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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가 만난 배우] 안재현X김신록

일상 속에 세워지고 스러지는 헤테로토피아

김신록_배우

제169호

2019.10.10

이 글을 읽으시려는 독자님, 어린 시절 엄마 방 침대 이불 속을 탐험하며 느꼈던 상상과 쾌락의 순간을 기억하시나요? 다락방 한가운데 놓인 인디언 텐트를 드나들 때의 설렘은 어떤가요? 일상의 시간과 장소가 순간적으로 전복되는 현실 세계의 유토피아,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1). 서커스 거리예술을 통해 도심 속의 헤테로토피아를 창조해내는 ‘서커스창작집단 봉앤줄’의 서커스 예술가 안재현 배우를 만나봤습니다.
안재현
봉앤줄 소개에 "봉앤줄은 서커스 기예와 다른 장르의 결합을 통해 무대 위 ‘헤테로토피아’ 구현을 추구한다."라는 문장이 있다. ‘헤테로토피아’에 대한 설명 부탁한다.
‘헤테로(hetero)’는 ‘서로 다른’, ‘낯선’, 토피아(topia)는 ‘장소’, ‘세상’을 뜻한다. ‘헤테로토피아’는 완벽한 허상인 유토피아도 아니고 그렇다고 일상적인 현실 세계도 아니다. 구체적인 기능을 가진 실제 장소에 맥락을 벗어난 이질적인 의미들이 중첩된, ‘현실적인 동시에 환상적인 세계’, ‘허구의 세계와 실제의 세계가 혼재되어 있는 시공간’을 뜻한다. 헤테로토피아는 결코 닿지 못할 유토피아 대신, 세상 한가운데서 잠시 쉴 수 있는 은신처가 되기도 하고, 힘겨운 현실과는 반대되는 꿈과 환상의 시공간을 제공하기도 한다. 헤테로토피아에서는 세상의 법칙이 한순간 효력을 잃는다. 이것이 서커스 기예의 본질과 만나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서커스 기예의 본질이 뭐라고 생각하나?
비현실의, 일상적이지 않은, 예측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말한다. 중력을 견디며 위로 올라가는 것, 공중에 머무는 것, 떨어져야 하는데 계속 버티는 것 등등. 따라서 봉앤줄의 무대를 통해 헤테로토피아를 구현하는데 서커스 기예는 필수다.
‘비현실’, ‘일상적이지 않은’과 같은 단어는 오히려 ‘어디에도 없는 장소’를 뜻하는 ‘유토피아’와 닮아있는 것 같다. 이런 유토피아적인 서커스 기예가 봉앤줄 공연에서는 어떻게 일상과 현실의 토대를 확보할 수 있나?
나에게 현실은 ‘거리’고 ‘일상’이다. 봉앤줄은 연출적인 미장센을 추구하는, 통합적으로 잘 짜인, 런닝타임이 긴, 기승전결이 있는 실내극보다는 거리극을 좋아한다. 일상의 거리에 툭 하고 차이니즈 폴이, 와이어가 놓여있는 것이다. 그 폴이나 와이어에 어떤 드라마적인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는다. 그냥 폴(pole)은 폴이고 와이어(wire)는 와이어다. 어떤 장소를 일부러 ‘무대’처럼 꾸미지도 않는다. 그냥 어떤 도시에 가면 그 도시에서 가장 상징적인, 잘 알려진 장소에 가서 신호등이나 가로등에 봉이나 줄을 걸어놓고 앉아있는 거다, 노래도 부르고. 공간을 인위적으로 바꾸지 않고 그 장소의 소음 등을 그대로 이용하려고 한다. 거리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갑자기, 늘 만나던 장소를 낯설게 바라보는 순간이 좋다. 이게 봉앤줄이 생각하는, 도심 속에 순간적으로 세워졌다 스러지는 ‘헤테로토피아’다.
봉앤줄은 안재현 1인으로 구성된 서커스 창작집단이라고 알고 있다. 여러 장르의 예술가들과 협업하는 것은 어떤 맥락인가.
헤테로토피아는 통일성을 중요시하는 호모토피아(homotopia)의 반대 개념이다. 사물들이 상이한 방식으로 중첩되어 공통된 위치를 정의하는 것이 불가능한, ‘혼란 속의 질서’를 뜻하기도 한다. 서커스 기예가 낯선 장르와 만났을 때 이런 감각이 잘 발생하는 것 같다.
난 협업을 ‘플레이팅’처럼 생각한다. 식탁에 음식을 보기 좋고 먹기 좋게 배치하는 것 말이다. 배치만 하는데도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게 있더라. 물론 각각의 음식이 질도 좋고 맛도 있어야 한다는 건 기본이다. 내 작품에 대해 꽉 짜인, 정교한 미장센이 없어서 아쉽다는 피드백도 있지만 난 그게 없어서 더 좋다. 그냥 배치를 통해 발생하게 하는 것, 관객은 그 여백에서 알아서 가져간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내가 연출적으로 딱 짜는 것을 잘 못 한다. 못하는 걸 억지로 하고 싶지는 않다. 물론 경험이 쌓이면서 나중에는 더 잘하게 되면 좋겠다.
실제 관객들 반응은 어떤가.
서커스 거리극을 하면 전혀 모르는 사람들,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관객으로 만난다. 연극과는 달리, 공연 장소를 오가던 사람들이 멈춰 서서 공연을 보기도 한다. 언젠가 보라매공원에서 공연했을 때는 어떤 할머니가 내 손에 만 원짜리 한 장을 쥐여주면서 ‘이런 거 하지 마라’고도 하셨다. 아마 배 곯아가면서 기예하던 예전의 서커스를 떠올리셨나 보더라. 또 도심 한복판에서 <외봉인생>을 할 때면 중년 남성분들이 공연을 보다가 울기도 하신다.
<외봉인생>은 35분짜리 공연인데, 무겁고 긴 봉을 어깨에 메고 끌고 걸어와서 신호등이나 가로등에 기대어 놓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나는 가로등이나 신호등에 올라가서 그 봉을 이용해 노래를 하고 대사를 읊는다. 봉 끝에는 마이크도 달려있다. 공연의 주된 시퀀스는 거리에 세운 높은 봉을 타고 올라갔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하고, 그 사이사이에 우리나라 전통 소리와 악기가 연주되는 것이다. 아주 단순하다. 그런데도 관객들은 과거 어느 때의 자신과 마주하는 데자뷰 같은 순간을 경험하기도 하고, 일상을 벗어난 안락함을 느끼기도 하는 것 같다. 나는 이것이 서커스 거리예술이 빚어내는 헤테로토피아적인 세계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푸코에 따르면, 우리가 스스로의 몸에 대해 의심할 여지없이 ‘존재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시체와 거울과 사랑을 통해서라고 한다.2) 어쩌면 서커스 기예가 극도의 신체성을 요구한다는 점, 죽음의 위험에 늘 직면해 있다는 점에서 이미 헤테로토피아의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기예는 탈 일상이지만 그 몸은 아주 실제적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맞다. 봉을 계속 오르고 떨어지다 보면 실제로 점점 지친다. 나는 그 지침을, 그 나약함을 일부러 숨기지 않는다. 관객은 기예와 함께 지쳐가는 퍼포머를 본다. 기예는 환상이지만 시들어가는 퍼포머의 육체는 현실이다. 관객은 기예의 환상과 나약한 육체의 현실을 함께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매끈하게 포장된 유려한 기예만 보여주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기예가 갖는 화려함 이면의 ‘인간의 나약함’에 주목하고 싶다. 화려함과 나약함이 함께 존재하는 면도 봉앤줄이 보여줄 수 있는 헤테로토피아적인 세계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서커스와 관객의 만남이 그렇다면, 본인과 서커스의 만남은 어떤가. 원래 대학원에서 연기를 전공하고 연극 무대에서 배우 경력을 시작하지 않았나. ‘연극배우’로 본인을 소개할 때와 ‘서커스예술가’로 본인을 소개할 때 어떤 점이 가장 크게 다른가.
내가 ‘배우’라는 말을 배운 건 대학 극회 10년, 대학원 3년, 프로생활 5년을 통해서다. 그 시간 동안 내가 배운 ‘배우’라는 말은 몹시 한정적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배우라는 이름 아래서 해낼 수가 없었다. 그게 너무 답답했다. 시도하고 싶은 걸 확 해버릴 때면 항상 호기, 객기라는 말을 들었다. 대학원 시절, 그리고 졸업 후 한동안 연극 작업에 참여하면서 이런저런 실험적인 시도를 많이 했다. 입에 휴지를 넣는다거나, 꼽추를 한다거나, 옷을 벗는다거나... 하지만 그때마다 ‘멀쩡하게 생겨가지고 왜 그런 거 하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욕구를 없애고 ‘정상적으로’ 연기하려던 시간 속에서 많이 부대꼈던 것 같다.
배우에게 요구되었던 ‘정상적인 연기’라는 말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배우들에게 천편일률적으로 요구되던 메소드, 이미지, 발성 방식, 존재 방식... 공연장 혹은 공연이라는 것 역시 일종의 헤테로토피아인데, 그것이 제작되던 세계는 위계적이고 통합적이고 엄격한 기준으로 가득 찬 ‘호모토피아’의 세계였던 것 같다. 그래도 지금은 연출적으로든 연기적으로든 다양한 대안적 시도들이 존중되고 있다고 느낀다. 본인에게는 그 대안이 왜 서커스였나.
예전부터 몸 쓰는 걸 좋아했다. 몸에 대한 나르시시즘이 있었다. 지금도 있다. 내가 볼 때 내 몸이 예쁘고 동물적인 모습이 있다고 생각해서 그걸 어필하려고 했었다. 다른 배우들과의 차별성을 몸에서 찾으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런데 트레이닝을 해보니까 옛날 내 모습이 객기 맞더라.(웃음) 근본 없는 추상적인 이미지만 가지고 그냥 덤빈 거였더라. 3년 동안 매일 트레이닝을 해보니까 비로소 알겠다. 특히 몸을 이용하는 기술 장르는 더 솔직하다. 한 만큼 나온다. 예전에는 뭐 하지도 않고, 내 몸의 매력만 믿고 벗어 재끼고 하니까, 보는 사람들이나 같이 하는 사람들이 힘들었겠다 싶더라.
아, 그리고 서커스 기예 동작들이 나와 잘 맞았던 건, 무용이나 무술과는 다르게 위험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내 성격과 맞더라. 짜릿하다. 위험을 넘어 해냈을 때 그 성취가 주는 나르시시즘이 엄청나더라. 그러다 보니 시키지 않아도 하게 되고, 작품도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더라.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나.
서커스의 경우, 매일 연습하는 내용의 한 조각을 보여주는 것이 곧 작품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기예니까. 사람들이 기예를 보면서 느끼는 그 조마조마함 자체로도 충분히 공연성이 있다. 거기에 평소 관심 있던 장르나 생각들을 추가하는 거다. 관심 가는 장르나 예술가, 협업에 대한 재미난 아이디어가 있을 때는 일단 만난다. 그리고 ‘배치’에 대한 간단한 아이디어만 가지고 즉흥 잼을 한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것들이 작품에 많이 포함된다.
요새는 차이니즈 폴 기예와 하이 와이어(Hight Wire, 고공줄타기) 기예를 연구 중이다. <하늘을 걷는 남자>(The Walk, 2015)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했지만, 사실 하이와이어 기예는 유럽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해왔다. 예를 들면, 높은 빌딩 사이에 줄을 매달아 놓고 그 위를 걷는 거다.3) 그런데 나는 그런 것은 안 하고 싶다. 줄이 너무 높으면 관객입장에서는 퍼포머가 자기와 상관없는 사람처럼 느껴질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줄을 5~6미터 정도로만 높이고, 줄에 오르기 전에 관객과의 짧은 눈 맞춤이나 악수 등으로 관계 맺기를 시도하려고 한다. 방금 나와 눈을 마주치며 인사했던, 짧지만 나와 관계를 맺은 어떤 사람이 내 머리 위 하늘을 걷고 있는 것을 볼 때 어떤 느낌일지 너무 궁금하다. 관객들이 내가 느끼는, 무한한 자유로움과 추락에 대한 두려움을 함께 느낄 수 있다면, 적어도 무관심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연습은 어떻게 하나.
줄넘기로 시작해서 스트레칭으로 끝나는 4시간 훈련 프로그램을 주 5일 한다. 하루에 한 마디도 안 할 때도 많다. 말을 안 하는 데는 단원이 없는 것도 한 몫 한다. 나한테 연습은 한마디도 안하는 시간이다. 대신 연습일지를 열심히 적는다. 어딘가에는 쏟아내야 하니까.
이런 방식이 나한테 잘 맞다. 학교 다닐 때는 내가 가진 에너지나 기운을 술, 연애, 담배로 다 날려 보냈던 것 같다. 아주 ‘요만큼’ 남은 에너지로 수업 듣고 무대에 서고 그랬다. 그런데 말을 안 했더니 기운이 모이더라. 그렇게 모인 기운을 봉 타고 줄 타는 데 쓴다.
연극했을 때는 내 연기를 영상으로든 뭐든 모니터링 하는 게 싫었는데 서커스 공연을 하면서는 내 모습을 모니터링 하는 것은 좋다. 영상 속의 나를 보면 되게 집중해 있고, ‘온전히 그것만’ 한다, 봉 타고 줄 타는 일만. 힘과 호흡이 들어가는 작업이니까. 그런 모습이 그 어느 때보다 ‘나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 모습이 좋다.
‘나이면서 나 같지 않은 감각’, 어쩌면 본인에게는 기예를 훈련하는 그 시간이 매일 매일의 일상 속에서 세워지고 스러지는 헤테로토피아의 순간일 수도 있겠다.
봉과 줄을 타는 시공간이 내게는 헤테로토피아다. 그리고 ‘거리에 봉이 서면’ 그 시간, 그곳은 ‘나와 관객의 헤테로토피아’다. 일상과는 다르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탈현실은 아닌 그 시공간. 이질적이면서도 환상적인, 어린 시절 엄마아빠 침대 이불 속에 들어갔을 때의 느낌처럼 말이다. 
이 글을 다 읽으신 독자님, 독자님이 꿈꾸는 유토피아는 어떤 세계인가요? 지금 독자님이 살고 있는 현실은 또 어떤 세계인가요? 하루하루를 보내는 나의 집에, 직장에, 거리에, 짧은 순간이나마 내가 꿈꾸는 유토피아가 깃들 방법은 무엇일까요?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1. 헤테로토피아(heterotopie)는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제안한 개념으로, 어디에도 없는(u) 장소(topos)인 유토피아(utopie)와는 달리 위치를 가지는 현실 속의 유토피아를 뜻한다. 기존 시공간의 질서를 정화하고 중화시키는 일종의 반(反) 공간으로서 기능한다. (『헤테로토피아』, 미셸 푸코, 이상길 옮김, 문학과지성사 참조)
  2. 「유토피아적인 몸」, (『헤테로토피아』, pp. 27~39 참조)
  3. 필리프 프티(Philippe Petit, 1949~)라는 프랑스의 곡예사이자 거리예술가는 1974년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두 빌딩 사이에 줄을 매달고 줄타기를 하면서 유명해졌다. <하늘을 걷는 남자>는 이 인물을 모델로 한, 조셉 고든 레빗 주연의 전기 영화다.(위키백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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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록

김신록 배우, 창작자, 워크숍 리더
rock2d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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