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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인이 만난 사람] 안은미X정소정

누구에게나 자기다운 춤이 있다

정소정, 안은미

제168호

2019.09.26

의기소침해지는 날이 있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내가 못나 보이고 어깨가 처지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이면 나는 '안은미'라는 세 글자를 인터넷 검색창에 치곤한다. 그건 내 마음의 게보린 같은 거다. 그 이름 석 자가 내뿜는 기운만으로도 마음의 통증이 사라진다. 2017년 국립극단에서 안은미 선생님과 함께 작업하며 내가 배운 건 안무라는 단어를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안 되는 건 없는 거야!"라고 외치시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아직도 나에겐 가장 힘찬 응원가다. (웹진 독자 여러분들께도 그 기운이 전해지기를 바라며 안은미 선생님을 만났다. 안은미컴퍼니가 브라질투어 중이라 대화는 화상통화로 진행하였다.)
정소정
서울시립미술관 전시 ‘안은미래’전이 참 좋았다. 춤을 전시한다는 게 재미있고 전시장 안이 온통 안은미로 가득한 것 같다. 전시장 안에 놓인 푹신한 의자도 늘 입으시는 의상과 똑같은 디자인이라 거기 앉으니 꼭 선생님 품에 안기는 것 같았다.(웃음) 전시는 어떤 발상에서 시작된 것인가?
안은미
무용공연이라고 하면 완벽하게 준비된 형태를 관객들에게 보이는 것이 대부분이다. 나 역시 그렇게 늘 공연해왔다. 그런데 사실 공연이라는 게 매일매일 연습하고 달라지면서 만들어지고 변화하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어찌 보면 인생 같은 거다. 어느 날 하루 짠! 하고 보여지는 게 아니라 매일을 살아가는 것. 그것처럼 공연도 매일매일의 연습과 변화가 있는 거지. 그래서 안은미 컴퍼니가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을 전시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전시장에서 새 공연을 준비하는 연습 과정을 공개해, 매일 달라지고 변화하고 만들어가는 시간을 관객과 공유하는 거다.
정소정
안은미 컴퍼니 30주년을 기념하는 것과도 잘 맞아떨어진다. 이런 시간의 궤적을 통해서 안은미컴퍼니의 공연이 만들어졌다는 걸 보여주는 거니까. 근데 동시에 전시, 투어공연, 강연 등 너무 많은 일을 하시는 것 같다. 그렇다고 무엇 하나 소홀한 것도 없다. 한꺼번에 그렇게 많은 일을 하시는 게 힘들지 않으신지?
안은미
안 힘들다. 나는 작업을 할 때 힘이 솟는다. 새 작업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흥분이 되고 생각이 멈춰지지 않는다. 연습할 때는 또 우리 컴퍼니 식구들과 함께하니까 재미있다. 내가 하는 일은 나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은 사람의 좋은 생각이나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그러니까 힘들다는 생각은 안 든다. 오히려 더 힘이 솟는다.
정소정
저는 극작가지만 연출을 할 때는 배우의 몸까지 언어에 포함하고 싶었다. 글을 쓸 때는 언어만으로 모든 걸 표현해야 하니까, 오히려 무대라는 입체적인 공간으로 들어왔을 때는 그 외의 감각적인 요소들을 언어로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싶었다. 극적인 연출에 있어서 몸의 활용에 관한 레퍼런스를 찾는 게 쉽지 않았다. 그때, 선생님께서 많은 도움을 주셨다. 무용수가 아닌 배우들에게 있어서 몸이란? 그리고 무대에서 드라마틱한 상황에 몸 쓰는 법에 대해서 선생님께 여쭙고 싶다.
안은미
배우에게 몸, 움직임이란 그 배우의 현존 그 자체다. 관객들은 그가 어떻게 움직이고 어떤 호흡으로 말하는가를 분석하지 않고 본능으로 느낀다. 움직임을 통해 본능적으로 캐릭터를 감지하는 것이다. 그러니 드라마를 분석해서 감성적으로 풀어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관객들에게 정말로 설득력 있는 연기를 보여주려면 숨 쉬는 것부터 발걸음 하나까지 신경 써야 한다. 무대는 숨을 곳이 없다. 카메라 앞이라면 보이는 곳 있고 안 보이는 곳이 있지만, 무대는 그렇지 않다. 아무리 작은 역이라고 해도 무대에 서 있는 이상, 관객들의 시야 안에 있다. 그러니 대사를 위주로 자신의 분량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매순간 살아있을 수 있게 몸의 언어를 개발해야 한다. 몸 자체가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게. 어떻게 몸을 통해서 드라마를 강조할 수 있는지 연구해야 한다.
정소정
선생님이 언젠가 배우들을 대상으로 하는 워크숍을 진행하시면 참 좋을 것 같다. 시간을 두고 신체훈련을 받으면서 드라마를 만들어간다면 의미 있는 작업이 되지 않을까.
안은미
나 역시 그런 기회가 있었으면 한다. 정기적으로 시간을 정해놓고 꾸준히 만나서 신체 언어를 개발하고 그걸로 연극을 만든다면 멋지지 않을까. 기회가 되면 같이 한 번 그런 작업을 해보자.
정소정
선생님에게 춤은 일상이고 삶의 전부인 것 같다. 그런데 저 같은 사람들은 춤추고 싶어도 춤출 곳이 없다. 클럽이나 이런 곳 안 가는 사람들은 어디서 춤추면 좋을까?
안은미
방에서 추면 되지. 창피하면 문 잠그고. 장소보다 더 중요한 건 춤추는 걸 쉽게 생각하는 거다. 보통 춤이라고 하면 뭔가 거창하게 생각하지 않나. 근데 춤이란 건 그냥 자기가 움직이고 싶은 대로, 자기 몸이 움직여지는 대로 그렇게 움직이면 되는 거다. 그래도 어울려서 사람들과 같이 추고 싶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 갈 곳이 없는 건 사실이다. 다음에 안은미컴퍼니가 그런 곳을 개방할 수 있으면 좋겠다. 누구나 찾아와서 원하는 대로 춤추다 갈 수 있는 공간. 다른 거 신경 쓸 거 없이 춤만 추는 곳. 눈이 아플 정도의 원색들로 벽을 꾸미고!
정소정
그럼 정말 좋겠다. 그런 공간이 생기면 꼭 춤 추러 가겠다. 근데 내가 춤을 추면 사람들이 웃는다. 춤 잘 추는 법?
안은미
웃기면 안 되나? (웃음) 웃기면 좋지 왜?! 사람마다 타고난 몸 그릇이 다른 만큼 거기 담기는 움직임도 다르다. 움직일수록 웃기다면, 웃겨도 좋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누구에게나 자기다운 춤이 있다. 그 춤이 실은 제일 아름다운 춤이다. 열 사람이 있으면 열 개의 다른 춤이 거기 있는 거다. 아이돌 댄스처럼 같은 춤을 추는 게 아니라. 같은 춤을 더 잘 추기 위해 노력하고 경쟁하면 춤이 어렵고 재미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꼭 입시경쟁처럼. 근데 춤이란 건 자기가 느끼는 감정이 중요하다. 그 감정이 남에게 전해지고 몸에 담긴 마음의 형태가 보여지면 그게 또 보는 이들에게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정소정
안은미의 의기소침한 모습은 상상이 안 된다. 선생님도 그런 기분이 들 때가 있는지?
안은미
왜 없겠나. 나도 사람인데. 근데 그런 기분이 자주 들지는 않고, 또 오래 가지도 않는다.
정소정
자존감 도둑이 많은 세상이다. 사라진 자존감을 되찾고 싶을 때, 뭘 하면 좋을까?
안은미
우선 어깨를 쫙 펴라! 구부정하게 앉아있으면 마음의 자세도 굽어진다. 자존감이라는 걸 심리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접근하면 어렵다. 하지만 자세를 바꾸는 몸의 문제로 접근하면 조금 쉬워진다. 어깨를 쫙 펴고 몸을 곧게 세우고, 큰 소리로 웃으면 그것만으로도 조금 용기가 생길 것이다. 그래도 위축된 기분이 든다면 일어나서 맨손체조도 하고 몸이 뜨거워질 수 있게 움직여보자. 그런다고 내가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드라마틱한 변화가 생기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에너지가 생긴다. 그걸 반복하면 몸의 자세와 근육이 달라지고 마음의 근육도 생길 것이다.
정소정
선생님은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다. 용기의 근원은 무엇인지?
안은미
보통 실패할까 봐 두려워한다. 그럼 차라리 이렇게 생각해보는 거다. "나는 실패를 원한다. 그 누구보다 간절히!" 그리고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말하는 성공이라는 것에 대해서 한 번 문제 제기해보는 거다. 가장 멋진 실패의 형식도 찾아보고. 특히 예술가는 칭찬받는 걸 좋아하면 안 된다. 그럼 끝나는 거다. 남들이 정해놓은 기준 안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게 무슨 예술인가. 그 기준에 대해서 항상 의심하고 자기 자신이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 건지를 질문해야 한다. 그렇게 해보면 성공도 실패도 다 의미 있다. 결과를 두려워하면 도전할 수 없다. 그런데 예술은 행위고 과정이 전부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살아가는 시간, 그 과정이 전부인 것이다.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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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정X안은미

정소정X안은미
정소정
어린 시절 아동문학가였던 아버지의 글을 읽고 이야기에 매혹되었다. 이후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고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2012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연극 ‘뿔’, ‘가을비’ 등을 쓰고, ‘소리의 숲’, ‘드림타임’ 등을 쓰고 연출하였다.

안은미
‘종이계단(1988)’을 발표하며 한국 전통무용과 현대무용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을 시작했다. 즉흥적이고 과감한 춤사위와 사회 현실을 반영한 주제, 실험적인 연출로 ‘무덤’ 연작 ‘회전문’ ‘레츠 고’ 등을 선보이며 국내외에서 인정받았다. 2011년부터 지금까지 일반인의 몸짓을 문화 인류학적 관점에서 인식하고 춤으로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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