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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어떻게, 왜] 신윤지X성수연

주장하지 않아도 이해받을 때까지

성수연

209호

2021.11.11

[무엇을, 어떻게, 왜]는 배우이자 창작자인 성수연이 진행하는 대화입니다. 동시대 창작자들이 무엇에 주목하고, 어떻게 작업하며, 그 일을 왜 하는지 들어봅니다.

배우는 자기 자신과 닮아있어 자연스레 이입이 되는 역할을 연기하기도, 도저히 이입할 수 없는 역할을 연기하기도 합니다. 이입하지 않아도 집중해야 하고, 동의하지 않아도 발화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배우들은 역할과 나 사이의 거리를 어떻게 다루며 연기를 할까요? 배우 신윤지 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눈 기록입니다.

성수연
최근에 굉장히 뜨거웠던 <청년부에 미친 혜인이>(웃음). 작업 과정도 궁금하고, 관객을 만났을 때 어땠는지도 궁금하다. <청년부에 미친 혜인이>(이하 <혜인이>) 는 왜 선택하게 되셨는지.
신윤지
이오진 연출님한테 제안을 받았는데 대본이 흥미로웠다. 그분 특유의 재치와 유머가 분명히 있는데, 이번에는 조금 더 세게 갔다는 느낌이었다. 제목부터 그랬고, 인물의 대사들도 셌다. 독자로서 읽을 때 쾌감이 있었다.
성수연
연습 과정에서 가장 세다고 느꼈던 대사가 뭔지 소개해줄 수 있나.
신윤지
굉장히 많다. 예를 들면 ‘이만희 개새끼’, ‘섹스 섹스 보지 보지 자지 자지’ 라던가(웃음). 페미니즘을 다루고 있는 작품들에서 조심하거나, 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들까지도 유쾌하게 밀어 붙여보는 시도를 하는 대본이라고 생각했다.
성수연
예를 들면 조금 언피씨한…(웃음).
신윤지
(웃음) 그렇다. 재미있게 읽으면서도 정말 괜찮은지, 이 정도까지 가도 되는지 계속 고민했었다.
성수연
그런 고민들을 연습 과정에서 동료들과 어떻게 나누었을지 궁금하다.
신윤지
각자의 생각들이 달라서 대화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혜인이는 교회 안에서 요구되는 모습으로 살았고, 혜인이의 잘못이 아닌 어떤 사건으로 인해 교회에서 나가야 했고, 페미니스트가 되어 교회로 돌아오는 인물이다. 이상한 말일 수 있지만 ‘페미니스트’가 그런 단어들을 사용해도 괜찮을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결국 그런 말들의 언피씨함을 알면서도 할 수밖에 없는 혜인이의 상황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다면 괜찮을 거라 믿고, 단순히 유머코드로 그런 말들을 사용하려 했던 것이 아니니 상황 안에 잘 녹여보기로 했다. 분명히 불편함이 발생할 거라는 것도 인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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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지
성수연
언피씨하다고 무작정 뺄 것이 아니라, 그 말들이 나오는 맥락들이 잘 받아들여지게끔 서사 안에서 잘 해결해보자는 것이었나.
신윤지
맞다. 이 인터뷰 코너의 제목도 ‘무엇을, 어떻게, 왜’인데, 요즘 내가 고민하는 지점이다. 무엇을 왜 해야 하는지, 혹은 왜 하지 않아야 하는지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 <혜인이>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고.
성수연
오히려 교회가 배경이기 때문에 그런 말들에 대한 선택이 서사 안에서 잘 작동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피씨하지 못한 어떤 말들을 피씨함의 상징처럼 느껴지는 ‘청년부’ 안에서 하는 인물의 선택이 흥미로울 수 있고.
신윤지
맞다. 사실 나는 교인이 아니라 <혜인이>를 납득하는 데 오래 걸렸다. 혜인이의 선택들에 대해서. 그런데 교회를 경험한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교회 안에서는 ‘섹스’라는 단어를 뱉는 것 자체가 가능하지 않다고 하더라. 그렇다면 그 단어가 주는 위험성보다는 그 단어를 여기서 왜 뱉게 되었는지, 누구에게 어떤 말을 전하고 싶은지에 대해 관객들이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했다. <혜인이>는 교회를 비난하려는 연극은 아니다. 어떤 폐쇄적인 집단에는 어느 정도의 자극이 필요한 걸까 질문해볼 수 있었던 연극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미러링 방식의 공격으로 보일지라도. 일상에선 그런 방식을 택하지 않고 어떤 것이 현명한 행동일지 고민하고 노력하는데 참 어려운 일이라(웃음).
성수연
결국 페미니즘과 교회라는 사회를 동시에 이해해야 가능해지는 작업이었다는 점이 재미있다. 학교 이야기, 예를 들면 <방송부에 미친 혜인이>라든가(웃음), <직장인 산악자전거동호회에 미친 혜인이>가 아니라 <청년부에 미친 혜인이>였기에, 그 특수한 사회 안에서 가장 도발적이면서도 현실적으로 가능한 방법들을 찾은 것일 테고, 모든 참여자분들이 함께 고민하셨을 것 같다. 연기하시면서 ‘이 정도는 너무 약한데? 확 어떻게 더 해버려?’ 이런 충동을 느끼기도 했나(웃음).
신윤지
그것 때문에 정말 많이 부딪혔다(웃음). 내가 실제 교회 사회를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혹은 페미니스트로서의 행동에 대한 나의 기대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혜인이는 교회에 남는 선택을 하는데, 그것을 본 관객들이 결국 변한 것 없이 똑같다고 생각할까 봐, 혜인이의 방식이 옳지 못하다고 생각할까 봐 두렵기도 했다. 어쩌면… 내가 살면서 그것까지는 차마 할 수 없었던 행동을 해보고 싶은 기대가 있었을 수도 있다…(웃음).
성수연
인물을 통해서?
신윤지
그렇다. 하지만 결국 작가님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교회라는 사회 안에서는 어떤 말을 내뱉는 것도, 자신을 배제했는데도 다시 돌아와 계속 뭔가를 하는 것도 어려울 수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인이가 발을 내딛기 시작한 것이고, 그런 내딛음은 실제 사회에서도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다는 생각. 방식이 조금 날 것이거나 나이브하거나 옳지 않아 보인다 해도, 한 사람이 사회에서 소리내기 시작한 것으로 봐주면 어떻겠냐는 생각. 그런 과정에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운 곳이 교회 사회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고, 혜인이의 선택을 받아들였다. 그랬는데도 또 공연 올라가고 난 후에 연출님에게 이런 말들을 했었다. ‘불 질러야 돼(웃음). 저 강대상을 때려 부수자(웃음).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그렇다면 제발 환상장면이라도 넣어줘(웃음)’.
성수연
(웃음) 아, 환상장면(웃음).
신윤지
‘내 꿈이었던 거라도 좋아. 제발(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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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연
결국 한 인물에게 어떤 사회의 룰이 완전히 체화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인정하고 가는 수밖에 없었나.
신윤지
그렇다. 받아들이고(웃음).
성수연
혜인이는 극 중 변화를 겪는 인물이기 때문에, 억압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던 우리의 과거와, 생각의 변화를 겪은 후 우리의 현재를 동시에 고민하게 됐을 것 같다. 사람마다 정도는 다르겠지만 분명히 연극계 미투 이후 변화를 겪었으니까. 혜인이의 이야기가 배우님 개인과 만나면서 떠오르는 순간들이 많았을 것도 같다.
신윤지
그렇다. 연극계 미투 이후 연극을 하면서 분명히 내가 변했고, 돌이켜보면 나도 혜인이처럼 차별을 전혀 감각하지 못하고 살았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다. 떨어져서 봐야만 불합리한 대우를 받고 있었음을 알게 된 순간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기억들을 불러오려는 노력을 많이 했다. 과거의 혜인이를 표현할 때 어렵고 고민이 많았다. 소위 ‘전형적인’, ‘평면적인’ 혹은 순종하는 여성의 ‘이미지’를 내가 그대로 연기하고 있지는 않은가? 현실에 그런 모습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그대로 연기하는 것이 필요한가? 어떤 때에는 필요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 안에서 어떻게 이 인물의 진심을 표현해야 하는가? 여성을 다루는 방식이 전형적으로 보일까 봐 두려웠다. 변화 이후의 혜인이를 표현할 때도 고민이 많았다. 혜인이의 선택들이 현실적이다 보니 사람들이 답답하게 생각하면 어쩌나 걱정도 됐다. 홍보문구를 보고 많은 분들이 ‘사이다 보러 가고 싶다’라는 기대감을 가지셨는데, 내용을 알고 있는 나는 속으로 ‘어떡하지 이건 고구마에 사이다 딱 한 모금 마신 정도일 텐데(웃음)’ 했다. 결과적으로 합의된 사항들에 충실하되,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기보다는 최대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들까지 찾아보자는 생각을 했다.
성수연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들을 찾고 공유하는 과정을 어떻게 밟았나.
신윤지
겪고 있는 상황 안에서 혜인이의 태도가 얼마만큼 표출되어야 하는지를 고민했다. 당시 연출님은 무대 위에서는 많이 표출되길 원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보인 것과 같은 모습의 혜인이가 등장하되, 무대 밖에서 혜인이가 혼자 있는 시간 속에 무언가 표출되는 걸 상상하셨던 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장면들을 연습할 때 자꾸만 뭔가가 표출되는 상황에 맞닥뜨렸다.
성수연
‘무대 위에서 표출하지 않아야 한다’라는 점이 재미있다. 무대 위에서는 전혀 그런 모습들이 드러나지 않는 대신 오히려 무대에 없을 때 그 인물이 지금 어떤 상태일지를 관객이 함께 상상하기를 원하신 건가.
신윤지
그렇다. 무대 위에서 표출하지 않기 위해 연습 과정 안에서 다 표출해보기도 했고(웃음). 정말 울고불고 다 해보고, 상대 배우와도 대화를 많이 했고, 매 등장이 첫 등장이라고 생각하며 무대 뒤에서 다 털어내는 연습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연습을 해도 올라오는 순간들을 계속 마주하곤 했다.
성수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흥미로운 생각이 든다. 서사 안에서 변화를 겪는 인물이어서 변화 이전과 이후가 무대에 다 드러나야 하고, 배우가 그 변화 이전의 상태와 이후의 상태를 다 감각해야 연기할 수 있는 그런 인물을 맡았을 때, 거리를 두고 각각의 상태를 연기할 수도 있지 않나. 그런데 페미니즘을 통해 변화하는 인물일 경우 배우로서의 나의 입장이 강하게 개입되는 경험을 나도 해왔던 것 같다. 변화 이전 인물의 상태가 나의 변화 이전 상태와 쉽게 연결이 되어 스스로의 과거가 떠올라 괴롭기도 하고. 이미 나는 뭔가를 깨달았기 때문에 그 이전의 상태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게 되어버리기도 하고. 배우가 ‘나는 이제 그런 것에 동의하지 않아’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일 때도 있지만, 때론 무의식적으로 변화 이전의 상태를 연기할 때 인물을 희화화하게 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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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지
맞다. 동의한다.
성수연
그리고 인물이 변화한 이후의 상태를 연기할 때는, 내가 이상적으로 꿈꾸는 정도의 변화를 인물을 통해 겪길 원하게 되고… 나도 배우님처럼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이유가 뭘까? 신윤지 배우님이 진짜로 교회 안에서 그런 일들을 겪은 여성 교인 당사자는 아니지만, 어쨌든 페미니즘 이슈에 있어서는 우리가 스스로에게 당사자성을 부여하고 있는 걸까? 내가 당사자는 아니지만, 어떤 당사자성을 가진 인물을 연기할 때와는 분명히 다른 입장이 생기는 것 같다.
신윤지
완전 동의한다. 최근 작품을 선택할 때 고민을 많이 하게 됐는데, 예전에는 ‘나는 배우니까 작품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을 하면 되지’, 혹은 ‘그건 배역이지 내가 아니니까’ 하는 마음으로 작품을 선택한 적도 있었다. 이제는 작품이 나의 가치관과 맞닿아 있어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혜인이>를 예로 들면, 혜인이는 내가 아니지만 나는 혜인이를 응원하고 싶었고, 또 이 이야기를 꼭 관객과 만나게 해야겠다는 확신이 있었다. 혹은 완전히 나와 동떨어진, 작품 안에서 굉장한 가해를 하는 악역을 맡더라도 작품 전체에 동의가 된다면 할 수 있고, 동의가 되어야만 하는 ‘나’가 되었다는 것이 연극계 미투 이후 나의 큰 변화이다. 그래서 힘들기도 하다. 왜냐하면 연극이 올라가는 순간 결국 난 그 연극에 동의한 존재가 되는 것이고, 내가 무엇을 말하기 위해 여기에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더 열심히 하고. 그래서 배우로서 좀 옛날보다 힘들어지지 않았나…(웃음).
성수연
이런 힘듦일까? 옛날에는 내가 맡은 인물을 잘 연기해내는 게 가장 중요했다면, 지금은 내 연기도 연기지만, 이 작품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 계속 시야를 작품 전체로 훨씬 넓혀서 확인을 해야만 하는?
신윤지
그렇다. 그것이 지금의 나에게 정말 중요하다. 어떤 인물을 연기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내 입장을 담고, 내가 동의할 수 있는 작품 전체의 의미를 전달하는 것. 가끔은 좀 무겁고(웃음). 아주 가끔은 그냥 나 이런 거 다 모르겠고(웃음), 내 역할 내 연기만 고민하던 순간이 그립다는 생각도 한다(웃음). 그렇지만 지금 이건 너무 중요한 일이고, 연극이 해야 하는 일이므로 계속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수연
배우님이 느끼는 무거움에 대해 더 설명해달라.
신윤지
<혜인이>를 하면서도 함께 고민했는데, ‘페미니즘’이라고 명명하지 않고도 이건 여성 남성 모두 함께 감각할 수 있는 문제임을 어떻게 드러낼 수 있는지 생각할 때가 있다. 공연을 홍보할 때 사람들이 가끔 물어본다. ‘이거 페미니즘 연극이야?’ <혜인이>에도 ‘언니, 애들이 언니 페미 같대’라는 대사가 나오는데, 이런 말들에 대한 고민이 있다. ‘페미니즘’, ‘페미니스트’라고 명명되는 순간 어떤 사람들은 거부감을 느끼거나 ‘너희들’의 이야기라고 바라보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완전히 공감하기는 조금 어려운 입장에 놓여 있는, 혹은 낯설어하는. ‘내가 문화생활 할 일은 신윤지 공연 보는 것밖에 없다’ 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우리 옆에 존재하지 않나(웃음).
성수연
맞다. 나도 누군가의 유일한 배우 친구다(웃음).
신윤지
그분들이 내 작품을 보고 나서 나라는 존재를 작품과 동일시할 때가 있음을 느낀다. 우려를 하기도 한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페미니스트’를 어려운 존재로 여기는 것 같다. 그럴 때마다 나는 분명히 이야기한다. ‘페미니스트, 페미니즘으로 또 다른 구분을 짓는 것이 아니다. 내가 봤을 때 당신도 페미니스트이다.페미니즘을 알고 있고, 인식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모두’.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그렇다. 그런데 편파적이거나 잘못된 방식으로 페미니즘에 매몰되는 식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 하는 주변의 시선을 느낄 때 씁쓸하다.
성수연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어쨌든 윤지 배우님 주변엔 페미니즘에 관해 속도나 입장이 다른 분들도 많고, 그런 분들도 배우님 개인의 삶에 소중한 존재들이고, 그분들과 굉장히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어떤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으실 텐데, ‘페미니즘’이라는 말로 그저 생각이 멀어져 버리는 것을 느낄 때의 어려움.
신윤지
최근에 선택한 작품들이 단순히 ‘페미니즘’ 연극이어서 선택한 것만은 아닌데 내가 고민하고 담아내고 전달하려고 한 것들이 그저 여자, 페미니스트, 여자 핍박받은 이야기, 여자들만 나오는 이야기 정도로만 이해되면 속상해진다. 최근 내 작업에 대해 그런 말들을 들은 적이 몇 번 있다.
성수연
최근 작품부터 참여하셨던 작품들을 역순으로 이야기해달라. 일단 <혜인이>랑, 그 직전이?
신윤지
이 직전이… <홍평국전>.
성수연
아…(웃음).
신윤지
아이고. (웃음) 그 전이 <밤에 먹는 무화과>이고, <연애는 반드시 망한다>, <미국연극/서울합창>, 그 전이 <제4의 벽>(웃음).
성수연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많은 것들을 살피며 주변의 시선에 대해서도 걱정을 하고 계신 분 치고, 선택하신 작품들이… (웃음). 이 괴리가 재미있고 매력적이다.
신윤지
어떤 편견을 갖고 극장에 들어오면 작품을 볼 때 계속 편견에 의해 해석하게 될 수 있지 않나. 왜 또 여자 이야기냐는 질문들을 더 이상 받지 않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성수연
그걸 위해서 계속 이런 작품들을 하시는(웃음)?
신윤지
그럴 수도 있다(웃음).
성수연
작년 이맘때 공연하셨던 <미국연극/서울합창>. 그때는 어땠나? 배우님께서 맡았던 역할이 굉장히 어려운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잠깐 소개해달라.
신윤지
대본에 아예 ‘41세, 백인, 남성, 바이섹슈얼’ 이렇게 적혀 있다. 실제로 작가님이 만났었던 인물이고 어느 정도 픽션이 가미되어 있지만, 아시안에 대한 어떤 성적 취향을 가지고 있고 아동성애자이고, 작품 안에서는 어쨌든 가해를 하는 인물이다.
성수연
어떻게 연기해야 할지 난감하셨을 것 같은데, 어떤 과정을 거쳤나?
신윤지
정말 어려웠다. 이 인물은 절대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고(웃음), 이 사람의 말을 눈으로 읽을 때 느껴지는 감각 자체도 굉장히 괴로웠다. 그래도 용기를 낼 수 있었던 이유는 첫 번째로 앞으로 꽤 오랜 시간 동안 이런 인물을 연기할 기회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옛날에는 이미지, 나이, 외모 등으로 캐스팅이 되어 작업을 한 적이 많았다면, 최근에는 ‘나’라는 배우가 무엇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지를 더 바라보고 캐스팅해주시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 즐겁고 반갑다. 두 번째로 이 인물이 등장해야만 하는 이유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분명 이런 사람들은 존재하고, 이 인물과의 만남을 통해 주인공이 하는 말들에 여러 의미가 생길 수 있다는 것.
성수연
굉장한 가해를 하는 악역이라도 작품 자체에 동의한다면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 생각난다. 좀 아까 이야기했던 <혜인이>와는 반대로 조금도 이입할 수 없고, 아시안에 대한 이상한 성적 취향이라는 부분에서 ‘아시아’ 여성인 배우 입장에서는 정말 거부감이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인물의 무엇에 집중해 연기를 하셨나.
신윤지
가장 중요했던 것은, 이 인물을 보는 관객에게 트라우마를 일으키거나, 이 장면 자체나 인물의 등장만으로 누군가에게 트리거가 되거나, 개인이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어떤 경험들과 만나서 너무 큰 공포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있는 선을 찾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인물에 대해서만큼은 너무나도 강력하게, 인물에 이입하거나 이해해서도 안 되고, 이 사람의 당위성에 대해 배우들이 인물 분석하듯이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시작했다. 절대로 이 인물의 동력을 만들지 말자는 생각. 이 작품에 당연히 필요한 인물이나, 연기하는 내가 이 사람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그래서 그 지점이 결국에는 발화하는 데 있어서 조금 어렵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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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연
그럼 발화할 때 어떤 원리로 하셨나.
신윤지
이 인물이 등장하는 부분의 컨셉 자체가 토크쇼 느낌 혹은 관객과의 대화 느낌이었다. 완전히 인물로서 장면을 연기하고 어떤 순간을 표현하는 구조가 아니었기 때문에 거리두기를 할 수 있었다. 또 발화를 하는 동안 표정이나 행동으로 뭔가를 상상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성수연
그 인물을 상상하게 만드는 것들을 하지 않는 것.
신윤지
그렇다. 그냥 이 사람이 내뱉은 말들을 전달하는 것에 중점을 두되, 인물이 아닐 수는 없기에 그 주변 환경과 감각을 조금 얹을 수 있는 정도만 해보려고 했다. 어쨌든 이 인물을 납득시키고 싶진 않으나 이 인물이 준 어떤 불쾌함이나 공포감을 분명히 내가 전달해야 하는 순간 또한 있어야 했고, 그래서 최대한 그 사람의 말하기 방식에 집중하며 의도적으로 호흡을 넣는 선택들을 했다.
성수연
예를 들면 어떤 방식으로?
신윤지
마이크를 들고 얘기를 했는데 블라블라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후–’ 하는 소리만 잠깐 내어, 객석에 약간 서늘하거나 소름 끼치거나 하는 환경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접근한 거다.
성수연
저는 그때 객석에서 매우 흥미로운 경험을 했다. 좀 오래돼서 기억이 희미해지긴 했지만, 인물도 나에게 분명히 전달되고, 배우님의 존재나 배우님이 선택하신 연기방식도 나에게 분명히 전달이 되는데, 그렇다고 배우님과 그 인물이 합쳐져서 그 인물의 나쁨을 크게 감각하게 되는 순간은 없었다. 또 이건 같은 배우로서 과몰입을 한 것일 수 있지만, 발화 도중 어떤 사투를 한다고 느껴졌다.
신윤지
맞다.
성수연
그 사투가 드러난 게 멋있었다. 오히려 그 인물이 주인공의 여정을 돕기 위해 등장한 악역1 정도로 소비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고, 분명히 거리두기를 하고 있지만 배우가 그저 전달자로만 머물러 소비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멋진 순간을 봤다고 생각해서 언젠가 배우님과 그때 작업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는데 오늘 <혜인이>와 함께 얘기하니 재미있다. 똑같이 작품의 방향에 동의하는 작업이어도 그 안에서 극과 극의 인물을 만나셨고, 그 인물과 배우 사이에 거리감이 명확하면서도 거의 반대 지점에 있는 그런 두 작업이었던 것 같고.
신윤지
(웃음) 정말 걱정을 많이 했었던 인물이고 장면인데 누군가는 흥미롭게 봤다니 다행이다. 절대 이입해서도 안 되고, 관객이 이입하게 해서도 안 된다는 생각이 너무 강했기에 고민이 많았다.
성수연
최근에는 동의할 수 있고, 내 생각을 담을 수 있고, 같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작업들을 선택하신다고 했는데, 연기를 처음 시작하셨을 때는 이런 생각?
신윤지
전혀 없었다(웃음).
성수연
연극계 미투가 가장 큰 변화의 계기인가?
신윤지
그렇다. 그때 소리 내어주신 분들 덕분에 생긴 변화이다. 나는 원래 잘 소리 내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여전히 그걸 잘하지 못하고… 많이 변했지만 지금도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편이다. 그런데 연기를 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미투 이전까지 제가 겪었던 많은 일들을 돌아보면서 ‘연극을 하려면 어쩔 수 없어’, ‘배우면 어쩔 수 없어’,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이걸 그만둬야 하니까’ 혹은 ‘다 그렇게 살아왔다는데’, ‘내가 너무 나약한가?’ 하는 생각들로 견디고, 견디고, 견뎌 왔다는 걸 알게 됐다. 지금은 나의 선택을 스스로 존중하게 되었고, 내가 하고 싶지 않을 때 거절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어떤 역할이든 어떤 작품이든 동의하고 안 하고는 전혀 중요하지 않고 배우니까 끊임없이 연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 안에서 살아왔던 것 같은데, 지금은 아니다. 결국 미투 이후에 함께 작업하고 있는 동료들, 선후배들이 이런 변화를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더 이상 어떤 작업들에 대해 이게 왜 여성이어야 하는지, 혹은 왜 남성이어야 하는지 질문하지 않는 사회가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계속한다. ‘왜 다 여성배우만 나와서 했어?’라는 질문을 더 이상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떤 작품에서 ‘젠더크로스’를 했음을 강조하지 않아도 그냥 받아들여졌으면 좋겠다. 내가 연기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더 나눌 수 있고, 인물의 성별이 강조되지 않는. 실은 나도 <미국연극/서울합창>과 <홍평국전>, <제4의 벽>을 함께 작업한 설유진 연출님에게 물은 적이 있다. 왜 여성배우들만 캐스팅했는지. 그때 설유진 연출님은 ‘나는 여성이 다섯 명, 여섯 명 나와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멋있다고 생각해요’라고 했는데 그땐 그게 충분한 대답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왜 여성이어야 하는지 남성이어야 하는지 어떤 의미를 담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누군가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하면, ‘그럼 남성배우만 다섯 명 나와서 했다면 이런 질문이 나왔을까?’ 라고 뾰족하게 말한 적도 있었다. 나도 ‘너는 여성이니까’라는 말에 갇혀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는 그런 것들을 넘어서 작품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때가 오기를 바라고 있다.
성수연
실은 나도 언제부턴가 주인공도 악역도 선역도 변태도 다 여성배우들이 하는 걸 보는 게 좋았다. 여성배우들이 저런 역할을 할 기회가 별로 없었으니 그걸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스펙트럼이 넓어지는 것을 보는 게 좋은 건가 보다, 하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것만이 아니라, 어쩌면 여성끼리이기 때문에 배역에서 성별을 제외한 무언가에 집중하면서 인물을 만들어가는 게 가능하고, 무의식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을 수도 있는 ‘너는 여성이니까’라는 생각을 떼는 연습이 되는 것 같아, 그게 좋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신윤지
그것이 배우로서 내가 가장 만나고 싶은 순간이다. 나도 ‘여성’으로서의 무언가를 연기하지 않고, 보는 사람들도 그렇게 보지 않고, ‘여자 배우가 저런 걸 연기하네?’라고 하지 않고 그냥 자연스럽게 인물을 연기하는 걸로 바라봐줬으면 좋겠다. 여성끼리였기 때문에 어쩌면 ‘여성’을 떼는 연습이 됐을 수도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랬을 수 있다.
어쩌면 ‘왜’와 ‘어떻게’ 없이 무엇을 그저 만나게 하고, 그저 존재하는 것을 하고 싶은 것도 같다(웃음). 왜냐하면 배우는 늘 이유를 찾고 만들지만, 어떤 것들은 이유가 필요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고, 자연스럽게 이해받아야 하는 부분이 있으니까.
성수연
주장하지 않아도.
신윤지
그렇다.
성수연
오늘 재밌고 솔직한 이야기 많이 들려주셔서 감사하다. 질문 주고받기를 마지막으로 이제 마무리를 하겠다. 신윤지 배우님의 마지막 질문을 독자님들께서 받아서 함께 생각해보실 수 있으면 좋겠다. 제가 오늘의 대화를 돌아보며 먼저 질문을 던지겠다.
신윤지
이게 가장 떨린다(웃음).
6
성수연
연기에 생각을 담으려고 노력하는 지금도, 처음 연기를 시작해서 인물에만 집중하는 연기를 했을 때만큼 즐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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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지
더 두렵고 더 괴롭지만, 더 즐겁고 그때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더 좋아. 그런데 연기를 하면서 즐거운 게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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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연
대답은 안하셔도 됩니다(웃음).
너는 어떨 때 즐거움을 느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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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지
또… 변화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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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연
너는 또 어떻게 변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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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지
시간이 지나야만 아는 것들을 지금 알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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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연
10년 후 우리는 어떤 작품을 만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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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지
건강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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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연
괴롭고 힘들 때, 마음의 건강은 어떻게 지키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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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지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서 멀리서, 밖에서 자꾸 생각하려고 해. 너는 너를 지키고 싶을 때, 어디쯤에서 생각을 해?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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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연(파이리)

성수연(파이리) 본지 편집위원
배우, 창작자. 다양한 형태의 연극작업을 하고 있다.
인스타그램: @sooyeons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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