씬 수월한 것 같다.
이리
여당극 공연은 배우들이 공연 내내 객석에 나불나불한다. 말을, 생각을 객석으로 막 집어 던진다. 자꾸 모든 순간을 객석을 향해 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관객이 계속 생각했으면, 관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객석을 흔들고 싶고, 극장을 뚫고 나가고 싶다. 관객에게 시간을 많이 주고, '기다려 보세요, 이제 곧 주제가 나옵니다.'라고 하면, 관객은 일루전 속에서 안전하게 관망하게 되고, 관찰자로 떨어지게 된다. 우리가 공연하는 주제나 내용은 사회적으로 관망할 만한 일이 아닌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더욱 객석에 자꾸 말을 걸게 된다. 그런 면에서 어쨌든 언어가 중요한 것 같다. 어떤 평론가들은 '제4의 벽을 뚫는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어떤 관념이나 개념이 기술적, 물질적 측면보다 중요하게 다뤄진다는 점에서 여당극 공연을 ‘개념 기반 연극’ 혹은 ‘개념연극’이라고 분류하기도 한다. 어떻게 생각하나?
이리
창작이든 해석이든, 텍스트 기반으로 공연을 하고 있다. 다만 ‘텍스트 이면의 무엇을 발생시킬 수 있는가’를 고민한다. 공연할 때는 그 이면의 것을 분리해내고, 분리된 것을 메인으로 전달하는 방식으로 연기하는 것 같다. 그러면 나머지가 소거되고, 소거되지 않고 남은 것이 주요 개념이 된다. 우리 공연은 1차원적이다. 분리된 것, 소거되고 남은 것, 그것만 보여주려고 하니까. 다른 공연들과 이 점이 다르다. 종합적으로 하지 않는다. 우리도 여러 레이어를 깔고 한꺼번에 보여주고 싶긴 한데, 그걸 연기로 다 해버리는 게 아니라, 대사, 동선, 조명, 소리, 그 외의 공연 외부 요소 등에서 계속 다른 레이어를 추가해가면서 개념들을 쌓아가는 거다. 
크레이프 케이크처럼?
이리
라자냐처럼? 하하. 일단 해체해야 새롭게 쌓을 수 있다. 배우는 한 겹을 맡아서 1차원적으로 연기하고 나머지 겹들은 디자인, 극의 구조, 대사 안에 심어진 단서들이 쌓아준다. 배우들은 하나만 연기하면 되니까 몸을 쓰면서 강렬하게 대시하는 것 같다.
‘연극은 종합예술’이라는 무딘 말과는 결이 다른 느낌이다. 모든 요소들이 다 라자냐 한 판씩 가져오는 게 아니라, 한 판의 라자냐를 만들기 위해 각자 ‘한 겹씩만 담당하는 것’ 말이다. 이렇게 했을 때, 연기뿐 아니라 다른 요소들도 그 요소만의 현존을 획득하기가 수월할 것 같다.
이리
배우가 아주 작은 조각의 기능만, 희곡의 일면만 담당하고 있더라도, 작품에서 그 의미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알고 선택하게 되기 때문에, 나중에 다른 모든 요소와 내 연기의 아귀가 탁 맞았을 때 희열이 느껴진다. 다른 요소들도 마찬가지일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손발 맞춰서 전체가 ‘짠’하고 나왔을 때 종합예술이라는 게 말이 된다.
여당극이 이런 비재현적 연극을 탐구하게 된 이유가 있나?
이리
<여기는 당연히, 극장>이라는 제목의 첫 작품에는 사실 재현적인 장면과 비재현적인 장면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재현적인 공연에 대한 의문은 계속 이어졌다. 구자혜 연출도 그랬고, 나 역시도 개인적으로 대학 동아리에서 재현적인 연극만 할 때 맨날 엄마, 할머니, 남자 이런 역할만 해서 그런지 재현적인 연극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 그러다가 2014년 세월호 이후에, 구자혜 연출이 2015년부터 혜화동 1번지 동인으로서 4년 연속 세월호 기획 공연을 하면서, 그리고 이후에도 예술계 내 성폭력 문제, 군 의문사 문제 등 사회적으로 실제 일어난 일에 대한 공연을 만들면서, 연출이나 배우나 재현적인 공연을 만들기가 어려워졌다.
배우 입장에서는, 실제 사건과 당사자가 있는 상황을 연기해야 할 때 모든 것이 ‘허구’가 아닌 ‘거짓’으로 느껴지기 쉬운 것 같다.
이리
그래서 공연 전체나 연기 스타일도 개념적이 되는 것 같다. 그럼에도 어떤 장면은 재현적인 연기 방식이 요구되기도 한다. 그런데 빗대어서라도 세월호 등의 사회문제를 다룬 작품의 경우에, 내가 실제 당사자들의 마음을 어떻게 재현할 수가 있겠나. 이런 고민은 군 의문사 문제를 다룬 <7번국도>에서도 드러났다. 자식이 억울하게 죽고 1인 시위를 하는 부모의 마음을 내가 어떻게 알겠나. ‘마음속에서 뭐라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사자처럼 느낄 수 있는 다른 것을 찾으려고 했다.
어떤 걸 찾았나. 정서적 기억? 대체 감각?
이리
‘몸의 감각’이 쌓이면 연습 안 할 때보다는 실제 당사자들의 경험과 조금이라도 가까워질 거라는 믿음을 가졌다. 짐을 싸 짊어지고 피켓을 들고 있는 당사자들의 필사적인 감각을 배우가 연습실에서 실행할 수 있는 감각 안에서 찾아보는 거다. 나도 어떻게든 연습실에 매일 짐 싸 짊어지고 나가서 매일 피켓을 들어보고, 목소리를 높여서 치열하게 논쟁해 보면서, 연습실에서 배우가 경험하는 실제 감각과 실존 인물이 느꼈을 ‘몸의 감각의 접점’을 계속 찾아 나가는 거다.
유사감각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몸의 감각의 접점을 찾아간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또 개념연극을 한다고 알려진 여당극 배우가 ‘마음속에서 뭐라도 찾아야 했다'고 말하는 것이 신선하다. 사회적인 문제들에 천착해 공연을 만드는 이유가 있나.
이리
연극을 하면서 ‘이게 무슨 의미가 있지?’ 이 생각을 항상 한다. 이 공연을 하고, 이 연기를 하는 것이 지금 2019년 이 세상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를 계속 고민한다.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찾고, 그 의미를 구현하기 위해, 어떻게 관객과 만나고 전달할지에 대한 고민을 늘 갖고 있다. 작게는 나한테 이 공연이, 극단 내부적으로 이 공연이, 지난번 공연에 비해서는 이 공연이, 대학로에서는 이런 공연이, 한국연극계에서는, 대한민국에서는, 세계 연극계에서는, 그리고 내 삶에서는, 이 공연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하려고 한다.
커밍아웃을 한 배우이다 보니까 내가 어떤 일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여자배우로서도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일례로, <코끼리>라는 부조리극을 할 때는, 희곡 자체가 일본 남성이 쓴 옛날 희곡이다 보니 여성 캐릭터가 수동적이었는데, 여당극에서 하는 <코끼리>공연은 어떠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창작에 참여하는 사람에게 연극은 결과물만이 아니라 그 행위, 그 과정 자체로 의미를 발생시킬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특히 실제 사회문제를 다루는 공연의 경우 배우와 인물 사이에서, 나아가 배우와 관객 사이에서 완결적으로 존재하는 현존이라는 것이 가능한가, 혹은 연기적으로 가능하더라도 의미가 있는가, 생각한다.
이리
맞다. 그래서 때로 여당극의 공연은 공연하는 장소의 상황에 따라 약간씩 그 맥락이나 의미가 변환된다. 예를 들어 2016년에 혜화동1번지에서 초연한 <킬링타임>을 2017년에 블랙텐트에서 재공연할 때는 차 소리가 시끄럽고 분향소가 있는 광화문 광장의 장소적 맥락을 수용해서, 큰 소리로 집회하는 방식으로 발화했다. 내가 맡은 인물이 가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뻔뻔하게 운동권 여성의 목소리를 ‘전유’하면서 자신의 정당성을 역설했다. 날씨도 춥고 비도 오고 물도 차고 해서 다소 악에 받쳐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하하.
일종의 ‘수행적 전환’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맥락 불문하고 무대와 객석의 만남에서 발생하고 완성되는 현존이 아니라, 그 공연이 놓인 극장, 그 공연이 놓인 기획의 맥락, 그 공연과 연계된 사회적 맥락에 따라 공연이 변하고, 그 변화를 포함해야 공연이 비로소 제대로 읽히게 되는 일종의 수행적인 힘이 발휘되는 것 말이다.
이 글을 다 읽으신 독자님, 신은 죽었다는 이 시대에, 부재, 불확실, 미완성, 텅 빔, 미끄러짐, 현재의 놓침이 화두가 되는 이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보고자 극장에 모이는 걸까요. ‘누구 앞에 내가 있고, 내 앞에 누가 있고, 누군가 나를 보고 있고’에서부터 시작되는 현존의 감각은 어떤 방식으로 재 사유되고 있을까요. 우리는 공연 안팎의 어떤 시공간의 맥락에서 어떻게 새롭게 현존할 수 있을까요?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1. 김방옥, ‘연극에서의 현존’, 『한국연극학』 57권, 2015, p.26.
  2. 원제는 <21세기 어느 날 코트니 심슨 박사는 미아리고개예술극장에 앉아 생각한다. 제 4의 벽을 뚫으려했던 여당극의 연극 만들기 전략이란 무엇인가. 개가 사라졌다. 개를 찾는 연극을 할 것인가, 개를 찾기 위한 연극을 할 것인가? 이 연극의 부제는, 나는 퇴장했지만 보고 들으며 무대 위에 있었다,가 될 것이며 영업 전략 노출의 리스크,가 디렉터스컷이 될 것이다. 클라이막스템포갈등이 없는데도 바삐 달려가는 이 연극에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너를 사랑하는 것만으론 견딜 수 없을 텐데, 우린 무얼 향해 달려가는 걸까. 2014년 이후의 연극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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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록

김신록 배우, 창작자, 워크숍 리더
rock2d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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