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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재산이냐 사유재산이냐, 그 이전의 문제

남산예술센터는 왜 공공재인가?

김일송_공연칼럼니스트

제143호

2018.07.05

공공재로서 공공극장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자주 언급되는 것이 기능과 역할에 관한 것들이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창작자나 레퍼토리의 선정, 작품의 제작환경 조성, 관람환경 구축 등이 주로 언급된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공공극장의 역할보다는 남산예술센터에 한정해 그 역사성에 대한 질문을 던질 계획이다. 사실, 그것이야말로 공공재와 사유재의 논의에 앞서 선행되어야 할 질문일 것이다.

남산예술센터는 서울시가 학교법인 동랑예술원과 장기임대계약을 맺어 운영해오고 있는 공간이다. 이 문화사업계약은 2009년 체결되어 3년마다 갱신되어왔고, 계약대로라면 2020년이 계약갱신 시점이었다. 그러나 지난 1월 동랑예술원은 서울시에 문화사업계약을 올해 말이나 늦어도 내년 6월 끝낼 것을 요청했다. 종료를 요청하려면 계약연장을 하기 전 6개월 전인 지난해 6월에 협의를 해야 했지만 서울예술대학(동랑예술원)은 계약연장이 이뤄진 뒤인 1월에 돌연 종료 요청을 해온 것이다.1)
그래서 이에 반발한 일군의 연극인들이 ‘공공극장으로서의 드라마센터 정상화를 위한 연극인 비상대책회의’(이하 비상대책회의)를 구성하였고, 지금까지 세 차례의 공개토론회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이 자리를 빌려 건립부터 지금까지 드라마센터를 둘러싼,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역사적 사실들이 드러났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어쩌면 앞서 언급한 공공재와 사유재 논의로 귀결된다.

일제강점기 통감부의 땅에서

남산예술센터가 위치한 행정지명은 예장동(藝場洞)이다. 얼핏 보면, 예술의 기운이 넘치는 터를 연상할 수도 있지만, 사실 이 지명은 무예를 닦는 터에서 유래했다. 유래처럼, 이 지역은 유난히 군부조직과 관련이 깊었다.
시작은 조선후기부터다. 이곳이 조선후기 무반(武班)들의 집거지로 사용되어 예장동으로 불렸다는 설이 유력하다. 2)
한편 임진왜란 때 일본 장수 마스타 나카모리가 진을 친 곳이라 왜장대(倭將臺)라 불렸다는 설과 일본 군영 주변에 장(場)이 섰기 때문에 ‘왜장(倭場)터’라 불리다 왜장대가 되었다는 설, 그리고 일본군이 이곳에 성을 쌓았기 때문에 왜성대(倭城臺)가 되었다는 설도 있기는 하다. 실제로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왜성대정(倭城臺町)으로 불렸다. 3)
그 시절 예장동은 이미 일본인들의 집단 거주지로 자리를 잡은 후로, 사료에 따르면 1882년에 이미 일본공사관이 예장동에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이곳 공사관을 중심으로 일본의 군납상인들이 점포를 차렸고 1883년 개항 이후에는 일반인들도 이 주변에 거처를 마련하게 되었다. 4)
중요한 사실은 일본이 을사늑약을 체결한 이듬해 1906년 2월 이곳에 대한제국의 정치와 군사 관련 업무를 보는 통감부를 설치했다는 사실이다. 통감부가 예장동에 설치되면서 예장동은 수많은 일본인들의 집단 거류지가 되었다.

1) 매일경제, 2018년 4월 3일, ‘서울예대 "남산예술센터 임대 끝내겠다"…공공성 사라지나’ (http://news.mk.co.kr/newsRead.php?sc=50500001&year=2018&no=211433)

2) 한겨레21 920호, 2012년 7월 18일, ‘전우용의 서울탐史-병사 무예장 예장동이 왜장대로 불린 까닭은’ 기사에는 ‘남산 기슭의 남촌이 무반(武班)의 집거지인데다 인근에 남소영(南小營) 등 군영(軍營)이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이 설이 더 믿을 만하다.’고 적혀있다.

3) 한겨레21 920호, 2012년 7월 18일, ‘전우용의 서울탐史-병사 무예장 예장동이 왜장대로 불린 까닭은’. 기사에는 ‘일본인에 대한 경멸의 뜻’이 있음에도 1914년 경성부의 행정구역 명칭을 정할 때 왜성대정(倭城臺町)이라는 이름을 공식화했다‘고 쓰여 있다.

4) 한겨레21 920호, 2012년 7월 18일, ‘전우용의 서울탐史-병사 무예장 예장동이 왜장대로 불린 까닭은’.

일제강점기_예장동 일대 지도, 지금의 남산예술센터와 서울애니메이션센터가 있는 자리가 통감부 터였다.

예장도 조감도조선총독부(시내전경)조선총독부(남산전경)

1926년 총독부(舊 통감부)가 경복궁으로 이전한 후, 통감부 건물은 은사기념과학관으로, 다시 시정기념관(1940년, 11월)으로 사용5)되었으며, 해방 후, 1946년에 국립민족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 한국전쟁 후, 1954년 6월 연합참모본부가 신설되면서 이곳에 연합참모본부의 청사가 들어섰다. 설명이 장황했다. 요컨대, 지금의 남산예술센터의 자리는 해방 후, 사유지가 아닌 국유지로 관리되었다는 의미다.

5) 오마이뉴스, 2005년, 7월 3일. ‘통감관저, 잊혀진 경술국치의 현장-[역사고증] 남산 왜성대에는 이제 어떠한 흔적이 남아 있을까?’ 기사에 따르면 시정기념관은, 1940년은 그네들의 황기(皇紀) 2600년이 되는 동시에 시정 30주년이 되는 해라고 하여 이를 대대적으로 기념하는 사업의 하나로 추진된 것이었다고 한다.

중앙정보부의 한복판에

1960년 9월 28일, 당시 내각수반들은 국가의 귀속재산이었던 이 땅을 유치진이 운영하던 재단법인 한국연극연구소에 편법적으로 매각하였다. 매매 가격은 61,748,000환(원 단위 환산금액으로는 6,174,800원) 6)이었으며, 계약 조건은 계약금 1할, 매각대금은 계약일로부터 1개월 내 완납이었다. 유치진은 이 계약을 이행할 수 없었지만, 당국은 계약금조차 납부하지 않은 그에게 허위 입금증명서를 발행해주는가 하면, 계약금 미납 상태에서 토지를 점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아마도 드라마센터를 건립해 운영할 수 있던 배경에는 록펠러재단과 한미재단, 아시아재단 등 든든한 뒷배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군부세력의 지원도 있었을 것이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남산에 중앙정보부를 설치했다. 그리고 남산에 중앙정보부를 신설, 제1대 중앙정보부장으로 김종필을 임명했다. 중앙정보부 땅 한가운데에 드라마센터가 세워진 셈이다.

6) 환은 1953년 2월 15일부터 1962년 6월 9일까지 사용되던 대한민국의 통화 단위이다. 1962년 6월 10일자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실현을 위해 2차 통화조치가 시행된다. 이때는 ‘환’에서 ‘원’으로 단위가 바뀌었고 10분의 1로 평가 절하되었다. 예: 10환은 1원으로.

안기부(과거 중앙정보부, 현재 국정원) 시절 예장동 일대 지도, 지금의 남산예술센터를 둘러싸고 안기부장 공관과 안기부 6국, 수사동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김종필과 유치진의 관계에 대해 풍해문화재단 이철성 이사장은 “드라마센터는 5·16 주체세력의 한 사람인 김종필 정보부장의 주선으로 국유지에 지어진 건물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7)
그리고 1962년 4월 12일, 드라마센터는 개관공연 <햄릿>을 시작으로 첫 발을 내딛었다. 개관해 드라마센터는 <밤으로의 긴 여로>, <포기와 베스>, <한강은 흐른다>, <세일즈맨의 죽음>, <로미오와 줄리엣> 등 6편의 공연을 무대에 올렸지만, 한 해를 버티지 못하고 1963년 1월 경영 부진을 사유로 폐관되었다. 폐관에 대해 이해랑은 이렇게 술회한 바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이 끝날 무렵 유치진 씨가 조용히 나를 불렀다. 더 이상 극장 지탱이 어려워 문을 닫겠다는 것이었다. 최악의 사태였지만 그래도 극장 문을 닫을 수는 없다면서 완강히 반대했다. (...) 그러나 완전히 탈진상태가 된 유 선생은 ‘내일을 기약해 보자’면서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이 드라마센터 극장장이자 연출자로서 마지막 작품이었고 남산을 내려온 나는 또다시 일자리를 잃은 폐랑이 되고 말았다. 이후 드라마센터는 학생극과 흥행쇼 개관 장소로 전락해 갔다.”8)그의 말대로 이후 드라마센터는 결혼식장, 미8군 공연단의 재즈공연장, 영화상영관 등으로 사용되었고 연극과의 거리는 멀어져갔다. ‘한국 연극 예술 부흥’이라는 명목으로 지어졌지만, 정작 연극인들은 드라마센터를 사용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유치진은 여전히 ‘한국 연극 예술의 부흥’을 구실로 토지 대금 상환 장기연기 등 금전적인 특혜를 계속 요구했고, 이에 군사정부는 국유재산 매각대금의 납기를 10년으로 연장해주고, 나아가 은행 융자를 알선해 주기도 하였다. 김종필은 드라마센터를 예그린 악단의 연습실 사용하여 유치진의 은행대부를 일시에 갚아주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에도 그는 매각 대금을 갚지 않아 국유재산 매각 대금 체납, 국세 체납 등으로 복수의 압류를 당했다. 매각대금의 완납은 1970년 9월 14일 이루어졌다.

7) 한산신문, 2008년 2월 22일, ‘이철성-풍해문화재단 이사장-① 서울 드라마센터 밝힌 통영의 밤’ (http://www.hansa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5677) 이 회고담에서 이철성은 1967년 자신이 국세청 조사국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드라마센터의 강제처분을 연기시켰다고 밝히기도 했다.’

8) 이해랑, ?허상의 진실?, 새문사, 459쪽

공공재산의 사유화 과정

그런데 유치진은 대금을 완납하기도 전인 1964년 학교법인 한국연극연구원(현 동랑예술원)을 설립하면서 드라마센터를 사립학교의 ‘수익용 기본재산’으로 신고한다. 자신(재단)의 소유가 아닌 건물을 기증한 셈이다. 이 과정에서 유치진은 재단을 해체하여 신설하는 등의 다양한 방법을 이용했다.
록펠러의 지원을 받기 위해 설립했던 한국연극연구소 유지재단 대신 앞서 설명한 한국연극 연구원을 설립하며, 그는 연극인들을 배제하고 정관계, 언론계, 그리고 자신의 친인척들을 이사진으로 등재시켰다. 또한 서울연극학교를 설립했다가 폐교하고, 1974년 새롭게 인가를 받아 서울예술대학을 개교하는 등의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드라마센터를 자신(재단)의 재산으로 바꾸어놓았다.
극장의 사유화와 관련해 1989년 연극인들이 문제를 삼은 적이 있었다. 그들은 드라마센터가 “개인 성금과 공익자금이 투입”된 공공극장으로 연극인들에게 개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9)그러나 당시 서울예술대학의 학장이었던 유덕형은 애초 드라마센터의 건립목적 중 하나로 교육기관의 역할을 주장하였고, 결국 공공극장으로의 전환은 무산되었다.
드라마센터는 이후 학생들의 실습과 발표를 위한 장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2001년 서울예술대학이 안산으로 캠퍼스를 이전하면서부터 관리가 부실해졌다. 서울시와의 계약은 그렇게 진행되었고,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공공극장으로서의 남산예술센터는 그때 탄생한 셈이다.

남산예술센터의 공공성을 이야기할 때, 이에 대한 반론으로 사유재산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반박하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을 통해 본 재산형성 과정은 조금 다른 증언을 하는 듯하다. 보다 근본적인 질문이랄까. 드라마센터가 과연 사유재산이 맞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9) <동아일보>, 1989년 7월 3일. ‘연극계서 남산 드라마센터 공연장 활용 주장- “개인ㆍ공익자금으로 세운 시설, 학교 전용(轉用)은 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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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송

김일송 ‘이안재’ 대표
서강대 불문학과 졸업. 문학(희곡)전공으로 동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무대예술을 소개하는 공연문화월간지 <씬플레이빌> 과 서울무용센터에서 발행하는 무용웹진 [춤:in] 편집장을 역임했다.
ilsong75@gmail.com / 페이스북 Il-Song Raphael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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