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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어떻게, 왜] 경지은X성수연

자원을 모으고 선택지를 늘려가는 일

성수연

제206호

2021.09.30

[무엇을, 어떻게, 왜]는 배우이자 창작자인 성수연이 진행하는 대화입니다.
동시대 창작자들이 무엇에 주목하고, 어떻게 작업하며, 왜 그 일을 하는지 들어봅니다.

배우가 맡은 배역을 연기할 때, 그 배역의 무엇에 주목하여 어떻게 연기할지 결정하는 일엔 그 배우의 세상과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 반영됩니다. 의식적으로 반영하지 않아도 어떤 순간 훅 드러나기도 하고요. 저는 어렸을 때 흉내 내기를 좋아했어요. 연기에는 분명 흉내 내기의 속성도 있지요. 그런데 이제는 압니다. 사유 없는 흉내 내기가 무엇을 만들어내는지, 때로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신의 사유를 연기에 잘 반영하기 위해 배우들은 어떤 일들을 할까요? 배우 경지은 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눈 기록입니다.

성수연
최근 연극 <레드 스피도>에서 ‘남성’ 수영선수 역할을 맡았던 경지은 배우님과 함께 배우의 젠더 수행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보고 싶다. 나는 지은 배우님이 사회에서 여성으로 패싱되고 있다고 생각했고, 배우와 다른 성별의 배역을 맡아 연기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배우는 배역의 성별, 나이, 직업 등의 어떤 프로필만을 연기하지는 않는다.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경지은
젠더프리 캐스팅을 제안받고 지금까지 연극을 만드는 과정에서 새삼스럽게 발견한 건 그동안 연기를 ‘성별’로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레드 스피도>에서 내가 맡은 인물인 ‘레이’는 극 중에 남성으로 명시되어 있고, 나는 여성으로 패싱되는 배우이다. 배우와 배역의 성별이 일치된 작품을 만나면 성별을 염두에 두고 연기하지 않는데, 처음 젠더프리 캐스팅으로 작업했을 땐 ‘어떻게 표현하지?’ ‘나는 누구이며, 내 정체성은 어디까지 여성인가?’ ‘남성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남성을 표현할 것인가?’ ‘여성의 몸으로 남성을 연기하는 것은 무슨 사회적 의미를 발생시키는가?’ 등에 대한 다양한 질문들이 생겨났었다.
성수연
그런 질문들에 대해 어떤 식으로 고민을 이어나갔나.
경지은
과정에서 발견되는 것들을 조금씩 찾고 있다. 사회에서 요구되는 ‘여성스러움/남성스러움’ 등의 성별 고정관념을 확인하고, 그러한 편견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한다. 성별을 둘로 나누려는 세상에서 다양한 성정체성을 지닌 존재가 함께 산다는 것을 잊지 않고. 한 작품 한 작품 하면서 자원을 모은다는 느낌으로.
성수연
자원을 모은다는 말이 굉장히 좋다(웃음).
경지은
모아져야 할 텐데(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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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지은
성수연
이상한 말이지만, 솔직한 질문을 해보겠다. 그럴싸하게 ‘남성처럼’ 보여야 한다는 강박이 들거나 하지는 않았는지?
경지은
이번 <레드 스피도>를 할 땐 그런 강박이 들지는 않았다. 맨 처음 젠더프리를 경험했을 때는 남성을 연기해야 한다는 부담이 더 컸다. 결과적으로 내 몸은 특정 성별이 되지 않아도 생각보다 강인하고 격렬했다. 남성만큼 강한 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되어야 한다’라는 무게를 이겨내는 힘을 찾은 기분이랄까. 그리고 이번에 굉장히 흥미로웠던 점은 ‘관객과의 대화’에 참석했을 때 젠더에 관련된 질문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뭔가가 확인되는 순간이었달까?
성수연
‘관객들도 함께 고민해왔고, 우리가 찾아낸 것을 보고 믿어주는구나’ 이런 확인이었을까?
경지은
그렇다. 물론 해결할 부분이 있지만, 보는 관점들이 다채로워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첫 번째로 나올 것만 같던 젠더에 관한 질문이 나오지 않은 게 놀라웠던 기억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공연계에서 젠더프리, 젠더밴딩 등에 시도가 더 생겨났고 창작자들과 관객들에게 자원과 데이터가 쌓여갔기 때문 아닐까.
성수연
멋진 확인의 순간이었을 것 같다. 나는 오히려 ‘여성’ 인물을 연기할 때 지은 배우님이 말한 것과 비슷한 질문을 가졌던 적이 있었다. 여성으로 패싱되는 배우들이 모두 남성으로 명시된 인물을 연기하는 환경에서 유일한 ‘여성’ 인물을 연기했을 때. 아무도 나에게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왠지 상대적으로 더, 소위 말하는 ‘여성스럽게’, ‘사회적 여성성’을 수행해야 할 것만 같은 불안의 순간이 생기는 게 흥미로웠다. 그런 분류에 동의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때 질문들이 생겼다. ‘나는 누구이며, 내 정체성은 어디까지 여성인가?’ ‘여성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여성임을 표현할 것인가?’ ‘지금 이 불안은 옳은 불안인가?’ 연극계 미투 이후로 여성성에 관한 사회적 편견을 되짚어보고 없애려고 노력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막상 내 일이 되니, 생각이 많아졌다. 캐스팅은 젠더프리한데 나는 젠더로부터 프리하기 어려웠던 것이다(멋쩍은 웃음). 질문은 또 이렇게 확장됐다. 배우와 배역의 성별이 일치하는 작품에서는 분명히 ‘성별’을 연기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인지하지도 못한 채로 하고 있었던 건 아닐지. 혹은 갇힌 것도 모르는 채 갇혀 있었던 건 아닌지. 그런 의미에서 젠더프리 캐스팅 작업을 통해 사유하게 되는 것도 많고 질문도 고민거리도 늘어난다.
경지은
젠더프리 캐스팅에서는 ‘성별’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 여전히 새삼스럽기도 하고 중요한 사건을 맡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배우와 배역의 성별이 일치하지 않을 때 무대 위에서 낯선 가설들이 생기고, 보는 이의 입장에서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배역을 맡은 배우는 새롭게 파생될 가능성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해야 하니까 고민이 많아진다.
성수연
‘남성성’을 떠나서 어떤 ‘멋짐’을 수행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는 없었나(웃음).
경지은
(웃음). 멋져야 된다는 생각은 안 했지만, 멋져 보일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었다.
성수연
어떤 종류의 멋짐일까?
경지은
폭력을 휘두르는 남성 인물을 여성의 몸을 가진 내가 연기해야 할 때, 폭력을 그대로 재현하기 싫다. 상징적으로 표현하거나 몸의 각도를 틀거나 행위를 반복하는 횟수를 줄이는 등 폭력성을 최대한 적게 노출시키려고 한다. 때로는 이 선택에서 폭력이 폭력으로 드러나지 않고, 인물이 매혹적이고 유혹적인 남자처럼 보이는 순간이 발생하는 건 아닌지 의구심이 들 때가 있었다.
성수연
여성의 몸을 통해 표현되는, 또는 중화되어 표현되는 남성의 폭력이 오히려 아슬아슬하게 인물 혹은 배우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순간에 대한 의구심인가? 흥미로운 의구심이자 발견이라고 생각한다.
경지은
물론 성별을 떠나 무서운 상황에서 벗어나는 게 제일 좋긴 하지만, 부득이하게 수행해야 할 땐 다층적인 표현을 쓰고자 한다. 연기적 선택으로 폭력을 중화시키거나 축소시키면서도 명백한 폭력으로 그리고 싶다. 미묘하고 먼지 같은 폭력으로 섬세하게 나눠서 구분하기 어렵지만 분명 구분할 수 있는, 논의될 수 있는 장면으로 재생산시키려고. 우리에게 익숙한 반복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고 해석할 수 있게 균열을 만드는 것이다.
성수연
다층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표현을 선택하는 과정에 대해 듣고 싶다.
경지은
우선 프로덕션 안에서 ‘이 장면이 꼭 필요한지’에 대해 논의한다. 작가와 대사를 수정한다든지, 연출가에게 장면의 다른 콘셉트를 제안한다. 그럼에도 구조상 폭력성을 담는 장면이 필요하다면 결국 무대 위 배우의 몫이 중요해진다. 이럴 때는 특정 성별을 연기한다는 사실을 떠나서 조금 더 성평등한 지향점을 가지고 있는 창작자로서의 표현에 관한 고민을 한다.
성수연
공연 때 선택했던 구체적인 표현의 예를 들어줄 수 있나.
경지은
올여름 낭독 공연 <즐거운 너의 집>이라는 작품에서 ‘주디’라는 인물을 연기했다. ‘주디’는 1950년대 삶의 가치를 지향하는 가정주부다. 친구 남편이 취직을 빌미로 성희롱을 하는 장면이 있었다. 일을 같이 하겠냐, 라는 상사의 물음에 ‘주디가 고개를 끄덕인다’라는 지문이 있었는데 고개를 끄덕이며 제안을 인정하기 싫은 거다(웃음). 배우인 나는 동의하지 않고 인물은 동의할 때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며 수긍하지 않고 턱을 치켜들면서 삐딱한 고갯짓을 시전한다. 두 주먹을 꽉 쥐는 행동을 더한다든지. (경지은이 고개를 높이 들고 비뚤게 끄덕인다.) 그리고 결국 ‘죄송해요’라는 대사 이후에 자리를 박차고 퇴장하는 동선을 만들었다.
성수연
인물의 상황과 배우의 입장은 충돌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배우와 인물이 딱 맞아떨어지는 순간이 되었겠다. 지금의 현실이 잘 반영된 굉장히 풍부한 순간이 만들어졌을 것 같다.
경지은
배우와 인물이 딱 맞아떨어지는 순간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어떤 선택을 해야 배우도 안전하고, 인물도 안전할 수 있는지, 또 그것을 보는 관객들도 안전할 수 있는지 생각한다. 작은 고개 끄덕임이었는데 당시에는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다.
성수연
멋지다. 작은 고개 끄덕임이지만 결코 작지 않다.
경지은
작은 행동들이 쌓이면 인물이 누구와 연대하는지, 누구의 목소리를 대변하는지 더 선명하게 전달될 거라고 생각한다. 경계를 허물고 선택지를 늘려가는 일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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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연
선택지를 늘려간다는 표현이 좋다. <레드 스피도> 창작 과정에서도 그런 순간들이 있었는지, 창작 과정에서 어떤 논의들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경지은
<레드 스피도>의 프로덕션은 젠더프리 캐스팅을 처음 하는 팀은 아니었다. 이미 쌓여있는 데이터들을 기반으로 서로 의견을 나누면서 연습을 진행했다. 수영선수인 ‘레이’와 그의 ‘코치’는 남성으로 명시되어 있지만 여성으로 패싱되는 배우가 연기를 했고, ‘레이’의 전 여자친구 역할은 여성으로 명시되어 있고 여성으로 패싱되는 배우가 연기했다.
‘레이’는 곤란한 사건에 연루되는데 관련한 일로 ‘레이’가 ‘코치’나 ‘변호사’인 형을 만나는 장면에선 경쟁 사회 속에서 공적으로 드러나는 관계성, 거대한 사회 구조가 드러나는 반면, ‘전 여자친구’를 만나서 이야기를 할 땐 연애문제로 화두가 축소되는 느낌이 들었다.
중요한 사건이 있으면 인물과 인물이 공적으로 만나지는 경우가 있지 않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든 이익을 쟁취하기 위해서든. 그런데 ‘전 여자친구’와의 장면은 같은 사건을 걸고 만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랑문제가 되는 거다. 심지어 ‘레이’에게 방안을 제시하고 조력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연인이라는 이유로 말이다.
성수연
연애문제로의 축소는 결과적으로 많은 것들을 축소시켰을 것 같다. 인물의 위상도 갈등의 크기도. 의견 대 의견으로 팽팽할 수도 있는데.
경지은
그렇다. 그래서 사적 영역에서 은밀하고 내밀한 관계로만 그려지면 안 된다는 이야기가 팀 내에서 나왔다. 사건의 조력자로 연루되어 있는 중요한 인물인데, 여자친구였다는 이유로… ‘사랑했기 때문에’(웃음)로 끝나버리는 것이다.
성수연
(웃음). 사랑….
경지은
이 인물이 다른 관점에서 읽힐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지고, ‘여자친구’라는 속성으로만 남는 거다. 그래서 논의를 하며 각 인물이 원하는 목표와 욕망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정해 나갔고, 결과적으로 원하는 방향이 잘 드러났다.
성수연
젠더프리 캐스팅을 통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성성’, ‘남성성’, ‘젠더’에 대한 질문들에 또 다른 레이어의 질문을 더한 것으로 보인다. 여성인물들이 서사 안에서 어떤 식으로 소비되어 왔거나 축소되어 왔는지 고민하고 작품에 담아낸 것으로. 여성의 여자친구이든, 남성의 여자친구이든, ‘여성이 연기하고 있는 남성’의 여자친구이든, 그 여자친구를 여성이 연기하든 남성이 연기하든, 주인공의 여자친구를 ‘여자친구’라는 속성에만 머물게 해서는 안 된다.
경지은
그렇다. 그리고 맡은 배역의 성별을 고민해야 되는 부분도 있겠지만, 지금의 나한테 크지는 않고, 아니 크다(웃음). 배역과 배우가 만났을 때 파생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에 대해 충분히 읽어보려고 하는 거다. 최대한 많은 질문들을 하면서 무엇을 의도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보려고 한다.
나는 자라면서 사회에서 요구하는 여성상에 부합하는 사람이 아니기도 했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왜 여성스럽지 못하냐”라는 질문을 받고 자라왔으니까. 목소리가 굵고 낮은 편인데 이것이 보는 사람에게 익숙한 ‘남성성’에 가깝다면 오히려 음역대를 높게 써보기도 한다. 익숙한 편견에서 비롯된 경계를 흐트러트리고 싶다.
성수연
스스로 가진 조건들을 역이용해 경계를 일부러 흐트러트릴 수 있는 선택을 한다는 점이 재미있다. 물론 지금 우리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여성성’, ‘남성성’, ‘여성스러움’, ‘남성스러움’이라는 개념과 언어에 동의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웃음).
경지은
(웃음). 맞다. 나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여성상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성별에 따른 억압과 편견을 예민하게 감각하려는 의지가 있다. 내가 골격이 크고 키가 크기 때문에 남성 역할에 나를 캐스팅했을 거라는 생각은 별로 안 한다. 다만 나는 어떤 고정관념에 대해서 계속 공부하고 싶어 하고, 그것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있다는… 알긴 뭘 알아(웃음). 현실과 무대에서,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차별을 열심히 읽고자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작품 제안이 왔을 것이다.
성수연
작품은 어떤 기준으로 선택하나. SNS에 공유하는 기사나 소식 등을 보면 배우님의 의견과 배우님이 선택하고 있는 작품들의 결이 비슷하고, 같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경지은
아무래도 여성이 목소리를 내는 작품이라면 반갑고 신난다. 연극은 부조리한 현실을 담아내고 공감을 일으킨다. 다수가 긍정하는 공통의 이야기에서 소외된 인물과 역사를 찾아 동행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참여하는 프로덕션도 중요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관심사나 지향하는 가치, 작업에 대한 태도를 공유하고 팀 안에서는 어떻게 의견을 나누고, 창작을 이어나가는지 물어본다. 예전에는 작품, 배역 등만이 계약 조건이었다면 더 풍성한 대화를 나누고 계약 조건의 세부사항을 확인한다.
성수연
프로덕션에서 그런 부분들에 관한 대화를 나눌 때 ‘아, 이건 정말 발전적이고 좋은 대화다’라고 느꼈던 순간이 있나. 혹은 기억에 남는 프로덕션이 있는지.
경지은
크고 작은 순간들이 있다. 대본에 사용된 욕설의 뜻을 해석하면서 이 단어는 여성혐오이고, 이 단어는 장애인 비하, 이 단어는 청소년을 폄하하는 말 등임을 짚어 가면서 욕설을 삭제한 적이 있다. 또 어떤 작품에서는 등장하는 남성 인물들은 변호사, 장교 등 경제 활동을 하는 직업군임이 드러난 반면 여성 인물은 가정에서 어머니, 딸, 언니로 머무는 것을 발견하고 창작자들끼리 여성 인물들의 직업을 만들기도 했다. 또 창작자들이 사용하는 은어, “아, 오늘 대사를 절었어”, “배우는 잘 팔려야지”와 같은, 대상을 도구로 사용하려는 말과 ‘취급’에 대해서 경계하자는 약속을 나누기도 한다.
안전한 창작환경에 대해서도 계속 고민하고 있다. ‘나이가 어리다고 함부로 반말하지 않는다’는 건 어떤 그룹에서는 당연히 지키는 약속 중 하나지만, 어떤 그룹에서는 여전히 어렵다. 나는 동행하는 동료들과 안전한 작업 환경을 고민하고 만들어 가면서 안정을 찾아갔다. 느슨한 연대에 행복했고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고 느꼈었다. 그렇지만 기대를 품고 만난 타 작업에서, 고군분투했지만 상처를 받은 경험도 많다. 올해도.
성수연
맞다. 사람마다 그룹마다 속도도 다르고. KTS와 같은 훌륭한 지침들을 읽고, 그걸 참고해서 좋은 약속들을 만들어도 결국 너무 기본적이어서 명시하지 않은 부분이나, 행간에서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계속 고민하고 있다는 말에 동감하고, 계속 공부해야 한다.
경지은
프로덕션 진행 중 문제가 생긴다면 사적인 관계로 축소시키지 않고 동등하게 말할 수 있는 장이 필요하다. 모두가 함께 만드는 작업 환경에서 일어난 문제를 다 같이 감내하고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대책을 세워야 폭력이 반복되지 않는다.
또 30대가 되면서 ‘막내 여자 배우’를 지나가고 있다. 나를 압박하고 긴장시키던 폭력들이 나보다 나이가 어리거나 경력이 적은 배우에게 향하는 걸 확인하면서 나를 비껴가는 이 상황을 주시한다. 어떤 이는 아직도 그런 세계가 있냐고 비웃을지도 모르지만, 있다. 소리 낼 것 같은 사람과 못 낼 것 같은 사람을 구분해서 가해에 방향을 바꾸는 인간이, 지금도 있다.
성수연
내가 그 대상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없는 일이 되는 건 아니니까. 정말 계속 고민해야 하는 것 같다.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도 끊임없이 성찰해야 한다.
안전한 창작 ‘환경’에 대한 고민과 함께 안전한 창작 ‘내용’에 대한 고민도 하게 된다. 창작 환경에 있어서의 안전망을 제대로 구축해둔다면 조금 도발적이거나 불편한 내용도 조심스럽게 작업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가도 아직은 때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고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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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지은
안전망 없이 도발적이고 불편한 내용을 만드는 작품에서 피해받고 상처받은 사람이 생겨났으니까. 그래도 창작 환경에 대한 질문을 만드는 팀이라면 더 다채로운 화두를 다룰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가져본다. 또 새로운 이야기들이 이곳저곳에서 나오기도 하고. 스탠드업 코미디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수위를 넘나든다는 점이다. 안전한 창작 환경을 구축하는 팀 안에서 위험한 농담을 만들며 수위를 넘나드는 스릴이 즐겁다. 오랜만에 질펀하게 놀아제끼고(웃음).
성수연
나도 해보고 싶다. 스탠드업 코미디. 질펀하게(웃음). 이런 부분들 포함해서 연기나 연극 작업에 관한 화두들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공부를 하는가.
경지은
책으로 접하다가 관심 있는 특강, 강좌들을 찾아 듣기 시작했다. 올여름에는 3개월 동안 성평등 교육활동가 과정을 수료했는데 점점 호흡이 길어지는 걸 느낀다. 또 개인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행동을 놓치지 않고 체크하려고 한다. 이 길에서 세상이 바뀌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에 자주 낙담하고 분노하고 좌절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미투 운동이 일어난 전처럼, 침묵하고 방관하던 예전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 조금씩 몸을 움직여본다.
여러 가지 배우 훈련이나 메소드를 배우던 시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해보지 못한 경험을 더 해보려고 한다. 극한으로 몰아붙이는 훈련 과정에서 부상을 입고, 경쟁하던 시기를 지나 내 몸을 돌보는 방법에 대해 생각한다. 바다에 있으려고 한다. 바다는 마음을 다스리면서 설레는 마음으로 사유할 수 있는 시간을 준다. 물속에 있는 거다. 서핑도 하고 저번에는 스킨 스쿠버도 했다. 스노쿨링도 하고 바다 수영도 한다.
성수연
바다 가고 싶다(웃음). 이제 마무리를 해야 할 시간이 다가온다. 화제를 크게 바꿔보겠다. 어떻게 연기를 시작하게 되었나.
경지은
10대 때 학교에서는 늘 활발하고 인기 많은 2학기 반장 스타일이었고 집에서는 조용했다. 그 괴리가 소화가 잘 안 되고 어떤 모습이 내 본 모습인지 혼란스러웠다. 그 시기에 드라마, 영화에 빠졌다. 가상의 세계가 도피처가 되는 듯했다. 그러다가 촬영 현장을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배우가 되고 싶었다기보다는 그 가상의 현실이 위로가 됐다. 내가 처한 현실과는 다른 기분, 그렇게 자연스럽게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다.
성수연
현장을 따라다녔다니. 기억 나는 현장이 있나.
경지은
의학드라마를 굉장히 좋아해서 병원에서 촬영하는 현장에 자주 갔다.
성수연
의학드라마 중 어떤?
경지은
<외과의사 봉달희>를 정말 좋아했다. 봉달희가 너무 멋있었다(웃음).
성수연
<외과의사 봉달희> 재밌었다. 나는 <하얀 거탑>을 좋아했다. 그 당시에는 여자 역할에는 왜 장준혁 과장 같은 역할이 없을까, 저런 역할 해보고 싶다, 이런 생각했었다(웃음).
경지은
봉달희도 그때는 없었던 여자 의사 캐릭터였다. 러브라인이 있긴 했지만(웃음).
성수연
가상의 세계가 주는 위안 때문에 연기를 시작하게 되었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단단히 현실에 발을 붙이고 현실에서의 문제의식과 작업을 연결시키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이나 목표나 지향점이 있다면?
경지은
이 일을 오래 하고 싶다는 의지가 생겼다. 배우 일을 지속하는 것이 목표 중 하나다. 배우로서의 개인 창작 활동을 더 주체적으로 하고 싶은 마음도 있고, 스탠드업 코미디라는 장르를 알게 되었으니 한 시간 스페셜 공연을 해봐야겠다는 마음도 있다. 수연 배우님은 어떤가.
성수연
새로 설정하기 위해 아직 찾는 중이다. 안전은 하되, 안전함 속에서 안주하지 않을 수 있는 날카로운 순간들을 만들어내고 싶고, 또 보고 싶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여전히 내게 유효하다. 그런 의미에서도 그렇고 시기적으로도 그래서인지 연극의 가치도 다시 생각해보는 중이고.
경지은
대면하는 예술이 가지고 있는 가치에 대해서 다시 논하고 목표를 설정해야 하는 중 요한 시점인 것 같다.
성수연
대면하는 예술의 가치가 뭐라고 생각하나?
경지은
일단 무대에 있는 살아있는 몸을 보는 게 좋다. 창작의 흔적이 쌓인 현장에 함께 있는 감각이 황홀하다. 눈으로 볼 수도 있지만 내 곁 가까이 지나가는 배우의 발걸음에서 느껴지는 울림도 좋고. 빛도 좋고. 말라 있던 배우의 머리가 극 후반에는 땀으로 젖어가는 생생한 변화 같은 것이 좋다. 나 좋아하네 연극(웃음).
성수연
오늘 좋은 이야기 들려주셔서 감사하다. 앞으로 이 코너를 ‘질문 주고 받기’로 마무리하고 싶다. 우리가 서로 눈을 바라보고 질문을 하나씩 던진다. 오늘 경지은 배우님과의 대화를 통해 떠오른 질문으로 내가 시작을 하고, 그러면 그 질문을 받아서 배우님도 다시 질문한다. 내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의 질문도 좋고, 더 확장된 질문이어도 좋고, 그냥 떠오르는 질문이어도 좋다. 그런 방식으로 서로 다섯 개씩의 질문을 던진다. 인터뷰이의 마지막 질문으로 이 인터뷰는 끝나는데, 독자님들이 배우님의 그 마지막 질문을 받아 함께 생각해보면 어떨까 싶다. 괜찮을지?
경지은
좋다.

(경지은과 성수연 서로의 눈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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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연
선택지가 많다는 것은 자유와 이어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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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지은
우리는 무엇에 가로막혀서 자유로울 수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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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연
사회적으로 나를 가로막고 있는 것들만이 나를 가로막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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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지은
무엇을 미루고 무엇을 뜸 들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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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연
여러 생각들과 함께 걸어갈 때 어떻게 하면 좀 더 가볍게 걸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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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지은
너의 걸음 주변에 어떤 발자국들이 남아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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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연
너는 바다에서 혼자 있을 때가 좋아, 누군가와 같이 있을 때가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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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지은
같이 있을 수 있는 사람은 혼자로도 만들어주는데, 같이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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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연
(응응). 네가 보는 것을 나도 보고, 내가 보는 것을 너도 보고, 그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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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지은
(아싸). 너와 나는 무엇을 같이 보고 싶은 걸까.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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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연(파이리) 본지 편집위원
배우, 창작자. 다양한 형태의 연극작업을 하고 있다.
인스타그램: @sooyeons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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