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편지는 연극에서 시작되어]는 두 편지글로 이루어진 대화입니다.
사운드 디자이너 목소가 누군가에게 보낸 편지, 그리고 그 누군가로부터 도착한 답장을 함께 싣습니다.

기사의 제목인 “***_***.wav”는 두 필자가 제목으로 선택한 말들을 나란히 놓고, 사운드 파일의 확장자를 붙인 형태입니다. 서로는 서로가 어떤 말들을 선택했는지 모르고, 기사의 제목은 편집부가 그 말들을 수신할 때 완성됩니다.

매서운 추위가 누그러지고, 이제야 새로운 해로 미끄러져 들고 있는 기분입니다. 사실 학기가 시작되는 3월에야 한 해를 시작하는 생활이 제겐 아직도 익숙한 것 같습니다. 지원금에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는 지금도 연간 일정이란 대체로 비슷한 모양새긴 하지요. 봄을 기다리며, 불안한 비수기를 자박자박 걷고 있어요.
한 해를 미리 넘겨보면서 시간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미셸 투르니에의 소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의 한 구절을 문득 떠올렸습니다.

“나의 날들은 새롭게 정리되었다. [...] 날들은 서로가 비슷해져서 내 기억 속에서 정확하게 서로 포개어졌다. 나는 똑같은 날을 끊임없이 다시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지난 십여 년은 저에게 너머가 보이지 않는 숲속에서 나무들을 매만지며 걷는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회의와 연습, 셋업, 공연 등으로 명찰만 달리한 채, 날들은 달력의 낱장들처럼 각을 맞춰 내내 똑같이 포개어지곤 했습니다.
그러나 화천에서의 시간은 조금 달랐습니다.
그때 그곳에서는 모두가 저를 모르고 저조차도 저를 잘 알지 못했습니다. 물론 연희 배우님을 포함해 그 전부터 작업을 통해 친분을 맺어온 이도 여럿 있었지만, 그 시간 동안 저는 직업도 호칭도 지워진 채 그저 ‘목소’로 머무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제게 친숙한 관습적인 감각과 의미망에서 벗어나 그 순간에 머무는 훈련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미처 알지 못했던 단위의 감각들을 함께 탐색하는 일이었으며, 단지 큰 그림으로서의 숲이 아닌, 삶 그 자체를 통과하는 몸이라는 숲을 바라보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언젠가 주고받은 메시지에서 연희 배우님이 어떤 ‘시간’을 믿으신다고 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바삐 일하고 있는 시간도, 고여 있는 시간이나 또 그걸 견디고 있는 시간도 결국은 언젠가 다 드러날 거라고 말씀하셨죠. 저는 아주 구불구불한 시간을 지나왔는데, 모두가 제 안에 생생히 살아있음을 많은 순간 느끼곤 합니다. 그 시간들이 잠재적인 것으로 남아 미세 지각 단위의 다양한 선택을 부르고 또 다음으로 연결되는 걸까요. “퍼포머가 무대 위 한 순간에 감각하는 수많은 자극들 중에 왜 그것을 선택하고 왜 또 그 움직임을 행하게 되는가”1)란 질문은,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행동에 있어서조차 쉬이 강박에 사로잡히고 마는 저에게도 늘 중요한 화두였던 것 같습니다.
처음 즉흥수행 워크숍을 소개하면서, 연희 배우님이 “나로서 존재할 수 있었던 시간”이라고 표현하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화천에서 만난 ‘연희’는 제가 만나온 연희 배우님과 다른, 조금 더 ‘그곳’에 있는 사람 같았어요. ‘연희’를 생각하면 어떠한 시점에 온전히 존재하며 그것을 바로 응시하고 고요히 눈과 손으로 옮기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저에게 “나로서 있다는 것”은 그 시간 그곳에 있는 일 같기도 합니다. 늘 먼 곳을 꿈꾸지만 먼 곳을 삶으로 데려와 사는 일은 힘이 들지요. 언제나 그 순간에 발생하는 공연의 시간 속에서만 오직 저는 저로서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올해는 또 어떤 시간이 이어질까요. 우연의 필연성을 긍정하며, 조금 더 현재에 존재하기를 연습하고 싶습니다. 돌아올 편지를 기다리며 ‘연희’의 시간에도 귀를 기울여 봅니다.

2024년의 초입에서, 목소 우정인 드림

[시선이 노트북에서 창문으로 옮겨지고 한참 동안 가만히 있다.]

‘편지가 올 거야’라는 예정된 미래. 최근 몇 년 동안 ‘미래’ 시제에 설레임을 가진 기억이 없었는데 고마움을 가장 먼저 전하고 싶습니다.

목소에게 받은 편지를 어떤 시간, 어떤 공간에서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나와 나에서 ‘사이’를 느끼며 경계가 저의 자리인 것을 인정한 것 같습니다.
스스로 선택한 ‘고-오-독’은 다른 방법은 몰라 선택한 것이었는데요.
이상함을 느낀 세상에서 오히려 이상한 사람이었던 제가 목소의 글에선 ‘연희’로 존재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화천_예술텃밭에서 ‘목소’의 빛나던 여러 찰나를 기억합니다. 어떤 수식어를 붙이면 그 순간이 평평해지는 것 같고, 힘을 잃어버리는 것 같아, 저와 같은 문자언어 무능력자는 그 ‘순간’을 표현하는 데 두려움이 있습니다.
창작진으로 만나던 목소 감독님.
화천_예술텃밭에서 만난 (목소목소목소목소목소목소목소목소목소목소2)) ‘목소’.
처음 보던 몸의 움직임(몸짓), 어떤 빛나는 순간들에 참으로 놀라웠던 것 같습니다.
워크숍에서 돌아와, 저는 음… ‘목소’의 어떤 시간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소곤거림) 아..저는 정리와 인지가 많이 느린 편이라서요!!3)
그중에는 목소의 표현인 ‘구불거리는 시간’도 연결되어 있을까요? 왜냐하면 목소 감독님에서 ‘목소’로 만나기까지 꽤 오래된 시간 속에서 ‘<사심으로 즉흥수행>4)에 참여하고 싶다’는 연락을 직접 주신 바로 그날이 강력하게 생각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3박 4일의 일정 동안 잠깐의 여유도 없이 바쁘게 프로그램이 진행되었으나, 화천_예술텃밭이라는 공간에 기대어, 공감하며, 교류하는 ‘목소’와 모든 게 빠름과 최적화를 기준으로 진행되는 서울에서의 목소 감독님 사이에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미 어떤 바라봄을 하고 있고, 방법을 찾고 있는 혹은 이미 찾았을지도 모를 목소.

저는 발견과 변화는 같은 행동을 유발하는 단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혼재되어있고 뭉개져 있는 영역에서 오르락내리락거리는 구불거림의 탄력성으로 변화지점에 도달하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는 단어.

안드리 스나이르 마그나손의 『시간과 물에 대하여』에서는, 『순록의 나라』를 출간한 헬기 발티손의 여정을 따라갈 수 있는데요. 헬기 발티손이 어떤 ‘곳’에서 적은 문구를 인용하며 시간이 지난 후 ‘그곳’, ‘어느 곳’에서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발췌한 문구를 공유하고 싶습니다.

​밤은 고요하고 평화롭고 생생하고 순수하며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는다.
마치 바깥세상과의 물리적 연결이 모두 끊어진 것처럼, 침묵, 그리고 만물을 아우르는 밤의 정적에 둘러싸인 채 영혼은 홀로 자신을 찾는다.5)

그 고요에 당신은 침묵하고 귀를 기울인다... 당신은 매혹당한 채 제 영혼의 숨에, 오랫동안 잊었던 이 정수에 주의를 기울인다. 이곳에서 당신은 처음으로 당신 영혼의 무량한 넓이를 감지한다. 가만히 서서, 자기 영혼의 거룩함에 대한 말 못 할 경외감에 사로잡힌 채 깊은 침묵 속에서 놀라는 것이다. 6)

저는 언제부터인지 시간에, 공간에, 사물에, 사람에 기대어 사는 것 같습니다.

헤헤~

이 시각, 어느 곳에서 온전히 계시길 바라며
2024년 2월 22일 연희 드림

[사진·영상: 필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