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기 전에 반짝반짝 거리는 순간
[무엇을, 어떻게, 왜] 강수연 X 성수연
성수연
제246호
2023.11.30
[무엇을, 어떻게, 왜]는 배우이자 창작자인 성수연이 진행하는 대화입니다.
동시대 창작자들이 무엇에 주목하고, 어떻게 작업하며, 그 일을 왜 하는지 들어봅니다.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요즘 제가 좋아하게 된 많은 것들을 정성 들여 생각하고 있답니다. 그런데 그것이 왜 좋은지 스스로에게 설명하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어떤 문장을 말해도 그 마음이 충분하게 담기지 않아서요. 창작자들은 자신의 일을 왜 좋아할까요? 그 일에서 어떤 순간을 발견하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창작자 강수연 님과 대화를 나눈 기록입니다.
- 성수연
- 수연 작가님, 안녕하세요? (웃음)
- 강수연
- 수연 배우님, 안녕하세요? (웃음)
- 성수연
- 연극에서 영상디자이너로도 활동하시고, 다양한 미술작업을 하고 계신 작가님과 대화를 꼭 나눠보고 싶었어요. 언젠가 어떤 자리에서 이미지 생성 인공지능 프로그램들이 발전하면서 작가님의 미술수업을 듣는 중학생들이 속상해하고 있고, 그럴 때 어떤 이야기를 해줘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하신 말씀을 들었는데, 지금은 그에 대한 답을 좀 찾으셨는지도 궁금했고요.
- 강수연
- 기대가 되는 대화네요(웃음). 지금 어떤 음료를 드시는 거예요? 커피?
- 성수연
- 고구마라떼요. 고구마라떼.
- 강수연
- (웃음) 너무 귀여운 거 아니에요? 고구마라떼라니. 고구마라떼 너무 귀여운 것 같아요.
- 성수연
- (웃음) 전부터 여쭤보고 싶었는데, 이름에 어떤 한자를 쓰세요?
- 강수연
- 엇! 저도 궁금했어요. 저도 궁금했어요. 저는 ‘받을 수’ 자에 ‘이을 연’ 자를 써요.
- 성수연
- 와, 뜻이 멋지네요! 그 많은 ‘수연’ 들 중에서 그 한자 쓰는 분은 처음 봐요.
- 강수연
- 배우님은요?
- 성수연
- 네. 저는 흔한 한자를 써요. ‘수노래방 수’, ‘연극 연’.
- 강수연
- (폭소)
- 성수연
- 사실 ‘빼어날 수’에 ‘예쁠 연’을 쓰는데, 흔하죠. 특히 ‘빼어날 수’는 수 노래방에… (웃음) 그래도 뜻도 예쁘고 모양도 예뻐서 저는 그 글자를 좋아해요.
- 강수연
- 정말 예쁜 한자인데 어느 순간 수 노래방이 독점했네요. 제 이름의 뜻은 사실 좀 남아선호사상적인 뜻이 아닐까 해요. 아들을 많이 원했던 집안이어서, 뭔가 ‘대를 이어라’라는 뜻이 있는 것이 아닐까…
- 성수연
- (절규)
- 강수연
- 제 추측이에요(웃음).
- 성수연
- ‘수연’은 정말 흔한 이름이잖아요. 전 학창시절에 꼭 한 반에 수연이가 두세 명씩 있었어요.
- 강수연
- 저는 수연이를 이렇게 딱 만난 건 처음이에요. 그래서 반가워요.
- 성수연
- 반갑습니다(웃음). 제가 미술이나 영상작업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해서, 그냥 궁금한 것들을 찬찬히 여쭤볼게요. 처음에 미술을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어요?
- 강수연
- 저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고 만들기 하는 것을 좋아해서 계속하고 싶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미술을 하게 됐어요.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에 진학했고요.
- 성수연
- 학창시절에, 반에 그림 정말 잘 그리는 친구 꼭 한 명씩 있잖아요. 그런 친구셨던 거예요?
- 강수연
- 네(웃음).
- 성수연
- 그렇군요. 특별히 좋아하는 작가가 있으셨어요?
- 강수연
- 저는 오히려 뮤지컬에 대한 동경이 컸어요. 어렸을 때 뮤지컬 <라이온 킹>이랑 <노트르담 드 파리>를 봤거든요. 특히 <라이온 킹>은 굉장히 충격적이었어요. 미술이 엄청나잖아요. 그걸 보고 나서 시각적인 조형물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쩌면 제가 연극작업을 하는 것도 공연장에 대한 동경이 있어서일지도 몰라요. 제 영상이 무대에서 배우들과 함께 움직이는 것 자체가 정말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지금도 계속 하고 있는 것 같아요.
- 성수연
- 지금은 공연장에서 조형물이 아니라 영상물을 만드시는데, 어떤 계기로 영상작업을 하게 되셨나요?
- 강수연
- 어렸을 때부터 막연하게 뭔가를 만드는 게 좋았는데, 영상이라는 매체 또한 제가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고3 때 미셸 공드리가 만든 뮤직비디오를 보고 정말 좋아서 언젠가 나도 그런 것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됐는데, 대학교 1학년 때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을 직접 만들면서 영상이라는 매체가 정말 좋아졌어요. 그때부터 영상작업을 시작했어요.
- 성수연
- 작가님은 미대 입시를 경험하셨겠군요. 그러고 보니 고등학교 때, 미대 입시를 준비하는 친구들이 한 반에 몇 명씩 있었어요. 야자 빠지는 친구들(웃음).
- 강수연
- 맞아요(웃음).
- 성수연
- 그 친구들이 입시 준비하는 이야기 들어보면 신기하고 재미있었어요. 그때 많이 들었던 말이 ‘발상과 표현’. ‘발상과 표현’이라는 시험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어떤 학교에 시험을 보러 가면 주제를 주고 그림을 그리게 하는데, 예를 들면 ‘물고기가 있는 어항이 깨졌다, 어떻게 할 것이냐?’ 이런 주제를 주고 그 상황을 그림으로 그리게 한다고.
- 강수연
- 맞아요. 아마 그때쯤 시작된 시험이었을 거예요.
- 성수연
- 연영과 입시에도 즉흥연기, 상황연기 이런 시험이 있었거든요. ‘발상과 표현’이랑 비슷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사용하는 도구가 다를 뿐. 만약 연영과 시험에서라면 ‘물고기가 있는 어항이 깨졌다, 어떻게 할 것이냐?’를 제시 상황으로 받아서 연기로 표현하게 되겠죠. (연기하며) 이렇게 할 수도 있고, (연기하며) 이런 연기법을 선택할 수도 있을 테고. 그때 친구가 좋은 사례라며 얘기해줬던 그림은, 물고기를 살리기 위해 물고기와 물을 입에 한가득 머금은 상태로 라이터를 켜서 천장 스프링클러에 대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었어요.
- 강수연
- 재밌는데요(웃음).
- 성수연
- 즉흥연기, 상황연기 시험에서 그런 행동을 연기해도 재미있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요. 닿아있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작가님도 ‘발상과 표현’ 하셨어요?
- 강수연
- 입시 때는 했었어요. 대학교마다 입시내용이 다르긴 했지만요. 상황을 구상해서 화면 안에 그려내는 건데, 여전히 형태력은 중요하고요. 저는 우유갑 같은 가공품보다는 자연물을 더 잘 그렸어요. 북어나 밧줄 같은 것. 선생님이 “너는 시험에 자연물이 나오도록 기도해라” 이런 말씀 하셨던 게 기억나요(웃음).
- 성수연
- (웃음) 재밌다. 갑자기 학창시절로 돌아가서 연영과 입시 준비하는 제가 미대 입시 준비하는 친구 만나서 얘기하는 기분이에요.
- 강수연
- 마침 딱 입시철 날씨네요, 지금.
- 성수연
- 그러게요. 곧 수능이네요.
- 강수연
- 예체능은 수능 끝나고 본격적으로 시작이잖아요(웃음).
- 성수연
- 남들 다 놀 때 못 놀고(웃음). 연극에서 영상작업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어요?
- 강수연
- 고등학교 때 입시 선생님이셨던 이상홍 작가님 덕분이에요. 그분이 먼저 공연 작업을 하고 계셨는데, 영상작업이 필요한 어떤 공연 팀을 소개해주셔서 하게 됐어요.
- 성수연
- 아, 홍살롱을 운영하셨었죠! 제 주변 배우들이 그림 그리러 굉장히 많이 다녔어요.
- 강수연
- 네. 홍살롱 주인이시기도 하지요. 지금은 제주도에 계시지만요.
- 성수연
- 보통 미술작가님들은 개인 작업을 많이 하실 텐데, 개인 작업 하실 때랑 연극 프로덕션에 참여하실 때랑 많이 다르지요?
- 강수연
- 많이 달라요. 공연에 참여할 때 여전히 정말 신기하고 재미있는 것은 여러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공연장에 모여서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 나가는데, 마치 조각처럼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착착착착 한 덩어리가 되는 모습이에요. 그 자체가 정말 신기한 경험이고, 제 영상도 그 덩어리의 일부가 되어 탁 달라붙는 것이 정말 재밌어요.
- 성수연
- 영상 촬영을 하기도 하시지요? 그래픽 디자인을 하기도 하시고요.
- 강수연
- 네. 제가 그림을 그려서 영상을 만들기도 하고요.
- 성수연
- 기술이 많으셔서 영상 작업을 하실 때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많으실 것 같아요.
- 강수연
- 할 수 있는 기술들이 좀 얕아 가지고(웃음), 부끄럽네요. 다룰 수 있는 툴은 많은데, 깊지는 않은 것 같아요. 아쉬울 때도 많아서 다음엔 더 잘하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해요(웃음).
- 성수연
- 제가 작가님이 참여하신 연극을 거의 다 봤더라고요. <산책자의 행복>, <메이크업 투 웨이크업>, <춤의 국가>도 봤고. <춤의 국가>에서의 자막과 영상, 정말 직관적이고 예쁘다고 생각했어요. <편입생>도 봤고, <세컨드 찬스>도 봤네요. 진짜 다 봤어요. 다 좋았고요.
- 강수연
- 와. (박수)
- 성수연
- <세컨드 찬스>는 만들면서 어떠셨어요? 저는 관객으로서 정말 좋았거든요.
- 강수연
- <세컨드 찬스>는 윤혜숙 연출님과 아버지의 사적인 이야기였어요. 저도 저와 제 아버지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되기도 했고, 저와 제 자신의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어요. 사실 당시엔 정신없이 영상을 만들었는데, 그 공연 끝나고 몇 달 후에 건강검진하면서 제가 어떤 질환을 발견했거든요. 그때부터 그 공연 생각이 계속 났어요. 저 스스로 좀 심각할 수도 있었던 사건이었는데 오히려 그 공연에 참여했고, 그 공연을 봤기 때문에 잘 견뎌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세컨드 찬스>는 제 상황을 잘 견뎌낼 수 있었던 힘 중에 하나였어요, 저에게.
- 성수연
- 어떤 공연을 했기 때문에 생긴 힘으로 삶의 어떤 순간을 잘 버텨낼 수도 있는 것이었군요. 아, 좋네요. 그러고 보니 윤혜숙 연출님 작업을 많이 하셨네요?
- 강수연
- 제가 정말 정말 좋아하는 연출님이어서 작업 제안 주시면 기쁘게 항상 달려가요. 연출님의 공연 자체가 참 좋고, 항상 뭔가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그 시선이 저는 정말 좋아요.
- 성수연
- 따뜻한 시선 좋아하세요(웃음)?
- 강수연
- 따뜻한 시선 좋아해요(웃음).
- 성수연
- 그러신 것 같아요(웃음). 얼마 전 작가님 작업실에 방문했을 때, 보여주셨던 그림들을 보고 그런 생각을 했어요. 저는 그림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서 좋은 언어를 못 찾겠는데… 작가님 그림에는 하여튼 뭔가, 그러니까 뭔가가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재료 설명해주실 때나 작업방식을 얘기해주실 때 눈이 반짝반짝 빛나시던 모습도 기억나요. 이 사람은 이렇게 따뜻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작업을 하기 때문에 그 마음이 결과물에 남아있는 걸까 싶기도 했어요.
- 강수연
- 제가 혼자 좋아하던 것들을 나눌 수 있어서 저는 그날 정말 즐거웠어요. 배우님도 재미있어 하시니까 저도 신나서 자꾸 이것저것 꺼내서 보여드리고 싶었나 봐요. “이 먹에서는 이런 냄새가 나요” 하면서(웃음). 사실 저도 그림 그리는 것 자체를 즐기게 된 건 몇 년 안 됐어요. 어렸을 때부터 입시를 시작했거든요. 정말 좋아서 시작한 그림이었고, 항상 저는 반에서 그림을 제일 잘 그리는 아이였는데 미술학원에 가니까 저는 더 이상 그런 아이가 아니더라고요.
- 성수연
- 반에서 그림 제일 잘 그리는 애들이 다 학원에 있었겠네요.
- 강수연
- 네. 저는 매일같이 혼났어요. “왜 이렇게 비뚤게 그렸냐, 투시가 다 틀렸다” 이런 식으로요. 저는 입시미술에서 하는, 투시 맞추고, 정해진 시간 안에 그려내는 일을 정말 못했거든요. 그때 너무 혼나서 점점 소묘가 싫어지고, 형태를 그리는 게 싫어지고 그랬어요. 한국 미술 교육과 입시는 그림 그리는 일을 싫어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구조인 것 같아서 아쉬워요. 그림을 그리는 건 정말 즐거울 수 있는 일이거든요. 배우님도 그림 그려보시면 어떠세요? 잘 맞으실 것 같아요. 그날 작업실에서 그리신 그림도 좋았고, 잘 못한다고 말씀하신 것 치고는 붓놀림이 쓱쓱 거침없으셔서 좋았어요. 재료에 대한 호기심도 굉장히 많아 보이셨고요.
- 성수연
- 저는 그림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있어서, 학창시절에 미술을 정말 싫어했어요.
- 강수연
- 어떤 기억이 있어요?
- 성수연
- 혼난 기억이요(웃음). 한 번은 놀이터를 그렸는데, 바탕을 모자이크처럼 나눠서 가진 크레파스를 다 칠했어요. 바탕색을 무조건 칠해야 완성이라고 하는데, 이 색을 칠하려니 어떤 부분엔 어울리지만 어떤 부분엔 안 어울리는 것 같고 해서 몇 가지 색을 칠하다가 갑자기 크레파스에 감정이입을 시작했어요(웃음). 얘랑 얘는 썼는데 얘를 안 써주면 서운하지 않을까 싶고, 갑자기 안 쓴 크레파스들이 통 안에서 쭈그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웃음). 그래서 모든 색을 다 칠했다가 이게 대체 무슨 그림이냐고 혼이 났어요. 이유를 말했는데 더 혼났어요. 억울했고, 저는 그렇게 미술을 싫어하는 아이로 성장하게 되었답니다(웃음). 그래서 홍살롱도 가보고 싶었지만, 발걸음이 선뜻 떨어지지 않았어요.
- 강수연
- 이상홍 작가님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시고, 그림의 즐거움을 알아가게 해주세요.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갔던 것 같아요. 저도 작가님한테 배웠을 때 정말 즐겁게 배웠었거든요.
- 성수연
- 그림 그리는 일 자체를 즐기게 된 것이 몇 년 안 됐다고 하셨는데, 어떤 계기가 있으셨어요?
- 강수연
- 동화책을 만들어야 해서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어느 순간 정말 즐겁더라고요. 그땐 수채화를 많이 그렸는데, 수채화 안료랑 물이 섞여서 도화지 위에 올라갔을 때 마르기 전에 반짝반짝거리는 순간이 있어요. 그 순간이 정말 좋았어요. 마르면 없어지긴 하지만.
- 성수연
- 진짜 금방 사라지는 순간이잖아요. 뭉클해요.
- 강수연
- 네. 그 순간이 정말 좋은 거예요. 한 번 칠한 것 위에 다시 색을 올리면 느낌이 달라지는 것도 정말 좋고요. 수채화로 레이어를 계속 쌓아서 두껍게 두껍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수채화는 아크릴이나 유화만큼 두껍게 올라가지는 않지만 얇게 계속 올라갈 수 있거든요. 물론 한계가 있어요. 이 얇은 물을 계속 쌓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어느 순간 ‘먹’이 떠올랐어요. 홍콩여행에서 우연히 사온 먹을 꺼내서 이렇게 저렇게 갖고 놀아보니 정말 잘 쌓이더라고요, 먹은 안료와 아교가 섞여 있어서. 그래서 수채화보다 레이어를 훨씬 많이 쌓을 수가 있어요. 그 물질적 특성이 정말 좋아서 요즘 먹을 쌓느라고 정신이 없어요(웃음).
- 성수연
- 설명할 순 없지만 지금 갑자기 뭔가를 작업하고 싶어졌어요(웃음). 쌓고 싶달까요.
- 강수연
- (웃음) 모든 일들이 결과물을 멋지게 내야 된다는 생각을 하면 너무 스트레스 받지만 그 과정 자체가 즐겁다면, 과정 자체를 즐길 수 있으면 정말 좋잖아요. 저는 미술은 정말 ‘과정의 작업’인 것 같거든요. 완성됐을 때도 좋지만, 그 과정이 정말 정말 즐거워요.
- 성수연
- 그 마르기 전에 잠깐 반짝반짝하는 그 순간, 결과에 남지 않을 순간을 굉장히 즐기시는 그 마음이 전해져서 행복해요. 작가님의 개인 작업 중 드로잉 시리즈가 있더라고요. <드로잉 부천>, <드로잉 서울>. 저도 부천 사람입니다(웃음). 부천에 관한 작업을 한 적도 있고요.
- 강수연
- 와, 그렇군요. 저는 부천이 비행기가 보이는 도시라는 점이 정말 좋았어요. <드로잉 부천>은 부천에 관한 저의 개인적인 기억을 다루는 작업이었고, <드로잉 서울>은 서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의 기억을 수집한 작업이었어요. 사람들의 기억을 통해 익숙한 곳을 다시 바라보는 일을 하고 싶었거든요. 부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수연 배우님의 기억이 궁금하네요. 부천에 대해 어떤 작업을 하셨는지도요.
- 성수연
- 작가님께서 ‘드로잉’ 시리즈를 하시는 것처럼 저는 ‘연습’이라는 키워드로 작업을 하고 있어요. 악역 연습, 비인간 연습, 꿀벌 연습 등등. 몇 년 전에 ‘부천의 연습’이라는 짧은 공연을 만들었었어요. 어린 시절의 기억들, 부천을 산책하며 제가 수집한 말들, 관찰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이웃들에게 깊이 닿고 싶은 마음을 담으려고 했어요. 타인과 나 사이의 벽을 훅 허물고 다가가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던 때였거든요. 세상이 위험하긴 하지만.
- 강수연
- 그렇죠. 맞아요.
- 성수연
- 길에 누워있는 사람을 도우려다가 불쾌한 일을 겪은 적이 있어요. 가슴이 아프다고 하길래 심장문제인가 싶어 119를 부르고 옆에 있었는데 갑자기 제 손을 이상하게 잡고 막 이상하게 만지는 거예요. 구급대원들이 오자마자 사실은 머리가 아팠다며 도망치더라고요.
- 강수연
- (절규)
- 성수연
- 그런데 그런 경험을 했다고 해서 앞으로 길에 쓰러져있는 사람을 모른 척할 순 없잖아요. 그런 선들을 계속 생각하고 있어요.
- 강수연
- 궁금하다. 부천에 대한 공통점이 있다는 것도, 얘기할 수 있다는 것도 신기해요.
- 성수연
- 작가님 말씀처럼 비행기가 보이는 곳이라는 관점에서는 생각을 안 해봤는데, 재미있네요. 앞으로 작가님의 ‘드로잉’ 시리즈를 계속 보고 싶어요. 학생들 만나는 일은 언제부터 하셨나요?
- 강수연
- 2016년부터 시작했어요.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시작했는데, 학생들에게서 제가 좋은 영향을 많이 받아서 계속하고 있어요. 주로 중학생들을 만나고 있고요. 문화교육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미술 영상 수업이라서 미술을 좋아하는 학생, 좋아하지 않는 학생들을 다 만날 수 있어요. 그림 그리는 것을 너무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학생들을 보면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싫어하게 됐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해요. 잘 그리고 못 그리고는 없는 건데, 그런 것이 있다면 그건 컴퓨터한테 시키면 되는 건데. 그래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수업내용을 고민해요. 최근에는 학생들이 직접 춤을 춘 영상을 조각조각 모아 그려서 뮤직비디오를 만들기도 했어요.
- 성수연
- 인공지능 때문에 속상해하던 학생들에게는 어떤 답을 해주셨어요(웃음)?
- 강수연
- 그 당시 제가 해줄 수 있었던 답변은 “그림을 그릴 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은 과정 안에 있고,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그림을 그릴 것이다”라는 말이었어요. 지금은 과정 때문에 이 일을 한다는 그 생각이 더 확고해졌어요. 그 외의 답은 아직 못 찾았어요.
- 성수연
- 혹시 학생들이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선생님, 그 과정에서 즐거운 건 저잖아요. 저만 즐겁지, 결과물은 인공지능이 훨씬 잘 내잖아요. 인공지능이 더 잘 그리잖아요?”
- 강수연
- 저도 사실 그게 고민이긴 해요.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야겠죠. “나도 지금 그게 고민이야. 어떻게 하면 좋을까? (긴 침묵) 그런데 또 잘한다는 것은 뭘까?”
- 성수연
- 맞아. (긴 침묵) 잘한다는 것은 뭘까요?
- 강수연
- 미술을 잘한다는 건 뭘까. (긴 침묵) 뭐라고 생각하세요?
- 성수연
- 모르겠어요. 예전엔 뭉크를 좋아하긴 했는데(웃음). 잘하는 연기에 대해서도 보는 사람마다 다 다르게 생각하는데, 미술도 그렇겠지만, 잘 모르겠어요. 아까 형태력은 중요하다고 하셨던 것처럼 연기에서도 어떤 기본은 중요할 텐데, 그다음 단계로 가면 그저 그것을 보는 각각의 개인들에게 닿는 뭔가가 있을 뿐 보편적인 기준은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 강수연
- 맞아요. 또 미술에서 형태를 잡는 기본기가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요즘 사람들이 굉장히 사랑하는 피카소는 형태를 다 없애버렸잖아요. 배우님이 말씀하신 뭉크도 형태를 뭉그러뜨렸고요. 다음 기회에 학생들과 이 이야기를 다시 하게 되면 ‘잘 그린다는 것은 뭘까’에 대해 이야기를 해봐야겠어요. 지금 얘기 나누다 보니 재미있네요.
- 성수연
- 저도 상용화된 여러 인공지능 프로그램들을 써봤는데, 처음엔 그 작업 속도에 놀랐어요. 그 다음에 했던 생각은 ‘상상력’에 대한 것이었어요. ‘반은 꿀벌이고 반은 인간인 배우가 햄릿 연기하는 모습을 그려줘’라고 했더니 어떤 ‘그럴싸한’ 그림들을 그려내더라고요(웃음).
- 강수연
- (웃음) 그렇죠. 그렇죠.
- 성수연
- 상상력이라는 것이 뭔지 다시 질문하게 됐어요. 그 그림들을 인간 작가가 그렸다고 생각하면 “와, 멋진 상상력이네!”라고 말했을 것 같았거든요. 상상이라는 것은 거대한 미지의 세계에서 건져오는 게 아니라 여러 경험, 정보, 감각 등 데이터들의 다양한 조합, 재조합인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됐어요.
- 강수연
- 저도 굉장히 동의해요. 상상력, 창의력 이런 개념들은 그저 엄청난 조합의 여러 방법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어 떻게 조합하느냐, 내 안의 데이터들을 어떻게 연결하느냐가 창의력이고 상상력이라고요.
- 성수연
- 그런데 그게 바로 인공지능이 하는 일이잖아요. 앞으로 더 잘하게 될 것이고요. 상상력, 창조력은 예술하는 사람들이 마땅히 갖춰야 할 덕목이라고 배우면서, 막연히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인 것처럼 생각하게 되기도 했던 것 같아요.
- 강수연
- 그러게요. 상상력은 무엇이고, 창의력은 무엇일까요? 발상은 무엇이고, 표현은 무엇일까요?
- 성수연
- 그때 전 제가 그동안 상상이라는 것이 뭔지 스스로 제대로 정의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알았어요. 여러 데이터들의 연결 능력이 상상력이라고 생각하게 되면서 인간은 어쩌면 정말로 모르는 것은 상상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도 했어요. 그런 말 있잖아요. 인간은 ‘무’를 상상하지 못한다고. ‘무’를 상상하라고 하면 빈 ‘공간’을 상상하고, 공간조차도 없는 것이 뭘지 상상하지 못한다고요. 그땐 좀 힘이 빠졌는데, 지금 작가님과 이런 주제로 대화하다 보니 다른 길이 보이는 것도 같아요. 작가님도 작가님의 학생들처럼 걱정하신 적 있어요?
- 강수연
- 그럼요. 대체 앞으로 어떻게 될까,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사실 기대 반 걱정 반이에요. 기대하는 이유는, 그런 새로운 형식이 생겨날 때마다 새로운 것들이 태어나고 그게 굉장히 재미있기 때문이에요. 누군가가 만들어낼 새로운 것이 기대되거든요. 걱정하는 이유는 역시 악용될까 봐. 이미 많이 악용되고 있으니까요.
- 성수연
- 지금 이런 생각이 번득 스쳐요. 새로운 기술들이 나올 때마다 ‘인간은 다 대체될 거야’ 이런 말들 많이 하잖아요. 절망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결국 ‘인공지능이 이렇게 하는 게 가능하다고? 그렇다면 인간이 하는 그 일은 어떤 영역까지였지?’ 이런 생각을 발견하게 되는 것 자체가 좋은 것 같아요. 상상력이 뭐였는지 다시 생각하게 된 것처럼요.
- 강수연
- 맞아요. 맞아요.
- 성수연
- 어쩌면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학생들도 속상해할 필요가 없는 것 같아요. 계속 생각을 발견하고 시도해보면서 인공지능과 인간이 함께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 정리가 잘 되진 않아요. 그런데 이런 질문이 갑자기 생겼어요. 예를 들어 인공지능의 장점이 빠른 속도라면, 그래서 인간이 오랜 시간을 들여야 할 수 있는 일을 순식간에 할 수 있게 되었다면, ‘어떤 일을 빠르게 한다는 것은 왜 중요했던 거지? 우리는 시간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지?’ 이런 다른 질문을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작가님께선 요즘 먹으로 레이어를 쌓고 계신다고 했는데, 물론 그런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면 인공지능도 잘 그리겠죠. 하지만 작가님의 그림엔 그 레이어가 쌓여가는 과정과 시간이 담겨 있잖아요, 도화지 한 장에. 그게 정말 아름다웠거든요. 먹이 말라가고 또 먹이 올라가는 시간을 상상하게 되는. 그렇다면 그 느린 시간을 더 드러내서 담아낼 수 있는 종류의 결과물 형식을 개발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이런 다른 생각의 길이 계속 개발될 수 있지 않을까.
- 강수연
- 맞아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도 다음에 학생들과 대화할 때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어요. 지금 정말 좋아요. 제가 충격받았던 어떤 일이 생각나요. 예전에는 신발을 사람들이 손으로 만들었잖아요. 산업혁명 이후 공장이 생기면서 손으로 신발을 만들던 사람들이 많이 없어졌다고 하고요. 한 10년 전에 제가 처음 영상 일을 할 때 많이 하던 아르바이트 중 소위 ‘누끼를 따는’ 일이 있었어요. 전문적인 일이었어요. 포토샵 같은 프로그램으로 제품 사진의 테두리를 깔끔하게 따는 전문적인 일이고, 그런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 일을 전문으로 하는 스튜디오들도 있었고요. 그런데 그 10년 사이에 기술이 발전해서, 물론 완벽하진 않지만 클릭 한 번으로 90% 이상 정확하게 그 일을 해주는 기능이 생겼잖아요. 저는 그 기술이 업데이트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 일을 하던 사람들의 일자리가 없어지는 건가 하는 생각을 오랫동안 이상하게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 대화하면서 든 생각이, 애초에 그 직업 자체가 포토샵이라는 기술이 발명되면서 생겼다는 거예요. 많은 것들이 기술 발전에 따라 자연스럽게 생겼다가 사라지곤 하는 것이구나 싶고, 또 노동력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생각까지 해보게 되네요. 저는 이렇게 AI에 대해서 관심 있게 얘기해서 너무 좋아요. 아직까지 주변에 그렇게 관심 있는 사람이 없어서. 배우님은 어떠세요? 우리 일상생활에 AI가 굉장히 많이 들어와 있는데, 그게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세요?
- 성수연
- 저는 아직 일상의 영역에서는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고, 그런 기술들로 작업을 할 때, 그 기술의 의미를 작업 안에서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에요. 예를 들어 AR로 어떤 작업을 할 때, ‘실제 공간엔 없지만 화면 속 공간에는 있는 뭔가가 왜 드러나야 하지? 그 맥락을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지?’ 이런 고민들. 새로운 기술들을 아직까지는 즐거워하고 반기는 편인 것 같고요. GPT3가 쓴 희곡을 연기한 적이 있었는데 재미있었어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요. 아까 잘 그린 그림이나 잘하는 연기가 뭔지 얘기할 때, 머릿속으로 제가 좋아하는 작가나 배우의 어떤 점을 좋아하는지 잠깐 생각했거든요. 제가 좋아하는 배우에게는 뭔가가 있어요. 적어도 저에게는요. 모든 존재들에겐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고유성, 혹은 나와 고유하게 만나지는 지점이 있는 것 같고, 어쩌면 AI의 작업물도 각 인간들의 작업물처럼 수많은 것들 중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인간과 AI를 구분해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
- 강수연
- 아까 배우님께서 “수연 작가님의 그림에는 뭔가가 있어요”라고 하셨고, 방금도 “제가 좋아하는 배우에게는 뭔가가 있어요”라고 하셨는데, 사실 아까부터 저는 비틀즈의 <Something>이라는 노래가 자꾸 생각났어요. ‘너에게는 뭔가가 있어. 내가 사랑하는 그것에는 뭔가가 있어’ 그런 내용이잖아요. 그것을 Something이라고, 뭔가, 뭔가가 있다고 계속 말하잖아요. 그것을 구체적인 말로 표현할 수는 없고, 말로 표현하면 오히려 사라져버릴 것도 같고. 아까부터 속으로 그 노래를 계속 불렀어요.
- 성수연
- (흥얼거린다) Something in the way she moves attracts me like no other lover~ 그 ‘Something’이 나한테만 작동하는 한순간일지라도 그건 정말 중요해요.
- 강수연
- 그건 예술에서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나한테 작동하고, 나한테 와닿는 것.
- 성수연
- 오늘의 대화가 정말 즐겁네요. 멈추고 싶지 않지만, 시간 관계상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럼 질문 주고받기와 함께 대화를 마무리하겠습니다.
- 강수연
- 저도 정말 즐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두 명의 수연, 서로를 바라본다.
- 성수연
- 그림을 그리며, 누군가와 이 과정을 나누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이 가장 최근에 언제야?
- 강수연
- 고구마라떼 맛은 어땠어?
- 성수연
- 입 안에 레이어가 쌓이는 느낌이 느껴지는 종류의 음료를 좋아해?
- 강수연
- 점심 뭐 먹을 거야?
- 성수연
- 너는 뭐 먹을 거야?
- 강수연
- 너무 답하고 싶어요(웃음). 최근에 가장 즐거웠던 순간은 언제야?
- 성수연
- 최근에 만졌던 것 중에 느낌이 제일 좋았던 게 뭔지 떠올릴 수 있어?
- 강수연
- 어제 잠 잘 잤어?
- 성수연
- 잠 안 올 때 듣는 음악 있어?
- 강수연
- 어렸을 때 꿨던 꿈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게 있어?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