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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서 만나기

[연극인이 만난 사람] 김경희 X 이윤정

김경희

제242호

2023.09.21

연출가 김경희와 안무가 이윤정이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다. 
            나무 재질의 테이블과 의자가 일렬로 배치되어 있는 공간이다. 
            뒤쪽으로 빨간색 컨테이너들이 보이고, 천장의 트러스 구조물 사이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김경희(이하 K)
작년에 렉처 퍼포먼스 방식으로 했던 연구발표 끝나고 운전하고 오면서 전화로 막 떠들었던 게 재미있어서 좋았어요. 그때 수다했던 게 이번 쇼케이스에 도움이 많이 됐거든요. 윤정 님에게도 쇼케이스에서 수다의 흔적이 보였는지 궁금하고, 간만에 만났으니 근황에 대해서 맥락 없는 수다하시지요.
이윤정(이하 Y)
작년 1차 리서치 발표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리서치를 공연으로 연결하지 않고 순수하게 과정만을 발표한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국립극단의 모든 과정을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연구자들의 소중한 시간을 거칠고 소신 있게 발표하는 시간에 함께 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저는 리서치, 워크숍 과정을 공연의 형태로 발표할 때의 어려움이 늘 있거든요. 예전에 국립극단 청소년 예술가 탐색전이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데 공연의 형태로 발표해야만 했다는 것이 좀 아쉬웠습니다.
K
국립극단뿐만 아니라 공연예술 전반에서 리서치는 공연의 준비과정으로만 생각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다양한 방식의 연구 공유나 교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작업자들이 리서치나 연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하고 현장에서 움직이는 연구자들도 많아져서 다양한 방식의 작업을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연구’라는 건 ‘태도’를 말한다고 생각하는데요. 각자의 표현 방식이 있고 현장 작업자도 연구가 필요한 시기가 있는 거죠. 학위가 있는 학자들만 연구를 하고 연구는 이런 식으로 해야 한다는 식의 구분법은 재미도 없고 예술에 도움이 안 되는 발상이잖아요.
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는 정해진 시스템 내에서 예술가가 하고자 하는 바를 질문합니다. 아쉬운 점을 반영하려고 방법을 찾아가는 노력을 하는 기관에 속한다고 생각해요. 아시겠지만 대개 기관이 원하는 바를 먼저 이야기하는 편이지, 예술가가 하고 싶은 바를 질문하는 기관은 거의 없거든요.
Y
네. 물론 공연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새로운 경험들을 나눌 수 있고 성취감도 얻을 수 있어 좋았지만, 저는 보여지는 몸보다는 스스로의 몸에 집중하는 시간을 경험하길 원했던 것 같습니다.
작년 노니의 리서치 발표를 보면서는 ‘세포적 관점으로 몸 바라보기를 시작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아주 작은 단위에서부터 뭔가를 쌓아 가는 모습을 보면서 반가운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저도 몇 해 전부터 몸의 아주 작은 단위를 차근히 바라보고 있거든요. 발표 내용이 모두 기억나지는 않지만, 몸 내부에서부터 시작해 시각, 청각 등 감각을 다뤘던 것이 기억납니다. 감각을 이야기하니 저는 요즘 발달장애 리서치와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K
하고 계신 리서치들에 대해 이야기 들려주세요.
Y
2019년부터 2021년까지 북새통과 플랜Q가 함께한 중장기 사업에 참여하게 되었는데요. 2년 동안 발달장애를 알아가는 리서치를 하면서, 2년째 되었을 때는 워크숍을 개발하고 3년 차 때는 릴랙스드 퍼포먼스를 만들어 당사자들을 초대해 공연을 올렸습니다. 이후로 저는 잠시 참여하지 않았지만, 성인 발달장애를 연구한 팀은 1년에 한 번씩 새로운 공연의 형태로 관객을 만나고 있고, 아동 발달장애를 연구한 팀은 릴랙스드 퍼포먼스 <똑 똑 똑>을 통해 전국에 있는 발달장애 어린이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K
그 소식은 온라인 통해서 보고 있어요. 같이 하고 계셨군요.
Y
저는 올해 성인 발달장애인들을 위한 프로그램 <모두 다르지만 함께 연극해요>에서 움직임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는데요. 12번의 모든 워크숍이 끝나면 하루 잠시 만나 연습하고, 지인들을 초대해 그동안의 과정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하루의 연습이라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늘 재밌게 발표하는 것을 보았는데, 이번에 참여하면서 그 노하우를 알게 될 것 같아 너무 기다려집니다.
어떤 연구가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관객과 참여자들을 만난다는 것은 너무나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 시간을 통해서 워크숍도, 진행자도 모두 성장할 수 있으니까요. 이번 워크숍은 불특정 다수를 위한 공연이 아닌 특정 대상을 위한 공연이잖아요. 발달장애는 너무나 다양한 스팩트럼이 있기 때문에 종잡을 수 없지만, 서로의 따뜻한 마음만은 통한다는 것을 많이 느끼고 위로받습니다. 2년간의 충분한 이해가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지금의 이 순수하고도 아름다운 시간을 보낼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당사자분들과 몸을 움직여본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워크숍을 준비하려니 많은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워크숍 첫날 모든 생각이 바뀌게 되었는데요. 만나기도 전에 너무 많은 두려움 때문에 부정적인 생각에 휩싸여 실패를 각오하고 참여자분들을 만났어요. ‘그들이 흥분하면 어쩌지? 화장을 하면 불편해할까? 원색적인 옷을 입으면 흥분할까? 재미없다고 움직이지 않으면 어떨까? 혹시 나를 공격하지 않을까?’ 등등 너무 많은 오해들.
안무가 이윤정. 이마를 살짝 덮는 앞머리를 내린 짧은 단발머리에 짙은 푸른색의 반소매 셔츠를 입었다.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살짝 앞으로 뻗은 왼손의 주먹을 꼭 쥔 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첫 워크숍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두 번째 워크숍 날 참여자 한 분이 저에게 “윤정 어디 아파요? 화장도 좀 하고 이쁜 옷도 입어요” 하는 말을 듣고 너무 놀랐습니다. 세 번째 날은 그분이 저에게 이쁘다고 칭찬도 해주셨습니다. 워크숍도 너무 재밌지만, 가끔 졸리고 지루하다고 솔직한 마음도 전해주셨습니다. 어떤 필터링도 없는 순수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 위로를 받았습니다. 직접 만나면 될 것을 너무 많은 두려움에 휩싸여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분들께 너무 죄송했죠.
그런 면에서 노니의 작년 연구발표를 보면서 대상에 대한 연구를 정말 충실히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니의 발표 중 세계 지도를 펼치며 미경 님과 민경 님이 세포에 대한 내용을 발표했던 것이 기억나는데요. 정말 재밌게 봤거든요. 그래서 이런 리서치가 모여 어떤 작업의 형태로 나올 수 있을지 생각했습니다. 수많은 생각이 모이고 많은 내용이 스며들어 가지를 쳐나가는 것이 공연이잖아요. 저는 올해 연구발표 쇼케이스인 <빙빙빙 Being Being Being> 때 많은 갈래의 생각들이 하나의 형태로 나온 것을 보고 너무 기뻤습니다.
경희 님이 개인적으로 뇌에 대한 관심이 많다는 사실은 막연하게나마 알고는 있었어요. 몸에 대한 리서치를 하고 이 작업을 실행, 계획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몸에 대한 아주 기본적이고 구체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계속해서 만나고 있다는 생각도요.
K
오래전부터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몸을 물질로 인식하고 있었고 더 나아가서는 기계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때 다른 이야기들이 툭툭 나오는데도 맥이 닿는 부분이 있어서 재밌었죠. 작업에서 표현하는 방식이나 재료가 다를지라도 생각하는 방향이나 개념이 유사하다 느끼면 집중력이 훅 올라가는 것 같아 반가웠고 흥미로웠습니다. 경계와 변두리에서 작업하는 작업자들은 이렇게, 같지만 다른 방식의 동료들을 만나고 교류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있구나, 연결되어 있구나’ 하는 걸 느끼면서 배우기도 하고 자극을 받기도 합니다. 의식과 신체의 관계 이야기는 마음 편히 다음에 수다하면 좋을 것 같고요(웃음).
작년 리서치 중에 시각장애 운동선수들을 만났던 부분이 저한테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축구든 유도든 선수들이 운동하는 걸 보면 각자 체계의 시그널들이 있거든요. 특히 축구는 일단 혼자 하는 운동이 아니잖아요. 공이라는 오브제도 사용해서 골대에 넣어야 하고, 서로 공을 주고받아야 하고요. 또 달리기하는 것처럼 몸을 빠르고 거칠게 써요.
그런데 시각이 완벽하게 차단된 상태에서 다른 감각들을 총체적으로 활용해 다른 선수들과 패스를 하며 공을 골대에 넣는다는 게 두 눈으로 보고 있는데도 상상이 안 되더라고요. 이런 탐색의 경험을 통해 시각 축구가 가진 다층적인 시그널 시스템을 많이 참고할 수 있었습니다. 또 장애는 일방적으로 도와야 하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 각각의 상태에 따라 감각이 다르게 발달되고 훈련된 인간의 유형이라는 인지가 확실히 되었고요. 또 유도 도장에서 장애와 비장애를 구분 못 할 만큼 선수들이 밀착되어서 훈련하던 모습과 환경이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각장애 영유아 교육기관 선생님들이 인터뷰도 해주시고, 피드백도 주셔서 도움도 많이 받았고 고민도 많이 하게 됐어요. 천국과 지옥 사이를 왔다갔다 했죠. 예술과 교육의 차이에 대한 질문이 생기고 확실히 다른 부분들도 발견하게 되었고요.
Y
교육이랑 예술은 다른 부분이 있죠.
K
나이가 어리거나 특수교육일수록 예술이 할 게 없다고 느낄 정도로 선생님들이 고민하고 시도하시니까 선생님들 인터뷰할 때마다 예술이 해야 할 것을 대부분 교육기관에서 한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혼돈의 시기가 있었죠. 그러면 장애 친구들한테는 우리가 주관식이 아니라 객관식으로 제시해야 하는지 헷갈리기도 했지만, 예술을 하는 사람으로서 그건 아니라는 걸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죠. 핵심은 시간이라고 생각했어요. 예술에서 객관식을 제시했을 때 빠른 결과를 낼 수는 있겠지만, 그게 역으로 제한이 된다는 걸 예술을 하는 우리는 잘 알고 있잖아요.
연출가 김경희. 갈색의 커다란 뿔테 안경을 쓰고, 긴 머리를 뒤쪽으로 높게 묶었다. 
            목이 살짝 올라오는 푸른색 반소매 재킷을 입고 목 끝까지 지퍼를 올렸다. 양 팔꿈치를 테이블에 대고 앞쪽으로 손바닥을 펼친 채 이야기하고 있다.
Y
우리는, 우리의 경험으로, 맞아요.
K
객관식으로 A, B, C를 제시하면 A, B, C 바깥으로 나갈 수 없잖아요. 예술가들은 A, B, C 이상, 이외를 찾고 싶은 사람들이니까 미리 제시하지 않는 걸 먼저 선택하죠. 예술가는 다른 영역을 다양하게 확장하고 이끌어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다른 시간과 공간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 같아요.
Y
맞아요.
K
그렇기 때문에 특수교육 선생님들의 인터뷰와 피드백이 많이 도움이 됐거든요. 시각장애 영유아들을 움직이게 한 ‘바람’이라는 감각도 선생님의 인터뷰에서 얻은 노하우에요. 하지만 저희는 교육을 하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저희가 작년부터 헷갈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게 ‘우리는 교육하는 사람이 아니다, 교육과 예술을 헷갈리면 안 된다’였거든요. 우리는 우리의 방식을 찾아야죠. 선생님들도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본인들이 할 수 없는, 예술이 할 수 있는 부분을 부탁한다는 거였어요.
Y
그것이 예술 교육의 방향이라고 생각해요. 예술에는 예술 교육이 포함돼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예술 교육은 예술 창작의 과정과 거의 비슷하기 때문이죠. 저번 발표에서 보여주셨던 완만한 곡선의 단계가 마치 예술 교육의 안내를 경험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빙빙빙 Being Being Being> 쇼케이스에서 또 다른 공연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경험했다고 생각합니다.
K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예술이 전통적으로는 기술 훈련이 전부였는데, 지금은 다양한 방향성이 존재하고 계속 새로운 것이 나오는 거죠.
Y
정답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것이 교육이라면 정답이 없는 길을 안내하는 것이 예술 교육이라고 생각해요. 예술을 통해서 삶을 연습하고 정확한 규칙 안에서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자유를 통해서 타인과 나 사이를 바라보고 경험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려서부터 이런 연습의 과정이 필요한 거죠. 작년에는 리서치를 봤다면 올해 쇼케이스는 공연 안에서 친절한 예술 교육을 경험하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차근차근 저를 안전하게 안내하는 느낌.
K
네. 처음부터 끝까지 안내와 제시로 이루어져 있죠. ‘사람이, 빛이, 소리가, 오브제가 다양한 경로와 방식으로 안내와 제시를 한다’ 그렇게 설계되긴 했어요.
Y
그러니까요. 저는 그게 좋은 예술 교육의 한 과정이고 또 다른 형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K
재밌는 해석이네요. 만드는 입장에서는 교육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결국 예술 교육한 건가요(웃음).
Y
저는 예술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뜻하지 않게 수업의 마지막 단계에 작은 공연이 만들어지는데요. 과정은 이렇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몸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진 후 타인의 몸을 만나고 나누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 후에 그날의 주제인 움직임을 안내하고 공연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경험하게 됩니다. 움직이는 참여자들은 주어진 과제를 수행하며 시공간 안에서 자신의 몸과 타인의 몸을 돌보고 움직이는 과정을 겪게 됩니다. 서로 시간을 나누며 움직이는 과정을 마치면 참여자는 퍼포머의 몸 상태로 바뀌게 됩니다. 몸을 움직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보고 있는지 경험하는 과정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K
듣기만 해도 재밌는 공연이 떠오르네요. 교육과 예술은 인간 탐구인 동시에 인간과 인간이 소통하는 방식으로써 흡사한 부분이 있지만 분명하게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좀 더 생각해봐야 할 거리네요. 이 부분은 각자가 생각하는 다름과 같음이 있어서 재밌는 것 같습니다.
Y
<빙빙빙 Being Being Being>은 너무 친절한 공연이 아니어서 좋았어요. 불친절한 공연이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한 아이가 비닐을 통과하는데, 여러 번 넘어지더니 그다음부터는 넘어지지 않는 거예요. 아이들 스스로 생각하고 몸을 조절하고 그것이 학습되는 순간을 목격한 거죠. 아이들이 시각과 청각을 통해 공간과 시간을 인지하고 몸을 조절하는 모습이 보였고, 공간에 익숙해져 마구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같이 놀게 되더라고요. 아이들보다 제가 더 신나서 놀았습니다. 어두움과 빛이 있는 공간에서 아이들이 빛을 따라다니는 모습이, 광주 아시아문화전당에서 했던 <노타이틀> 때 아이들이 빛을 찾아다니고 만졌던 순간과 겹쳤습니다.
K
<노타이틀>과 <지.라운드> 작업 당시 관객들과의 경험이 이번 작업에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배우나 텍스트가 정해진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끌고 가지 않고, 관객이 플레이어로서 장면을 만드는 주체가 된다는 지점이 맥을 함께 합니다. 저희는 빈집을 짓는 설계자인 거죠. 다른 작업들과 <빙빙빙 Being Being Being>은 감각 분배와 활용 면에서 차이는 있고요.
Y
물성의 크기와 모양이 다양해지면서 아이들 몸의 형태가 바뀌잖아요. 그 과정이 넓게 봤을 때는 인간이 성장하는 과정이랑 크게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런 물성이 시공간에서 움직이며 만드는 에너지가 작은 것에서 시작해서 점점 커지는데, 그 변화가 굉장히 완만하게 계속 가고 있다는 것이 좋았습니다.
K
여태까지 작업 중에 가장 완만하죠.
Y
그리고 아이들만 신나는 게 아니라 성인들도 신나잖아요. 저도 끝까지 신나게 놀았는데요. 계속 던지고 놀고 하는 것이 타당하고 납득할 만한 과정이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것도 해봐 저것도 해봐, 하지만 네가 선택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그리고 그 안에서 방법을 찾는 과정들이 저는 재미있었어요.
함께 있던 시각장애 양육자들도 과정을 통해 안전한 몸의 상태가 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분들을 유심히 보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는데 장애인을 만났을 때 어떻게 가이드해야 할지를 생각하게 되었고, 그 안에서 서로가 다 함께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겠다 생각하게 되었어요. 뭔가 특별한 구역을 만든 게 아니라 긴장된 상태에서, 서로를 돕는 상황들이 만들어지고 서로 주시하게 되는 순간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안무가 이윤정. 옆모습을 클로즈업한 사진이다. 배경에는 국립극단의 빨간색 컨테이너가 가득 들어와 있다.
일상에서 장애 부모가 비장애 어린아이, 비장애 부모가 장애 아이를 만날 일이 거의 없잖아요. 시공간을 공유하고 함께 움직이면서 어떻게 서로의 어려움과 즐거움을 알고, 상호작용할 수 있을지 질문해봤습니다. 짧은 시간 동안에 영유아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작업을 만들었다는 것보다도 다 같이 함께할 수 있는 작업을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좋았었거든요.
K
그게 가장 기본 목표였어요. 일단 만나야 한다. 만나야 뭐든 한다. 다양한 상태의 인간이 만나서 같이 노는 지점까지 가는 과정에 대한 공유, 노는 데까지 가는데 낯섦이 있잖아요. 아시다시피 전 익숙한 일상을 낯설게 만들어서 관객들이 일상을 새롭게 보게 하는 작업을 주로 해왔습니다. 일상 공간, 사물, 몸이 주재료들이죠. 그런데 영유아는 아직 모든 게 낯선 존재들이더라고요. 그런 ‘낯섦’, ‘낯가림’의 상태를 받아들이고 그 과정을 공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끝날 때까지 그 과정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래서 사전 입장 시간이 공연시간보다 길었던 거고, 이때 공간에 대해서, 서로의 존재에 대해서, 오브제에 대해서 ‘탐색’의 시간을 갖습니다. 모든 감각을 활용한 자기 주도적인 ‘탐색’을 통해서 ‘위험’과 ‘안전’ 사이를 오가는 판단 능력이 작동되죠. 이후는 ‘행동’으로 연결됩니다. 그게 놀이가 되든 아니든, 놀이에 도달하는 시간에 차이가 있더라도 끝나고 자유놀이 시간이 30분 있으니까요. 각자의 시간을 가진 극장 공간, 빛, 오브제, 존재들의 내부와 외부에서 일어나는 관계들, 이 과정 전체가 작업입니다.
Y
이 결론은 그런 것 같아요. 대상에 대한 탐구가 치열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쉽지 않겠구나.
K
모든 작업은 그렇죠.
Y
맞아요. 살아 움직이는 그것 자체가 어떤 영감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뭣이 중요하겠어요. 제일 중요한 재료가 작동을 멈췄는데. 바람 가득한 비닐이 날아다니는 걸 보는 것에서 훨씬 영감을 많이 받는 거죠.
K
아까도 말씀하셨지만 연극이 텍스트 중심에 오래도록 멈춰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너무 오랫동안 교육과 현장에서 그것이 정답인 양 그 무게 중심이 지속되고 있고 이상하리만큼 변화가 없다는 거죠. 고착되어 있다는 건 재미없는 거죠. 살아있지 않다는 것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작업을 풀어나가는 작업자들이 없는 건 아니거든요. 그런데 안 보이죠. 그 부분이 참 흥미롭습니다.
연극의 재료라는 게 텍스트만 있는 게 아니고 몸, 사물, 공간, 소리, 빛 등등, 다양한 것들이 작동했을 때 굉장히 재밌는 게 나오잖아요. 정말 다양한 데서 이야기와 상상력은 작동하고 그것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어요. 자유롭게 제멋대로 자신만의 재료를 찾아서 작업하는 작업자들이 더 넘쳐나서 여기저기서 보이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관객들이 그런 다양한 작업을 볼 기회도 더 많았으면, 다양한 방식과 표현을 보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도 더 많아지면 좋겠다는 건 욕심일까요. 왜 그게 안 되죠? 세상엔 이해할 수 있는 일보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공연예술, 특히 연극은 사회적인 경험입니다. 공연을 보는 순간 그 자체로 끝나는 게 아니라 관객이 어떤 공연을 볼지 말지 고민하는 순간도 있고, 결정한 순간부터 시작해서 극장으로 오는 과정이 있잖아요. 그리고 극장으로 왔다고 하면 공연을 보고 나서 그 이후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가장 핵심적인 게 예술 경험을 나누는 순간인 거예요.
윤정 님이 어릴 때 어머니와 로댕 전시를 본 경험을 이야기하신 적 있는데, 어머니가 조각 작품의 발가락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다 그랬잖아요. 발가락에 대한 얘기를 하셨다는 게 발가락을 본 것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윤정 님은 어머니의 말을, 윤정 님이 발가락을 본 것과 함께 기억하는 거잖아요. 경험한 장소에서, 집에 가서, 혹은 그 이후의 순간에 그 작품에 대해서 함께 본 사람들, 가족들과 어떤 방식으로 공유하느냐에 따라 엄청나게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요.
저희가 작년에 맹학교 선생님도 인터뷰했는데, 가족과 공연이나 예술을 경험하고 공유할 수 있는 문화적인 기회가 없어서 많이 아쉽다고 하신 부분이 기억에 남습니다. 좋은 공연 자체를 즐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은 그 경험을 가족이나 지인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 하는 겁니다. 이 소통에 대한 욕망이 매체를 확장시킨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공유하고 소통할 수 있는 걸 선택하는 거죠. 이 소통의 본질이, 공연이 가지고 있는 힘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만드는 순간부터 끝날 때까지 개인 혼자는 없습니다. 작업의 처음부터 끝까지 소통이고 사람입니다. 저에게도 여전히 가장 난이도 높은 부분이긴 하지만, 예술은 결국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기에 이 부분은 공연 예술의 존재의 이유,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고 생각을 해요.
한번은 하늘극장에 앉아 있는데, 10년여 전에 헝가리에서 처음 영유아 공연을 본 게 떠올랐어요. 평일 아침에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들이 유아차 끌고 와서 아이들한테 공연을 보여주는데 ‘저분들은 평일인데 일하러 안 가나’ 이런 쓸데없는 생각도 했고. 작은 극장이긴 했지만, 극장에 문턱이 없어 유아차가 도로에서 바로 극장 무대와 객석까지 들어오는 거죠. 그런 모습들이 기억에 남았거든요. 또 인상 깊었던 것 중 하나가, 밤이 되면 남녀노소 단정하게 옷을 입고 극장에 줄을 서 있는 거예요. 극장이라는 공간이 일상에 들어와 있다는 느낌을 받았었어요. 그러니까 리프레쉬 하고 싶으면 극장에 가는 거죠. 카페인 필요하면 커피 한잔 마시는 것처럼. 요즘은 리프레쉬 하고 싶으면 넷플릭스 보지만(웃음).
연출가 김경희. 두 손을 앞쪽으로 모은 채 고개를 뒤로 젖혀 한껏 웃고 있는 모습이다.
Y
리프레쉬 하고 싶으면 넷플릭스. 카피 같은데(웃음).
K
이번에 공연하면서 ‘관객들에게 극장은 무슨 의미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 주변엔 여전히 일평생 공연 한 편, 극장이나 미술관 한번 가보지 못한 사람이 더 수두룩하고. 나도 변두리 위성 도시에서 성장하면서 대학 가기 전까지는 공연 한 번 제대로 보지 못한 사람이었으니까요. 이런 가치나 의미는 갑자기 생기는 건 아니잖아요.
하늘극장에 앉아 있는데 어렸을 때 양육자와 극장을 방문한 기억이 큰 가치가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거죠. 실제로 관객 중에 극장 첫 방문이라고 인터뷰하신 분이 있어서 더 그런 생각들이 났던 것 같아요. 나 같은 사람에게 극장은 일상이니까 극장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인식하고 작업을 시작한 건 아니었는데. 허허. 이거 생각보다 큰일이었구나, 라는 생각.
Y
한 명의 관객일지라도 제 공연을 보고 어떤 영향을 받는다면 저한테는 엄청 큰 의미가 된다고 생각해요. 이것이 공연예술의 특수성이겠죠. 다수를 위해서 작업을 하고 있지만, 그 다수 중에 공연의 경험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K
맞아요. 다수가 모두 만족할 수 있는 예술은 없어요. 각자 다양한 생각을 하기 때문에.
Y
저는 어떻게 보면 클래식한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은데요. ‘공연을 보고 다양한 생각이 열리게 하는 것이 인류를 구원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K
구원까지 가나요?
Y
인류 구원이 대단한 게 아니라 예술을 경험하고, 스스로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그 생각이 삶의 일부분에 달라붙어 조금씩 일상이 변화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죠.
작품을 보고 각자 기억에 남는 순간을 어떤 방식으로 나눌 것인지, 서로의 다른 생각을 어떤 방식으로 존중할 것인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 과정에서 예술을 통해 서로를 배우니까요. 어렸을 때 엄마와 함께 본 로댕의 <키스>, 엄마는 발가락을 자세히 보고 저는 입술을 자세히 봤던 기억이 납니다. ‘예술이란 하나의 작업을 함께 보고 다르게 바라보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막연히 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공연예술이라는 것은 어떤 환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일상이 무대 위에 올라간다고 해도 이미 약속된 기호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환상, 서로를 믿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퍼포머들의 몸 훈련이 굉장히 중요하고요. 다양한 경험이 쌓인 몸을 본다는 것, 그 몸을 보고 감정이 일어나고 나의 일상의 틈을 벌릴 수 있다는 것은 공연예술이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연출을 잘해야겠지만요. 2017년 안산 광장에서 올렸던 <안녕>이라는 작품이 생각나요. 포크레인과 크레인, 중장비들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움직였던 퍼포머들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떠오르고 가라앉았어요.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봤어요. 아마 다른 관객들도 많은 감정들을 느끼셨으리라 생각해요.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이런 감정을 공유한다는 것이 저는 굉장히 고차원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없어지면 안 된다.
K
갑자기? 없어져요? 예술?
Y
없어지면 안 되죠.
K
그래요. 없어지면 안 되지만 인간이 멸종한다면 어쩔 수 없고.
Y
없어지면 안 되지.
연출가 김경희와 안무가 이윤정이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다. 
            두 사람이 앉은 공간은 서계동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의 로비로, 유리 벽면에는 백성희, 장민호 두 배우의 포스터가 붙어 있고, 
            유리문 너머로는 건너편 소극장판의 빨간 건물이 보인다.

* 장소 협조: 국립극단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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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희

김경희
예술 작업자, 연출가, 무대미술가. 창작그룹 노니 대표. 거리예술, 서커스, 파쿠르, 무술, 연희, 사운드 등 서브컬쳐와 공연예술을 연결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https://www.archv-g.com

이윤정

이윤정
댄스프로젝트 뽑끼의 대표로 활동 중이며 춤, 안무, 퍼포먼스, 예술교육, 소메틱 수련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사회와 예술의 접점에서 몸의 잠재성을 탐구하고 소수자와 미약한 몸들이 공명하고 공생하기 위한 안무 방식을 연구하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설근체조>, <내장진동>, <동시다발>, <점과 척추 사이>, <1과 4, 다시> 등을 안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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