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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이후 10년, 같이, 연극

[연극인이 만난 사람] 김순덕 X 김태현 X 백송시원 X 송김경화

정리_연극in 편집부

제251호

2024.03.28

일시:
2024년 3월 17일 14시-16시

장소:
서울연극센터 3층 스튜디오

어떻게 연극으로 세월호를 말할 수 있을까

태현
안녕하세요. 저는 세월호 어머님들과 함께 연극을 만들고 있는 4.16가족극단 노란리본의 연출가이고요. 김태현입니다.
순덕
저는 보통 저를 이렇게 소개하는데요. 2014년 4월 16일 생존학생 2학년 1반 장애진 엄마 김순덕입니다. 4.16가족극단 노란리본 단원이기도 하면서, 현재 가족협의회 재정사업단 4.16기억상점 실무를 맡고 있어요.
태현
4.16기억상점이라고 어머님들이 만든 공예품, 가족분들이 직접 생산하는 여러 세월호 굿즈들을 판매하는 곳이에요. 가족협의회의 재정적 후원을 하는데 작년에 무려 8천만 원의 후원을 만들어냈습니다.
시원
안녕하세요. 저는 아동청소년의 대표 배우를 맡고 있는 백송시원이라고 합니다.
경화
사람들이 알고 있을까요? 시원 님이 대표 배우인지? (웃음).
순덕
그 아이가 이렇게 컸다니요!
태현
우리 그때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에서 공연 봤었는데! (웃음).
경화
네, 저는 낭만유랑단에서 글 쓰고 연출하는 송김경화입니다.
태현
송김경화 님과 백송시원 님께서는 특별히 세월호 10주기를 맞아 안산에서 열리는 <4월 연극제>에 작품으로 오시기로 되어 있어요. 벌써 티켓이 매진되었더라고요.
경화
좌석을 조금만 열어서요(웃음). 대신, 3월 말에 책이 나옵니다. 『2014년 생』!
태현
(웃음). 그럼 오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열어 볼게요. 낭만유랑단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세월호 이전에도 각자의 자리에서 연극을 해왔던 경험들이 있는데 송김경화 연출님은 세월호 이후에 어떤 활동들을 해오셨나요?
경화
저는 2015년부터 2018년까지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에서 6기 동인들과 세월호 기획초청공연을 올렸어요. 매년 주제를 바꿔서 했는데 이번에 다시 찾아보면서, 아니, 이런 생각을 했단 말이야! 하면서 놀라기도 했습니다. 2015년에는 “세월호가 우리에게 무엇이며 세월호를 통하여 우리는 무엇을 볼 것인가”를 주제로 작품을 구성해봤었고요. 2016년에는 “세월호 이후의 연극은 무엇이며 극장은 어떠해야 하는가”, 그리고 2017년에는 “세월호로부터 파생, 상상될 수 있는 연극적인 이야기”들을 모아보자, 해서 작가분들을 모셨어요. 그전에는 연출분들이랑 극단만 초청했는데, 작가분들이 글을 쓰고 팀을 꾸리는 방식으로 하게 된 거죠. 2018년에는 고전 희곡, 문학, 철학 텍스트 등을 원작으로, “세월호 이후 우리의 세계는 재구성되었다”라는 주제로, 세월호 참사를 통해 기존의 원작들이 어떻게 우리 안에서 재해석되고 재구성될 수 있는지를 고민했고요. 2016년에 노란리본 창단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2017년 세월호 기획공연에 초청하게 되었어요.
태현
맞아요, 2017년 여름에 <이웃에 살고 이웃에 죽고> 초연을 혜화동1번지에서 했죠.
순덕
그전에, 극단에서는 <그와 그녀의 옷장>을 했고요.
태현
2016년에서 2017년 1월, 블랙텐트 정도까지 했나요?
경화
네! 제가 블랙텐트에서 노란리본 담당 무대감독이었어요! 그래서 혜화동1번지에서도 노란리본을 담당했지요. 사실 혜화동1번지 동인 작업을 계속하면서도 세월호를 어떻게 이야기하면 좋을까 막막했었는데요. 그때가 참사 1주기였으니까, 무대에서 무언가를 재현한다는 게 가능한가 싶었던 거죠. 4년의 기획공연 동안 적극적인 창작자보다는 기획자로 있었어요.
태현
재현할 수 없겠다는 표현을 하셨는데, 말하자면 참사를 관객들이 직접적으로 읽을 수 있도록 만들긴 어렵겠다, 이런 얘기일까요?
연출가 김태현. 웨이브가 들어간 짧은 머리에 검은 테의 안경을 썼다. 검은색 줄무늬가 들어간 흰색 니트를 입었고, 오른쪽 손목에는 노란색 팔찌를, 왼쪽 손목에는 시계를 차고 있다.
김태현
경화
맞아요. 세월호 참사는 모두가 알고 있는데, 무대에서 어떤 다른 이야기를 할 것인가, 그걸 찾기가 어려웠던 거죠. 그리고 당시에는 서로 만나기도 어려웠잖아요.
태현
가족들을 만날 수 있는 통로도 없고, 서로 간의 마음의 준비도 안 된 상태였으니까요.
경화
찾아보니까, 세월호 기획공연 하기 전에 동인들이 가족협의회에 연락을 드려서 허락을 받았더라고요. 기사에 나와 있는 걸 보고 알았어요. 아, 우리가 연락을 드렸고 허락을 해주셨구나.
태현
2015년이 첫해였죠? 참사 1년 후부터 바로 한 거네요, 연락드려서 허락도 받고요.
경화
첫해에 워크숍도 만들어서 어머님들이랑 같이 단원고도 가고 기억저장소도 가고. 그러면서 도연 님, 주희 님도 만났고요.
태현
도연 님, 주희 님이 <2014년 생>1)에 나오는 생존자들이죠? 시원 님 <2014년 생>이라는 작품을 어떻게 시작하게 됐어요?
시원
주희 언니랑 도연 언니를 보고 그냥, 이런 공연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의 존재를 잊지 않고 기억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요. 사람들이 이걸 잊으면 안 될 것 같은 마음, 그러면 돌아오지 못한 언니 오빠들이 속상해할 것 같고, 나는 기억 속에 없는 존재구나 생각할 것 같은 느낌.
태현
너무 귀한 마음이네요. 고마워요. 생존해서 온 언니들을 만나면서 결심이 생겼군요.
경화
시원 님 덕분에 앞으로 세월호 참사를 계속 말할 수 있겠구나, 하는 큰 힘이 생겼어요. 이제부터 이 이야기를 무대에 올릴 수 있겠다, 하는 계기가 된 거죠.

공존의 힘, 노란리본의 연극

순덕
저는 세월호 이전에는 그냥 회사 다니는 엄마였고, 신랑은 노동 활동을 하는 노조위원장이었지만 제가 거기에 깊게 빠져 있지는 않았어요. 집회 가면 멀리 도망가있고, 다가서지 않는 사람이었거든요. 중요한 일을 하는구나, 노동자를 위해서 일을 하는구나, 생각하고 있다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면서 저도 뭔가를 하고 싶었지요. 근데 유가족 부모님들한테 쉽게 다가설 수가 없더라고요. 그 당시에는 유가족분들이 생존자 부모님들도 쉽게 보고 싶다는 얘기를 안 하셨어요. 애진이한테도 안 보고 싶다고 얘기하시는 분이 있었고요. 그런데 신랑은 당연히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서 계속 두드렸던 것 같아요.
이전에도 얘기했던 적 있는데 처음에는 유가족분들이 뭘 바라고 오느냐, 막기도 하고 외면도 하고 의심도 하셨고요. 시간이 좀 지나면서 어떤 진정성을 보면서 받아들이셨던 것 같고, 그때 저도 뭔가를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더라고요. 동수 엄마를 만나면서 조금씩 달라졌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수요일이면 광화문 천막 지킴이를 간 거죠. 수인 엄마, 동수 엄마, 그때는 7반 엄마들이었는데요. 사실 여자아이 희생자 엄마들이 여자아이 생존자 엄마를 마주하는 걸 힘들어했어요. 근데 남자아이 엄마는 좀 괜찮았던 거죠. 그래서 제가 갈 수 있는 틈이 열린 거예요. 그렇게 광화문 지킴이를 했는데, 그때 동수 엄마는 이미 연극을 하고 있었죠. 저한테 스태프나 할래? 하면서 들어오라고 해서 연극을 하게 됐어요.
태현
맞아요. 그렇게 노란리본에 들어오신 거죠. 근데 우리는 그때 앉아서 리딩할 때니까, 아직 스태프 역할이 필요한 시기가 아니라서 같이 리딩하시죠, 이렇게 됐어요. 그때가 2016년 3월이었네요.
순덕
그래서 7월에 올라가는 <그와 그녀의 옷장>에서 15초짜리 용역 깡패 역할을 했는데요. 얼마나 열심히 했던지 집에 오니까 청바지가 찢어져 있더라고요. 내 속에 연기자의 피가 끓고 있었는지(웃음), 아, 내가 엄마들하고 이것도 함께할 수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태현
사실 참사 직후에는, 마음은 너무 옆에서 같이 하고 싶은데, 혹시라도 나의 존재 자체가 유가족 엄마들한테 주는 상처가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우려가 있었을 것 같아요.
순덕
진짜 복잡했어요. 연극 연습을 하러 갈 때도 보이지 않게, 희생 학생 엄마들이 나를 보는 걸 힘들어해서 저도 상처를 받았어요. 내가 아이 이야기를 한다거나 하면 순간 말할 수 없는 어떤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나한테 많은 말들을 던지시기도 했고요. 근데 사실 지금은 그 엄마랑 너무 친해요. 나도 상처를 받긴 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는 거죠. 만약 나였다면 어땠을까, 이렇게 되새겨 보면서요. 내가 당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게 당연히 있으니까요. 내가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너무 아파서, 아직은 그 아픔을 어떻게 할 수 없어서 그렇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지금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더 많이 의지하고 있어요.
배우 김순덕. 굵은 웨이브가 있는 머리가 가슴께까지 내려온다. 카키색과 베이지색의 잔 체크무늬 재킷에, 안쪽에는 흰색 셔츠와 아이보리색 니트를 입었다. 오른 손목에 노란 팔찌를 하고 있다.
김순덕
태현
지금 그 엄마는 순덕 배우님 없으면 안 되죠(웃음). 근데 피케팅이나 도보행진이나 이런 것들도 함께 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인데, 연극이라는 걸 하면서 생존 학생 엄마와 희생 학생 엄마가 더 아프게도 부딪혔고, 더 깊이 있게 하나가 될 수 있는 과정을 겪었어요. 연극이라는 매체가 그렇게 만들어 준 거죠.
순덕
맞아요. 연극이라는 게 무대에 올라가면 내 감정만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상대 배우를 배려해야 하는 게 많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좀 힘든 과정이 있더라도 무대에 가서는 그걸 다 받아들이게 됐던 것 같아요. 그리고 내가 배우이기 전에 누구 엄마고, 세월호 참사 피해자 가족이고, 이 연극 자체가 그걸 알리는 거였으니까요. 어쩌면 피케팅 하면서 열 마디 하는 것보다 연극을 보여주는 게 더 큰 힘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태현
상처를 많이 받는 건 필연이었죠. 그런데 힘든 과정일 수밖에 없었지만, 노란리본이 생존 학생 엄마와 함께하는 극단이라는 게 되게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순덕
연출님의 그 말 때문에 하기도 했어요. 보통 어느 단체에 가도 유가족이 생존자와 같이 있는 경우는 없다고 하셨거든요. 그리고 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의 전체 이름이 ‘사단법인 4.16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을 위한 피해자 가족협의회’거든요. 보통 유가족협의회, 생존자협의회가 있는데, 피해자 가족협의회는 생존자와 유가족을 모두 포함하잖아요.
태현
그 자체가 공존의 표현이네요.
순덕
네, 어쨌든 저는 여러모로 고민이 많았는데 김태현 연출님 말이 맞았어요. 내가 나서지 않으면 생존자 아이들도 잊힐 수 있고, 아이들이 아직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자기가 뭔가를 하고 싶더라도 할 수 없는 경우가 많고, 아이는 하고 싶은데 부모가 하지 말라고 막는 경우도 있겠더라고요. 내가 가족협의회, 가족극단에 있는 이유도 내 아이의 친구 엄마 아빠들과 함께할 수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또 이렇게 하다 보면 내 아이에게도 언젠가는 뭔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예요. 자기 몫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거죠.
태현
어머니가 연극을 지속하니까 관객들도 연극을 보면서 살아 돌아온 아이들이 있다는 걸 생각할 수 있는 거죠. 제 이야기를 조금 해보자면, 저는 안산에서 연극을 하던 사람이었어요. 안산 지역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공단이 있으니까 노동자들 이야기로 연극을 하기도 했고요. 4.16 그날도 별무리 극장에서 셋업을 하고 있었거든요. 안산에서 연극 활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뭘 해야 할까, 라는 질문이 쏟아지던 땐데, 일단은 조심스러웠죠. 당시에 가족분들이 광화문에서 이런저런 활동을 하셨는데, 공연을 준비해주신 분들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가족들이 보기에 너무 힘든 공연이 있었어요. 실제 교복 입은 학생들이 허우적대는 장면이 있어서 문제가 되기도 했고요.
그래서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는데, 그때 안산 지역의 민담 설화를 바탕으로 동네 아이들하고 그림책 만들기를 하고 있었거든요. 「별망부인」이라고, 안산이 어촌이니까 고기를 잡으러 나간 남편을 기다리다 산이 된 부인 이야기였어요. 그 이야기의 남편을 아이로 바꿔서 연극으로 만든 게 2014년 9월이었어요. 이런 방식으로 세월호 이야기를 연극으로 할 수 있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2015년 가을쯤 연락을 받은 거예요. 세월호 엄마들이 연극을 하고 싶어 한다고요. 사실 처음 만났을 때 그런 건 아니었고(웃음), 그때부터 설득을 한 거죠. 그래서 같이 대본을 읽고 하다가 2016년 상반기에 <그와 그녀의 옷장>을 올리게 됐어요.
사실 엄마들하고 연극을 시작하면서 세월호 얘기를 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이왕이면 희극을 하고 싶었고요. 엄마들이 무대에서 신나지 않으면 관객들이 엄마들의 연기를 못 보지 않을까, 싶었던 거죠. 실제로 희극 대본을 리딩할 때 엄마들 표정이 너무 보기 좋았어요. 2015년, 2016년이면 아직 참사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였는데 막 웃어젖히는 거예요. 그리고 작품 자체의 이야기가 공감대를 많이 만들어내기도 했고요. 다들 반월공단 회사 경험이 있으니까 자기 이야기였던 거예요. 그렇게 공연을 만들면서 점점 가족 곁에서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에 대한 고마움을 떠올리게 됐고, 그들을 위로하는 작품을 해보자, 이렇게 나아가게 됐죠.

시원, ‘촛불을 들었던 시민’이라는 말에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킨다.
경화
시원 님도 촛불 들고 많이 갔어요.
태현
맞아요. 시원 님도 엄청 왔지요(웃음). 사실 <그와 그녀의 옷장>은 원작을 하나도 안 고치고 했는데, 그 내용이 세월호 엄마들하고 만나는 지점이 있었어요. 예를 들면 공연에서 한 여성 노동자가 이 조끼 1년째 입고 있다, 이런 대사가 있었는데요.
순덕
(갑자기 연기한다) “때로는 이놈의 조끼가 지긋지긋할 때도 있어요, 다른 여자들처럼, 예쁜 옷 입고 하늘하늘한 원피스 입고 친구랑 애인이랑 놀러 다니고 싶은데 1년 내내 이 조끼만 입고 있는 게 너무 원망스러울 때도 있어요.” 이 대사가 정말로, 당시 가족들이 피케팅하고 그럴 때의 이야기였어요.
태현
우와, 정말 배우네요. 호흡을 제대로 쓰셨어요. 하하. 아무튼 그 이후에 <이웃에 살고 이웃에 죽고> 작품부터 조금씩 희곡을 각색하기 시작했어요. <장기자랑>에서는 완전히 우리 얘기로 가보자, 해서 <기억여행>, <연속, 극>까지 오고 있는 거예요.

가족들의 여정, 어린이청소년의 눈으로

시원
<기억여행> 오늘 아침에 영상 보고 왔어요.
경화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 <기억여행>이기 때문에(웃음). 시원 님은 세월호에 대한 연극이라고 하면 노란리본 엄마들의 공연을 봤잖아요. 다른 공연은 본 적 없어요. <기억여행>이랑, <장기자랑>, <이웃에 살고 이웃에 죽고>, <연속, 극> 이렇게 봤어요. 시원 님과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 뭔지, 공연 사진들을 찾아보다가 그게 <기억여행>이라는 걸 확인했어요. 그 공연 영상을 오늘 아침에 보고 온 거죠. 다시 보니까 어땠어요?
시원
한 번 더 보니까 더 생생하고 뭔가 그 현장에 있는 것만 같은 느낌도 들었고. 영상을 보면서 공연을 봤을 때의 기억이 막 뒤섞여서 생각이 나고요. <기억여행>에서 영만 이모가 노란리본 역할을 했는데요. 처음에 혼자 등장할 때 행복한 노란리본 연기를 했지만, 마음속에서 슬픔이 느껴졌어요. 그래서 더 슬프고 감동 받았던 것 같아요.
배우 백송시원. 검은색 줄무늬가 들어간 흰색 티셔츠를 입었다. 목에 노란색 꽃무늬가 들어간 손수건을 두르고 있다. 양손을 턱 아래쪽에 모아 잡고 웃는 얼굴이다.
백송시원
경화
좋아하는 장면들, 인상적이었던 장면들 얘기도 해주세요.
시원
그거, 이모가 이거 빡 하는 거.

시원, 세운 무릎 위에 투명한 파일을 놓고 반으로 쪼개는 동작을 한다. 일동 웃음.
태현
납골당 반대한다, 이런 피켓 들고 있다가 무언가 깨닫고 피켓 부러뜨리면서 나가는 장면!
경화
순범 이모 연기하는 거 보면서 했던 얘기 있잖아요.
시원
정말 꼰대 같다, 히히.
경화
이모는 참 꼰대 연기를 잘하는 것 같다, 라고 하더라고요. 왜 빨갱이라고 하는 거야? 당시에 시원 님이 공연을 보면서 그런 얘기를 했어요. 그리고 쫓아가는 장면 있잖아요. 같이 걷는 거요.
태현
광화문 도보행진이요.
경화
저 사람 누구야? 저 사람 어떻게 되는 거야? 그 장면에서도 질문을 많이 했고요. 경찰은 왜 막는 거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인 거죠. 유가족이고 피해자인데 국가가 왜 이런 방식으로 대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크게 품었던 것 같아요.
시원
국가가 나빴어요. 세월호에서 실종자 수색도 제대로 안 하고 거짓말하고 유가족들만 나쁘게 몰아가고 그래서 좀 슬펐어요.
순덕
아이의 시선은 처음 들어보는 것 같아요.
태현
엄청난 질문들이 쏟아진 거군요. 경찰이 왜 막지? 그런 생각이 당연히 들겠지요. 그리고 사내 역할도 너무 궁금할 것 같아요. 유가족이면 유가족인 게 드러나고 경찰이면 경찰이라는 걸 알겠는데. (순덕을 가리키며) 이 사람은 착한 사람이야, 나쁜 사람이야?
시원
처음에는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착한 사람이고, 영상으로 다시 보면서도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같이 활동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순덕
감동이네요. 나도 연극에서 사내라는 역할을 할 때, 꼭 나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순덕, 눈시울을 붉힌다. 시원, 그 모습을 보고 가방을 뒤적거린다.
경화
그 작품 어떻게 만들었는지 질문해도 될까요? <기억여행>은 어떤 마음으로 만들었는지, 어떻게 이미 가지고 있는 이야기들을 꺼내기로 했는지, 궁금했어요. 시원 님도 그랬거든요. 진짜로 저렇게 한 거야? 진짜 이모들 이야기야?
태현
<장기자랑>이 5주기 때인데, 그때도 많이 잊힌다는 느낌이 있어서 우리 아이들, 진짜 우리 아이들이 귀엽게 놀았던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렇게 하고 나니 이제 우리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런 생각이 번쩍 들었던 순간이 있는데, <이웃에 살고 이웃에 죽고> 공연을 서울 북부 어딘가에서 잘 끝내고 버스 타고 돌아오는 길이었거든요. 다들 신나서 수다를 떠는데 광화문에서 어떤 일이 있었지, 그런 무용담이 쏟아져 나왔어요. 그때 우리 이렇게 싸웠다, 그것을 무용담처럼 이야기하는 모습이…

시원이 순덕에게 손수건을 건네준다. 시원이 울지 마, 하고 말하면 순덕은 고개를 숙인다. 다시 고개를 든 순덕,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김순덕이 앉아 있는 책상 옆으로 다가간 백송시원. 백송시원이 김순덕에게 노란 꽃무늬 손수건을 건네는 순간,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손수건을 잡은 모습이다. 백송시원이 입을 꾹 다문 채 가만히 김순덕의 얼굴을 바라본다.
순덕
배우는 울면 안 되는데…
시원
배우도 울어도 돼, 사람이잖아. 태어날 때부터 이미 울었는 걸.

일동, 울고 웃는다.
경화
그래서 <기억여행>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자면,
태현
네, 우리 극단의 연극 활동이 네 번째 작품까지 왔는데, 이런 가족들의 여정을 연극으로 만들어서 알리기도 하고 기록도 해두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김규남 작가에게 의뢰해서 엄마들 인터뷰도 하고, 시간 역순으로 엄마들이 걸어왔던 여정을 장면으로 든 거예요. 마지막에는 잘 다녀와, 이렇게 끝내는 걸로 한 거죠.
경화
하시면서는 어떠셨어요? <장기자랑>하고는 상반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힘든 작품은 연기를 하면서도 힘드니까요.
순덕
버스에서 무용담 얘기할 때 이걸로 연극 만들어야겠다, 얘기했던 거 기억 나요. <기억여행>에서 제일 힘들었던 장면은, 수인 어머니가 상복을 입고 가면 사내가 우산을 받쳐주는 장면이에요. (울먹이며) 그 장면 너무 힘들었어요. 처음 극을 올리고 서울에서 안산으로 오는데 못 빠져나오겠더라고요. 그래서 울음을 꾹꾹 참았어요. 중앙역 내릴 때까지. 내리면서 누구를 의식할 틈도 없어서 그대로 벤치에 앉아서 통곡을 했어요. 그 장면이 너무 아팠어요.
태현
사내 역할을 하신 거잖아요. 유가족이 상복을 입은 채 영정을 들고 도보행진을 하는데 옆에서 우산을 씌워주는 역할, 그게 개인의 이야기로 온 건가요?
순덕
그렇죠. 그리고 유가족의 부모님과 나의 엄마가 겹치기도 했고요. 유가족분들이 어디 가셔서 피켓 들고 도보행진하고, 물대포를 맞을 때 항상 저도 그 자리에 있었거든요. 그 엄마들의 아픈 모습이, 그 상복 입은 모습이 다 나한테 왔어요.
태현
<기억여행>은 <장기자랑> 준비할 때랑 달랐어요. 엄마들이 무대에 서고 나면 정말 힘이 너무 빠졌거든요. 영정 도보 장면도 그렇지만, 광화문 장면에서도, 경찰이 화장실도 못 가게 하는 그런 상황을 연기하다 보면 그때로 확 들어가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공연을 하다가 두 가지 조처를 했어요. 한 가지는 정신 전문가 선생님에게 대본을 보낸 다음에 모든 배우들이 상담을 받은 거였고요. 다른 한 가지는 작품 막판에 연극을 확 깨버리는 장치를 넣은 거예요. 잘 다녀와, 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암전되면 아이고, 오늘도 공연 잘 끝났다, 왜 또 실수했니, 이런 장면을 추가한 거죠. 작품에서 빠져나와서 현실로 들어오는 것까지 장면으로 만들고 나니까, 실제로 좀 괜찮아졌어요.
순덕
그게 없었으면 너무 힘들었을 거예요. 진짜 있었던 일이니까, 내가 그 안에 있었던 장면을 하는 거니까. 연극을 할 때마다 내가 배우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것 같았어요.
경화
아마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연극은 <장기자랑>일 거예요. 저는 이보다 더 훌륭한 작품이 있을까, 생각했어요. 이건 무조건 대상 줘야 하는데 그해 어느 시상식에서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에 진심으로 화가 났어요. (시원, 허리에 손을 올리고 씩씩댄다) <장기자랑>은 연극이 바로 이거야, 라는 문을 열어주었던 작품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기억여행>은 사람들이 외면하고 싶은 이야기였어요. 죄책감이 몰려오니까요.
시원
노우! <기억여행> 보고 싶어요!!
경화
그치 그치, 제가 진짜 하고 싶은 얘기는 지금부터예요. 시원 님이 <기억여행> 공연을 보러 가서 대한민국의 구조에 대해서, 지금 국가가 어떤 방식으로 재난참사피해자를 대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확인한 거죠. 다음 세대에게 너무 중요한 연극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배우 백송시원과 연출가 송김경화가 나란히 앉아 양손의 주먹을 불끈 쥐고 있다. 백송시원은 슬며시 웃는 얼굴이고 송김경화는 눈을 크게 뜨고 말하고 있다.
태현
사실 <장기자랑>은 아이들 이야기를 한 거지만, <기억여행>은 따박따박 전부 우리 이야기라서, 대본을 보고 너무 무겁잖아, 얘기도 했죠.
순덕
그래서 조금씩 바꾸기도 했고요.
태현
작가도 기록해두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거예요.
시원
나는 무겁게 쓴 게 오히려 좋았는데. 왜냐면 이모들이나 그런 유가족분들의 마음이 확실하게 더 잘 드러난 느낌이라. 재밌게 얘기하면 저 때 무슨 느낌이었는지, 잘 모를 것 같은데 무겁게 얘기하는 게 생동감이 느껴졌어. 생생하게, 머릿속으로 생각이 구체적으로 가능한 것 같아.
경화
가짜가 아니라 진짜다, 이런 생각이 들었던 건가요? (시원, 끄덕인다) <기억여행>은 세월호 참사로 작품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당사자의 언어라는 걸 가르쳐준 연극이었어요. 당사자의 언어가 사실은 이 사회랑 만나기 너무 어려운데, 기록을 뒤지고 기사를 볼 수는 있지만 사실 그것도 다 편집의 과정이 있고요. 그런데 당사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충분히 한다는 거, 그 말을 잘 실어 나를 수 있는 매체로서 연극이 이 사회에 필요한 거죠.

연극으로 관객을 만나고, 관객으로 연극을 만나는 경험

태현
우리 작품 말고 연극인들이 했던 세월호 관련 연극 중에 기억나는 거 있으세요?
순덕
<시소와 그네와 긴줄넘기>. 어떻게 아이들이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되게 힘들게 했는데, 그런 생각도 들었고요. 아이들이 저쪽에서 나올까 말까 하는데 꼭 우리 보는 것 같았어요. 세월호 참사에서 250명이라는 아이들이 사라졌는데, 다시는 그런 참사가 일어나지 않게 해야겠다, 이 아이들을 우리가 잘 보호해야 그다음 아이들도 보호할 수 있겠구나, 이런 생각을 엄청 많이 했어요.
태현
그 작품에 이어서 <2014년 생>이 나온 것이 너무 좋은 맥락이었어요. 연극으로 관객을 만나는 경험은 어땠어요? 시원 배우님?
시원
따뜻하고 위로해주는 가족 같은 사람이 몇 명 더 늘어난 느낌?
태현
관객들의 시선이나 반응이 그런 느낌이 들게 해줬어요?
시원
관객들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더 자세히 알고 싶어 하니까, 따뜻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 같고, 괜찮아, 앞으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 관객이 조심할게, 이런 느낌이었어요.
경화
어떤 장면들에서 관객들이 어떤 반응을 해줬는지도 이야기해주면 좋을 것 같아요.
시원
첫 번째 장면에서 이야기할 때, 관객들이 배우를 엄청나게 집중해서 쳐다보면서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던 것 같고. 마지막에 얘기할 때는 우는 관객들이 많았어요.
경화
어떤 대사와 장면이기에 많이 우셨어요?
시원
음… 왜 울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경화
그럴 수 있죠. 저희가 공연 때 관객들이랑 같이 노란리본 매듭을 만드는데, 한 공간에서 그걸 같이 할 수 있다는 거, 그리고 세월호 참사를 어린이청소년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다는 게 좀 다른 경험이었던 것 같아요. 그게 우리를 어떻게 통과해 가고 있는지 확인하는 거죠. 중간중간 시원 님과 주희 님, 도연 님이 나누는 대화들이 있거든요. 그동안 차별과 혐오가 어떻게 쌓여왔는지, 또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요. 2015년에 단원고에서 국회까지 생존자들이 걸은 적이 있어요. 언덕을 지나갈 때 뒤를 돌아보니 너무나 많은 시민들이 나와서 함께 걷고 있었다고, 그 모든 거리에서 만났던 시민들에 대해 이야기해요. 우리에게 생존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시공간이 없었는데, 시원 님을 통해서 그런 이야기를 듣게 되는 거죠.
또 마지막에 시원 님이 세월호 장소를 다 돌아보고, 주희 님에게 말해요. 언니, 내가 세월호 참사를 모르는 어린이들에게 전해줄게, 생명안전공원이나 진상규명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반대하지 못하게 촛불집회를 열게, 라고요. 그러면 관객들도 미안하고 고맙고, 그런 것을 통과하면서 묘하게 용서받는다고 할까요. 나 다시 싸울 수 있을 것 같아, 다시 연대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런 마음이 생기는 것 같아요.
태현
나 다시 연대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이 너무 좋네요.
경화
시원 님은 이제 세 번째 공연을 하기로 결심했잖아요? 너무 힘들다, 다시 안 하고 싶다, 하면서도 결심을 다시 하는 마음은 어떤 거예요?
시원
결심! 관객들에게! 세월호를! 널리 널리 퍼뜨리고 싶어요! 그래서 이 연극을 발전시켜서 더더욱 많이 하고 싶어요. 그래서 지금도 세 번째 하고 있는 거고요. 앞으로도 열심히 할 거예요.
경화
대사량도 너무 많고, 사실 공부도 엄청 해야 하거든요. 그게 궁금해? 그럼 우리가 이걸 봐야 해, 이걸 한번 알아보자, 그렇단 말이야? 그럼 우리 여기에 한번 가볼까?(웃음) 하면서, 그럼 그 어려운 단어들을 다 읽고, 그게 뭔지 다시 한번 알려고 하고요. 그렇게 힘들게 하면서도 우리 언제 또 해? 하는데, 정말 언니 오빠들을 사람들이 기억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버티거든요. 그럴 때 어린이는 너무나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죠.
연출가 송김경화. 귀밑으로 내려오는 커트 단발. 남색 재킷에 청남방을 받쳐 입었다. 왼손으로 입을 살짝 가리고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며 웃는 얼굴로 이야기하고 있다.
송김경화
태현
순덕 배우님은 연극으로 관객을 만나는 경험이 어떠셨어요?
순덕
첫 경험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죠. 실제로 저 아는 분들은 제가 연극한다고 했을 때 애진 엄마가? 김순덕이? 그러셨어요. 동수 엄마가 나를 처음 만났을 때 목소리를 30%만 알아들었다고 했거든요. 목소리가 워낙 작으니까요. 근데 내가 무대에서 그걸 잘할 수 있을까, 부모님들한테 피해가 되지 않을까, 그러면서 연극을 만나게 됐는데요. 실제로 공연할 때, 그런 일이 있었어요. 세월호 참사 때 가족들이 많이 들었던 말들 있잖아요. 교통사고가 났는데, 뭘 그래, 그런 말들이 대사에 있었는데, 어떤 관객분이 정말 욕을 하셨어요. 너무 공감이 가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니까. 근데 그 욕을 듣는 순간, 나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진 않았을까, 반성도 하고, 힘들지만 연극을 하길 잘했구나, 생각했어요. 연극은 정말 말할 수 없는, 몸짓 하나로 어마어마한 걸 전달하니까요. 아프지만 그래도 우리가 연극을 해서 관객들이 세월호에 대해서 기억하고 함께해주고 공감해주는 게 좋았어요.
태현
엄마들이 주로 하는 얘기가 있는데요. 연극 무대에서 관객과 배우가 서로서로 주는 게 있다는 거예요. 배우들도 관객들한테 힘을 받고 오고, 또 관객들은 내가 잠시 놓치고 있었는데 연대해야겠다, 마음이 생기기도 하고, 엄마들이 저렇게 씩씩하게 버티고 있다는 걸 읽고 있기도 했고요. 사실 세월호 가족 하면, 우울하고 어둡고 슬픔을 참고 침잠해 있을 거라 생각하기 쉬운데 엄마들이 저렇게 힘내서 세월호를 이야기하고 있구나, 그걸 보면서 안심하기도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순덕
<장기자랑> 할 때 생각이 나요. 엄마들이 <장기자랑> 할 때 화장을 많이 했거든요? 그전에 작품 할 때는 안 그랬는데, 누가 뭐 하나 사면 나도 좀 바를래, 하고. 여고생이 되어야 하니까요. 그 모습 보면서 마음이 아프면서도 좋았어요. 엄마들이 내 아이를 표현하면서 밝아지는 거예요. 그 아이가 되어서 아이의 친구와 논다고 생각하니까 살도 빼고, 어떻게 하면 교복을 예쁘게 입을까, 고민도 하고요. 엄마들도 그 연극이 좋았다는 말을 많이 했어요. 엄마가 아닌 아이가 되어 보는 거니까요.

세월호 이후의 세계, 연극, 그리고 기억

태현
송김경화 연출님은 세월호 이후 사회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어떻게 달라졌어요? 사실 이전부터 반골 아니었나요? (웃음)
경화
맞아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전까지는 머리로 한 것 같아요. 세월호 이후에는 많은 것들을 내 이야기로 만나게 된 거죠. 세월호 참사와 시원 님을 만나게 된 게 같은 시기니까, 그게 한데 뭉쳐져서 어떻게 세상을 바라봐야 하는지 가르쳐줬고, 이 구조를 좀 더 면밀히 바라보면서 한 인간으로서 사회를 만나게 된 것 같아요.
태현
시원 님은 어때요? 세월호를 알고 나서?
시원
불공평해요. 왜냐면 재난참사피해자나 장애인이나 퀴어나 아동청소년이나 동물을 너무 차별적으로 막 대하는 것 같아요. 아니, 유가족이 생명안전공원을 만들 수 있고 그런 권리가 그 사람들에게도 있고. 근데 경찰이라는 사람이 어떤 계기로, 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고 못 하게 막느냐, 그게 그 사람의 창의력이고 인권일 수도 있는데 그걸 어떻게 침범하고 못하게 하느냐, 한 마디로 국가가 나쁜 거잖아요.
태현
누구나 인권이 보호되어야 하는데, 그걸 어떻게든 개선하려고 연극 하는 거죠?
시원
아니, 순범 이모가 화장실 가고 싶다고 했는데 화장실도 못 가게 하고!
순덕
기본적인 인권인데 화장실도 못 가게 하고!
시원
경찰들이 유가족이면, 만약에 그런 일을 똑같이 당했다면 그럴 수 있겠어!
순덕
맞아요, 사실 예전에는 너무 화가 나서 너도 당해보라는 말을 했어요. 하지만 본심은 아니에요. 생명을 잃는 건 아픈 일이니까요. 사실 국가는 변한 게 없지만 돌아다니다 보면 국민들은 변하고 있다는 걸 알게 돼요. 평일인데 도보행진에 사람들이 많이 올 수 있을까, 싶지만 돌아보면 어느 순간 사람들이 있어요. 손잡아주시고, 아직 잊지 않고 있다고 말씀해주시고. 국민들은 2014년 이후로 변하고 있다는 걸 느껴요. <기억여행>의 사내가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고 가족과 연대하고, 함께 걸어가잖아요. 10년이 지났는데 아직 우리를 기억하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가보면 시민들이 함께해주시는 것에서 따뜻함을 많이 느껴요.
태현
이번 도보행진이 너무 좋았어요. 8년 만에 한 건데요. 사실 10주기가 다가오고 있는데, 세월호 10주기를 준비하는 가족분들, 우리 연극인들, 활동가들이 느끼기에 도대체 왜 세상은 10주기에 관심이 없을까, 이런 게 있었거든요. 그런데 실제로 걸어 보면 응원해주는 사람들을 만나요. 표현을 안 하고 만날 기회가 없어서 그걸 발견을 못했다는 걸 느끼는 시간이었어요.
순덕
제가 맨날 하는 말이 있어요. 생일이든 뭐든 할 때마다 세계평화를 말해요. 현재 전쟁도 일어나고 있는데, 세월호 이후로 어떻게 하면 이런 참사가 일어나지 않게 할까, 하는 생각을 계속해요. 제가 초등학교, 중학교 안전교육 선생으로 나갔는데, 정말로 안전은 예방할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실제로 세월호 참사도 예방할 수 있었는데 기본적인 수칙을 지키지 않아서 그런 거였잖아요.
연출가 김태현과 배우 김순덕이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다. 김태현은 턱 아래에, 김순덕은 책상 위에 붙잡은 양손을 모으고 있다.
시원
국가랑 정부는 나쁘다. 내가 대통령이 됐으면 좋겠어! 내가 대통령이 돼서 생명안전공원도 만들고 또 기억공간을 확장해서 이 건물만 하게 만들 거예요.
태현
그렇게 해줄 수 없겠니? 몇 년 기다려야 하지? (웃음)
시원
생명안전공원도 엄청 크게 만들고.
경화
함께 있을 수 있게.
시원
그리고 당을, 재난참사가 안 일어나게 철저하게 보완하는 당을 만드는 거지. 아니면 당 이름이 세월호야! 아니면 재난참사금지당? (한숨 쉬며) 다들 오로지 자기 이익만 생각하니까.
순덕
진심의 한숨이네(웃음).
경화
세월호 참사 TF 자료집을 보고 그 과정을 그림으로 그리면서 얘기했거든요. 한번 읽고 너무 어려우니까, 세월호 당일 정부가 어떤 책임이 있었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이야기를 나눈 거예요. 그 이후로 책임회피를 하는 과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되었어요. 시원 님이 지금 이런 언어를 사용하는 건 사실관계를 알고서 그러는 거예요. 저도 그걸 보면서 많이 배웠거든요. 정말 기록이라는 게 너무 중요하고, 또 그걸 같이 읽는 건 너무 힘이 있구나, 하는 것도 확인하게 됐고요. 그것들을 비청소년들만 소화하는 게 아니라 어린이랑 함께 대화할 수 있어야 하는 거죠.
시원
가짜 뉴스를 어떻게 할지도 고민해야 해요.
태현
빨리 창당해주세요(웃음).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우리가 많이 했던 이야기는, 이전과 이후는 달라져야 한다는 거였죠. 그럼 뭐가 달라져야 하는지를 찾는 과정이 있어야 하잖아요. 대형 참사를 겪고 나서 우리가 성찰해야 할 가치가 뭐냐, 가장 첫 번째는 생명이 소중하다는 걸 어떻게 상식적인 가치로 만들 거냐, 하는 건데요. 국가는 법률, 제도를 개선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우리 사회가 다른 사회가 되느냐, 그렇지 않을 거라는 거예요.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이 바뀌어야 하는데, 예술과 문화 영역에서 해야 할 몫이 여기에 있는 것 같아요. 시원 님은 사회적 참사를 함께 이야기한다는 게 어떤 의미라고 생각해요?
시원
힘을 합치고 믿어주는 것?
경화
서로의 이야기를 믿어준다는 거예요?
시원
서로의 이야기를 믿어주고 거짓말하지 않는 것. 그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순덕
누군가를 믿어주는 게 굉장히 힘이 필요하고 또 힘을 받는 일이거든요.
시원
그런 국가가 과연 있을까?
순덕
국가가 우리를 보호해주지 않았으니까 그걸 바꾸기 위해서는 우리의 힘이 필요한 거죠. 이렇게 자라나는 아이들이 있으면 가능하지 않을까?
태현
그럼 우리는 연극으로 무엇을 기억하고 기록할 수 있을까요?
시원
사람들마다 생각과 마음이 다르겠지만, 그때의 감정과 마음을 기록하고 그때의 생각을 기억할 수 있잖아요. 그런 걸 일기로 쓰거나 세월호에 후원을 할 수도 있고요.
경화
그러니까 이런 거죠. 우리가 연극을 하면 관객들이 공연을 보고 그때의 감정과 마음을 환기하고 떠올리잖아요. 그래서 앞으로 나갈 수 있는 힘을 모으고, 생각을 되돌리고 과거의 시간들을 현재로 끌어당기는 것을, 우리가 연극을 통해 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게 연극으로 할 수 있는 기억과 기록이라는 이야기를 시원 님이 해줬어요. 실제로 <2014년 생> 공연을 하면서 사람들을 그렇게 만난 거죠.
순덕
희망이 보이네요. 정말 우리의 희망이에요(웃음). 우리가 기억은 힘이 세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연극의 효과를 저 스스로 느꼈거든요. 백 마디 말보다 한 편의 연극이 보여주는 것이 얼마나 힘이 센지, 무한한 영향력을 확인했어요. 너무 아프고 슬픈 얘기만 하면 어느 순간 힘들기도 한데, 다양한 이야기들을 연극으로 하면 잊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태현
세월호 10주기를 준비하면서 사실은 많이 지쳐 있었어요. 심지어는 10주기까지만 버티자, 이런 이야기도 종종 들려와서 고민도 많았고요. 우리 이제 10년인데,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시원 님이 이야기했듯이, 2014년 4월 16일을 지금 현재처럼 느끼게 하는 연극을 하고 싶어요.
순덕
사실 저는 <기억여행>을 끝으로 연극을 안 하려고 했거든요. 그냥 그런 생각을 해서 어느 공연 관객과의 대화에서 이야기했어요. 근데 다시 연극을 하게 된 게, 하지 않으면 잊히니까요. 애진이가 인터뷰를 하면 똑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는데, 하지 않으면 잊히니까 계속하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 말을 들었을 때 깨달았어요. 내가 이걸 하지 않으면 우리 아이들이 사라지고 세월호가 잊히지 않을까, 생존자 이야기도 사라지고요. <연속, 극> 공연 마지막에 생존자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이런 게 어쩌면 10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걸어주신 시민들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어요. 네, 기억은 힘이 세죠.
경화
저는 좀 어려운데요. 연극이 사람들의 심성을 돌보고, 세계를 연결하는 일을 하고 있는 건데, 항상 하다 보면 한계를 느끼잖아요. 사람을 만나기 어렵다는 점에서요. 누가 보나, 누가 듣나, 더 넓어져야 되는데 그 한계가 너무 분명해요. 공공의 지원이든 민간의 지원이든 지원을 받지 않으면 작업을 만들어내기 너무 힘든 상황에서 예술가가 과연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지원 없이도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세월호 참사를 얘기하려면 지원 없이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고민과 회의가 많아요.
태현
지금 대학로가 더 위축되고 있으니까요.
경화
민간 극단은 절대로 자생하기 힘든 상황이에요. 어떻게 하면 관객과 더 넓게 만날 수 있나,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연극 본연의 힘조차 잃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이영만 연극상 시상식 가서 <2014년 생>을 낭독했잖아요. 그 자리에 굉장히 많은 분들이 축하영상을 보내주셨거든요. 근데 계속 영상을 보다가 시원 배우님과 나리 배우님이 무대에 딱 나왔는데 너무 강력한 거예요. 실제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는 것에 이렇게 힘이 있는데, 연극의 힘이 바로 저것인데, 우리가 정말 그걸 소중하게 잘 사용하고 있나, 예술을 위한 예술로 향해 가고 있는 게 아닌가, 거기에 제동을 걸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저는 연극 본연의 기능이 기억과 기록이라고 생각해요. 들리지 않는 이야기를 실어 나르는 것, 연극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태현
동의해요. 그 작업을 우린 계속해나갈 거고요. 이제 10주기가 지나고 나면 우리 이야기를 넘어서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경화
맞아요. 연대하고 있는 분들이 많으니까. 그렇죠!
책상 위에 놓인 배우 김순덕의 손을 클로즈업한 사진. 꽃무늬가 들어간 노란 손수건을 곱게 접어 양손에 꼭 쥐고 있다. 오른쪽 손목에 노란 팔찌가 드러나 있다.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1. 제목 <2014년 생>은 ‘2014년생’과 ‘2014년 생존자’라는 중의적 표현으로서 ‘2014년’과 ‘생’ 사이에 띄어쓰기를 사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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