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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적인_다정한 목소리.wav

[이 편지는 연극에서 시작되어] 송지인 X 목소

목소, 송지인

제247호

2023.12.07

[이 편지는 연극에서 시작되어]는 두 편지글로 이루어진 대화입니다.
사운드 디자이너 목소가 누군가에게 보낸 편지, 그리고 그 누군가로부터 도착한 답장을 함께 싣습니다.

기사의 제목인 “***_***.wav”는 두 필자가 제목으로 선택한 말들을 나란히 놓고, 사운드 파일의 확장자를 붙인 형태입니다. 서로는 서로가 어떤 말들을 선택했는지 모르고, 기사의 제목은 편집부가 그 말들을 수신할 때 완성됩니다.

지인 님에게, 다시.

보내주신 편지를 읽고 한참을 우두커니 멈춰 있었습니다. 그리고 뒤늦은 답장을 눌러씁니다.
대부분 그렇겠지만, 상실은 저에게도 늘 대하기 어려운 기억이자 예감인 듯합니다.
불가역적인 것에 대해 생각하면 언제부터인가 공황이 찾아옵니다. 첫 발작을 겪고 십여 년의 시간을 보내는 새 불안과 많이 친숙해져 그것을 비교적 잘 다루게 되긴 했지만, 잃어버렸고 다시 찾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면 유독 심한 공포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한두 해 차츰 나이를 먹으며 누구보다 자신 있었던 기억에 구멍이 생기는 것을 종종 목격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상실된 사람들도 결국은 잊히게 될까요. 아직은 모두 먼일로 느껴집니다. 누군가가 견딜 수 없이 그리워지면 그이의 목소리를 불러냅니다. 그때마다 함께했던 시간이 현재로 다가와 가만 포개지는 기분을 느낍니다. 그 수백 개의 목소리는 녹음에 의존하지 않고도 어떻게 이렇게나 선연히 제 안에 다 남을 수 있는 걸까요.
기억하는 한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수년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도착”한 흔적이 현재와 만나 또 다른 길을 냅니다. 어쩌면 끝내 과거에 빚지고 살아가는 삶일 것입니다.
사라진 무대에 대해서 생각하는 감독님을 생각합니다. 물리적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을 만들고 그와 작별하는 마음은 무엇일까요. 호쾌하고 효율적인 작별의 무드 속에서 빠르게 해체되는 한 세계를 매주 매달 바라보는 마음을 생각합니다. 저마다의 기억의 자리에 남아서 움직이고 있는 무대들의 이야기를 언젠가 꼭 듣고 싶습니다.

U2 – Stay(Faraway, So Close!) 뮤직비디오의 첫 장면을 캡처한 이미지. 
            독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앞을 지나가는 2층 버스를 뒤에서 촬영했다. 
            흑백의 이미지이지만 거리와 버스의 불빛이 선명하고, 그 불빛에 버스의 1층과 2층 맨 뒤 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도드라진다.
U2 – Stay(Faraway, So Close!) (유튜브로 보기)

편지를 다시 읽으며, 전 어쩌면 “그 순간에만 존재한다는 걸” 견디거나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받아들이는 까닭에 이 일을 지속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타났다 사라지기, 모였다 흩어지기, 열렸다 닫히기, 오직 일시적으로 존재하기… 이러한 전략을 저는 20대 후반을 함께한 스쾃터(squatter) 친구들로부터 배웠습니다. 모든 것을 체제 안으로 포섭하려는 자본의 시도에 맞서 그저 힘으로서 존재하는 것 말입니다. 저와 친구들이 일찍이 함께였던 문래동 철공소 골목의 공간은 사라졌지만, “스스로 ‘일시성’ 즉 연속적 시간이라는 질서의 중지를 향해 나아가는”1) 힘은 지금도 제 안에 남아있습니다
기형도의 시 중 오래 품어 온 문장들이 있습니다. “소리나는 것만이 아름다울 테지./ 소리만이 새로운 것이니까 쉽게 죽으니까./ 소리만이 변화를 신고 다니니까.” 2) 그러니 실은, 상실의 운명 때문에 외려 소리를 사랑하게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소리는 다시 올 수 없는 ‘지금 여기’ 저의 세계를 일시적으로 구획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을 만드는 일에 대한 비애는 남아있지요. 아니, 그것이 실은 시간 속의 삶의 전부이고 우린 유난히 삶과 가까운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잘 버티고 마무리를 잘해 보는 것. 그 또한 공연의 일이자 삶의 일이니까요. 편지를 읽고 문득 가을이 온 것을 알았는데, 어느새 겨울이 되었네요. 올해도 잘 버텼고 이제 마침표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또 어떤 마음의 부분에는 근육이 붙었겠지요. 모쪼록 지인 감독님의 한 해도 정답고 따스하게 마무리되기를 바랍니다.

2023년 11월, 목소 우정인 드림





목소 감독님에게

지난 만남을 생각하면 자꾸 웃음이 납니다. 저흰 무엇을 위하여 그렇게도 열띤 토론을 했나요. 이상한 시간들을 보내며 잠시 여행을 다녀온 것 같았어요. 지금도 편지를 쓰며 웃음이 납니다. 그리고 그 시간을 편지로 남기다뇨. 정말 재미난 일입니다. 지난 편지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는데 괜한 질문을 던져 두 번째 편지를 쓰게 되어 부담을 드린 게 아닌가 하면서도 편지를 쓴다는 건 꽤 재미난 일이어서 자주 펜을 들어보기로 했어요.
종종 글은 그 사람의 영혼을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글을 보며 글쓴이의 애처로움에 울기도 하다가 그가 지닌 화에 그만 책을 닫아버리기도 합니다. 지난 편지에서 저는 모자를 눌러쓴 감독님, 그리고 그 너머의 감독님의 어떠한 모습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마도 저희가 그 사이 잠시 만났기에 더 선명하게 감독님의 모습이 제게 남아있어서 그런 거 같습니다.
편지에 남겨주신 “누군가의 목소리”에 대해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상상해봤어요. 친구의 목소리, 아버지의 목소리, 무대 위의 목소리… 노력을 해도 저는 들리지가 않네요. 상상하려 해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편지를 쓰면서 갑자기 너무 슬퍼졌습니다. 한평생 들었던 목소리가 상상이 안 되다니. 들리지 않는다뇨. 이상한 일이에요. 소리는 들리지 않고 말을 하고 있는 입 모양만, 그들의 모습과 분위기만 떠오릅니다. 눈이 마주치고 저를 향해 웃어주었던 그들의 다정함. 그 포근함이 떠올라요. 어쩌면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립다는 건 그들이 건네주었던 다정함이 그립다는 말과 비슷한 감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처럼 떠오르지 않는 목소리는 다시 실제로 듣기 전까지 이 세상에 없는 사라질 누군가의 자취이기에 더 아름답고 소중한 소리 같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일은 이러한 순간을 만들어주는 일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반짝하고 사라질 순간을 만들어주는 것. 그 순간이 마치 영원처럼 느껴지게 하는 것.

세로로 긴 흑백의 이미지.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는, 파도가 치고 있는 바다의 한가운데다.

지난 감독님의 작업 <이런 밤, 들 가운데서>를 생각해봅니다. 꾹꾹 눌러 담아 최소한의 소리만을 넣은 그 고민을 생각합니다. 90분의 러닝타임이 저에게는 사라지지 않았으면 했습니다. 연대하는 순간이 있었고, 공유하는 시간을 서로에게 선물로 건네주었어요. 상실을 잘 받아들이고, 순간을 잘 보내는 일이 어딘가에서는 함께이기에 견딜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이요.
누군가를 잘 보내는 일은 제게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멀리서 보면 제 삶에 아주 잠깐의 순간일 텐데 어떤 이들은 너무 오래 그 자리를 버티고 있습니다. 끈질기고 구차하게요. 아련하고 서글프게도요. 시간이 간다는 건 그러한 사람들이 더 많이 제 기억 속에 남는다는 말이겠지요. 그래서인지 용기를 내는 사람들을 보면 울컥하는 마음이 들어요. 시간이 지나간다는 건 이러한 용기를 이곳저곳에 가득 넣어두고 하나씩 꺼내어 쓰는 일 같아요.
이번 겨울은 유독 빨리 왔어요. 모든 푸릇한 것들이 사라지는 이 계절은 자꾸 어디론가 숨어들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합니다. 누군가에게 숨어있는 불안이 잘 다스려지길 바라며, 따뜻한 모닥불과 같은 존재로 서로에게 의지가 되었으면 합니다. 곧 또 봬요.

지인 드림



[사진: 필자 제공]

  1. 김현숙, 「스쾃의 미학: 헤테로토피아와 정치」, 홍익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22, 123쪽.
  2. 기형도, 「종이달」,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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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

목소
듣기의 연습을 통해 ‘들리는 것’과 ‘듣는 것’에 대한 질문을 수행 중이다. <앨리스 인 베드>, <홍평국전>, <우리는 농담이(아니)야>, <스푸트니크> 등에 사운드 디자인으로 참여했다.
인스타그램 @morceauxx

송지인

송지인
무대를 고민하고 짓는다. 최근 다원 공연 <이토록 가깝게>에서 구성과 미술을 맡았고, <틴에이지딕>, <20세기 블루스>, <절창III> 에서 무대디자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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