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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두텁게 바라보면 보이는 것들

[연극인이 만난 사람] 박성원 X김소연

박성원, 김소연

제248호

2023.12.21

김소연
<지하철 1호선>이 마지막 공연을 향해 달리고 있네요. 올해 개막 후에 학전 폐관 소식이 알려졌지요. 소극장 학전에서 마지막 공연이 되겠다 싶어 그 현장을 지킨다고 할까? 기록한다고 할까? 그런 마음으로 극장에 갔던 것 같아요. 저는 초연 이후 오픈런으로 공연이 정리되는 과정도 봤고, 대극장 버전도 봤고, 원작 단체인 독일 그립스 극단의 내한 공연도 봤어요. 공연을 보기 전엔 다 아는 작품이라 생각했던 것 같아요.
박성원
네. 저는 이번에도 봤고 21년도에도 봤습니다. 학전과 <지하철 1호선>은 워낙 유명하죠.
김소연
공연 보기 전에 조금 우려되기도 했어요. 이 공연이 세태풍자적인 작품이다 보니 초연 이후 연출이나 대본이 계속 수정되었는데요. 지하철 잡상인의 노래 가사가 “UR 개방으로 손님들만 땡 잡어~”에서 “IMF 시대에 손님들만 땡 잡어~”로 바뀐다든가 한 거죠. 그러다가 2000년을 넘기면서 ‘1990년대 서울을 담은 이야기’가 되었거든요. 그리고 2008년 공연을 중단하면서 21세기 이야기로 새롭게 고쳐서 다시 올리겠다고 했지만, 2018년 공연을 재개할 땐 <지하철 1호선>은 20세기 서울의 이야기로 고정하겠다고 했죠. 그 소식을 들으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어렵구나’ 생각했어요. 10년을 두고 다시 오른 <지하철 1호선>에 대한 반응은 다양했어요. 여전히 재밌다는 사람도 있고, 역시 시대의 간극이 느껴진다고도 했고요.
흰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흰색 일인용 책상 여섯 개를 맞대어 두었다. 
            김소연, 박성원이 마주 보고 앉아 있다. 김소연이 양손을 들어 무언가를 말하고, 박성원이 그를 유심히 바라본다.
사실 초연을 볼 땐 김민기의 음악은 너무 좋은데 뭔가 시대의 뒤에 있는 사람들을 그린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순수의 표상 같은 선녀나 걸레, 안경, 곰보할매 등이 70년대 하층계급을 그리는 전형성으로 다가왔어요. <지하철 1호선>이 처음 오른 1990년대는 ‘X세대’와 같은 새로운 세대, 새로운 문화가 등장하는 등 사회정치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한 때였거든요. 그런 시대적 분위기와 거리감이 느껴졌죠.
그런데 이번에 오랜만에 다시 공연을 보는데 작품이 전혀 다르게 다가오는 거예요. 등장하는 인물들이 참 못난 사람들이잖아요. 예전엔 시대에 뒤처진 사람들로만 보였는데, 다시 보니 김민기라는 작가가 저 못난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애정이 있는지가 먼저 다가오더라고요. 이렇게 못난 사람들에게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게 하는 그 마음이 뭘까 생각하게 됐어요. 그리고 1998년으로 시대 배경을 고정한다는 것, 서울을 기록한다는 의미도 더 깊게 다가오더군요. 근데 제가 자신이 없는 것이, 이게 저라는 사람의 변화인 건지 작품에 대한 새로운 발견인 건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나와 다른 세대들은 이 작품을 어떻게 볼지 궁금했어요.
박성원
네. 저도 완벽하게 요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제가 고등학생이었던 2007년 당시에 <지하철 1호선>을 거쳐 간 유명한 배우들이 많다고 했던 기억이 나요. 2007년이나 2021년 공연을 볼 때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는데, 이번에 공연을 보면서 보기 힘들었던 장면들도 있었어요. 객석도 유심히 살펴봤는데 확실히 관객 세대에 따라 온도 차이가 나더라고요. 이 작품을 추억에 젖어 보시는 50~60대 분들도 계실 텐데, 그들이 보는 시선과 요즘 관객의 온도가 굉장히 다를 거라고 생각해요. 선생님은 극 중 인물들을 보면서 초연과 어떤 점이 가장 다르게 느껴지셨나요?
김소연
초연을 볼 때는, 걸레라는 캐릭터가 불편했어요. ‘걸레’라는 캐릭터의 이름부터 불편하죠. 2003년에 <지하철 1호선> 2000회 공연을 기념해서 이 공연의 원작인 독일 그립스 극단의 <Linie1>이 지금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됐는데 그때 썼던 리뷰 제목이 「베를린의 축제, 서울의 씻김굿」이에요. ‘걸레’는 원작의 두 인물, 지하철에 뛰어드는 마약중독자와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가난한 실직 소녀 두 인물이 합해져서 만들어진 인물이거든요. 원작에서는 마약중독자가 지하철에 몸을 던지고 그 때문에 지하철 운행이 중단되어서, 지하철에 있던 시민들이 격렬한 갈등을 벌여요. 그러다가 지하철에 몸을 던진 그녀나 여기 살아있는 우리들이나 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모든 ‘나’들은 외로운 존재라는 자각이 판타지처럼 펼쳐지면서 축제 같은 결혼식으로 마무리돼요. 반면 <지하철 1호선>에서는 걸레가 몸을 던지고 마치 이 외로운 영혼의 씻김굿처럼 고무줄놀이 영상이 나오면서 걸레의 장례로 이어지죠. ‘걸레’는 번안 과정에서 작가 김민기의 의식이 투영된 인물인데요. 걸레의 고무줄놀이 영상은 소외된 삶들에 대한 작가의 진혼가 같았어요. 이 시선이 70, 80년대 ‘민중주의적 시선’이랄까, 지식인의 민중에 대한 연민이랄까 그렇게 다가왔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번에 다시 보는데 그런 불편함이 상당히 걷히더라고요. 걸레가 선녀에게 “넌 너무 예뻐 울 때조차~”하고 노래를 부르는데, 그 노래가 자신은 갖지 못한 선녀의 순수함에 대한 선망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희망이 다 막혀버린 울고 있는 선녀에게 위로를 건네는 것으로 들렸어요. 마치 선녀를 위로할 수 있는 이는 걸레뿐인 것처럼요.
박성원
저는 제일 보기 힘든 장면이 걸레 장면이었거든요. 방금 말씀하신 걸레의 노래가 사실은 클라이맥스인데 저는 걸레의 선택을 미화시키는 것처럼 느꼈어요. 극의 형식도, 배우들의 앙상블도 좋아서 극을 표현하는 방법은 너무 좋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관객인 내가 이 극을 통해 현재 무엇을 느껴야 할지 의문을 가지고 극장을 나왔어요.
왜냐하면 앞에 나온 여성 인물들에 문제적인 시선이 있어요. 걸레도 문제지만 제일 이해가 안 됐던 건 사실 빨간바지였고요. 빨간바지의 성공신화는 이해되지만 결국 제비를 키우는 큰 손이고, 곰보할매도 시대의 전형적인 할머니 이미지를 도구적으로 쓴 것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옛날에는 되게 구슬프게 느껴졌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새롭게 보였어요.
김소연
저도 90년대 <지하철 1호선>을 볼 때 그런 점이 느껴지기도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 작품의 인물들은 정밀한 초상화라기보다는 캐리커처잖아요. 단편 단편의 특징을 잡아채서 빠르게 그려가죠. 사실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층민, 서민, 소시민이라고 할 수 있어요. 아무래도 연민의 시선을 갖게 되는데, 못나면 못난 걸 그대로 드러내요. 빠른 스케치에 자기 풍자적인 시선이 있죠. 그런 점이 웃음을 만들어내면서 연민에 빠지지 않게 거리를 만드는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연민을 자아내는 결핍이나 갈망이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 작은 욕심에 얽매인다든가,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서 공격적 모습을 보이기도 하거든요. 그게 한 인물에서 드러나기도 하고, 빠르게 이어지는 장면 장면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풍속도에서 드러나기도 하죠. 최근 연극을 보면 못난 사람들을 자꾸 무대에서 지워버리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뭔가 세상의 모습이 표백된 것 같다고 할까 그런 점들이 있어요. 반면 <지하철 1호선>은 못나면 못난 모습 그대로, 정당화하지도 않고 연민에 빠지지도 않고, 하지만 못난 대로 삶에 분투하는 모습을 그려낸다는 거예요. 90년대 뭔가 거대한 변화가 오고 있다고 왜 그런 변화를 이야기하지 않냐고, 왜 시대의 뒤에 있는 사람들 이야기를 하냐고 했던 때에는 제가 보지 못했던 것이 다시 보인다는 거죠.
박성원
말씀하신 작품의 풍자하는 방식, 그리고 인물들이 이 작품의 매력이라는 점에는 동의해요. 그런데 저는 그 시대의 풍자를 지금의 세대에게 전달함으로써 어떤 메시지를 주고 싶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풍자가 적절한가의 문제는 전혀 아니고요. 이 98년도의 이야기를 23년의 대학로 극장에서 보면서 시대를 관통하는 무언가를 느끼지 못했거든요. 세대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요. 저 스스로도 같은 작품을 가지고 시간을 두면서 봤는데, 이번에 새롭게 보면서 좀 더 회의적으로 봤던 것 같아요. 선생님께서 그 터널과 같은 역사를 이렇게 지켜보면서 발견한 어떤 새로운 의미들이 궁금하네요.
김소연
거리를 가지고 그 시간을 다시 보면서 지난 30년간 우리 사회에 무슨 일이 있었나 생각했어요. 여전히 밀려나는 사람들이 세상에 존재하는데 도리어 우리 연극은 그런 사람들 이야기에 관심이 없구나. 연극만이 아니라 정치도 그렇구나. 90년대의 ‘변화’라고 했던 것이 과연 우리 사회에 어떻게 남아 있나 그런 생각들을 했어요.
김소연. 턱 끝 정도 오는 갈색 단발머리에 투명한 테를 두른 안경을 썼다. 
            남색 맨투맨을 입고 파랑, 보라, 초록 등의 색이 그라데이션으로 섞인 머플러를 둘렀다.
김소연
박성원
요즘 뮤지컬과도 비교해보고 싶어요.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배우의 의상과 소품, 연기만으로 표현하는 방식이 근래 뮤지컬의 문법과는 달라서 낯설게 느껴졌어요. 요즘 대학로 소극장 뮤지컬에서 배우들이 이렇게 다양한 역할을 빠르게 전환하면서 담당하진 않잖아요. 멀티 역을 담당하는 배우들이 있긴 하지만요. 연기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사실 뮤지컬이긴 하지만 게스투스라고 하는 동작들이 여가 없이 보여서 풍자성을 훨씬 더 보여주는 것 같은데요.
김소연
아까 말씀드렸던 캐리커처 방식으로 인물을 그리는 것과 연관 있죠. 특징만을 요약해서 인물을 드러내면서 빈 채로 남겨두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더 강조되고 왜곡되고 희화화되죠.
박성원
네. 화술 변화뿐 아니라 걸음걸이 같은 신체 동작 변화를 통해 직관적으로 인물들을 보여줘서 빠르게 전환되어도 잘 따라갈 수 있었어요. 그런 세밀한 부분들에서 그 배역들을 맡아왔던 배우들의 역사가 스쳐 지나갔고요. 특히 직전에 어떤 역할을 맡았던 배우가 다른 장면에서 전혀 다른 인물을 연기한다는 것을 인지하게 될 때, 거기서 또 다른 새로운 재미가 생겨나는데요. 이런 부분들에서 내공을 느꼈던 것 같아요.
김소연
70대가 된 김민기 선생과 20~30대의 젊은 배우들이 함께 만든 거잖아요. 거기에는 지난 30년간 이 작품에 섰던 배우들이 만들어낸 것들도 배어 있고요. 그래서 공연을 보는데 이 무대는 30년의 시간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다고 지금 배우들이 선배들의 연기를 고스란히 재연한다는 건 아니에요. 예를 들어 선녀의 경우 이미옥 배우가 분했던 초연에서는 고음의 고운 목소리가 도드라져 비현실적인 느낌이 강했던 것 같은데, 이번 공연에서 서율 배우의 선녀는 땅에 발을 딛고 서 있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초연에서 권형준 배우가 안경을 분했을 때는 <서울의 노래>가 굉장히 냉소적으로 다가왔는데, 이번 공연에서는 그런 느낌이 확연히 약화되었고요. 이렇게 인물 하나 하나 노래 하나 하나가 다르게 다가오는 것이, 저는 배우들의 세대가 달라지면서 인물에 대한 배우들의 해석에 변화가 스며들어서인 것 같아요.
박성원
그건 저도 동감해요.
김소연
안경도 초연 때는 불편한 점이 있었어요.
박성원
안경은 20년, 30년 전에는 훨씬 더 피부에 와닿는 인물이 아니었었나요?
김소연
다들 안경이 위장한 운동권 학생이라고 믿잖아요. 80년대에는 사회 변혁에 투신한다면 당연히 노동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냥 룸펜처럼 흘러 다니는 인물이 운동권이라고 그려지는 게 불편했죠. 그런데 그때로부터 30년이 흐른 지금 돌아보면 사회 변혁에 투신한다고 했던 사람들이 그 경력으로 권력을 얻잖아요. 그 경력으로 수십 년 국회의원을 하고 대통령도 되고요. 초연 때는 우리가 변혁을 위해 열심히 싸우는데 독설을 퍼붓고 있냐는 불편함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30년이 지나고 나니 안경의 이야기가 독설인 것이 아니라 그냥 우리 모습으로 받아들여지더라고요.
박성원
30년의 시간차를 두고 같은 작품을 보시면서 달라진 점은 또 없나요?
김소연
비평가로서 동시대성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그 동시대성이라는 게, 그런 어떤 시대의 표지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라는 것도 굉장히 여러 시간들이 복합적으로 막 뒤섞여 있죠. 그런데 우리가 동시대성이라는 말로 우리 시대의 여러 다층적인 시간들을 소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시간의 소거는 삶을 소거하는 것이죠. 서로 다른 시간에 살고 있는 또 다른 삶을 지우는 거잖아요. 삶의 양태를 지우는 것일 수도 있고 어떤 목소리를 지우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90년대에 봤을 땐 이 작품이 시대의 뒤편에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면, 지금 다시 보면서는 ‘그래, 그 시대에 저런 삶이 있었지’라고 받아들이게 되는 거죠. 사실 동시대성이라는 건 굉장히 두터운 것이 아닐까 다시 생각하게 되었어요. ‘이 못난 사람들의 이야기도 우리 시대의 삶인 거야’라고 받아들이면서.
박성원
그게 그렇게 포용하고 넓어지는 것이 관록일까요?
김소연
타협이고 보수화되는 걸 수도 있죠. 항상 그걸 경계하면서 두터운 시간을 사유해야 하는 건 저 같은 중년 평론가의 의무이고 역할인 것 같아요. 저는 평론가이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의 시민으로 살아왔잖아요. 그 시간이 제 몸에 쌓여 있고 그러니까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그리고 평론가로서 작품을 다르게 보는 것이겠죠.
박성원
공연을 보면서 ‘저런 시절도 있었지’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지난 시절의 이야기가 가진 장점이 있을 거고, 고전도 계속 읽히는 이유가 있을 텐데요. 2023년의 제가 아직 그 의미를 발견하진 못했지만, 나에게 와닿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도 와닿지 않을 거란 법이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이 공연이 이렇게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 데에는 분명한 힘이 있었다고 봐요. 그 첫 번째 힘은 배우일 것 같고, 두 번째 힘은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못난 사람들에 대한 시선인 것 같아요. 그 못난이들을 부러 아름답게 표현하는 어떤 깊이에 저도 동감했고요. 못난이에 대한 그런 내용을 알고 봤더라면 좀 덜 예민하게 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박성원. 가슴께에 오는 갈색 생머리를 늘어뜨렸다. 검은 브이넥 니트를 입었다.
박성원
김소연
‘학전이 문을 닫는다. 어쩌면 마지막 공연일지도 모른다’는 기사를 접하면서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어요. 저도 그런데 김민기 선생님 자신은 또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고. 물론 표정도 달라지지 않으시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마지막 공연이 될지도 모르는데 <지하철 1호선>의 가장 빛나는 성취를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안 생길까 싶었어요. 그런데 이번 공연도 똑같이, 학전이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 그대로 오디션을 통해 배우들을 다시 꾸리고 그렇게 올리더라고요. 학전에 대한 기사들에서 지금은 반짝반짝 빛나는 스타들의 이름을 쭉 나열하면서 <지하철 1호선>을 ‘배우사관학교’라고 말하는데, 그렇게 한 줄로 담길 수 없는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그 수많은 시간 동안 배우들을 새롭게 모집해서 리허설을 하고, 시즌을 올리는 과정을 계속해서 해내왔고, 마지막까지도 지금까지 제작해 왔던 방식 그대로 해서 올리잖아요. 98년의 이야기를 이 젊은 배우들이 2023년에 관객들에게 건네주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대본을 고쳐 쓰는 것만 새롭게 쓰는 건가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새로운 배우들을 만남으로써 사실은 새로운 세대들과 계속 작업을 하는 거잖아요. 이렇게 새로운 배우들과 계속 새롭게 시즌을 꾸리는 것 자체가 사실은 끊임없이 <지하철 1호선>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과정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어요. 1991년 개관한 학전 소극장은 30년이 넘도록 대학로에서 운영을 지속해왔어요. 30년 동안 대학로도 굉장히 많이 변화했는데, 끊임없이 새롭게 써오신 거잖아요. 지금 몇 마디 말로 그 일이 어떤 작업인지 설명하거나 분석하기는 사실 어려울 것 같아요. 학전의 30년이라는 시간과 같이 생각해보면 그게 그냥 거기 있는 것 자체가 놀라운 분투라는 생각이 들어요. 김민기 선생님이 말로 설명하지는 않지만 엄청나게 강건한 실천가인 거죠.
박성원
지금껏 해오던 방식대로 그대로 새롭게 만들어 나가신다는 건 진짜 뚝심이라고밖에 생각이 안 드네요.
김소연
자기 성찰과 자기 시선이 있기 때문에 새롭게 프로덕션을 꾸리고 계속될 수 있었겠죠. 장기 공연이라든가, 초기의 열광은 당대 문화적 트렌드와 교차점이 있었던 것이고. 김민기는, 물론 원작의 음악이 있지만, 한국에서 극음악으로는 빼어난 작가죠. 김민기 뮤지컬이 <모스키토>, <의형제> 등 번안 뮤지컬만 있는 게 아니라 어린이극 외에도 <개똥이> 등이 있거든요. <개똥이>는 여러 차례 공연되었는데 연출적으로 완성이 안 되었죠. 하지만 음악은 정말 좋아요. 그래서 저주받은 걸작이랄까. <개똥이>는 오롯이 김민기의 작품이어서 노랫말과 음악에서 김민기의 시선이 더 잘 드러나죠. 이 작품이 끝내 완성되지 못하나 싶어 안타깝네요.
학전 음악극에서 정재일 작가의 역할도 기억해야 할 것 같아요. 음악감독을 계속 맡고 있죠. 이번 공연도 초연이랑 음악이 달라요. 초연 무대에는 키보드, 드럼, 기타 등이 있었던 것 같은데 여기에 바이올린과 아코디언이 들어오면서 노래의 색깔이 달라졌어요. 물론 다른 배우가 부르기 때문이겠지만, 음악의 양감도 풍성해진 것 같아요.
박성원
이번 공연에서 무임승차 밴드의 라이브도 대단했죠.
시대의 최전선, 유행의 최전선에 있는 것들 위주로 봐 오다가 <지하철 1호선>의 인물들을 보는 순간 ‘싫은 건 아닌데 왜 이렇게 감각이 다르지?’ 하는 생각을 했거든요. 그 다른 감각에서 오는 분명한 매력들이 있고요. 아름답고 멋진 이야기와 인물들 위주로 보다가 못난 인물들 위주로 봐서 그런지도 모르겠어요. 이제는 그 감각들이 사라진다니 아쉽기도 하고요. 물론 그 감각을 적극적으로 응원하고 동감하는 것은 아니지만요. 못난 인물들이 만드는 해피엔딩이 아니어서 그런지 더 생경했던 것 같아요.
김소연
아마 이 작품에 대해 저와 다르게 보고 느끼고 읽는 관객들도 있겠죠. 김민기에 관심 없을 수도 있고 <지하철 1호선>이 별다른 울림을 주지 않을 수도 있죠. 그런데 저는 이렇게 오랜 시간을 건너오는 작품을 통해서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해요. 연극하는 사람들 그리고 관객들이 이 작품을 가지고 다양한 이야기를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이 작품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은 것, 제가 말한 오랜 시간을 건너온다는 것이 이 작품의 권위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에요. <지하철 1호선> 출신의 스타가 누구인지 몇 명인지, 얼마만큼의 관객을 동원했는지 등등은 그냥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이죠. 비평가로서 우리의 삶과 연극에 대해 시간을 두텁게 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작품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어요.
박성원
시간을 두텁게 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작품이라는 말, 다른 작품 볼 때도 마음에 간직해두어야겠어요. <지하철 1호선>만큼 시간을 두텁게 놓고 볼 수 있는 작품이 계속 계속 생겨났으면 좋겠습니다.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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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원

박성원
연기와 연극학을 전공했지만 지금은 문화예술교육가로 산다. 보고 쓰고 하는 것 사이를 부유하고 있다. 요즘엔 연기비평에 관심이 많다. 인스타그램: @support.park_, acturg_sw@naver.com

김소연

김소연
연극평론가. [문화정책리뷰] 편집장. 좋은 공연을 함께 보기 위해 글을 쓰고 잡지를 만든다.
인스타그램 @sweetdream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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