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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고 아프고 약한 여자들의 발설

[연극인이 만난 사람] 김진아 X 리타

김진아

제228호

2022.12.22

리타를 알게 된 것은 블로그와 트위터를 통해서입니다. 우리는 꽤 다르지만, 어쩐지 비슷한 종류의 화를 가지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가끔 비슷한 대상들에 시간과 마음을 쓴다고 느꼈습니다.
2020년 1월 연극 <티타임/ 밀사의 찻잔>을 올린 후, 리타에게 비평문을 받고 싶어 처음 연락을 취했습니다. 그 공연에 담긴 ‘성노동운동’의 맥락과 ‘밀사’라는 인물을 알기에, 공연의 시도들을 정밀하게 읽어줄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대낮의 공모자들’이라는 소제목의 단락으로 시작하는 글을 받고 매우 기뻤습니다. 당혹스럽지만 흥미롭기도 한 ‘공모’. 그 연극에서 발생시키고 싶은 것이었기에 반가웠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리타 님, 진아 님이라 부릅니다. <티타임/ 밀사의 찻잔> 이후로는 연락 나눌 일이 없다가, 2022년 5월부터 7월까지 ‘무늬글방’에서 리타가 진행한 수업 “아프고 슬프고 이상한: 퀴어/크립/‘정병러’의 텍스트와 함께 나를 쓰기”에서 만났습니다.

1. “미치고 아프고 약한 여자들의 발설.” 왜 하게 된다고 생각하나? 미친 여자들의 창작을 추동하는 욕구들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진아
미치고 아프고 약한 여자들. 리타 님은 굉장히 오랫동안 많이 이야기해 오신 주제일 텐데요. 저는 이번에 주어진 지면을 기회 삼아 이런 여자들의 창작물과 연관된 담론을 연극계에 더 알리고 싶어요. 취약한 여성으로서의 이슈를 드러냈을 때 그저 ‘감상적인,’ ‘소녀적인’ 작업으로 치부될 때가 있어서요.
미치고 아프고 약한 여자들의 발설-창작이 이루어진 역사와 맥락에 대해 이론적 자원을 제공해주실 분을 모시고서, 취약성을 드러내는 작업이 그저 센티멘탈리티에 소구하는 게 아니라고 어필하고 싶은 것 같아요.
리타
저희 둘 사이에는 약간의 시차가 있는 것 같네요. 최근 서울의 미술과 문학계(그런 것이 존재한다면)에서는 우울하고 미쳐있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터져 나오고 있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그런 작업에 대해 시류 영합적인 것 아니냐는 비판을 할 수는 있어도, ‘감상적’이라고 치부하고 지나가는 반응은 생소하네요.
진아
그래서 저에게, 좀 더 이해받고 해석되고 싶다는 마음이 엄청 쌓여 있어요. 일순간의 판단으로 지나치지 않았으면 좋겠고, 특히 저희가 취약한 여성으로서의 이야기를 어떻게 연극으로 만들었는지, 구체적으로 왜 어떤 방식을 택했는지에 대해, 그 성취와 실패들까지가 읽혔으면 좋겠거든요. 그리고 이런 이야기가 왜 필요한지도 더 얘기가 되기를 바라고요.
그런데 ‘필요’라고 하면 너무 큰 의미 부여를 하게 되는 것 같아서, 미치고 아프고 약한 여자들의 자기 말하기를 추동하는 ‘욕구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을 해보고 싶었어요. 제 경우엔, ‘부정적’이라 여겨지는 감정과 상태들을 드러내지 못할 때, ‘부정적’이거나 ‘비생산적’인 존재들이 너무 쉽게 외면받거나 가려진다고 느낄 때, 고립감과 화 때문에 작업을 하게 되는데요.
연출가 김진아. 노랗게 염색한 가슴께까지 오는 생머리이다. 남색 스웨터와 검은색 바지를 입었다.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무릎에 올려놓았고, 하얀색 운동화가 보인다. 한 손을 입가에 대고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이다.
김진아
리타
많은 사람들이 같이 고민하길 바라기 때문에 발화를 더 많이 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지는 경우도 있죠. 판이 커질수록 그런 책임감 또는 정치적인 욕망이 더 커지게 되고요. 하지만 처음에 자기 이야기를 시작하게 될 때는, 진아 님이 말한 것처럼 고립감과 화 때문에, 자기 안에 있는 것들을 풀어내고 싶다는 아주 개인적인 동기에서부터 출발하게 되는 것 같아요.
진아
그렇죠. 그렇죠.
리타
저 역시도 공적인 차원에서 미치고 아프고 취약한 여자들의 이야기가 더 필요하다는 식의 얘기를 계속 하고 있는데요. 개인적으로는 ‘이게 근데 왜 필요하지?’라는 의심을 하고 있기도 해요. 지겹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이야기들이 자기계발적인 신화 속에 포섭되는 건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있고. 내가 거기 일조하고 있다는 죄책감도 있어요. 진아 님이 저를 미치고 아프고 약한 여자들에 대해 엄청나게 잘 아는 사람인 것처럼, 특히 이론적인 자원을 제공해줄 사람인 것처럼 소개해 주셨지만, 저는 조금 더 글 쓰고 말하는 걸 많이 한 사람으로서 아는 척 나불거릴 뿐 사실 저희 둘의 불안은 크게 모양이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진아
이런 이야기가 ‘자기계발서화’ 되는 데 일조한다는 죄책감이 있으시다고요.
리타
분명히 있죠. 예를 들어 제가 수업에서 미치고 아프고 약한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쓰도록 적극 장려하는 것 같다고 하셨잖아요.
진아
맞아요. ‘아프고 슬프고 이상한’이라는 제목을 보고 수업에 모인 모두에게 자기 이론1)화를 촉구하는 것 같았고, 뒤풀이에서도 누가 자기 이야기를 풀면 “글로 써보는 게 어때요!” 이런 말을 강하게 하셔서 인상적이었어요. 죄책감도 느끼신다지만, 여전히 그런 창작을 유도하고자 하는 마음이 크실 것 같은데요. 어떠신가요, 요즘은?
리타
글방에서 제가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필요로 하고 그것을 널리 공유하려고 하는 까닭은 제 강박 때문이에요. 불행하고 비참하고 슬픈 이야기들이 글이 되지 못한다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 거죠. 그래서 진아 님도 계속해서 무대를 만드시는 거겠죠?
진아
어… 맞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나는 그냥 그러고 있을 뿐이니까.
리타
아마도 저는 ‘그냥 그러고 있을 뿐’인, 쓸모없는 느낌으로부터 빨리 벗어나고 싶은가 봐요.
진아
그런데 작업을 시작하고 나면 또, 계속 그런 의심이 들거든요. 이게 그럴 만한 일인가? 이게 들려질 만한가? 저의 우울이나 무력감에 대해 말하는 작업을 할 때 특히 그런데요. 우울을 돌아보는 것만도 힘든데, 이걸 무대에 노출시킨 다음에 결국 이해받지도 못하고, 나는 그냥 이상한, 아니면 나약한 감상에 빠져있는 존재로만 여겨지면 어떡하나 불안도 생겨요.
리타
저도 블로그에 지나치게 사적일 수 있는 일기를 그냥 올리거든요. 이 일기를 쓰는 자아가 다른 사람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어요. 그러니 사람들이 이것으로만 나를 판단하면 어떡하지, 라는 당연한 불안감이 있어요. 그런데 그걸 제가 컨트롤할 수 없는 영역인 이유는, 저한테 말하고 싶은 욕구가 너무 커서인 것 같아요. 그냥 그렇게 생각하든지 말든지 상관이 없을 만큼. 진아 님도 아마, 앞으로도 감수… 할 수밖에 없는 영역이 아닐지… (웃음)
진아
(웃음). 근데 저는 심지어 욕구가 그렇게 크지도 않아요.
리타
그럼 왜 하시는 거예요.
진아
욕구가 커지죠. 화가 나서 커졌을 때 해요.

2. 글방 수업을 들으면서 ‘우리’라는 말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느꼈다. 그 말에 두는 의미는?

진아
저는 극단 SNS 프로필에 항상 ‘지금-우리’라는 말을 달아 놓는데요. ‘지금-여기’라는 말을 많이 쓰잖아요. 그걸 ‘우리’로 바꾸고 싶더라고요. 제가 연극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려 했을 때가 2016년, 2017년 즈음인데요. 당시에 통시적 관점에서 사회와 사람들을 바라보는 공연이 많았어요. 그중 제가 정말 좋아하는 작품들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거기 담기지 않는 요즘의 삶들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쯤이 소위 ‘페미니즘 리부트’ 시절이니까 친구들과 대화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공통의 화두들이 있었거든요? #OO계 내 여성혐오, 성폭력 고발 해시태그 운동이나, 미러링에서 파생된 유머 같은 것들이요. 다들 페미니스트거나 퀴어여서 그런 것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그 정도로 페미니즘이 대중화된 시점에, 연극에는 그런 이야기가 담기지 않는 상황 속에서 ‘우리’라는 말을 자주 떠올리게 되었던 것 같아요.
왜 여기서 말하는 ‘우리’에 속하지 않는 우리가 생기나, 그럼 나는 어떤 사람들을 ‘우리’라고 생각하고 있나, 나는 지금 이 ‘우리’와 저 ‘우리’가 서로 더 이해하고 잘 지내길 바라는 건가 아니면 특정한 ‘우리’의 편을 들고 싶은 건가… 이런 질문들을 여전히 오가면서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저한테 ‘우리’라는 말이 중요하거든요. 리타 님이 ‘우리’라는 말을 쓰게 되는 맥락은 무엇인지 듣고 싶었어요.
리타
말씀해주신 얘기를 들으니까, 제가 보는 어떤 종류의 광경들하고도 겹치는 지점이 많고요. 그래서 ‘우리’라는 단어의 사용을 전략적인 차원에서 고려하셨다는 것도 알겠어요.
저는 09년도에 대학에 입학했는데, 이 당시에는 ‘우리’라는 말을 기피하는 분위기가 남아 있었어요. 섣불리 ‘우리’라는 단어로 퉁칠 수 없는 어떤 나머지들이 있는데, 그 나머지들까지 ‘우리’라는 단어에 포섭하는 것은 굉장히 폭력적이고 권위적이므로 ‘우리’라는 단어를 지양해야 한다는 가르침들이 있었죠. 근데 진아 님 얘기는 이제, ‘우리’라는 단어 속에서 배제되는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을 호명할 수 있는 다른 ‘우리’가 필요하다는 거잖아요.
진아
네.
리타
그런 효과가 저에게도 물론 중요해요. 그런데 동시에, 저는 의도가 뭐건 간에 ‘우리’라는 말을 들을 때 기뻤던 경험이 별로 없거든요(웃음).
진아
아, 네. (끄덕끄덕)
리타
‘우리’라는 말을 남발하는 사람들을 볼 때 제 생각은 보통 이래요. ‘넌 어디에 속해 있길래 우리라고 하고, 니가 뭔데 나랑 너를 같은 취급 하고…’ 그런데 이 효과가 놀라운 것 같아요. ‘우리’라는 말이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을, 순종하게 만들 수도 있는 동시에 반발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게. 그런 ‘우리’의 가능성을 의식하면서 고의적으로 그 말을 무슨 어그로처럼 쓰게 된 거 같아요.
진아
아아.
리타
네. 그런데 또, ‘호명’으로서의 효과들을 생각해보자면… ‘우리’라는 말을 썼을 때 가끔 흥미로운 상황들을 목격하곤 하는데요. 제가 예를 들어 “페미니스트인 우리로 살기”라는 말을 했다고 쳐요? 그러면 어떤 분들은 그 말에 쏙 들어와서 갑자기 자기도 ‘우리’라는 말을 쓰면서 ‘당신이 말하는 그 페미니스트가 바로 나야’라는 반응을 해요. 그런데 어떤 분들은 끝까지 거리를 두면서 ‘저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라고 응답하실 때가 있어요.
평론가 리타. 검은색 후드티를 입고, 하얀색 야구모자를 썼다. 모자 아래쪽으로 머리칼이 보이지 않는 짧은 머리이며, 동그란 안경을 썼다.
리타
진아
그렇죠.
리타
이런 판단이 한순간에 일어나는 거예요. 자기가 ‘페미니스트’가 될만한 자격은 없다는 거죠. 실제로 10년 전만 해도 그런 이유로 자신을 ‘페미니스트’라 말하지 않는 분들이 꽤 많았어요. 아니면 저들 무리에 끼기는 부담스럽다고 느끼거나. 그런데 반대로는 어떨까요? 그 사람이 내가 과연 페미니스트가 될 만한 자격이 있는가, 아닌가를 따지지 않고 그냥 저 ‘우리’에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그 경계를 훌쩍 뛰어넘었을 때. 그건 한 개인에게 엄청나게 큰 변화이지 않을까, 라는 상상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계속 어그로 끌 듯이 그 말을 쓰고 있는 거죠.
진아
그렇군요! 어그로였구나.
저도 그런 지적을 받은 적이 있는데요. ‘‘우리’라는 말이 조금 폭력적일 수 있지 않냐’. 그런 말에 딱히 반박하고 싶지는 않거든요?
리타
왜냐면 모든 종류의 자기 말하기는 결국 폭력이기 때문에… ‘나는’이라는 주어를 써도 폭력적이고 ‘너는’이라고 해도 폭력적이잖아요. 문장을 완성하고 온점을 찍는 순간 우리는 어떤 맥락에서 이미 세상을 단위별로 구획 짓고 자기와 타자를 분리하는 폭력에 공모하고 있는 거죠. ‘우리’라는 단어를 썼다고 그것만 갑자기 폭력적이게 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폭력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고요.
진아
그렇죠. 저도 일종의 어그로처럼 이 말을 고집하게 될 때가 있는데요. 공연에 관객으로 오는 사람들은 사실 매우 랜덤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로 절대 묶이기 어려운 차이가 감지될 때가 많아요. 그런데 공연을 보는 동안에는 ‘우리’라고 엮어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자격이나 당사자성을 의식하지 말고 뛰어넘어서 들어오기를 바라는 기대를 항상 갖게 되는 것 같아요.
리타
맞아요. 맞아요. 맞아요. 그걸 계속 기대하게 되는… 거겠죠? 뭔가 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다 똑같겠죠(웃음)?
진아
그쵸? 네. 그런가 봐요(웃음).

3. 미치고 아프고 약한 이들의 작업 중 좋아하는 작품?

진아
‘미치고 아프고 약한’ 사람들의 작업 중 좋아하는 작품들을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오래 좋아해 왔거나, 최근 관심을 두고 있는 작품들이요.
리타
우선 소수자들의 자기표현이라는 주제 자체는 문학, 미술, 영화, 만화와 같은 여러 매체와 장르에 걸쳐 이어져 온 나름의 역사가 있죠. 그중에서 최근 제가 다시 보게 된 게 여성 신체 예술가들인데요. 이제야 이 여자들이 자기 몸으로 자기를 쓴 거였다는 사실을 아무런 선입견 없이 이해하게 됐어요. 왜냐하면 한창 제가 미술사 수업을 듣고 이에 대해 배울 당시에는 이런 작업들이 그냥 무슨 노출증 환자들이 하는 과격하고 자극적인 스트립쇼 같은 거였다고 설명한 분들도 계셨거든요. 성차별적인 분위기가 만연했죠. 그리고 페미니스트 중에서도, 그런 작업들을 자기 말하기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굉장히 적었던 것 같아요. 1970년대 나온 작업 중에 한나 윌크라는 작가가 자기 몸에다가 계속 껌 같은 걸 붙여가지고 되게 포토제닉하게 찍은 <S.O.S. Starification Object Series>(1974)라는 작업이 있어요. 그런데 이걸 당대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조차도 그냥 니 몸매 예쁘니까 자랑하려고 하는 거 아니냐, 라는 식으로 비꼬았죠. 사실 그러면 어때요.
조금 더 아슬아슬한 작업으로는, 오노 요코의 <컷 피스 Cut Piece>(1964) 같은 것도 있죠.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작업 중에도 정신과 약 한꺼번에 먹고 내가 언제쯤 통제력을 상실하나 관찰하기(<rhythm 2>(1974)), 사다리에다 칼을 박아놓고 며칠이나 높은 무대 위에서 버티기(<The House with the Ocean View>(2002))가 있고요. 이런 예시들을 계속 읊을 수도 있겠죠. 여성 작가들의 자기파괴적이고 자해적인 작업들은 미술 대학교 안에서조차 ‘저런 식으로 작업하지 않게 주의해. 저건 그냥 연극이야’라는 식으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아요. 미술 비평의 맥락에서 연극적이라고 하는 건 굉장히 오랫동안 멸칭이었거든요. 남성 작가들의 그것이 ‘아방가르드’, ‘개념 미술’로 손쉽게 받아들여지는 동안에요.
진아
아. 아하하하. 하. 하. 하하.
리타
다시금 생각해보면, 이 여성이라는, 소수자라는, 또는 상처받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방식이라는 게, 계속해서 자기를 해치는 것들과 함께하면서, 그것에 이해할 수 없이 중독된 채로, 자기 손으로 다시 한번 그런 상황들을 재연함으로써만 겨우 살 수 있는 그런 방식인 거잖아요.
진아
네.
리타
그런 이야기들을 계속해서 그들이 몸으로 해왔던 거라는 생각이 이제 와서 드는 거죠.
진아 님 작업 중에 특히 <코미디캠프: 파워게임>2)이라든가 배선희 배우님이 나오는 작업들을 봤을 때, 분명 누군가에겐 그저 살풀이처럼 보이겠지만, 저는 ‘저것’ 없이는 말할 수 없는 어떤 존재 방식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진아
그 작업의 경우에는, 고통스러운 사적인 경험들을 말하면서도 자신이 그저 불행 속에 있는 존재로만 비치지 않는 방법을 찾는 데에 코미디라는 틀이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하지만 과정에서는 배선희 배우가 굉장히 힘들어했는데요. 망상이 더 심해졌다거나, 이걸 왜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거나 하는 말들을 자주 했어요. 작년 겨울에는 여성괴물 창작 프로젝트를 했는데, 그때도 본인 안에 있는 불편한 감정들, 누군가에겐 무서울 수도 있는 감정들을 드러내는 것을 진짜 괴로워했어요. 저도 아까 말했듯 저의 우울을 꺼낼 때의 불안이 크고요. 그런데 말씀해주신 작가들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비슷한 불안에 지지 않고 그 위태로움을 질러나가며 작업을 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로부터 받는 힘이 있네요.
리타
몸을 써서 그 장소에서 해프닝처럼 벌이는 작업 중에는 사진조차 남아 있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요. 그저 미래에 이걸 기억해 줄 사람들에게 온전히 맡기고 판을 벌인 경우들이란 말이에요. 그런 아름다움이 또 있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저장되거나 보존되거나 또는 계승될 수 있을지 전혀 모르지만, 나중에 읽어줄 사람들을 믿으면서 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진아 님 좋아하는 작업에 대해서 얘기해주세요.
진아
저는 일단, 리단 님의 작업들이요. 『정신병의 나라에서 왔습니다』의 경우엔, 정말 필요에 의해서 쓴 책이잖아요. 우리가 어떤 자원을 획득하고 관리할 필요가 있는지, 어떤 지식이 더 필요한지 공유하려는 의도가 확실한 게 좋았어요. 그리고 그분이 그린 만화들은 ‘이해받고 싶다’라는 욕망보다 그냥 ‘이렇잖아. 내가 혹은 우리가 이렇잖아’를 표출하는 그림들에 가깝다고 느끼는데, 그 확고함이 존경스러워요. <조색기>의 발간사를 같이 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요.
리단의 만화책 <조색기>의 표지 이미지
. 세로로 긴 하얀 화면이 검은색의 거친 선에 의해 3행 3열로 나뉘어 있다. 각 칸에는 사람을 비롯해 새, 토끼, 사슴, 개미 등의 동물들이 인간의 옷을 입고 의인화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상단에 ‘조색기’라는 제목이 쓰여 있다.
리단의 정병 만화책 <조색기> 표지 (텀블벅 캡처)
이미지 클릭 시 발간사 전문으로 연결됩니다.
리타
이걸 가지고 제가 무슨 말을 더 해요. 리단 님 그냥 짱이시고…
진아
저는 이 마지막 문단이 정말 너무 좋은 거예요.
리타
맞아요.
진아
“그러니 청컨대 우리를 알고자 하지 말되, 익숙해지려 하십시오. 이곳은 호기심의 영역도, 감정 이입의 영역도, 모든 것이 다 될 수 있는, 비어있어 채우는 일밖에 남지 않는 곳처럼 보이지만 그대여, 그대는 여기를 한 스푼도 덜 수 없다네.”
저는 어쨌건 극장에 온 모두에게 공감과 이해를 받을 여지를 찾고 싶어 하는 사람인데,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게 너무 좋은 거죠. 그리고, ‘이게 그냥 진짜고 계속된다고 알리기 위함이다’라고, ‘알린다’ 정도의 동사를 쓰신 점에 계속 눈이 가요.
리타
네.
진아
멀리사 브로더의 『오늘 너무 슬픔』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보고 싶었는데요. 저는 일단 엉망진창인 이야기를 볼 때의 즐거움이 컸고요. 너무 엉망인 자기를 사랑해주기를 바라지만, 자기 의심도 정말 큰 여자의 이야기인 게 좋았어요.
리타
네. 그 책도 참 아슬아슬하죠. 몇 장만 읽으면 그냥 치기 어린 슬픔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전체를 다 읽으면 이 여자가 얼마나 전방위로 엉망인지가 드러나잖아요. 다양한 미친 여자들이 있는데 매우 또 다른 미친 여자의 상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저는 유용하다고 생각했어요. 동시에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비판적인 관점도 작동해요. 최근에 이렇게 정신병이 있고, ‘아픈’ 여성의 에세이들이 많이 쏟아져 나온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요. 저는 사실 쏟아져 나오는 모든 게 다 좋다고 생각하진 않거든요.
진아
제 위치에서는 일단 더 많이 쏟아져 나오는 게 긍정적으로 느껴지는 것 같아요. 리타 님은 어떤지 조금 더 얘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리타
뻔한 이야기에요.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 불릴만한 자본주의의 한 극단에서 우리는 결국 우리가 비판하려는 세계, 빠져나오려는 세계와 분리 불가능해지죠. 우리 고유의 개인성, 감정과 사고의 체계, ‘자기 말하기’의 방식은 모두 어느 정도는 이 세계에 적응한 결과이기도 하고요. 결국에는 우리가 지금 이야기 중인 여성, 소수자의 ‘자기 말하기’라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혼자 독창적이거나 독립적일 수 없다는 뜻이에요.
진아
네.
리타
그런데 제가 이렇게 의심하든지 말든지, 이 여자들, 그리고 소수자들은 계속 자기 이야기를 지껄여 왔기 때문에, 뭐. 하지만 제 우려를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이거에요. 한 개인인 여성, 소수자를 우상화하거나 대상화하면서 이들을 소진하는 자본과 정동의 사이클 속에서 이들이 어떻게 살아남을지에 대한 걱정인 거죠.

4. 미치고 아프고 약한 이들의 감정과 감각을 드러내는 작업을 보면서/하면서 생긴 어려움, 고민, 질문?

리타
예를 들면 해나 개즈비라고 제가 좋아하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있는데요. 저는 이 사람이 자기의 트라우마를 가지고 놀고, 그 기술로 청중들 역시 가지고 노는 그런 코미디를 하는 걸 무척 좋아해요. 동시에 이게 하나의 스테레오 타입으로 고착될 때가 있잖아요. ‘저런 여자들, 저런 소수자들은 저렇게 말하지’ 하는 식으로, 소수자의 분노 자체가 또 하나의 상품, 기믹이 되어버리는 상황이 있는 거죠. 기믹적인 것은 듣기도, 읽기도 필요로 하지 않기에 빠르게 시장에서 팔려요.
한국에서도 이런 현상들이 때로 관측됩니다. 슬픈 여자들, 고통을 겪은 소수자들의 이야기가 소비되는 방식을 보자고요. 한번 시장에 내놓아지고 나면, 이들은 이제 정해진 역할들을 할당받게 되죠. ‘너 슬픈 얘기 잘하는 사람이지. 여기서 슬픈 얘기 해 봐’ 이렇게. 정말 걱정되는 것은, 저 포함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요구에 부응하느라고 빠르게 소진된다는 거죠. 그래서 더 약해지고 더 슬퍼지고 더 취약한 상태에서 무대 위에 올라가서 슬픈 얘기를 하는데, 그게 이제 전혀 새로움을 낳지 못하는 반복이 될 수도 있는 거고요. 이 거대한 불행 사이클의 연쇄로 제가 일조하고 있다는 감각이, 제가 앞서 말씀드린 죄책감과 연결되네요. 진아 님의 경우는 어떠세요?
진아
저는 이게 새로움 없는 반복이 될 것 같다는 걱정보다는, 취약함에 대한 이야기를 무대화하는 과정 자체의 어려움을 크게 느끼고 있어요. 특히 내가 이걸 아주 ‘잘’, 정확하게 구현하지 못하면 더 쉽게 모든 것이 ‘센티멘탈리즘’으로 뭉개지리라는 우려가 있고요.
최근 <조금 쓸쓸한 독백과 언제나 다정한 노래들>3)(이하, <조쓸언다노>)를 할 때 특히 그랬는데요. 이 공연에서는 초반 20분 동안 배우가 차만 마시고 있고, 관객이 그 사람을 지켜보기를 포기하고 공간의 다른 사물들, 소리들로 주의가 분산될 때까지 두기로 했어요. 주인공이 무엇을 느끼거나 생각하고 있는지를 말해주는 대신, 느슨한 시간 속에 이 사람의 상태 또는 환경을 함께 경험하며 출발하고 싶었던 거죠. 그래야 공유할 수 있는 정서들이 있다고 생각했고요. 그런데 이런 시도가 정말 우리가 원하는 효과로 이어질지 알 수가 없으니 어려웠어요.
김진아와 리타가 마주 보고 앉아 있다. 두 사람 사이에 작은 원탁이 놓여 있고, 그 위에 노트와 커피, 케이크, 커피 등이 흩어져 있다. 공간에는 같은 소파와 탁자들이 줄지어 있으며, 한쪽 벽면에는 서가가 보인다.
리타
진아 님의 방식이 누군가에게는 물론 익숙하지 않고, 감상적으로 보일 수 있죠. 하지만 제 경우에는 중요한 통찰의 순간이라든지, 살아가게 하는 계기들이 전부 일상적이고 약한 것들로부터 오거든요. 친구와의 통화에서 엄청난 계시 같은 걸 받기도 하고, 그런 경우 많잖아요.
진아
그렇죠.
리타
그리고 약한 것들로 뭔가 만들기 어렵다는 것에 저도 매우 동의하는데, 그 이유는 일단, 강한 것들을 다루는 데에 우리가 더 많은 경험과 지식이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후자를 비판 이론이라고 말할 수도 있죠. 세상이 어떻게 잘못되었고 그래서 우리는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말하는 이론들의 다발이요. 이런 이론들은 강력하고, 매력적이에요. 세상에 이런 일이 있는데, 너네가 잘못했고, 그러니까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될 거야, 또는 이렇게 살지 말아야 될 거야, 라고 하는 분명한 메시지를 보여주기 때문이에요. 이건 우리를 안심시켜요. 짐작하건대, 이게 연극계에서 사회 비판적이고 심지어 교훈적인 작품들이 여전히 주목받는 이유일 겁니다. 이런 현상은 분명히 아버지(스승)-아들(제자)로 이루어진 오이디푸스적인 질서와도 무관하지 않고요.
그런데 <조쓸언다노> 같은 경우는 그렇지 않죠. 배선희 배우가 노래를 부르는데 그 행위가 현장의 해프닝처럼 일어나는 방식에 대해, 그리고 이 극과 유사한 상황을 겪어 본 사람들만 알 수 있는 종류의 충동들, 정서들에 대해 이야기할 만한 비평적인 틀이 풍부하지 않죠. 만드는 입장에서도 참조할 만한 선례가 드물 것이고요.
진아
그리고 이번 작업을 하면서, 리타 님이 말한 ‘자기계발서화’에 대한 우려와 비슷한 경계심을 저도 갖게 되었는데요. <조쓸언다노>에서 전하려는 위로가 결국 누군가에게 소용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공연을 만들었단 말이에요? 이런 위로가 필요했던 사람들에게 온기를 주면 좋겠다. 그런데 그런 쓸모를 찾는 마음이 괜찮은가?
리타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주실 수 있어요? 왜냐면, 진아 님이 접근하는 방식이 ‘야, 너 죽지 마. 너 소중한 사람이야’ 이런 건 아니잖아요.
진아
글쎄요. 내 안에서 자꾸 누구를 위하고자 하는 마음이 커지면, 그만큼 그의 변화를 바라게 되니까 경계심이 드는 것 같아요.
리타
내가 이 우울한 사람들, 죽으려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될 수 있는 방법을 다 안다고 생각하고 연극을 어떤 일시적인 처방으로 쓰는 것에 익숙해질까 봐 두려웠다는 이야기이신 거죠.
진아
네네.
리타
진아 님이 연극을 올렸을 때, 사실 거기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죽고 싶을 수도 있고, 하나도 나아지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 거잖아요. 근데 그들을 구하는 데 목적을 두면, 그런 사람들을 그 연극의 자리에서 몰아내게 되는 이상한 효과가 나는 거죠.
진아
그렇죠.
리타
그게 무서운 일인 것 같아요.
진아
그래서 굉장히 복잡해요. 어떤 효용성을 추구하고, 여기에 어떤 가치가 있다고 외부에 얘기하고 싶기도 한데, 거기에 또 경계심이 들고요.
리타
맞아요. 맞아요.
일종의 기만이 일어날 때가 있는 거죠. 우리가 우울한 감정들, 죽고 싶은 마음들을 다루면서, 자기 작업을 남한테 설명할 때는, ‘여기에 사실 유용한 구석이 있습니다, 이거 보고 우울증 환자들이 집에 돌아가서 밥 먹고 양치하고 잠에 들었어요, 매우 효과적입니다’, 이런 얘기를 하게 되면 사기와 다를 바가 없는 거죠.
안드레아 롱 추라는 작가이자 비평가가 있는데요. 이 사람의 책 『피메일스 females』(위즈덤하우스)가 2월에 한국어로 출간돼요. 롱 추가 하려는 건 일종의 실망의 정치학인데요. 한 마디로 부정성을 대안적이거나 창조적인 정치적 동력으로 사용하지 않고, 그냥 부정적인 채로 머물기를 택하는 거죠. 머물면서, 그 부정성의 맛과 냄새를 찬찬히 더 씹어보자는 겁니다. 롱 추의 의견은 이래요. 하도 소수자들이 부정적인 것 속에서 소중한 걸 찾아내는 데에 전문가다 보니까, 그런 발견 자체가 곧 정치적으로 유용한 것이라고 착각하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유용성의 관점에서 절대로 구제될 수 없는 실망과 우울의 자리, 궁극적 ‘비체’의 자리를 바로 ‘트랜스 레즈비언 여성’의 자리라고 간주하죠. 롱 추 본인은 인정하지 않지만, 어쨌든 제 해석에 의하면 그래요. 이런 관점으로 뭘 할 수 있을지 아직까지 모르겠는 게, 그냥 그 자리에 앉아서 ‘난 지금 별로야. 난 지금 상태가 안 좋아.’ 이렇게 얘기하는 걸로 우리가 소위 ‘연대’라든지, 어떤 실천을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도 이제 등장하는 상황인 건데요.
진아
네.
리타
그런데 제 생각에는, 기만이니 사기니 하는 식으로 자아비판 하는 건 별로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진아 님이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을 던지듯이, 저 역시도 ‘이거 사기 아닌가’ 계속 의심하면서 그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뭔가를 추구하고자 해요. 거기에 훨씬 큰 즐거움이 있고, 그러므로 ‘가치’까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 같아요.
평론가 리타가 웃고 있다.
진아
저는 솔직히, 연대감이라든가 어떤 실천적 효과들을 좋아하거든요. 당장 서로를 치유하고 구원하자고 할 수는 없지만, 뭔가를 덜 덧나게 하는 데에 서로 조금 보탬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누가 내 공연을 볼 때, 또 내가 누구의 글을 볼 때, 잠시 좋았더라도 다시 죽고 싶어질 수 있는 게 당연하지만요. 그래도 그걸 보는 동안 ‘누가 저기서 또 이런 걸 느끼고 있구나’를 확인할 수 있다면 그걸로 소중하지 않나. 그 정도의 연대감을 원하는 것 같아요.
리타
저한테는 항상 그 부분이 어려웠던 것 같아요. 살아있는 사람들하고 얼굴을 마주 봐야 된다는 게 연극을 볼 때 가장 저를 고통스럽게 하는 부분이거든요. 레비나스 같은 철학자가 이랬죠. 얼굴은 자신의 연약함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나를 죽이지 말라’고 간청하기에 우리는 그 얼굴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된다, 이런 관계 맺음 속에서 우리는 얼굴로부터 나의 바깥에서 오는 죽음을, 절대적인 타자이자 무한한 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들이 요청하는 무수한 책임을 감당하는 한에서만 우리는 윤리적 주체가 된다는 이야깁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연극을 가장 윤리적인 장르라고 할 수도 있겠죠. 근데 저한테는 그게 굉장히 가학적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살아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계속 보면서 견디는 게 신체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힘들어요. 그걸 계속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연극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과 놀라움이 있어요. 항상.
그래서 우리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지라도 진아 님의 고민이 놓이는 맥락이나 조건은 저랑은 굉장히 다를 것 같아요. 왜냐면 저는 얼굴을 상대하지 않으니까.
진아
네. 얼굴들… 제가 언젠가부터 연출로서의 저를 소개할 때 그런 말을 쓰거든요. ‘무대만큼 객석에 관심이 많습니다’라고.
리타
오. 멋있는 말이다.
진아
객석의 물리적인 구조 자체도 그렇고, 거기에 어떤 사람들이 와서 뭘 하다 갈 건지에 관심이 많아요. 최근에는 그런데, 그 모두와 뭔가를 주고받기 위한 노력을 덜 하고 싶다, 그냥 내가 뭐라 하면 바로 잘 알아듣고 교감해 줄 사람들에 집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좀 더 쉽게 애정을 돌려받고 싶어진 것 같기도 하고, 그래야 앞으로 오래 지속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리타
여러 가지 생각이 드는데요. 진아 님을 제가 처음 알게 된 게, <티타임/ 밀사의 찻잔>4)때잖아요. 관객들을 다 억지로 누운 채로 보게 하면서 아주 특정하고 구체적인 경험들을 만들어줬잖아요. 그게 제게 되게 특별한 감각이어서 거기서 본 광경들이 잊히지가 않거든요.
지금 얘기해주신 것들도, 시대적 흐름과 굉장히 역행하는 일인데요. 자본은 좋은 경험을 모든 사람에게 다 제공한 다음에 100원씩이라도 환수받으라고 명령하잖아요. 넷플릭스처럼. 그런데 진아 님이 추구하는 건(웃음), 이 열 명 정도를 눕히거나 앉힌 다음에 굉장히 특수한 경험을 주고 그럼으로써 그들과 각별한 방식으로 엮여 있고 싶다는 거잖아요. 이건 무서운 욕망이네요(웃음).
진아
네. 몰랐는데, 그렇게 들으니 맞아요.
리타
내가 원하는 종류의 꿈들을 이 사람들에게도 주고 싶다는 무시무시한 마음이죠. 이건 주는 사람만 할 수 있는 거예요. ‘이렇게 만들어 줬으니까 너네는 다 이제 먹고 행복해져야 돼’라는 거죠.
진아
그렇죠. 그렇죠. 네네.
리타
그런데 그것이 거의 뭐랄까, ‘내가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나는 너네한테 이걸 먹일 거야’, 이런 이해하기 어려운 제스처기 때문에 저한텐 매우 아름답게 느껴지네요. 평등하고 민주적으로 조금씩 골고루 모두에게 먹인 다음 ‘좋게 좋게’ 할 수도 있었는데. 그것과 완전히 역행하는, 고립을 선택하는 길인 거잖아요(웃음).
진아
선택하지 않았죠(웃음).
리타
그렇죠. 고립으로부터 선택받은 거죠. 이제 기금의 시대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기금을 받지 못해서, 기금을 받고도 행정적인 절차에 시달리느라 소진되는 상황이죠.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규모를 키우는 게 아니라 오히려 축소하고 특정 관객들에 집중하겠다는 발상이 저한테는, ‘이 사람 어디까지 가려는 걸까’ 상상하게 만들죠. 동시에 매우 아름다운 이 꿈은 반드시 실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왜냐하면 이 사람이 이제 다 포용하고 관용하고 이러겠다는 게 아닌 거잖아요, 지금.
진아
‘나도 돌려받고 싶다’가 첫 번째 이유인 것 같아요. ‘각별하다’는 말을 쓰셨는데, 어차피 연극의 제약들이 크기 때문에 그 각별함에 기대서 애정이나마 돌려받고 싶은 거고요. 두 번째는, 그렇게 모인 사람들의 반응이 공연의 질감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에요. 그냥 더 각별해질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이 와서, 더 풍성한 혹은 더 내밀한 시간을 보낼 판을 만들면 더 성취할 수 있는 것들이 있겠다는 생각을 최근에 하게 된 것 같아요.
선희 배우에게도 이런 얘기를 꺼내 보려 하는데요. 다음엔 공연 제목을 <조금 쓸쓸한 독백과 언제나 다정한 노래들> 같은 느낌보다, 아예 <미친 언니의 아름다운 노래> 이런 식으로 해보자. 미친 언니를 원하는 사람들이 더 모이게… 이런 마음이 들어요, 요즘은. 앞으로 어떨지 모르겠지만.
리타
계속해서 무대에 올리는 연극과, 느슨한 콜렉티브와, 그 사이에 있는 종류의 작품을 계속 만들어나가실 거라고 생각해요. 저로서는 이런 시도들을 응원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매우 기대가 됩니다.
진아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해주셔서.

5. 한국일보 ‘젠더살롱’ 칼럼 연재에 대해 듣고 싶다. ‘공적 지면’을 통해 주변부의 이상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 친구들, 나의 이야기를 하는 글쓰기 경험이 어떠셨는지.

진아
처음에 말씀드렸다시피, 연극in의 대화 코너에 리타 님과 함께 참여하기로 한 저의 의도와 사심들이 있는데, 그게 리타 님이 한국일보에 ‘젠더살롱’ 칼럼 쓰실 때의 마음과 겹치는 부분이 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더 들어보고 싶었어요. 저는 연재 마지막 글이 정말 와닿았고, 읽으면서 울었는데요.
리타
마지막 글이 뭐였죠(웃음).
진아
‘안물안궁의 구구절절함’에 대한.5)
리타
아, 네네네. 진아 님도 공적 지면을 전략적으로 사용하려고 하는 것처럼, 항상 ‘젠더살롱’에서 제일 싫어할 만한 주제가 뭘까를 고민하게 됐던 것 같아요. 결과적으로는(웃음) 그렇게 된 거죠. 매 편마다 ‘이 글 때문에 다음 글은 쓰지 못하게 될지도 몰라’라는 위험을 감수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진아 님은 어떤가요?
진아
지금은 전혀 위험을 감수한다고 생각 안 돼요. <티타임/ 밀사의 찻잔>을 할 때는 위험을 감수하고 있다는 감각이 분명히 있었거든요. 이 공연을 하는 바람에 ‘지금아카이브는 성노동론 파는 데다’ 이런 식으로 찍히면 나의 이후 활동에도 지장이 있지 않을까 걱정했죠. 그즈음 성노동 운동에 대한 사이버 불링이 심했어서요. 그런데 딱히 그렇지 않았고, 리타 님 리뷰를 사람들이 인용하면서 ‘이게 뭔 예술이냐 발악이다’ 이러는 트윗 몇 개 정도 있었죠.
리타
몰랐어요. 뒤늦은 분노가 올라오네요. 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말이죠.
진아
‘젠더 살롱’에 대한 이야기, 특히 마지막 글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었던 이유 중에는… 제가 울게 되었던 지점을 지금 찾아보고 있는데요. 리타 님이 여기서 갑자기 자기 자신을 막 드러낸 거예요.
연출가 김진아가 웃고 있다.
리타
네. 그랬었죠. 저는 공부하면서 ‘나’라는 주어를 지우는 훈련을 하기도 했어요. ‘나’라는 주어를 쓰지 못 하게 한 이유는, 글이 그러면 에세이가 되어버리고 에세이가 되면 진지하지 못한 ‘여자 글’이 되어버리기 때문이죠(웃음).
진아
아하하.
리타
저를 포함한 소수자들에겐 공적 지면이라는 기회가 흔치 않잖아요. 그런 지면을 할당받게 되면 여러모로 재는 것이 많아져요. 마지막 글 같은 경우는 ‘그냥 다 내려놓고 끝까지 가보자, 그럼 이제 내 얘기를 해야겠지’ 그런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진아
지금 다시 읽어보니까, 이 부분 정말 공감 가거든요. ‘동시에 나는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라고 하면서, ‘일반적인 사람들이 모를 것이라고 간주되는 부치, 드랙킹 같은 ‘고맥락’의 단어들을 설명하기를 피하고, 안물안궁의 일기장 같은 이야기를 구구절절하게 늘어놓기를 선택했다’. 저도 연극하면서 이런 선택 할 때 있거든요. 어떤 것들은 매우 세세히 전달하고자 설명을 준비하지만, 그 와중에 어떤 것들은 그냥 불쑥 밀어 넣고 싶어 하죠.
리타
진아 님이 앞으로 작업할 때 관객을 고르겠다고… 그렇게는 말 안 하셨지만, 어쨌든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도 바로 이런 맥락일 거라고 저는 생각이 들고요. 남 눈치를 보면서 우리가 자기 자신의 말을 구체화하지 않는 부분들이 있잖아요. 그러는 와중에 굉장히 손상되고, 탈구되고, 여기저기가 잘리잖아요. 그렇기에 저에게는 우리끼리 좀 더 농도 짙은 방식으로 자기 자신의 말을 발명하고, 구체화하고, 예리하게 만드는 일이 매우 중요하게 느껴져요. 오늘 대화에서도 느꼈지만, 저희 둘이 비슷하면서도 다르잖아요. 이런 차이가 제겐 너무 소중해요. 각자의 방식으로 할 일이 있다는 거니까. 진아 님과의 대화 무척 고무적이었고, 즐거웠습니다.
진아
너무 좋네요. 저와 리타 님이 비슷한 것들을 상대하고 있다는 유대감을 혼자 갖고 있었는데요. 공명했던 지점을 확인할 수 있어 기쁘고, 동시에 리타 님과 다른 저의 언어가 무엇이었고, 앞으로 무엇이 될 수 있을지 찾게 해주신 것 같아 감사합니다.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1. 자기 이론(autotheory)은 2010년대 이후 유행한 자서전적 글쓰기와 이론적 글쓰기가 결합된 문학 장르를 일컫는 말로, 특히 로렌 푸르니에(Lauren Fournier)가 2019년 발간한 저서 『Autotheory as Feminist Practice in Art, Writing, and Criticism』으로 인해 페미니즘/퀴어 이론과 실천의 한 방법론으로써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 책은 주로 여성/퀴어 예술가들의 작업을 통해 삶, 예술, 행동주의, 이론의 분리가 얼마나 약하고 (남성적인) 토대에 기초하는지를 밝힌다.
  2. <2022 코미디캠프: 파워게임> (2022.8.18-28, 펀타스틱 씨어터). 언급된 배선희 배우의 공연에는 <비행기술: 토미에 해방의식>이라는 부제가 있다. https://nowarchive.kr/powergame_crewstage
  3. <조금 쓸쓸한 독백과 언제나 다정한 노래들>(2022.11.23-26, 신촌극장)
    https://soundcloud.com/toujoursieme/sets/spinach-curry-for-hana
  4. <티타임/ 밀사의 찻잔>(2020.1.17-22, 삼일로창고극장)
    https://nowarchive.kr/teatime
  5. 이연숙, 「‘안물안궁’의 구구절절함, 소수자들의 자기 말하기」, 『한국일보』, 2022.6.25,
    https://m.hankookilbo.com/News/Read/A2022062408190002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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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아

김진아
극단 지금아카이브. 무대만큼 객석에 관심이 많다.
<결투>, <티타임/ 밀사의 찻잔>, <조금 쓸쓸한 독백과 언제나 다정한 노래들>, <아주 친절한 (페미니즘) 연극> 등을 연출했으며, <코미디캠프> 시리즈를 매년 이어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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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itter/facebook/instagram @wenowarchive

리타(이연숙)

리타(이연숙)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에 대한 글을 쓴다. 소수자(적인 것)의 저항 형식에 관심이 있다. 기획/출판 콜렉티브 ‘아그라파 소사이어티’의 일원으로서 웹진 『세미나』를 발간했다. 프로젝트 ‘OFF’라는 이름으로 페미니즘 강연과 비평을 공동 기획했다. 2021 SeMA-하나 평론상을 수상했다.
블로그 https://blog.naver.com/hotleve를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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