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메뉴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하단메뉴 바로가기

[연극인이 만난 사람] 하영미 X 설유진

우리가 고민하는 것들. 어쩌면 다들 하는 고민. 보여지는 것과 보이는 것들

설유진, 하영미

제167호

2019.09.05

유진
그때 우리가 얘기했던 게 우리가 고민하는 것들?
영미
어색하다.
유진
잘 해봅시다.
사이.
유진
뭘 고민하고 있죠?
하하.
  • 설유진
  • 하영미
유진
요즘 뭐하나?
영미
작품 준비하지.
유진
전에 했던 것?
영미
했던 건데... 다시 하려니 별로다.
유진
그때 별로였던 것 같아서?
영미
지금 하는 방식은 틀도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음악도.
유진
그때 공연에는 음악이 있었는데?
영미
먼저 춤을 만들고 사운드디자이너의 음악이 들어오고 그 위에 또 춤을 만드는 방식인 건 전과 같은데, 자꾸 뭔가를 하려고 하고, 보여주려고 하는 것들이 부딪힌다. 뭐라고 해야 하지... 둘이 춤을 추는데, 둘이 춤을 추는 것 자체가 가진 것들이 있는데, 그걸 자꾸 못 본다. 자꾸 뭔가를 만들려고 하기 때문인 것 같다. 관념적으로 여긴 약간 이래야 한다거나 하는 움직임들이나 구성들이 있지 않나. 그걸 다시 보게 되니까 너무 부끄러운 거다. 그땐 그래도 그게 괜찮다고 생각하고 갔던 건데. 다시 만들려고 둘이서 머리를 싸맸다가는 완전히 새로운 것은 만들지 못하겠다 해서 기존에 했던 것들 중에 괜찮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뽑고, 다시 또 움직여 보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들을 찾아봤더니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던 것조차도 관념인 게 많더라. 여기선 점점 에너지를 늘려야 하지, 여기선 바뀌어야지, 그러다 보니 어떤 부분은 호흡이 짧아지지... 관념 자체도 우리 안의 너와 내가 너무 다르니 관념끼리 계속 부딪힌다. 왜 꼭 거기서 그래야 돼? 몰라. 느낌이 좀 그런 것 같아. 난 좀 아닌데?
유진
각자의 느낌으로 움직이면 안 되나?
영미
내 느낌은 다르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엔 또 나는 왜 꼭 이 주장을 해야 하지 하는 생각도 든다.
유진
자기 움직임에 대한 것인가 상대의 움직임에 대한 것인가?
영미
같이 하는 것에 대한 것. 구성도 그렇고 움직일 때도 상관없이 움직일 수 있지만 같은 공간 안에서 움직이다 보면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유진
내가 이렇게 했을 때 이 사람의 영향을 받아서 나도 모르게 다르게 움직이게 되는 건가?
영미
그런 것도 발생하지만, 답답할 때는 내가 이 사람을 그냥 따라가고 있을 때다. 충돌이 돼서 이 사람과 다르게 가려고 내 안에서 노력하는데 그걸 찾지 못할 때. 자연스럽게 가는 걸 찾지 못할 때 답답하다.
유진
하긴 똑같이 가는 게 자연스러운 게 아니라 다를 수밖에 없어서 충돌하는 게 자연스러운 건데.
유진
나도 요즘 고민하는 게, 보여 지는 것과 보이는 것들, 말장난 같은 고민이다. 대본의 말 한마디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할 때, 어떨 땐 내가 관습적이라서 대본에 쓰여 있는 본질이 전형적이라고 느껴지는 걸까? 이 말은 이렇게 할 수밖에 없게 써놨네, 거부감이 들 때면 이 거부감이 과연 옳은가? 내가 예술 한다고 뭔가 그냥 다르게 하고 싶은 건가? 관객의 공감이 필요한데 이게 요즘의 보편성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지? 결국 작품을 보는 모두가 자신의 지식과 경험에 기반해 볼 텐데... 내게 보이는 걸 남에게 보여주는 게 과연 가능할까?
영미
나도 요즘 보편성이라는 게 뭘까 많이 생각하게 된다. 내가 기존에 생각해온 어떤 관습들이 요새 나를 괴롭히거든. 나 왜 자꾸 이렇게 생각하지? 나 왜 이렇게 못된 생각을 하지? 내 생각이 너무 못됐다고 생각을 하면서 또 한편에선 나 그냥 못될래 생각이 든다. 진짜 보편이라는 게 있을까? 사람마다 다 다르고 어떤 이미지를 상상하기 위해 어떤 말을 던지는 데 다 너무 다르고, 서로 같은 걸 생각한 줄 알았다가도 결국 다 달랐다는 걸 알게 되기도 하고.
유진
맞아. 언어의 차이는 작업할 때마다 발생한다. 작업을 자주 하던 사람들과는 취향을 공유하게 되니까 소통할 때 언어도 조금 편해진다. 하지만 처음 만나는 사람과 작업을 할 때는 서로 언어를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  *  *
유진
어쩌면 난 요즘보다 이전이 좀 더 편했던 것 같다. 이전엔 잘못된 것들이 빨리 보이고, 이를테면 선배나 선생님들의 연극이랄지 방식을 대할 때 사람이나 뭔가에 대한 평가가 빨랐던 것 같다, 지금보다. 지금은 그렇게들 말하고 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아.
영미
맞아.
유진
그러면서도 그 결과가 좋지 않다는 것도 안다. 지금 우리 나이 30대 후반 이때가 중간에 끼어서는 20대처럼 거부도 못 하는 나이인 걸까?
영미
다른 사람들 인터뷰를 보는데, 물론 정리를 했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말할 때 뭔가 확실하게 하더라. 어쩌면 그렇게 확신하고 있지? 말을 잘 할 수 있지? 나는 어떤 대화를 해야 할지를 생각해보는데. 어떻게 보면 사람들이 바보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냥 정말 나는 모르겠더라. 근데 또 왜 우리는 항상 확신하고 어떤 정의 같은 것을 내려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유진
맞아. 그리고 정의 내리기 좋게 아는 게 많아질수록 모호한 게 점점 더 많아진다. 전에 알았던 것들, 그래서 지켰던 것들조차도 어, 아니네? 하는 게 생기더라. 요즘은 내가 정해 놓은 나름의 원칙들조차도 기성에 대한 거부감에서 비롯한, 어떤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내 독선일 뿐인가 싶을 때가 있다.
*  *  *
유진
무대 위에 뭔가를 모르는 사람을 만들려면 정말 모르면 안 되더라. 이를테면 뭔가를 모를 수밖에 없는 경험적 나이와 아는 나이의 사람이 충돌하는 모습을 그리려는 데,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어조나 태도, 알기 때문에 나오는 그것들까지 정말 몰라서는 제대로 부딪히질 않는다. 경험적 동의나 해석 뒤에 결국은 기술이 필요하다. 무의식의 미묘한 모습까지 드러나려면 해석에 기반한 기술까지 있어야만 구현 가능하다. 섭외부터 해석과 구현까지 결국은 보여 지느냐, 보이느냐인데 어떤 작품을 위해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배우와 스태프, 연출이 어디 있겠나. 그저 함께 이야기하고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우리의 진짜가 견고해질 뿐이다.
영미
그런데 작품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가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힘들어진다. 춤을 왜 추는지부터. 처음에는 내가 어떤 것을 풀어내고 기분이 좋아지고, 배우도 연기를 시작할 때 무대에 서는 순간을 너무 좋아하더라도 그다음 단계는 그것만으론 안 되지 않나. 춤은 스스로 도를 닦다시피 하는 건데. 그렇지 않은 사람을 만나게 되면 도를 닦다시피 추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 돼버린다. 그런데도 같이 가기 위해서는 갈등이 발생하고 포기하는 것들 생긴다. 연기도 무용도 추구하는 정신들이 있지 않나. 개인적으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작품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유진
맞다. 그래서 결과와 과정의 취향이 같은 사람들을 하나둘 만나가는 것이 점점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난 무용도 무용수도 안무가도 잘 모르니까. 매일 춤을 추고, 매일 추고 싶어 하고, 무대가 아니라도 아무도 없는 연습실에서 춤을 추고 나면 좋다고 하고, 춤을 추기 전마다 정성껏 몸을 풀고, 평소 몸을 관리하는 언니를 보며 신기했던 기억이 난다. 언니에게선 좋은 것이 나올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  *  *
영미
내가 작품을 봤을 때 담백하다고 생각될 때는 보여주려고 하는 것보다는 본질로 가는 느낌이 많이 들 때.
유진
어떤 본질?
영미
그 인물, 이야기의 본질? 아, 사람이 이렇지. 사람이 이런 심리를 가지고 있지. 작품을 보면서 나도 내 심리를 정확하게 볼 수 있는.
유진
담백하게 만들기 위해 관객을 극에 개입시킬 것인가 극과 차단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관객에게 명확하게 전하려는 주제를 가져야 하는 건지, 가지지 않는다면 공연을 하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고민하게 되고, 나는 예술가인가, 활동가인가, 까지 고민하게 된다.
영미
그 질문으로 가면, 정말 나는 춤을 추는 것을 좋아하고, 어쨌든 춤이 삶으로 자리를 잡았는데, 그렇게 따지면 굳이 공연을 하지 않아도 되거든? 물론 그 춤을 보고 감동을 느끼거나 어떤 다른 것을 볼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가 굳이 무대에 서서 보여야 하나. 굳이 나는 왜 뭔가를 만들려고 하는 거지 하는 생각이 자꾸 든다. 사람들에게 뭘 주려고 하는 건 아니거든. 나 춤 이만큼 춰요도 아니고, 우리 이렇게 만들었어요도 아니고, 저는 춤에 대해 이렇게 생각해요도 아닌데 내가 왜 굳이 무대에 서야 하지 라는 생각이 요새 자주 든다.
유진
난 그게, 이유가 없으면 연출을 할 수 없다. 그게 엄청 오그라드는 이유라도 이 작품을 지금 관객들 앞에서 하는 이유가 있어야만 한다. 그 이유를 찾지 않으면 대화를 할 수가 없는 거다. 지금 이 자리에도 왜 나와 있는지 이유와 목적이 있지 않나. 이유가 있어야 나도 대상이 생기고 대상도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 같은데 그걸 못 찾을 땐 정신을 못 차린다. 이야기를 하는 공간부터 특히 공연의 마지막을 만들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
영미
전에 어떤 작업을 하는데 인터뷰를 위해 내용을 정리하는 중에 같이 하는 사람이 그 일을 다룬 이 작업을 왜 하냐는 질문을 했다. 그래서 그 일이 그냥 너무 슬퍼서라고 대답하니 그럼 슬퍼하면 되는 거지 왜 공연으로 만드냐고 하더라. 할 말이 없었다. 그때 그 이야기를 다시 준비하고 있는 중이라 나 이거 왜하지? 그 질문을 스스로 던져보는데, 여전히 모르겠다. 그냥 나는 그게 슬프고 충격적이고 희생당한 사람의 아픔으로 공감하는 것이 다인 것이지. 관객에게 뭔가를 줘야겠다랄지 왜 이걸 만들어서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지는 정말 모르겠다.
유진
근데 그게 공연인 것 같다.
하하
유진
내가 만들 때 고민한 것들을 관객들은 모를 수도 있는 것 같다. 창작자와 관객들이 그 자리에 왜 있는지는 공연의 끝에야 감각하게 되는 것 같다. 너무 슬프다는 것도 이유가 될 수 있지 않나. 누군가는 슬프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 상황을 나는 슬프게 본다는 슬픔이 보여 지는 공연. 지금 준비하고 있는 그 이야기가 워낙 보통 슬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언니 본인이 감각하는 게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일에 대해 슬픔이란 감정을 우선적으로 느끼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 이야기의 사람들이 슬프다는 걸 보여주는 공연이 되는 것 아닌가.
영미
이 주제로 작업을 많이 하진 않았지만, 꽤 오래 이 주제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것 같다.
유진
처음에 언니가 나에게 그 이야기에 대한 해석을 얘기해줬을 때 신기했던 기억이 있다. 언니가 관념적인 아픔이 아니라 감각적인 아픔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는 이게 말을 쓰는 사람과 몸을 쓰는 사람의 차이인가 생각했다. 하여간 그래서 언니가 하는 그 이야기가 계속 궁금해진다.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좋아요 선택 버튼

하영미X설유진

하영미X설유진
하영미_안무가, 공연자
‘무브먼트씨어터 움시’ 대표, '스스로춤 모임' 멤버. 주요 작품은 무용 <쭈크러진 창>, <이방인>, 연극 <9월> <초인종>, 오페라 <투란도트>, 댄스필름 <1958>이 있다.

설유진_극작가, 연출가 907 대표.
주요 작품은 <너에게>, <나의 사랑하는 너>, <9월>, <누구의 꽃밭>, <초인종>이 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