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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인이 만난 사람] 김보석 x 고주영

수어로 세상을 시끄럽게

고주영, 김보석

제204호

2021.07.15

김보석 수어통역사를 처음 본 것은, 그 전에도 어딘가에서 본 기억이 있지만, 분명하게 뇌리에 남은 것은 <남산예술센터대부흥성회> 공연장에서였다. 영상촬영용 무대였기 때문에 중간중간 끊어가는 공연이었는데, 그 끊어가는 사이에 내 눈은 다른 통역사와 조금은 ‘수다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그의 표정과 몸짓에 꽂혀 있었다. 그리고, 올 초 어느 화상회의에 수어통역으로 참여한 그에게 회의 중에 과감하게 개인 메시지를 보내 연락처를 땄고, 그 인연은 <연극연습3. 극작 연습-물고기로 죽기>(이하 <물고기로 죽기>)로 이어졌다. 연습실과 무대와 대기실에서 함께 지내며 내가 갖고 있던 기존의 ‘수어통역사’에 대한 이미지를 완전히 깨준 김보석 통역사와 만나 개인의 삶, 수어라는 또 다른 언어, 그리고 ‘연극’ 이야기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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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코다입니다”

주영
실례일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수어통역사의 이미지는 아니다. 어떤 계기로 수어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수어통역사가 된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보석
나는 코다(CODA, Children Of Deaf Adult의 약어, 농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청인 자녀)이다. 하지만, 20대까지 수어를 배우거나 부모님 이외의 농인과 대화해본 적은 없었다. 내가 이래 보이지만 기독교 신자다(웃음). 20대 초반에 방황하던 시기에 교회를 찾았고, 그곳에 농인부가 있었다. 거기에서 활동하면서 수어통역학과라는 곳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입학을 했다. 학교에서 수어를 배우면서 내가 가진 ‘코다 정체성’을 깨닫게 되었고 전공에 점점 더 푹 빠졌다.
수어를 배우면서 새로운 정체화 과정을 거치면서 부모님을 새롭게 이해하게 됐다. 그 전에 나에게 부모님은 그저 대화가 되지 않는 대상이었다. 부모님과 깊은 대화를 한 적이 없었다. 용돈 얘기, 밥 얘기 정도.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깊은 대화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비로소 부모님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고, 부모님을 보며 갑갑하게 느꼈던 부분, 행동들이 농인인 부모님들의 맥락에서 이해되기 시작했다. 학부 1학년 때 수어통역사 자격증을 따서 수어통역 일을 시작했고, 지금은 박사 과정에서 공부하고 있다.
주영
‘코다’라는 단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은 최근 일인 것 같다. 특히 ‘코다 정체성’이라는 표현이 인상적인데, 태어나보니 부모가 농인이어서 원치 않지만 코다라 불리는 사람들이 말하는 ‘코다’와는 다른 의미로 들린다. ‘정체성’이라는 말은 사실은 삶에 큰 영향과 자긍심을 주는, 주어야 하는 한 사람의 구성요소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아는 한 한국어는 물론 영어, 일본어에도 능통하다. 거기에 한국수어에 일본수어, 미국수어도 어느 정도 가능하지 않나? 무려 6개의 언어다. 언어에 대한 감각이 특별한 것 같다. 그런 것이 수어통역사라는 일을 택하는 데 영향을 줬을까? 나의 경우 한국어-일본어 통역을 하기도 하는데, 겨우 2개 언어를 오가는 데도 스위치가 안 켜지거나 잘못 켜지는 일이 종종 있는데 말이다.
보석
할 줄 안다고 당당히 얘기할 수 있는 건 한국어, 한국수어, 일본어, 일본수어 정도다. 영어와 미국수어는 어디 가서 빠지지 않고 놀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
어릴 때 꿈이 일본어 교사였다. 그래서 공장에서 성실히 일하고 월급 받는 것을 최선의 선택이라고 믿고 살아오신 농인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입학해서 스스로 열심히 벌어 열심히 공부했었다. 좋지 않은 일로 자퇴를 하고 방황을 하긴 했지만...
다른 분들도 다 그렇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코다라는 나의 환경이 언어 감각을 길러줬다고 생각한다. 코다에게는 어릴 때부터 많지 않은 단어수로 부모님을 통역하는 역할이 주어진다. 병원, 법원 같은 곳의 어려운 통역까지. 적은 단어를 가지고 부모랑 소통하고 통역해야 하니까 ‘말 풀어쓰기’ 능력이 개발된다. 예를 들어 ‘컵’이라는 단어를 모르면 ‘마실 때 쓰는 그릇’이라는 식으로. 그래서 일본어를 배울 때, 아는 단어도 별로 없으면서 처음부터 그냥 대화를 했다. 어릴 적부터의 훈련으로 그런 식의 말하기에 겁을 먹지 않고 사람들과 만나 말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 같다. 새로운 코다 모임인 '코다 피플'에 참여하고 있는데, 코다들끼리 모이면 말의 봇물이 폭발한다. 사연들도 많고 그걸 이해할 사람들끼리 모이니까.
통역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스위치가 잘못 들어오는 경험을 하지 않나? 음성통역 하다가 한국인에게 일본어로 얘기하고 일본인에게 한국어로 얘기하고... 그런 경험 많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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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석

“나는 성소수자입니다”

주영
주축 멤버로 참여하고 있는 한국농인LGBT설립준비위원회(이하, 농인LGBT(준))에 대해서도 궁금하다. 일단 당사자성을 드러내고 활동하는 것에 대한 부담은 없는지, 본인의 성적 지향을 정체화하는 과정은 어땠는지. 그리고 농인사회, 수어통역 커뮤니티는 소수이기 때문에 더더욱 어떤 ‘불리함’이 작동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든다.
보석
나는 동성애자라는 나의 성적 지향을 고민해본 적이 없다. 유치원 때부터 꿈에 남자 아이돌이 나왔으니까(웃음),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숨긴 적도 없었다. 굳이 막 떠들지는 않았지만, 누군가 물어본다면 부인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처음 다녔던 대학에서 자퇴한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어려운 형편 때문에 장학금에 목매고, 교수님들과 잘 지내며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이 주변 친구들에게는 아니꼬웠던 모양이고, 그게 “게이인 게...”라는 식으로 귀결되었다. 그때가 힘들었다. 아, 숨겨야 하는 거구나... 처음으로 생각했다. 다시 들어간 학교에서도 나를 숨기지는 않지만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다. 또 다시 그렇게 배제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건 아닐까. 웃긴 건, 그런 일을 겪고 나름대로는 벽장에 들어갔는데 그게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유리 벽장이었다는 점! 고주영 프로듀서가 갑자기 연락처를 딸 만큼.
농사회나 수어통역 커뮤니티에서도 나의 성적 지향으로 인해 불리하게 작용을 받을 건 이미 받았다고 생각한다. 아까 말한 코다 모임이 커밍아웃한 상태로 처음 낯선 사람의 집단을 만난 경우였다. 모르는 사람들에게 “저는 게이입니다”라고 소개하는데 되게 묘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이 좋다. 불편하다고 느끼는 점을 불편하다고 얘기할 수 있고, 나로 인해 모임 안에서 어떤 의사 결정에 영향을 주기도 해서 좋다. 성중립화장실이 생겨 내내 수다 떨던 여사친과 화장실 앞에서 헤어지지 않아도 되는 일처럼 작은 외로움이 사라졌다.
주영
아마도 점점이 존재했을 농인/성소수자들이 농인LGBT(준)라는 단체로 모이게 된 것도 청인사회와 다르지 않은 농사회의 보수성이 있었을 것 같다. 계기와 경위가 궁금하다. 뭘 하려고 하고, 하고 있는지도.
보석
두 가지 계기가 있다. 첫 번째는 지금 준비위원회의 대표를 맡고 있는 우지양이라는 인물. 우지양 씨가 자신의 성적 지향을 정체성을 오래 고민하고, 드디어 스스로를 가시화하고 혐오 수어를 바꾸는 활동을 시작했었다. 두 번째는, 서울인권영화제. 서울인권영화제는 장애인 접근권과 수어통역을 계속 고민하던 곳이었다. 그럼에도 수어통역에서 남성동성애자가 ‘신체 결합’으로만 표현되었고, 우지양 씨가 그걸 보고 글을 올렸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수어연구자들의 “그렇게 보지 말아라, 맥락을 보지 말고 어휘로만 보라”는 주장이 제일 화가 난다. 우지양 씨가 혼자 하는 데는 한계가 있으니 같이 해보자며 알고 있던 농인 커뮤니티 주변의 성소수자들을 모은 거다. 성소수자에게 차별적이지 않은 새로운 언어를 만들자, 그러려면 단체가 있어야 한다, 그런 흐름이었다.
농인LGBT(준)는 얼마 전에 염원이었던 성소수자와 관련된 대안적 수어를 개발해 묶은『농인성소수자X한국수어: 편견과 혐오를 걷어낸 존중과 긍정의 언어』(https://deafqueerkor.org/에서 한국어나 한국수어로 볼 수 있다)를 출간했고, 올해부터는 시민단체 행사, 공연을 포함한 문화예술 행사 등의 수어통역을 모니터링하고 의견을 제시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앞으로는 수어통역사 양성도 하고 싶은 바람이 있다. 지금은 정식단체로서의 발족에 집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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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인성소수자X한국수어: 편견과 혐오를 걷어낸 존중과 긍정의 언어』 책표지
Ⓒ한국농인LGBT설립준비위원회
주영
“어휘로만 보라”니 언어는 사회적 인식과 맥락에서 발생하고 역으로 발생시키기도 한다는 기본적인 언어에 대한 인식조차 결여된 것 같다. 보석 통역사를 처음 본 곳도, 함께 한 작업도 연극이었다. 통역사라면 선호하는 분야가 있을 것 같다.
보석
교육 통역이 가장 만족스럽다. 대학에서 강의통역을 오래 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알아서 공부해갈 수도 있고, 다른 통역사나 제3자의 간섭도 제일 덜 하다.
주영
통역은 “아는 만큼 할 수 있다”고 믿는 얼치기 통역자로서는 놀라운 이야기이다. 강의나 수업, 교육의 경우, 끝없이 새로운 단어와 이론이 나오지 않나? 그리고 정보량도 엄청나고 정확하게 전달이 되어야 하고.
보석
많은 수어통역사들이 현장에서 애쓰고 고생하는 것을 알고 있고, 개인적으로 그분들을 존경한다. 개인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한국수어통역만을 두고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가장 큰 문제는 한국수어를 잘 못한다는 것. 수어통역을 잘 못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단어가 없어서 통역을 못한다”이다. 하지만, 나의 경우 단어와 통역은 별개라고 생각한다. 서로 다른 언어 사이에 단어가 일대일로 정확하게 매칭될 리 없지 않나? 통역은 통역이다. 원 내용을 이해하고 한국수어로 옮기려고 하지 않고 직역을 하려니까 단어 탓을 하게 되는 거다.
성소수자 관련 단어는 수어표현이 많이 없긴 하다. 하지만, 가령 ‘남성 동성애자’라는 수어 단어가 없다면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라고 중립적으로 정확하게 옮기면 될 일인데, 남성 동성애자에 대한 이해 자체가 없으니 혐오적인 단어로 표현을 하게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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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연극 수어통역사입니다”

주영
언급했던 <남산예술센터대부흥성회> <물고기로 죽기> 외에 <퍽킹 젠더>에서 농인 드랙 퍼포머의 통역을 하기도 했었고, 성평등 공연 <깨어난 숲속의 공주>, 장애-비장애 공감 즉흥연극 <나의 이야기 극장> 같은 작업들에서도 통역을 맡았다. 연극에서의 수어통역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보석
연극에서는 만족할 만큼의 통역 환경이 제공되지 않는다. 여전히 수어통역을 들러리처럼 사용하는 연극이 많다. 몇 명이 통역을 해야 하는지, 어떤 자료를 제공해야 하는지, 연출의도와 공간사용에 따라 수어통역사의 자리배치를 어디에 해야 하는지, 그런 것들이 충분히 논의되지 않는다. 공연을 다 만들고 나서 수어통역사를 불러서는 ‘청인에게 불편하지 않은 위치’에서 대사를 직역하기 바라는 공연들이 많다.
그런 점에서 <연극연습3. 극작 연습-물고기로 죽기>는 정말 특별한 케이스였다. 내가 한 팀으로서 호흡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단, 작가님이 쓰신 내용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고민이 있었는데, 제 얘기를 들으시고 김비 작가님이 “(수어)언어가 저한테 없으니 제가 얘기할 수 없는 것 같다. 통역사가 그게 맞다고 생각하시면 맞는 것 같다”고 얘기해주시더라. 대본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분들도 많다. 논의하면서 합의를 해야 하는데. 연습실에서 시간을 같이 보내며 해석과 표현을 함께 고민하기도 했다. 장애인 할인을 받는 관객들에게 사전 설문지를 보내서 휠체어 이용 관객이 원하는 자리를 지정할 수 있게 하거나 수어통역을 쉽게 볼 수 있도록 좌석을 먼저 지정하게 하고, (수어통역이 투사되던) 영상 송출에 잠깐 문제가 있었을 때, 그 사과문도 수어영상으로 올리고, 농인 관객분들이 오시는 날 수제 립뷰 마스크를 제작하고... 아, 우리 팀이 제대로 배리어프리를 고민하는구나 생각했다. 수어통역 있다고 보러 오라고 해놓고는 표 받고 객석에 앉아 공연을 시작할 때까지는 배리어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물고기로 죽기>는 여기부터 고민해서 너무 좋았다. 단순히 수어통역을 세우는 다른 공연이랑 전혀 같지 않다.
주영
눈앞에서 과찬을 들으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애초에 수어를 무대에서 사용되는 하나의 언어로 상정하고 부가정보로서 전달되기를 바라지 않은 연출의 의도가 있었다. 무대에서 영상이긴 했지만, 배우들보다 크게 나오지 않았나? 우리 공연의 주연배우였다. 유일하게 메이크업을 하는...(웃음). 스크린으로 비춰지던 수어통역사가 무대에 등장하고, 그 다음에 김비 작가님이 객석에서 무대로 올라올 때, “연극과 현실 사이 경계의 붕괴”를 느꼈다는 관객의 피드백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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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로 죽기> 공연사진, 촬영_원준혁 Ⓒ연극연습 프로젝트
보석
연극에서 최근 몇 년 새 배리어프리에 대한 고민이 엄청나게 늘어났다는 사실은 실감한다. 수어통역을 세우는 공연도 늘어나고. 하지만, 수어통역사를 세우는 게 다가 아니라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이런 얘기를 하면 “이렇게 하는 게 어디야, 연극이 예전에 비하면 얼마나 달라졌냐, 좋게 좋게 하자”라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그런데, 이 위치에서 수어통역을 하면 극의 흐름을 깰 것 같은데, 그래도 좋게 좋게 끝내는 게 맞나? 또 다른 의뢰 받을 걸 걱정하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서는 내 할 말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다른 건 모르겠지만, 농인 접근권이 제대로 구현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고 꼭 얘기하는 편이다. “이렇게 하면 청인 관객들이 불편해 한다”고들 하는데, 그럼 “농인 관객은요?“라고 되묻고 싶다.
비장애인들은 모르겠지만, 어떤 공연에서는 청인과 다른 정보를 농인 관객이 받기도 하고, 공연 시작 전에 “농인 관객 어디 계세요, 손 들어 보세요”하고 자기를 드러내라는 강요를 당하기도 하고, “오늘 통역사들은 전문 통역사가 아니니 이해해 달라. 어디 가서 얘기하지 말아 달라”는 협박(?)을 받기도 한다.
내가 코다라서 이렇게 사고를 하는 걸까? 저들이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게 나는 너무 기가 막힌데? 배우지 않아도 이러면 안 돼 하는 게 왜 저 사람들에겐 없지? 나도 청인 부모에게서 태어났으면 달랐을까, 그런 생각도 한다.
아유, 맨날 이렇게 떠드는 거, 나도 싫다. 나도 조용하게, 저 사람이랑은 항상 문제없이 즐겁게 작업할 수 있어, 그런 얘기 듣고 싶다.
주영
당사자가 아니니 알 수 없다고 해버리면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당사자가 아니라면 당사자에 다가가려고 노력을 하는 게 당연하다.
편의상 쓰고 있지만 ‘배리어프리’라는 말 자체도 어폐가 있다. 뭘 해도 프리해질 수 없으니까. 공연의 정보를 얻는 과정, 어떤 공연을 보겠다고 결정하는 심리적·사회적 환경, 공연을 보러 오는 길, 지정된 객석에 앉는 과정, 공연을 볼 때, 어떻게 배리어를 제로로 만들 수 있겠나. 배리어프리라는 말이 어떤 태도나 관점이 아니라 장비 갖추듯 무대 위 매뉴얼로 받아들여지고 실행되는 공연이 많은 것 같다. 기획-제작-홍보-운영 과정 전반에서 관람 약자의 동등한 접근권과 관람권을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고, 생각만큼 잘 하고 있지도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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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주영
주영
장애인접근권을 고민하는 연극인들과 농인LGBT(준)가 함께 만나는 자리가 있으면 좋겠다.
보석
같이 고민하는 자리를 만들려고 한다. 연극인들이 수어에 대해 잘 모르듯이 우리는 연극을 잘 모르고, 실제로 우리가 연극을 볼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가르쳐줄 건 없지만 같이 고민하고 싶다.
농인이 이해할 수 없는 연극 수어통역은 악순환의 시작이다. 가뜩이나 연극을 접할 기회도 적은데 보러 갔더니 수어를 알아들을 수가 없다, 다시는 보러 가지 않는다, 연극단체에서도 어차피 농인은 안 오니 수어통역을 뺀다, 이런 식의. 연극 통역이 많아지면 좋겠다. 연극을 보면서 갖게 되는 풍부한 생각을 농인들과도 나누고 싶다.
주영
어떻게 하면 공연에서 농인 접근권을 잘 보장할 수 있을까?
보석
농인과 소통해라. 수어통역사가 아니라 농인 당사자와. 위치든 수어통역의 질이든, 당사자의 조언과 감수를 받는 게 중요하다. 덧붙이자면 연극이라는 문화에 익숙하고 관심이 있는 당사자여야 한다. 그리고, 완성 후가 아니라 공연의 기획 단계부터 논의할 수 있으면 좋겠다.
주영
피어싱과 네일아트는 <물고기로 죽기> 때부터 봤는데, 팔뚝에 새로운 레인보우 타투가 보인다. 머리색도 달라졌고. 수어통역사라면 방송처럼 위아래 검은 옷 입고 표정과 손동작 외에는 자신을 숨겨야 하는 거 아닌가? 그것들 역시 통역사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싶은 건가?
보석
교만해 보일 수도 있는데, 수어통역을 볼 때 농인들이 통역사들의 복장을 지적하는 것이 정말 복장 때문이었을까? 통역도 가뜩 안 전달되는데, 이것도 거슬리고 저것도 거슬리고 한 것이 아닐까. 격식을 차려야 할 자리라는 것이 있을 수는 있지만 왜 검은 머리를 꼭 묶어야만 할까. 수어계에서 통역 잘 하기로 소문난 미국 수어통역사들의 복장은 굉장히 자유롭다. 저는 (이런 모습이어도) 복장에 대한 지적을 받아본 적이 없다. 농인들에게 물어봐도 처음에는 신기해 보이지만 통역이 시작되면 복장보다는 네 통역에만 집중하게 된다고들 하더라. 너무 재수 없나?(꺄르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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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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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주영X김보석

고주영X김보석
고주영
몇몇 예술 축제와 지원기관을 거쳐 2012년부터 공연예술 독립프로듀서로 일하고 있다. <안산순례길>(2015~2019), 정상성 규범에서 벗어난 존재들과 함께 연극을 만드는 [플랜Q](<래러미 프로젝트&십년 후>), 연극의 확장과 새로운 연극의 발생을 시도하는 [연극연습 프로젝트]( <1. 연출 연습-세 마리 곰> <2. 연기 연습-배우는 사람> <3. 극작 연습-물고기로 죽기>) 등을 기획・제작했다. 연극, 극장, 예술과 그 바깥의 사이에 있고자 한다.

김보석
2010년부터 한국수어통역사로 활동하며 다양한 분야에서 통역을 했고, 필요에 따라 일본어, 일본수어 통역도 다수 경험했다. 지금은 한국수어와 농인의 언어와 문화를 학술적으로 세상에 알리고자 박사과정에서 공부하면서 한국농인LGBT 설립준비위원회 상임활동가로 활동 중이고, 얼마 전부터는 농인 아티스트의 예술 활동 통역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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