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인이 만난 사람] 김보람 x 염문경
다재다능한 멀티플레이어? 아니, 그냥 자영업자!
염문경, 김보람
제196호
2021.03.11
- 문경
- 소개부터 하자면, 전 정체성이 모호한 창작자고요. 민망스럽게도 연극을 못한지는 2년이 넘었네요. 최근엔 독립영화를 하고, EBS 펭TV 팀에서 방송 조금 하고, 어쩌다보니 운이 좋아 <내향형 인간의 농담>이란 책을 내게 된 배우/작가입니다. 감독이라고는 차마 스스로 못 칭하겠어요.
- 보람
- 출간 축하드려요.
- 문경
- 감사해요. 오랜만에 뵙네요. 다큐멘터리 <피의 연대기> 감독님이시고, 2020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제 단편 <백야>와 감독님 단편 <자매들의 밤>이 함께 제작되었지요. 직접 자기소개 해주신다면요?
- 보람
- 저는 스스로 자영업자라고 생각하고,
- 문경
- 자영업자란 말을 쓰시는군요!
- 보람
- 네... 자영업자 김보람입니다.
- 문경
- (웃음) 영화 자영업을 하시는 거죠.
- 보람
- 영화로 먹고 살아야 영화를 한다고, 직업이라고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렇진 않아서, 다양한 일을 하는 자영업자라고 말합니다. 감독이라지만 사실 일을 따와서 기획하고 제작, 정산하고 스탭들이 다 떠나도 전 유통 과정을 계속 책임져야 하고, 돈이 없을 땐 홍보나 캠페인 영상도 하고요, 그러다보니 이건 물건을 생산해서 소비자와 만나는 자영업자와 가깝다 싶었어요.

김보람
- 문경
- 저도 저를 규명할 말을 잘 못 찾겠어서 명함을 만들고 ‘다목적 프리랜서 배우’라고 새겼던 적이 있어요. 어쨌든 제 정체성은 배우인데, 다른 일들이 훨씬 돈이 됐거든요. 글 쓰는 일도 시작은 생계 개념이었고요.
- 보람
- 지원금 말고 누가 저한테 돈 주고 감독하라고 하는 일은 없거든요. 제작 자영업자, 소규모 제작자에 가깝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너무 스트레스 받는 일이 많아서...
- 문경
- 맞아요 맞아요 맞아요
- 보람
- 그래서 <피의 연대기>에도 제 직업이 자영업자라고 떠요 영화감독이라고 안 뜨고.
- 문경
- 그때부터 그렇게 생각하셨군요!
- 보람
- 거기에 정체성을 두면 약간 혼란이 오는 것 같아서.
- 문경
- 그거 좀 건강한 거리두기인 것 같아요. 전 이 <내향형 인간의 농담>이라는 에세이집을 쓸 땐 몰랐는데, 편집부가 보시더니 어딘가 거리를 두려는 태도가 글 속에서 일관적으로 느껴진다는 거예요. 사실 이 책엔 제가 배우로서 겪은 고통스러운 일들이 많이 담겨 있거든요. 거기에 너무 절 가깝게 두면 자꾸 마음이 데이는 부분이 많으니까, 저도 모르게 거리 두는 태도를 계속 연습했나 봐요. 방어기제이기도 하겠지만, 어떻게 보면 제가 서른 몇 살까지 살아남은 나름의 방식이구나 싶어요. 스스로를 프리랜서라고 명명하는 것도 비슷한 일이에요. 왜냐면 전 배우로서의 정체성을 가장 가깝게 생각하지만 실제로 벌어먹고 사는 일하고는 또 가장 머니까... 오히려 거리를 둬야 지속 가능해지는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자영업자라는 단어가 참 공감 가네요.
- 보람
- 그렇군요. 저도 비슷한 지점이 있는데, 전 사실 오랫동안 소설을 썼었어요. 고등학교도 소설로 학교를 갔고요.
- 문경
- 그래요? 제가 정말 모르는 게 많았네요...
- 보람
- 대학도 소설 쓰는 과로 갔고. 그때만 해도 등단해야만 소설가가 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런데 등단을 못하던 차에 마침 다큐멘터리 제작사에서 작가가 필요하다고 해서 거기서 영화 일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다큐가 좋아진 거예요. 영화를 배운 적도 없고요. <피의 연대기>도 원래는 연출을 원했던 게 아니라 그냥 하고 싶던 기획이었는데, 분업이 잘 되어있지 않은 한국 독립영화계 구조상 결국 주변의 도움을 받아 제가 직접 감독하게 된 거죠.

염문경
- 문경
- 놀랐어요. 저는 사회초년생 때 <피의 연대기>를 너무 재미있고 대단하게 봤던 기억이 있어서... 막연하게 ‘이 분은 독립영화계에서 스타다!’ 라고만 생각했고, 당연히 영화연출과 이런 델 나오셨을 것이다 그랬죠. 그럼 오히려 다큐멘터리에서 극영화로 변주하신 게 아니라, 애초에 소설 쪽에서 넘어오신 거군요?
- 보람
- 근데 뭐 소설을 못했으니까. 뭔가 계속 잘 안 풀려서 넘어왔다는, 완수하지 못했다는 기분이 계속 있어요. 지금도 저는 소설이 제일 좋아요. 영화보다도 소설을 훨씬 많이 보고요. 할 수 있다면 사실 지금도 소설이 쓰고 싶지만... 아까 문경님이 배우 일에 대해 말씀하신 것처럼, 16살 때부터 7년이란 시간을, 너무 원했고 너무 가까이 소설만을 쓰는 사람들하고 지내면서 너무 크게 동경하고, 혹은 너무 크게 질투하고.
- 문경
- 맞아요.
- 보람
- 그러다보니 더 이상 소설을 쓰는 저 자신이 좋거나 내 작품이 맘에 들거나 하지 않았던 거 같아요. 근데 영화는 사실 뭐 영화씬에 친구도 없고 아는 사람도 선후배도 없고 질투, 경쟁, 비교할 사람도 없고 내가 못한다고 누가 나한테 뭐라고 할 것도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그냥 저 하고 싶은 대로 해서 훨씬 편했어요.
- 문경
- 신기하다. 전 영화계 핵인싸이신 줄 알았거든요! (웃음)
- 보람
- (웃음) 아니에요 전혀.
- 문경
- 저야말로 씬에 인맥이 거의 없어서. 연극계에서도, 이후 영화계나 방송계에서도, 항상 아웃사이더, 발만 걸친 애라는 자격지심이 강했어요. 어중이떠중이처럼 보이나 싶고.
- 보람
- 제가 그랬어요 제가. 예를 들어 상을 받아도, 뒷풀이에 안 가고 혼자 맥도날드 가서 밥 먹고 들어가고 그랬어요. 그게 슬프지도 않았고 오히려 편하기도 했고요.
- 문경
- 책이 나오고 한 기자님께서 기사를 써주셨는데, 제가 쓴 저자소개를 인용하셔서 ‘오래 공들인 일보다 갑자기 찾아온 행운이 강력하다니, 젠장’ 이라고 헤드라인을 뽑아주셨더라고요.(웃음) 이게 헤드라인이라니 웃겼지만 좀 ‘젠장’이었던 건 사실이에요. 펭수 이후로 많이 마음이 불안했었으니까요. 이제 내 배우인생은 끝이다 이러면서... 근데 또 한편으론, 제가 작가로서 어떤 쓰임이 있는 건 제가 배우 일에 가졌던 그런 끈적한 욕망이 없어서인 것 같아요. 보람 감독님께 영화 일이 더 편했던 것처럼요. 그냥 일로서 할 수 있는 만큼 했고. 못하면 못할 수 있지 난 원래 작가도 아닌데 이런 맘으로 접근했던 거 같고. 역시 사람 일이란 게 뭐든 힘을 좀 빼야 되나 싶기도 하네요. 예전의 제게 연기는 보람 감독님의 소설과 비슷했어요. 너무 쏟은 게 많고 다친 것도 많으니 보상심리도 생기고 질투도 너무 많이 하고. 그런 끈적한 마음들을 버린 후에야 연기 자체도 훨씬 나아졌단 생각이 들어요. 너무 잘하고 싶은 배우의 마음은 결국 카메라에도 무대에도 티가 나는 것 같더라고요.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 염문경 X 김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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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문경_배우/작가
연극 <로봇을 이겨라> 시리즈, <도처의 햄릿>, <퀴어한 낭독극장> 등에 출연했다. EBS <자이언트 펭TV>의 기획작가이며, 영화 <메이드 인 루프탑>, <모럴센스> 등의 각본에 참여했고, 단편영화 <현피>, <백야>를 만들었다. 에세이집 <내향형 인간의 농담>을 출간했고, 현재 EBS 유튜브채널 <딩동댕대학교> 방송반이다.
ymk890201@gmail.com
김보람_영화감독
영화감독이자 영화프로듀서.
영화<피의 연대기>로 서울독립영화제,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들꽃영화제에서 수상하였다.
<저수지게임> 프로듀서, <자매들의 밤>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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