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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낭만의 거리는 어떻게 탄생했나

[대학로 연대기] ①대학로의 기원-上

이진아_연극평론가

웹진 12호

2012.11.15

대학로 연대기

  • 대학에서 종로로 나오는 길가에 늘어선 플라타너스 잎사귀는 거의 다 지고,
    가지 끝에 드문드문 매달린 나뭇잎새가, 바람이 불면 망설이듯 하늘거리다가,
    그제는 선선히 바람에 몸을 맡기고 팔랑개비처럼, 빙글빙글 떨어져 온다.
    늦은 가을이, 옷깃을 여미고, 조용히, 한숨을 쉬고 있다.
대학로 연대기
예술가의 집
  •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한 구절이다. 주인공 이명준이 아직 싱그럽고 아름다운 청춘의 시간을 보내던 시절에 대한 묘사다. 명준은 대학신문에 자신의 시가 실린 것을 알고도 왠지 쑥스러워 펴보지 못한 채 신문을 접어 책갈피에 껴 넣고는 그것을 겨드랑이에 낀 채 애써 무심한 척 걷고 있다. 스스로에 대한 대견함과 가벼운 울렁거림을 감추면서 그는 학교로부터 종로를 향해 난 길을 걷는다. 명준이 걷는 곳은 대학로다. 지금은 ‘예술가의 집’이 위치한, 이전에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구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더 이전에는 국립 서울대학교 본관이던 곳에서 문리대 정원이었던 마로니에 공원을 통과해, 그는 지금 대학로 큰 길로 나선 것이다. 지금의 대학로 극장 근처 어디께를 통과하여 종로 5가를 향해 걷고 있을 것이다. 문학과 예술에 대한 꿈을 안은 채.


    대학로는 언제부터 대학로일까?

    대학로는 서울 종로구 혜화동 사거리에서부터 이화동 사거리까지 이어지는 약 1Km의 왕복 6차선 도로를 중심으로 한 446,569㎡ 크기의 지역이다. 이곳은 약 150여개의 공연장이 밀집되어 있는 명실상부한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로, 단일 지역에 이렇게 많은 극장이 밀집되어 있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대학로라는 현재의 이름이 공식화된 것은 1985년 5월 5일이다. 식민지 시절 경성제국대학이 있던 이곳에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이 들어선 후 이 거리는 속칭 ‘문리대길’, ‘대학의 거리’ 등으로 불렸다. 그러던 중 1985년 당시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원장인 정한모 선생의 제안으로 ‘대학로’라는 이름이 공식화 된 것이다.
대학로 연대기
동숭동 구 서울대학교 문리대 전경
대학로 연대기
대학로 연대기
학림다방
[출처] http://www.hakrim.pe.kr
  • 사실 대학로는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이전에도 대학 문화와 깊은 관련을 가졌던 곳이다. 조선시대의 대학이라 할 수 있는 성균관이 대학로에서 멀지 않은 숭교방崇敎坊, 지금의 명륜동 일대 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이곳은 조선시대 교육의 총본산과 같은 곳이다. 숭교방은 ‘가르침(敎)을 높이 여긴다(崇)’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곳에 공자와 우리 선현을 모시는 문묘(文廟)를 세우고 한편으로 강당을 마련하여 학문을 가르쳤다. 오늘날 대학로의 행정구역 명칭인 동숭동(東崇洞) 또한 이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숭교방 동쪽에 위치한다는 의미로 숭교방의 ‘숭(崇)’ 자와 ‘동녘 동(東)’ 자를 각각 가져와 이름을 붙였다. 이후 대학로는 대한제국 시대에는 공업전습소가, 일제강점기에는 경성제국대학이 위치하면서 여전히 대학문화와 관련을 가졌다. 해방 후 경성제국대학은 국립 서울대학교로 바뀐다. 이 과정에서 경성경제전문, 경성법과전문, 경성사범, 경성농업전립 등 수 개의 대학이 통합되어 종합대학으로 승격하는데, 동숭동 캠퍼스의 부지가 넓지 못하여 이곳에는 그 중 문리과 대학만이 자리하게 된다. 현재의 대학로라는 명칭은 바로 이 시기와 관련이 있다. 서울대학교의 문리과 대학이 있다하여 ‘문리대길’이라고 불리던 것이, 이곳을 중심으로 의과대학, 법과대학 등이 자리하면서 ‘대학의 거리’로 여겨졌고 오늘날 대학로라는 명칭의 직접적 계기가 된 것이다.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이 자리하면서 대학로 일대는 서서히 낭만과 예술의 거리로 여겨지기 시작한다. 이 시절부터 오늘날까지 건재한 학림다방은 그 시절의 문청들과 문인들 사이에서 대학의 낭만과 추억의 상징으로 자리하게 되었으며, 서울대학교 동숭동 캠퍼스의 상징물과 같았던 마로니에 나무는 젊은이의 꿈과 정신을 의미하게 되었다. 대학로가 지닌 이러한 이미지는 문학작품을 비롯한 여러 문예물에 등장하면서 동시대 사람들에게 젊음의 상징이자 엘리트 문화의 상징적 장소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대학의 거리에서 문화의 거리로

    대학로가 오늘날과 같은 문화예술의 거리가 된 것은 서울대학교가 1975년 관악구 신림동으로 이전하면서부터이다. 오늘날 ‘예술가의 집’으로 사용되고 있는 3층짜리 벽돌 건물은 서울대학교 본관이 있던 곳으로 본래는 경성제국대학의 본관으로 설계되어 1931년 완공된 것이다(사적 278호). 그 터에 1976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들어서고 연이어 미술회관, 문예회관 등이 자리하게 되면서, 각종 민간 문화예술단체 및 극장들도 속속 대학로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대학로 연대기
아르코예술극장
대학로 연대기
아르코미술관
  • 그런데 정부는 서울대학교가 이전해 나간 대학로를 처음부터 문화예술공간으로 조성할 계획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곳을 대한주택공사에 매각하고 아파트를 지어 분양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각계 인사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고, 특히 건축가 김수근을 비롯한 문화계 인사들은 이 지역 일대를 문화예술공간으로 조성할 것을 주장하였다 한다. 이것이 받아들여져 서울대학교 본관 자리에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자리하게 되고, 이어 1979년에 미술회관(현 아르코미술관), 1981년에 문예회관(현 아르코예술극장)이 건립되어 개장하게 된 것이다. 또 서울대학교 문리대 정원이었던 곳에는 마로니에 공원이 조성되었고 거리 곳곳에는 조각품과 벤치들도 설치되었다. 오늘날 마로니에 공원을 중심으로 한 아르코미술관, 아르코예술극장, 샘터 사옥 등 대학로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붉은 벽돌로 된 대표적 건물군들은 이 시기 김수근에 의해서 설계된 것이다.

    이어 샘터 파랑새 극장을 시작으로 바탕골 소극장, 대학로극장 등이 개관하고 기존의 소극장 밀집 지역이던 신촌으로부터 10여개의 공연장들이 연이어 이전하면서, 대학로는 서울의 대표적 공연예술의 메카, 특히 연극의 메카로 자리하게 된다. 당시 대학로는 또 다른 소극장 밀집 지역인 신촌에 비하여 땅값이 저렴했으며, 마로니에 공원을 중심으로 문화예술진흥원, 연극인협회 등이 자리하고 있어 문화적 잠재력이 있는 곳이었다. 여기에 1981년부터 시행된 개정된 공연법에 의해 서울 시내 전역에 소규모 공연장의 설치가 비교적 자유로워지기 시작하자, 대학로에는 소극장을 비롯한 각종 문화시설들이 유입되고 극단의 사무실도 연달아 입주하기 시작한다. 오늘날 대학로의 가장 중요한 문화적 정체성인 ‘연극의 거리’라는 이미지는 바로 이 시기에 형성된 것이다.


    젊음의 거리, 공연예술의 메카

    1985년은 대학로라는 공간의 장소적 성격이 뚜렷해지는 계기가 되는 해이다. 이 해에 ‘대학로’라는 이름이 공식화되었으며, 주말이면 대학로의 교통을 전면 통제하고 거리에서 문화 축제를 개최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치는 자신의 폭압적 이미지를 문화적 이미지로 바꾸고 86아시안게임이나 88서울올림픽 등 다양한 국제적 문화행사를 성공적으로 유치, 개최하려는 당시 정권의 정책적 의도와 관련된 것이었지만, 이로 말미암아 대학로는 축제의 거리, 문화예술의 거리, 젊음의 거리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다지게 된다. 차 없는 거리로의 운영은 1989년에 인근의 율곡로 정비로 인한 교통문제로 철폐될 때까지 토요일 18시부터 22시, 일요일 및 공휴일에는 12시부터 22시까지 매주 운영되었다. 더불어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앞 광장을 풍류마당으로 이름을 붙여 각종 전시회, 가무, 민속놀이, 시 낭송회, 공연, 콘서트 등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80년대 말에 이르면 공연예술 및 문화의 중심지로 이미 그 명성이 신촌을 능가하게 된다.
대학로 연대기
1985년의 대학로
[출처] cafe.naver.com/mamj8836
    1990년대 들어 대학로에는 ‘문화의 거리’ 조성 사업이 진행된다. 당시 문화부는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지방자치단체마다 ‘문화의 거리’를 지정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장했는데, 해당 구간에 가로등, 상징적 조형물, 조각품, 벤치 등을 설치함으로써 문화적인 공간 환경을 조성하는 사업이었다. 대학로를 문화의 거리로 지정하려는 사업이 추진되면서 해당 관할청인 종로구는 대학로의 마로니에 공원을 지붕이 있는 야외 공연장으로 정비하고 각종 문화행사 관련 시설물 설치를 추진한다. 이에 따라 공연 게시판 및 티켓 박스 등이 설치되었고 야외 공연도 활성화되었는데, 이러한 분위기로 인하여 대학로에 새로 개관하는 공연장들이 잇달으면서 대학로는 명실공히 공연장 밀집지역이 된다. 현재 대학로에 밀집한 공연장의 약 60%가 이 시기에 건립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소극장의 증가는 공연예술계의 양적 성장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는데, 1960년대 12개, 1970년대에 16개, 1980년 공연법 개정 이후에는 30여 개의 극단이 활동하던 것이, 1990년대 말에 이르면 극단의 숫자는 약 130여 개를 상회하게 된다.
대학로 연대기
현재의 대학로
  • 그러나 이와 같은 정책은 대학로의 상업화를 부추기기도 했다. 급격히 늘어난 유동인구를 수용하기 위한 카페, 레스토랑 등 각종 상업적, 소비적인 유흥시설이 급속도로 증가하면서 대학로는 외관상으로 매우 화려하고 번화한 거리가 된다. 한 조사에 의하면 1985년 당시에는 9개이던 일반 음식점이 1999년에는 61개로 늘어났다고 한다. 또 공연장의 성격 역시 변화했다. 대학로에는 연극, 무용, 음악, 퍼포먼스 등 다양한 공연문화가 공존하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주류 공연예술 장르는 연극이었다. 그러던 것이 1990년대 중반 이후 ‘개그 콘서트’라는 스탠딩 코미디가 새로운 공연 양식으로 빠르게 자리 잡기 시작하고, 소규모 창작 뮤지컬들도 대학로에 전용관을 두고 속속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대중적 상업적 공연에 주력하는 공연장들이 양적으로 크게 성장하게 된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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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아

이진아
연극평론가, 숙명여자대학교 한국어문학부 교수. 연극비평이 필요 없는 시대의 연극비평을 고민하면서 혼자 쓰고 읽고 좋아하며 산다.
snowe.sookmyung.ac.kr/club/playgo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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