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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자리_남겨진 사람들.wav

[이 편지는 연극에서 시작되어] 송지인 X 목소

목소, 송지인

제244호

2023.10.26

[이 편지는 연극에서 시작되어]는 두 편지글로 이루어진 대화입니다.
사운드 디자이너 목소가 누군가에게 보낸 편지, 그리고 그 누군가로부터 도착한 답장을 함께 싣습니다.

기사의 제목인 “***_***.wav”는 두 필자가 제목으로 선택한 말들을 나란히 놓고, 사운드 파일의 확장자를 붙인 형태입니다. 서로는 서로가 어떤 말들을 선택했는지 모르고, 기사의 제목은 편집부가 그 말들을 수신할 때 완성됩니다.

지인 감독님에게

한가위 잘 보내셨나요. 대체로 우리들 스태프에게 연휴는 별 의미가 되지 않지만, 두어 번의 큰 명절만은 잠시 다른 공기가 스쳐 지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얼마 전 산울림 소극장에서 보았던 감독님의 최근 작업 <이토록 가깝게>를 가끔 생각합니다. 실은 생각이 났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과거의 서랍으로 분류되기 전 남아있는 감상을 부족하나마 잘 담아 전해 보려 합니다.
몇 개의 계단을 내려가 극장에 들어섰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무대 가운데 놓인 의자였습니다. 그것은 왜인지 저에게 ‘기다림’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스스로를 그저 기다리는 사람이라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기다림은 늘 평생 같아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에 대해 오래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의자를 바라보는 동안 눈앞의 장소는 이미 저에게 오래된 것이 되었고, 그렇게 확장된 시간 위로 창 너머 비쳤다 멀어지는 빛처럼 많은 틈이 열렸다 이내 닫히곤 했습니다.
그날은 하필 비가 오는 날이었습니다. 역시 저에겐 꽤 오래된 것인 홍대 거리를 지나 도착한 극장에도 이윽고 빗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섬세하게 디자인된 소리들은 큰 비를 지나 제가 어딘가의 ‘안’에 이르렀음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무대 뒤에 마련된 헤드폰을 착용했을 때 고음역이 사라지며 저는 한 번 더 ‘안’으로 침잠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어두운 밤 홀로 운전을 할 때의 감각과도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스피커와 헤드폰의 미묘한 시차와 거리감 덕분인지 그 ‘안’은 퍽 독립적이고 아늑한 공간으로 느껴졌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극장의 뒤쪽 객석에 앉아 있다 헤드폰을 가지러 내려가며 무대와 가까워질수록 저는 기묘하게도 그곳과 시간적으로 가까워지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렇지만 현재가 조금씩 기억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인지, 혹은 무엇인가가 성큼 현재로 다가오고 있는 것인지는 끝내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유리창에 크고 작은 물방울들이 맺혀 있다. 유리 너머의 풍경과 안쪽의 이미지들이 어렴풋이 겹친 가운데 물방울 하나하나에 반사되고 있다.

어떤 순간이 시공간적 ‘거리’로 치환되어 감각되었던 건 어쩌면 “이토록 가깝게”라는 제목의 마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빛과 소리가 표현하는 흐름을 받아안은 채 버티고 있던 그 공간의 여백엔 무수한 거리들이 정말로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또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물이 접시에 떨어져 반짝하는 찰나를 여러 번 반복해 바라보았습니다. 모든 것이 같지 않고, 다시 오지 않습니다. 똑. 또옥. 톡. 늘 새로운 것이면서 결국 사라질 수밖에 없는 소리의 운명을 일순 엿본 것 같기도 했습니다.
오래 전 신촌극장에서 ‘응시’에 관한 전시를 한 적이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무연히 오래 바라본다는 것은 마음의 한켠에 어떤 공간을 발생시키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이토록 가깝게>에 대해서라면 그것은 ‘상실’을 위한 자리일까요, 혹은 ‘상실’에 의한 자리일까요.
“이곳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다니는 이를 위한 공간”이며 “어디에 서 있어도 누군가 남기고 간 빈자리”가 보인다고 쓰신 것을 읽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부재들을 응시하고 기다리면서 저는 아주 오래 그곳에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같지 않고, 다시 오지 않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연극을 만드는 우리들이 줄곧 바라보는 사실이자, 느슨하게 공유하고 있는 매혹적이고 불가피한 상실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지워지지 않는, 그날의 극장을 생각하며 씁니다.

2023년 10월, 목소 우정인 드림





목소 감독님에게

보내주신 편지를 한참이나 품어두고 열어보지 않았습니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좋은 때에 마음껏 환영하는 마음으로 열어보고 싶어 기다리다가 오늘에서야 열어보았습니다.
감독님의 편지는 잠시 밀봉해둔 기억들로 가득 채워져 있어, 그때 그곳으로 잠시 다녀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작업 또한 제게는 아직 열지 않은 편지로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이 편지가 그날을 회고할 수 있는 날이 된 것 같아 반가우면서도 쓸쓸한 마음이 듭니다.
누구에게나 상실의 기억이 있듯. <이토록 가깝게>는 잠시 잊혔던 그리운 이들을 회상하기 시작하면서 만들었습니다. 떠난 이들에 대한 기억이 문득 찾아올 때 그들의 흔적을 잘 마주해보고 싶었습니다.
저는 종종 상실된 사람들을 생각하면 시간이 짧아진다는 생각이 들어요. 함께 했던 긴긴 시간들을 등에 업고 뒤돌아보면 걸어온 길이 짧은 찰나처럼 느껴집니다. 아마도 그리운 마음이 그 오랜 수년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도착하기 때문이겠지요. <이토록 가깝게>라는 제목은 그 거리감에서 시작이 되었어요.
감독님, 저는 작업을 하며 사라진 무대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해요. 먹먹하게 계속해서 나를 괴롭히는 무대들이 있어요. 몇 개월도 채 안 됐는데 마치 아주 예전으로 간 작업들이 있고, 이미 무대는 해체되었는데 아직도 제 마음속에는 여전히 움직이고 있는 무대가 있어요.
감독님에게도 그런 순간들이 있나요? 이번 작업을 하며 소리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어요. 소리는 보이지 않는 언어로 그 순간에만 존재한다는 걸 다시금 알게 됐어요. 잘 기억하고 싶어도 우리에게 오로지 순간의 감각으로만 남는 건 숙명처럼 계속되는데요. 감독님은 버티시나요. 견디시나요. 남기시나요. 파도처럼 다가오는 상실을 어떻게 감당하고 계실까요.

<이토록 가깝게>의 공간 사진. 전체적으로 짙은 푸른빛의 어두운 공간에 나무 의자가 하나 있다. 
            의자 위에는 검은색의 그릇이 놓여 있고, 공간의 뒷벽에는 세 개의 검은 스크린이 나란히 걸려 있다. 뒷벽과 천장에 일렁이는 물 그림자 같은 것이 비친다.
촬영: 윤관희

<이토록 가깝게>에서는 익숙했던 재료들을 하나씩 걷어내 보았어요.
말을 건네는 이가 없자 그 낯섦에 스스로에게 말을 건네보면서 이야기가 시작이 되었어요. 하지만 공간에 있다 보면 기억 어딘가에서 말을 건네주는 이들이 생겨납니다, 문득 공간 속 빈자리들이 그의 자리는 계속해서 존재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지난 봄과 여름 저희에게는 짧은 만남이 두 차례 있었습니다. 항상 감독님을 만나기 전 질문들을 안고 갔는데 막상 시답잖은 대화만 하다가 되돌아왔어요. 그런데 또 그 대화들 사이에서 익숙한 편안함을 느끼다가 와요. 아마도 사라지는 일들에 대한 다짐 같은 게 서로에게 자리 잡고 있어서이지 않을까요.
제 오래된 친구이자 지금은 이곳에 없는 친구가 툴툴거리는 제게 자주 했던 말이 있었어요. 잘 버텨보자. 그리고 마무리를 잘 해보자. 기약이 없는 일들을 하며 그 말은 제게 작은 약속이 되었어요. 이번 일도 마무리를 잘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하다 보면 마침표를 찍을 때가 곧 오곤 하더라고요. 아마도 남은 이에게 건네는 애정 어린 시선이 아니었을까 해요.
잘 버티다 보면 저희에게도 또 다른 상실이 찾아오겠지요.
그때에도 이렇게 편지를 보내며 서로에게 안부를 물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낮에도 밤에도 선선한 가을이 왔어요. 부디 이 계절을 누리시길 바랄게요.

2023년 가을
지인 드림



[사진: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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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

목소
듣기의 연습을 통해 ‘들리는 것’과 ‘듣는 것’에 대한 질문을 수행 중이다. <앨리스 인 베드>, <홍평국전>, <우리는 농담이(아니)야>, <스푸트니크> 등에 사운드 디자인으로 참여했다.
인스타그램 @morceauxx

송지인

송지인
무대를 고민하고 짓는다. 최근 다원 공연 <이토록 가깝게>에서 구성과 미술을 맡았고, <틴에이지딕>, <20세기 블루스>, <절창III> 에서 무대디자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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