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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가 만난 배우] 강명주 X 김신록

악보가 먼저, 해석은 그 위에 온다.

김신록_배우

제203호

2021.06.24

이 글을 읽으시려는 독자 여러분, 텍스트를 ‘분석’한다, ‘해석’한다는 것의 반대편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강명주 배우를 만나 텍스트를 온전히, 그대로, 만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았습니다.
출연작 중에서 극단 코끼리만보의 여러 작품, 박해성 연출가의 <코리올라너스>, 김정 연출가의 <인간이든 신이든>을 봤다. 작품들이 형식적으로 실험적인 면이 있다 보니 연기적으로도 다양한 시도를 해왔을 것 같다. 얼마 전 출연한 <인간이든 신이든>의 경우도 김정 연출 특유의 신체성이 두드러진 작품 아니었나. 그 연극 양식을 신체적으로 과감하게 시도하고 소화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인간이든 신이든>이 굉장히 연극적인 작품이지 않나. 그런데 이 작품에서 내가 맡은 역할이 내 딸 또래의 아들을 둔 중년 여성이다 보니 ‘드디어 제대로 만나 본 적 없는 리얼리즘적인 일상연기를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 했었다. 연극을 실험극장에서 시작했다. 화술 위주의 정통 리얼리즘을 지향했지만 젊은 단원들이 무대에 설 기회가 많지 않은 곳이었다. 연구단원으로 들어가서 ‘정통 화술워크숍’을 들은 뒤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브레히트의 <사천의 착한 사람>을 이상우 선생님이 번안, 각색, 연출한 <쿠니, 나라>라는 작품으로 무대에 올랐다. 그 작품 역시 정통 사실주의는 아니었다. 일상적 말하기와는 다른 색채의 실험극장식 화술이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인간이든 신이든>은 - 고연옥 작가와 김정 연출가의 콜라보니까 - 그렇게 될 리 없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초반 리딩에서 인물의 상태와 감정에 집중하기도 했었다. 결국 일상적으로 풀면 이야기가 너무 작아질 것 같다는 연출가의 판단 아래, 아주 연극적인 방식으로 작업을 했다. 연출가의 방식을 오픈 마인드로 받아들이려고 했고 어려웠지만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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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주
연기적으로 어떤 시도를 했고 어떤 경험이 됐나.
기본적으로는 몸과 말을 분리해내는 작업이었다. 내가 맡은 ‘여자’라는 캐릭터가 괴롭고 격정적인데, 그 감정이나 상태에 말이 휩쓸리지 않도록 분리하는 동시에 일상적인 움직임에 말이 붙지 않도록 분리하는 작업이었다.
그간 (한국 창작극보다) 번역극을 많이 해서, 작업 할 때 항상 원문도 찾아보고 말의 의미를 따지고 대사를 정확하게 고치고 파고들면서 연기를 해 왔다. 텍스트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기를 원했고 이를 위한 토론 시간이 필요했지만 늘 부족하다고 느끼기도 했다. 내 역할의 말을 정확히 알고 나면, 다른 역할의 말도 제대로 알아야 하고, 서로가 장면에 대해 같은 이해에 도달할 때까지 텍스트를 들고 파야지만 그나마 말이 의심 없이 나한테 ‘탁 붙어서’ 나왔다.
이 과정이 충분하지 않을 때는 ‘연기하는 나를 보는 나’가 너무 잘 느껴져서 방해를 받았다. 차라리 초독일 때는 감정이나 뭐나 잘 붙어 나오는데, 연습을 하고 나면 말이 더 안 붙고 자꾸 자의식이 생겼다.
<인간이든 신이든>이 흥미로웠던 점은, 평소처럼 ‘텍스트에 대한 이해가 더 필요한데...’, ‘시간이 부족한데...’ 하는 태도로 접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작가의 말을, 이야기를, 오롯이 관객에게 전하자’ 하는 부분에만 신경을 쓰고 몸으로 부딪혔다. 아이러니하게도 텍스트를 들고 파지 않았던 이 작업에서 - 자의식이 발동하기보다는 - ‘자기 모니터링’이 됐던 것 같다. 모니터링은 연출가가 제안한 방법인데, ‘여러분 모두 잘하고 계시니까 제가 밖에서 모니터링 해드릴게요’ 라거나 ‘스스로 자기를 모니터링 하라’는 주문이 도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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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식과 모니터링은 한 끝 차이일 것 같다. 모니터링은 일종의 로우-파이로 작동해 나를 바라보는 의식이라면, 자의식은 하이-파이로 작동해 나를 방해하는 의식인 것 같다. 자의식이 ‘나’를 보는 감각이라면, 모니터링은 나의 ‘행위’를 보는 감각인 것 같기도 하다.
맞는 말이다. 가령 <인간이든 신이든>을 하면서는 내가 맡은 엄마라는 인물이 감정적으로 고통스럽거나 격정적인 상태로 빠지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에 그렇게 흘러가지 않도록 스스로 모니터링을 했다. 기술적으로나 표현적으로 연출이 의도한 톤으로 가고 있는지를 모니터링 하는 과정은 자의식이 그랬던 것처럼 연기하는 나를 방해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초독일 때는 감정이나 뭐나 잘 붙어 나오는데 연습을 하고 나면 말이 더 안 붙고 자꾸 자의식이 생긴다’는 말이 굉장히 흥미롭다. 일종의 해석이나 분석을 거쳐 말의 의도와 의미가 선명해지고 나면 이런 과정을 거치기 전보다 발화하는 배우에게 자의식, 즉 일종의 자기 평가나 자기 점검 같은 불편감이 생긴다는 것 아닌가. 내가 느끼기에도 소위 텍스트 분석을 마치고 그 분석을 구현하기 위해 연기를 하면 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폭넓은 경험 가능성, 감각적 소통 가능성을 역설적으로 축소시킨다고 느껴졌다. 그렇다고 분석을 안 할 수는 없지 않나. 그런데 요새는 더 극단적으로 ‘텍스트는 분석할 수 없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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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말이 답이 될지 모르겠다. 고연옥 작가가 하려는 이야기가 참 좋다. 연극이 세상을 바꿔야할 이유는 없지만, 내가 이 세상에 생명체를 둘이나 내놓은 사람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고연옥 작가의 작품을 보거나 하면 좋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죄책감도 많이 든다. ‘이런 세상에서 좋은 엄마가 되기에는 너무 밑천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며 두 딸을 키워왔다. 세상에 생명을 내놓고 그 존재들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나는 충분히 도와줬는가? ‘어린 시절 내가 느꼈던 결핍만 채워진다면 아이들과 행복하게 잘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순진한 환상으로 엄마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그래서 괴로움이 굉장히 많다. 건강에 문제가 생기고 부터는 아이들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책임감, 엄마로서의 책임감이 나를 조급하게 만들곤 했다. 분명 사랑하기 때문에 갖는 책임과 관심인데 그게 오히려 관계를 망치고 있다는 것을 뼈아프게 느끼기도 한다.
고연옥 작가의 작품을 보면 어느 가정, 어느 개인이 저지른 끔찍한 과오를 그들의 잘못으로만 미루지 않고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할 문제로 눈여겨보는 진심이 담겨있다. 그런 글을 써줘서 참 감사한 마음이 든다.
<인간이든 신이든>에서는 작가의 말을 잘 전달하지 못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 누구도 부담을 주지 않았지만 - 스스로 부담을 느꼈다. 다행히 연출가가 이야기를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고 이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애쓴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가 제시하는 길을 열심히 따라가겠다는 자세로 임했다. 그래서 <인간이든 신이든> 텍스트는 처음에 읽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구나’하고 이해한 다음에는 - 연습 중간에 어떤 대사를 이해 못해 질문 하는 친구들이 있을 때도 - 작가의 글쓰기 스타일 그대로, 처음엔 어색하더라도 이렇게 쓴 의도가 명확하다는 것을 믿고 받아들이면 어느 순간 알게 될 거라는, 그런 믿음을 갖고 나아갔다.
공연 후 어느 날 연출가가 영화 <샤인>의 한 장면을 캡처해서 내게 보내줬다. 교수가 학생을 지도하면서 하는 대사1)였는데 “쓸데없는 것은 마음에서 지우고. 악보가 먼저, 해석은 그 위에 온다.”였다. 그게 <인간이든 신이든> 작업을 하면서 가졌던 태도였던 거 같다고 하니 연출가도 공감하더라. 사실 작가가 대본을 주면서 ‘명주씨 이거 여자 연기하기 힘들 거예요. 이걸 논리적으로 파기 시작하면 너무 어려울 거예요.’라며 걱정스럽게 이야기했었다. 그래서 어떤 의심이나 반감을 갖지 않고 텍스트를 충실히 따라가려고 했다. 텍스트를 다 이해해야하고, 그 말이 뭐였고, 등등이 충분히 해결되지 않아서 너무 괴로웠는데 <인간이든 신이든>에서는 텍스트를 붙들고 고민하지 않고 일단 그대로, 그대로, 그대로 한 것이 좋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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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의 세계는 나보다 거대하고, 텍스트가 담고자 하는 세계는 텍스트보다 거대하다는 생각이 든다. 언어가 현상이나 실체를 온전히 담지 못하는 것처럼 텍스트를 발화하는 배우 역시 텍스트를 의미적으로, 감각적으로, 형식적으로, 혹은 경험적으로 온전히 장악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 같다. 텍스트라는 경험의 세계를 어떻게 ‘분석’이라는 논리의 세계로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겠나. ‘그대로, 그대로, 그대로’ 라는 표현이 마음에 든다. 연기술이란 어쩌면 미처 알 수 없는 세계를 더 온 몸으로 만나내기 위해 고안된 방법론들이 아닌가 싶다.
실험극장 이후에 결혼해서 아이 낳고 기르고 하면서 작업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됐었다. 그런데 김동현 선배와 2010년 <21세기 여인>이라는 워크숍을 함께 한 후에 선배의 제안으로 2011년 코끼리만보에 정식으로 입단했었다. 워크숍을 하며 얻은 경험들이 ‘다시 연극을 해도 되지 않을까’하는 이유를 만들어주었다. 한국 전쟁 전후로 우리나라에 있었던 양민학살 사건들을 리서치 하는 공동창작 작업이었다. 엄마로서 주부로서 양민학살 같은 일을 생각하며 살 기회가 없었던 내가, 자료를 찾고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우리 사회의 어떤 면들은 이런 사건들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문제라는 걸 깨달았다. 적잖은 충격을 받았었다. 무대에서, 극장에서, 내가 발 딛고 사는 이 세상에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그것이 우리 사회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를 고민할 시간을 만들어 주는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연극 일을 다시 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지금은 일 년에 한 편이라도 참여 하는 게 행운인 사람인지라 일이라는 게 주어지는 것이 감사하다. 힘들지만 재밌다. 연극을 통해, 배우로서, 좋은 주제나 서사, 좋은 이야기를 건넬 수 있다는 것이 내 보람이다.
이 글을 다 읽으신 독자 여러분, 어떤 것을 정확하게 설명하려고 하면 할수록, 집요하게 알려고 하면 할수록 실체에서, 소통에서, 의도에서, 진심에서 점점 멀어지는 경험을 해보신 적 없으신가요? 그대로, 그대로, 그대로. 삶이든 관계든 지금은 약간 이해가 안 되고 어색하더라도 일단 악보를 따라가는 마음으로 부딪혀내 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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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1. “The notes first, your interpretation comes on top of them.” 영화 <샤인>중 파크스 교수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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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록

김신록 배우, 창작자, 워크숍 리더
rock2d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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