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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발견되는 사이

[연극인이 만난 사람] 다이애나밴드

신원정, 이두호

제222호

2022.09.29

자기소개

원정
얼마 전에 두호 씨가 자기소개 글 쓰면서 “제작에 관심이 있다” 그렇게 적었잖아요? 여기서 제작이 뭔지 궁금하고, 왜 흥미가 있다고 얘기하셨는지 물어보고 싶었어요.
두호
아! 얼마 전에 자기소개 글에서요? “기술, 시와 노래, 제작에 관심이 많아요”라고 적었네요. 짧게 적었지만, 저는 꽤 마음에 들었어요. 이걸 적는 순간 자신이 꽤 객관적으로 보이는 찰나가 있었거든요. 제가 원래 그런 게 잘 안되는 사람인데요. 자기 객관화랄까요? 그래서 여기서 사용된 “관심이 많아요”라는 술어부의 화자는 저이긴 하지만 약간은 아니기도 해요. 제가 모르는 타인이 저의 인생을 바라보고 나서 뭐라고 설명할지 생각했을 때, 이런 것들에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 보여질 것 같더라고요.
첫 번째 단어인 “기술”과 마지막 단어인 “제작”은 비슷한 것 같지만 좀 다르다고 생각해요. 기술은 좀 정치적인 얘기인 것 같고, 제작은 매일매일의 생활인 것 같고요. 그러니까 만들기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운명처럼 만들기와 엮여있기도 해요. 사실 요즘은 만들기로부터 좀 멀어지고 싶기도 하고요. 원정 씨는 뭐라고 적었나요? “사물, 매체, 상황, 그리고 리듬을 만들어 관계를 엮는 작업자”라고 하셨네요?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른 게 있는데 원정 씨가 보기엔 어때요?
원정
“상황”이 조금 다르네요. “사물”도 그렇고. 좀 구조적이죠. 혹은, 공간적이고요. 예전엔 “사물, 매체, 상황, 그리고 리듬을 만드는 작업자입니다”라고만 쓴 것 같은데, 어느 시점에서 “관계를 엮는”을 추가했던 것 같아요. 나도 “노래”를 좋아하지만, 노래보다는 좀 더 형태나 형식, 그리고 그것으로 만들어지는 물결, 패턴, 관계의 모양 같은 것에 더 관심 있는 것 같아요. “관계를 엮는”이라는 말이 덧붙여진 것 같은 기분 분명히 있네요.
두호
스스로에게 되뇌는 건가요? 아니면, 강조하는 건가요?
원정
그건 좀 고민이 되지만, 스스로에게 되뇌는 것에 가까운 것 같아요. 더 관계적으로 작업을 하고 싶다는 뜻이요. 그러니까, 나중에 그 욕구가 좀 줄면 이 말도 슬며시 없어질 수가 있겠죠(웃음).
두호
더 관계적으로 작업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원정
관계를 엮는다고 하는 건, 내가 어떤 관계들을 계획하고, 디자인한다는 의미는 아니었어요. 예전엔 그런 면도 있었던 것 같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엮는다는 것은 직조한다는 말인데요. 그냥 만나게 하는 거예요. 어떤 상황을 같이 맞닥뜨리고 만난다고 할 때, 이 상황이 직조와도 같다는 것이죠. 이때 직조에 참여하는 실들을 보면, 어떤 실은 굵고, 어떤 실은 얇고, 어떤 실은 팽팽하고, 어떤 실은 고무줄 같고, 그들의 만남의 경우가 다양하고 예측할 수가 없기도 해요. 각자의 범위, 여기서 말하는 각자는 사람만 말하는 건 아닌데요. 각자의 범위나 공간들이 확보되면서 만났다가 헤어지는데, 이때 미리 계획하지 않은 부분, 아니 사실은 계획될 수 없는 부분들이 드러나게 되고, 그것과 다 함께 뒤엉키면서 관계들이 엮이게 되고, 이 관계들의 엮임 속에 관객들과 나 자신이 놓이는 것. 그것이 작업하는 재미인 것 같아요.

발견이 작업이 되기까지: 시, 그리기

원정
두호 씨는 “기술, 시와 노래, 제작에 관심이 많아요”라고 했는데, 그런 자신을 잘 보여주는 다이애나밴드 작업, 혹은 두호 씨 개인 작업이 있나요? 이런 부분이 시 같다든지, 떠오르는 작업이 있는지 궁금해요.
두호
저는 <신호수>가 떠올라요. 이 작업은 구상하는 과정부터 굉장히 고민이 많이 되어서, 원정 씨와 대화도 자주 했었죠. ‘사물 타자’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게 된 작업이기도 하고요. 이 작업을 하기 전까지 몇 년 동안 관객들이 스마트폰을 활용하고, 웹 연결을 적극적으로 끌어오는 작업을 해오고 있었어요. 네트워크의 동시성에 착안해서, 작거나 큰 연대의 모임들에서 사람들이 마치 신경망처럼 서로 연결되고 그렇게 해서 더 큰 ‘몸’이 되게 하는 것을 연습해왔잖아요. 2017년 <안산순례길>에서 했던 <시민밴드2>라는 작업이 대표적으로 그렇죠.
이 작업을 할 때 LTE 통신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는데, 그러다 보니 제가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공동체의 연결된 모양에 사람과 스마트폰이 아닌 이질적인 존재들, 이동통신 중계기들이 포함되더라고요. 그 부분이 어둡게 가려져 있었던 거예요.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내는 일시적 연대를 즐길 수 있었지만, 그 어두운 부분의 존재는 항상 마음속 한켠에 해결해야 할 영역으로 남아 있었거든요. 이들은 우리의 연결을 떠받쳐주는 존재들이지만 어디에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하루와 일상을 보내고 있는지, 나아가 우리들의 연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라도 이들을 만나러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이두호
이두호
원정
주변에서 눈에 띄는 이동통신 중계탑들을 보러 다니고, 접근이 가능한 곳에는 들어가 보기도 하고 그랬죠.
두호
하지만, 막상 그들이 거주하는 곳에 도달해보니, 그들과 우리가 어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어요. 관계가 무엇인지, 인간이 아닌 존재와의 관계란 어떤 것인지, 인간이란 무엇인지, 처음부터 다시 고민하게 되면서 미궁으로 빠져들고 답 없는 질문들이 무수히 쏟아지게 되더라고요. 결국,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주변에서 서성거리기는 것부터 해보기로 했고, 옆에 앉아 있어 보거나, 그려보고, 그들의 소리를 들어보고, 통신장치니까 전자파 픽업장치나 안테나도 만들어 가져가 보고요. 리서치 작업이었지만, 정처 없는 반복된 수행이기도 했는데, 인간의 언어 너머의 것을 향해 손을 뻗는 과정에서 어떤 시적인 부분이 계속 흘렀던 것 같아요. 이때 제가 중계기들을 그렸던 그림이 있었는데, 생각보다 잘 그려져서 뿌듯해하기도 했죠. 그래서 제가 원정 씨에게 드릴 질문은 그리기에 대한 것인데요. 저는 그림을 그리면… 약간 덧칠하듯이 내가 그린 걸 보면서 그 위에 또 그리고… 또 잘 그리고 있나 보고 막 이렇게 하는 편인데요. 원정 씨는 한번 찐-하게 보고 나서 눈을 딱 내리깔고 쫙-하고 그리시는 편이잖아요?
원정
그렇죠. 한 선으로.
두호
맞아요. 한 번 더 째려보고, 또 쫙- 그리고… 그렇게 쉽게 그리시는데 비결이 있는 건가요?
원정
어떤 대상이든 그리고 싶은 것을 똑같이 복사해보려고 해도 그게 똑같지가 않잖아요? 저는 다 담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연필이 종이 위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만드는 공간이 있잖아요? 저는 거기에 더 주목하는 것 같아요.
두호
연필이 공간을 만든다고요? 그러면, 그것들의 공간은 이렇게 했을 때 (오른손으로 연필을 잡고 종이 위에 손을 놓아 보이며, 왼손으로 연필 잡은 손 주변에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여기 주변의 3차원 공간을 말하는 건가요? 아니면, (연필로 그린 동그라미 안쪽을 손가락으로 찍어가며) 그림의 평면 공간을 말하는 건가요?
원정
둘 다 말하는 거예요. 선이 가르는 평면의 공간과 내 손이 가르는 공기의 순간 다 말하는 겁니다. 내가 대상을 그대로 표현할 수는 없으니 그리면서 발생할 수 있는 즐거움에 더 집중하는 것 같아요. 그림을 그린다는 건, 내가 잠시나마 그것을 마음에 품었다는 것인데, 내가 품은 마음은 그 대상과 같지 않고, 당시 나의 상태와 함께 만들어지는 어떤 해석인 거잖아요. 그 해석 위에서 연필이 어떤 점을 찍고 그리기를 시작하게 될 텐데요. 그때 평면 위의 분할되는 공간을 보기도 하고, 연필이 만들어내는 질감과 소리, 사건들에 주목하면서 어떤 선이 그려지는지를 지켜보기도 해요. 저는 발견하면서 그림을 그리는 것 같습니다.
두호
그림은 시인가요?
원정
그림은 흑연이죠.

내게 자극을 주는 것들: 관계 맺기, 듣기

두호
올해 자신에게 영향을 주었던 책이나 텍스트 같은 게 있나요?
원정
칼 사피나라는 생태학자가 쓴 『소리와 몸짓』이라는 책이 저의 태도에 영향을 준 것 같아요. 타자, 동물, 숲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데 계속 대상화하는 것 같아서 주춤하게 되잖아요. 그들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니까, 나를 제외한 모든 타자와의 관계 맺기나 이야기하는 거를 이제 그만해야 하는 것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이 책은 타자에 대해 절대 알 수 없고, 잘 모르는 게 당연하지만, 끊임없이 계속 관계 맺기를 시도하자고 말하고 있어요. 무엇보다 우선, 소리와 관련해서 동물들이 듣고 내는 소리의 범위, 소통과 언어의 방식, 공동체적으로 연대하는 방식 등 구체적인 예시가 너무 흥미로웠어요. 예를 들면, 돌고래들은 자신의 고유한 휘파람 소리를 개발해서 자신의 ‘서명 휘파람’을 만드는데, 그 ‘서명 휘파람’을 한번 들으면, 오랜 시간 기억하게 된다는 내용이 인상적이었어요.
두호
제인 구달이 동물학자로서 침팬지에게 각각 이름 붙여주면서 행동을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학계에서 굉장히 비판받았다고 하는 부분, 저도 읽었습니다.
원정
객관적인 연구 대상으로 동물의 행동이 배고픈지, 아픈지 등은 세밀하게 조사하더라도, 그들의 감정과 마음에 대해서는 철저히 중립을 지켜야 하고, 어찌 보면, 마음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성이라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다고 책에서 말해요. 돌고래든 코끼리든, 저는 여전히 책을 읽으면서, 저주파 소리를 내는 신체와 그들의 공동체를 염탐하고 추상적으로 관계 맺고 있지요. 그 존재들은 제 생활과 너무 멀리 있어요. 아, 얼마 전에 다녀왔던 제주에서 남방큰돌고래 서식지 해변에 찾아갔는데, 남방큰돌고래 무리들이 헤엄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확실하진 않지만, 소리도 들은 것 같아요. 만남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책에서 동물행동학 연구자들이 동물들과 구체적으로 관계한 경험들을 읽을 때 환기가 되었던 것 같아요. 어떤 대상이든 내가 저 사람 잘 모르니까 조심해야 되겠다, 라든지, 당사자가 아니니 말하지 말자, 라고 생각하는 굴레를 좀 벗어나야겠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계속해서 타자와 나는 평행선이더라도,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도 깨달았고요. 그림 그리는 방식과 비슷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대상을 온전히 그려내지는 못하지만, 관계 안에서 만들어진 어떤 이야기들은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거죠. 하지만 그것들은 계속 갱신되어야 할 것이고, 계속 관찰되어야 할 것이고, 실패하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말고 계속해서 관계 맺는 것에 대해 많이 생각했어요.
다음 질문, 두호 씨는 좋아하는 공간이나 장소가 있나요? 소리와 관련된 곳이면 더 좋아요.
신원정
신원정
두호
<숲에 둘러서서>라는 공연을 준비할 때 소개글로 묘사했던 장소가 생각나네요. 칠레 여행 갔을 때 길에 그냥 수탉이 막 걸어 다니는 도시에 머무른 적이 있어요. 새벽에서 아침 되는 시간이었는데, 수탉이 울기 시작하면 거리가 쩌렁쩌렁 울리거든요. 길 건너편 건물 테라스에는 조그만 의자 하나 놓고 앉아 있는 사람이 보이고, 나는 반대편 건물 꼭대기 층 지붕 아래서 그걸 내려다보고 있고. 근데 또 낮이 되면, 똑같은 거리에 트럭이 지나가면서 가스통을 배달해요. 그걸 배달하는 아저씨가 가스통을 연주하면서 가스가 도착했다는 걸 알려주죠. 그 소리가 도시에 울리는데, 아니 울린다기보다 도시에 이불을 덮는 것 같았달까요? 그런 느낌이 나는 장소가 있었어요.
원정
그런 장소가 주는 동기나 상상을 좀 더 설명해 줄 수 있나요? 공연 소개글에도 등장할 정도면?
두호
‘듣기’인 것 같아요. 소리를 내는 것도 중요한데, 여기서 지금 크게 소리를 내는 존재는 수탉밖에 없는데, 그 길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높은 건물이 마주 보고 있잖아요. 그래서 그런지 그 공간, 거리가 다 울린단 말이에요. 어떤 소리 가마처럼, 부글부글, 소리가 뻗어나가고 퍼지는 걸 내가 듣고 있는데, 건너편에 모르는 사람도 그걸 듣고 있어요. 심지어 그 사람은 반대쪽을 보고 있어요. 그리고 그 거리에 나무들이나 풀들도 그걸 다 듣고 있을 거란 말이죠. 수탉이라는 존재의 이야기를 다 같이 듣고 있는 그 긴장감. 수탉 본인도 듣고 있죠. 누가 대답하는 것도 아닌데 혼자 울면서요. 그 소리가 어디까지 퍼져나갈까, 싶기도 했고, 그러면서 소리의 덩어리, 듣기의 덩어리, 그런 것들에 대해 생각했어요.
<숲에 둘러서서>(2020) 소개글
그들은 숲에 둘러서서 있었습니다. 빌라들이 마주 보며 줄지어 늘어선 하얀 돌길 위를 수탉 한 마리가 걸어가고 있는 것을 듣고 있었습니다.
내일은, 가스통을 한가득 싣고 하얀 가스통을 두드리는 사람이 탄 트럭이 지나가기로 한, 그 길 위를 쓸쓸하게 걷는 수탉은 꺼이꺼이 울어대면서,
어젯밤의 술자리의 푸념을 동네방네 떠들어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높이가 5층 정도 되어 보이는 건너편의 빌라에 3층 발코니에 앉아서 담배를 태우는 사람이 있었고,
맞은편 빌라의 4층 침실에도 아래로 이십도 정도 꺾어진 처마 밑으로 창문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사람이 하나 있었습니다.
수탉의 먹먹한 노래는 골목과 창문들과 하늘까지 울려 퍼지고, 언덕 아래 사거리 횡단보도 옆 핫도그 가게 앞에 늘어져 있는 개와 길가에 세워진 올리브 나무,
그리고, 철제 담장이 있는 요리점의 회색 고양이, 하늘을 날아 어딘가로 가고 있는 갈매기들이 그 푸념을 듣고, 눈을 껌뻑이거나, 잎을 스치거나,
고개를 돌리거나 하는 도중에, 마침 지나가던 건너편 빌라 지붕에서 마주친 삼색 고양이와 얼룩이 고양이는 뒤틀린 심기를 참지 못해 언성을 높이고 말았습니다.

무엇을 좋아하나: 우연한 만남, 교란과 변주

두호
원정 씨는 공연이 좋아요. 전시가 좋아요?
원정
나도 그 질문할까 했었는데! 전시에서는 관람자들을 맞이할 때 그렇잖아요. 어떤 공간과 시간을 풀어주고 각자가 자신의 방식으로 접근하고 머무르고 해석하게 하는 거죠. 그렇게 자율적으로 관계 맺기를 하는 방식이 좋아요. 그리고 공연에서는 모두가 하나를 위해서 집중하는 그 시간이 굉장히 좋은데요. 어떨 땐, 공연자가 부각이 되고, 지켜보는 사람들의 에너지를 한껏 받아 뭔가 더 잘해야 할 것 같기도 한, 그런 순간들이 생기잖아요. 다들 너무 지켜보고 있으니까 가끔은 그게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어요. 저는 아직 공연으로 관객이 자신의 공간을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는지에 대하여 연구 중인 것 같고요, 에너지를 어떻게 순환시켜야 할지 관찰하고 있는 상태인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는 전시가 조금 더 익숙하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두호 씨가 아까 말한 칠레의 그 장소처럼 자기 방식대로 각자 듣는 덩어리가 되는 시간과 공간을 좋아한다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두호
그런데 2021년도에 윤무아 씨와 같이 만든 <돌 깨는 잠, 숨 짓는 숲> 같은 공연을 떠올려 보면, 그건 배우가 없는 공연이잖아요. 윤무아 씨와 제가 나오긴 했지만 배우로서 등장하지는 않았죠. 관객들은 서로가 서로를 관찰하게 되는 상황이었고요.
원정
신촌극장이었죠. 저는 공연 오퍼레이팅하면서 위쪽 발코니에서 그 상황과 관계를 목격했고요.
두호
그 공연은 어떤 특정 인물이 메인이 된다거나 하지 않고, 사물들, 특히 소리 나는 사물들이 여기저기 펼쳐져 있었고, 소리를 굳이 내지 않더라도, 인지할 수 없을 정도로 천천히 항상 상태가 변하는 것들, 나뭇가지, 이끼 같은 것들이 놓여 있었고, 계속해서 녹고 있는 물방울도 있었죠. 공연에서 목격되는 사물들과 존재들로부터 다양한 사건들이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에 구조상 사실 누구도 같은 것을 보지 못하는 상황이었어요.
원정
맞아요. 서로가 서로를 관찰하고, 일어나고 있거나 일어날 사건들을 서로 목격하는 시간이었어요. 두호 씨는 거기 등장하는 여러 가지 오브제들, 소리가 나든, 빛이 나든, 다양한 것들 중에 계속 마음에 담아 두고 좋아하는 것이 있어요?
두호
일단은 그 공연의 케이블카. 천천히, 엄청 천천히 간다는 게 좋아요.
원정
극장 천장에 긴 줄을 팽팽하게 매어서 그 줄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는 아이였지요. 그 아이에게 실을 매달고 탁구공을 묶어서 탁구공이 극장 바닥을 천천히 이동했었죠.
마룻바닥에 삼각형, 사각형 모양의 오브제가 있고, 실에 매달린 탁구공이 보인다.
<돌 깨는 잠, 숨 짓는 숲>(2021)에 등장한 케이블카 탁구공 / 사진 촬영: 이야기
두호
엄청 천천히 가는 케이블 카를 처음 만들었을 때, 같이 작업했던 윤무아 씨가 특별히 응원해 주셨어요. 이거 너무 느려서 재미없다 생각했는데, 그걸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까 재밌더라고요. 처음에는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을 만들려고 했어요. 공중에서 막 제비처럼 뱅글뱅글 돌리기도 하고, 소리도 내고 노래도 하고, 굉장히 빠르게 날아다니는 걸 상상하고 만들기 시작했는데, 너무 느리니까, 에이, 이게 뭐야, 하게 됐거든요. 근데 느리게 움직이는 것을 계속 보면,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감이 사라지게 되잖아요. 하지만 결국 그렇게 해서, 그냥 있는 그대로를 보게 되는 것 같아요. 나도 거기서 재미를 찾게 됐고요.
만드는 사람으로서 애착이 생기거나 좋아지는 순간은, 내가 의도한 대로 무언가 나오지 않을 때인 것 같아요. 흥미로워서 매료되는 순간이 있거든요. 있는 그대로 그걸 바라보면서 그 자체에 충분히 빠질 수 있게 되죠. 내가 만들었다기보다는 발견했다? 제작을 하되 제작하지 않고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만남? 그게 만남이 되는 것, 작업할 때 그런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봉봉이를 만들 때도, 원래는 탁구공으로 계란을 톡톡 쪼는 것 같은 소리를 내는 사물을 만들려고 구멍을 내게 되었고, 실을 매달아 우연히 돌렸더니 흥미로운 소리가 났어요. 휙휙휙 탁구공 구멍으로 그 안과 밖의 공기가 마찰하면서 나는 소리였어요. 소리가 너무 흥미로워서 매료되어 무엇을 만들려고 했는지 잊어버리게 됐죠. 근데 내가 그것을 계획해서 만들면 비판적으로 접근하게 돼요. 볼륨이 작다든지, 소리가 단순하다든지, 그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하지만, 제작 가운데서 우연히 발견되면, 그것을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원정
케이블카는 계속 가잖아요. ‘길’이기도 하고 ‘노래’나 ‘시’를 닮은 것 같습니다.
두호
그럼 원정 씨는 어떤 걸 고를 건가요?
원정
생각해 보니까 멜로디언 엎어놓은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멜로디언을 엎어놓고 그 위에 탬버린, 진동 장치 같은 것들을 위태로운 구조로 얹어놓은 다음, 멜로디언에 기계식으로 바람을 넣어 주었는데요. 그 이상한 구조 때문에 건반이 눌러지는 위치와 힘의 세기가 무작위였잖아요. 여러 건반이 한꺼번에 소리가 나는데, 진동 장치 때문에 소리와 진동이 서로 되먹임되어 미세하게 무작위의 위치가 변경되고요.
강의 물결을 보면,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 같은 물결은 한 번도 없잖아요. 그런 것처럼 가만히 듣고 있으면, 계속 소리가 슬쩍 바뀌고, 쌓이기도 하고, 겹치기도 하고, 혹은 그때 공간 안이나 밖에 어떤 소리가 있으냐에 따라 주파수 교란이 생기면 매번 다르게 들리기도 하고요. 그게 뭐랄까요, 일종의 빛의 성질을 띠고 나한테 온다고 착각하게 되는데, 그런 경험이 되게 재밌었어요.
두호
저희가 공연에서 멜로디언 엎어진 소리를 3분 들었는데 어떻게 보면 짧죠.
원정
계속 저렇게 틀어놓을 건가, 싶은 생각도 들고, 거기 계속 반응하게 되잖아요. 멜로디언 소리들이 쌓이는 동안 우리는 신촌극장 발코니 쪽 문도 열었고, 소리 환경에 변화를 주어 같은 소리를 다르게 듣도록 했죠. 여러 가지 사물이 포개져 있어서 그들 사이로 진동을 계속 주고받으니까 실제 멜로디언이 좀 움직여요. 서로 상태 변화를 일으키는 구조가 있고, 어떤 과정으로 그게 내 귀에 닿게 되는지, 어떤 관계들을 만나게 되는지, 감각하는 시간이었어요. 소리를 환경으로 받아들이는 과정, 패턴, 리듬, 그런 게 저는 흥미로워요. 나는 연결 방식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맞네요.
두호
저한테는 그 멜로디언 소리가 처음에는 굉장히 세고 크게 다가왔는데, 나중에는 그냥 있는 바람 같았어요. 마치 해변에 바람 소리가 있는데 그 안에서 파도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그 안에서 다른 소리들이 들리더라고요. 그 소리 자체도 계속 계속 변하고 리듬이 있고 다른 생각들을 불러일으키고… 그런 상태로 만들어주는데 마치 윤슬이나 파도, 물결이나 바람 같이 그냥 계속 흘러가는 어떤 것을 바라보고 있는 기분이 들어서 좋았어요. 시간도 공간도 자신도 모두 잊고 멍하게 만들어버리는….
이두호와 신원정 마주 보고 테이블 앞에 앉아 있다. 테이블 위에는 두 사람이 직접 만든 소리를 내는 사물들이 놓여 있다.

인간 뭘까?

두호
계속 이 질문을 할까 말까 고민했는데요. 작업에서 인간이 뭘까요? 좋은 질문은 아닐 수도? 저한테 하는 질문인 거 같기도 하고요.
원정
어려운 질문인데요. 대답을 생각했어요. 저는 작업에서 인간은 위로를 나눌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위로의 언어, 소리, 몸짓을 전송하고 전달받을 수 있는 프로토콜, 그러니까 약속을 미리 해둔 존재들이고, 연결과 연대로 공동체의 가능성이 있는 단위라고 생각해요. 우선, ‘나’가 가지고 있는 신체와 유사한 형태를 가진 동물이라는 점, 내가 내거나 듣는 소리의 범위를 듣거나 낼 수 있는 신체를 가진 존재라는 점도 중요한 부분인 것 같아요.
두호
작업의 소재로서는요?
원정
<동그라미 앙상블>이라는 공연을 기획할 때 드로잉을 했던 것이 떠오르네요. 2018년 당시 미투운동이 활발했고, 밤 늦게 트위터를 보면서 내뱉어진 말들과 경험, 사건들을 몸에 새기던 시기였는데, 스마트폰으로 연결된 몸들과 비통함의 정서들을 그렸어요. 어떤 인간, 남자, 여자 등 인간을 특정하여 소재로 사용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인간들 사이에 엮어져 있는 정서, 나와 맞닿아 있고, 내 속에 남아 있는 정서가 있다면, 다시 꺼내 보고 그려보는 것 같아요. 두호 씨도 이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어요?
두호
SeMA 창고에서 했던 전시, <루트에 대한, 대화>를 준비하면서 『숲은 생각한다』라는 인류학 책을 읽었어요. 이 책의 저자는 기존의 문화인류학이 인간과 인간의 문화에 대해서만 다루면서 인간이 아닌 존재들의 ‘인간성’을 못 본 채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재규어의 예시를 들고 있어요. 숲속에 사는 원주민들이 캠핑 중에 재규어를 맞닥뜨렸을 때, 재규어에게 자신이 또한 ‘재규어’임을 보여줘야 한다고 해요. 방법은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래요. 절대 눈을 감거나 고개를 돌리면 안 되고, 내가 너와 대등한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나는 먹잇감이 아니라, 너와 같이 생각하고 감각하는 숲의 주민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거예요. 재규어가 그 주민을 재규어로 인정하는 순간. 아니, 사실 저자는 재규어가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거든요. 그러니까, 모든 존재들은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부른다고 말해요. 이런 맥락에서 아까 그 말을 재규어의 입장에서 다시 하게 되면, 그 ‘인간’이 이 인간을 ‘인간’으로 인지하게 되면, ‘아, 얘도 인간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면, 공격하지 않고 스윽 지나간다는 거죠. 그런 이야기를 읽었어요.
그리고, 인류학자이신 홍서연 씨에게 전시에 대한 글을 부탁드리면서, 이 이야기를 했더니, 비베이루스 지 까스뜨루라는 사람이 ‘관점주의-다자연주의’라는 것을 주장했다고 알려주셨어요. 이건 자연이라는 것도 한 가지가 아니라는 의미인데, 좀 더 풀어 말하면 이런 거예요. 우리가 우리의 몸과 정신, 우리 ‘인간성’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구성하는 자연이 있다면, 마찬가지로 다른 몸과 다른 사유를 하는 다른 ‘인간’들에게는 같은 세계가 다른 ‘자연’으로 드러나게 되는데, 이 자연 또한 대등하게 의미가 있는 하나의 세상이라는 거죠. 한쪽에서 다른 쪽에 직접 접속할 수는 없지만, 두 자연은 분명히 연관되어 있고, 상호작용하고 있고, 서로가 서로를 떠 받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어느 하나가 다른 것보다 우월하다거나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게 하는 부분이 있어요. 그래서 저에게는 ‘인간’이란 것이 사물, 동물, 식물 다양한 존재들의 입장과 위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되기도 해요.
원정
작업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조금씩 변하기도 하잖아요?
두호
이 주제는 작업을 해보면서 조금씩, 천천히 오래도록 고민하는 주제인데요. 초기 작업인, <신호수>나 <프린스의 방에서의 1과 128분의 12초> 등을 했을 때는 사물들의 세계를 인간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가 닿을 수 없는 것으로 표현하거나 바라보곤 했었다면, 이후 전시에서는 ‘인간’의 정의가 해체되거나 재고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러면서 세계관을 새롭게 해보려고 노력하는 중이에요. 그런데, 그 과정에서 일차적으로 중요했던 건, 인간을 배제해 놓고 생각해보는 거였죠. 사물들이 인간성을 드러내거나, 존재감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익숙한 인간들이 공간에 함께 존재하는 것이 방해가 되는 부분이 있었어요. 그래서, 공간에서 사람의 존재는 매우 조심스러운 문제였어요.
원정
앞으로는 어떨 것 같아요?
두호
최근 배선희 배우를 만나 이야기하면서, 배우로서 사람들을 관찰하고 따라 하는 연습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연기 연습을 할 때,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몸짓을 그대로 거울처럼 따라 해보는 연습을 한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해하게 되는 것도 있고, 발견하는 것도 있다고요. 그 얘기를 듣고 며칠 전 제주도 여행을 다녀오면서 공항에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관찰할 기회가 있었는데, 신기하게 그날은 사람들이 사물처럼 느껴지더라고요. 사물처럼 빛이 나거나, 자부심 있게 걷는다거나, 구부정하다거나… 뭔가 짧은 순간의 포즈와 몸짓들이 단편적으로 만들어내는 인상들이 있었어요. 물론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와는 무관하거나 차이가 있겠지만요.
그냥 그 인상들만 떼어 놓고 바라보니… 배우들이 따라 하면서 그 사람을 이해한다고 했을 때, 사실은 그 사람의 실제를 이해한다기보다는 그 사람이 그 순간 그 장소에서 드러내고 있는 ‘인상’과 존재감과 파급… 표현과 스탄스(stance)를 연습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게 사실 제가 작업에서 사물들을 통해서 만들거나, 발견하려고 하는 ‘인간’적인 인상과 표현들을 찾는 과정과 거울 관계 같더라고요. 접근의 방향이 다르거나, 혹은 같은 방향인데 시작점만 다르거나? 하다는 생각도 드는 것 같아요. 사실 지금까지는 사물들의 존재감을 지키기 위해 인간이라는 소재를 멀리해왔던 것인데, 인상과 표현으로서의 사물적 ‘인간’이라는 소재가 미래의 작업에서 재미있는 요소가 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이 시작된 것 같아요. 아직은 정말 시작에 지나지 않긴 하지만요.
이두호, 신원정 두 사람이 작업실 공간에 나란히 서 있다. 식물들과 목재들, 각종 오브제들이 공간 여기저기 쌓여 있다.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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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정

신원정
사물, 매체, 상황, 그리고 리듬을 만드는 작업자입니다.

이두호

이두호
기술, 시와 노래, 제작에 관심이 많아요.

다이애나 밴드는 관계적 미학을 향한 디자인과 미디어 아트를 실험하는 2인조팀이다. 우리는 관객들의 참여와 관계형성을 위해 공연성과 상호작용성을 작업에 적용하고, 관객은 때때로 작품의 적극적인 개입자로서 혹은 일시적 사건에 개입되는 관찰자로서 사건에 초대된다.
http://dianaband.info/ 인스타그램 @dianaband_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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