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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이후 2년, 무엇을 ‘더’ 바꾸어야 하는가?

우리에게 주어진 현장의 과제들

김보은_배우

제177호

2020.03.26

이미 시작된 변화는 과거와 가장 멀어질 수 있는 형태로 진행될 것이고,
우리는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세계로 이동 중이다.
그렇다면 미투가 바꿔놓을 세계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뉴스로 접한 미투가 내 일상을 이렇게 크게 달라지게 하리란 것을 당시엔 상상할 수 없었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여서 이야기해보자는 '대학로X포럼'의 글을 읽고 자리에 나갔다가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이하 성반연)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게 되었다. 이후 수차례 열린 성반연 좌담회와 포럼에 참여하였고, 해외의 예술인과 연대하고, 그 과정에서 CTS(시카고 스탠다드)를 한국에 소개하게 되었다. 잘 몰랐던 페미니즘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고, 성폭력 구조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성폭력예방교육 강의를 들으러 다니다가 얼떨결에 강사로 위촉 되었다. 연극계 내부의 부정의에 연대할 수 있는 소중한 동료들을 만났고, 한국 공연예술계 내부규약을 만드는 모임이 꾸준히 이어지는 것을 목격하였다. 이러한 동료들과의 연대는 수평적인 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커뮤니티 활동으로 진행되었으며, 그 과정은 동료 및 연극계에 대한 나의 인식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 KTS워킹그룹 페이지 커버사진
    (출처: KTS워킹그룹 페이스북)
  • 성반연 세미나 안내문
    (출처: 성반연 페이스북)
그러나 또 상상하지 못 한 것은 미투 이후에도 여전히 위계를 강요하고, 여성 및 소수자 혐오를 기반으로 한 작품이 꾸준히 올라가며, 기득권 중년 남성이 독식하는 구조가 공고하다는 것이다. ‘2020년 연극의 해’를 맞아 열린 첫 토론회에서는 반말, 고성, 삿대질, ‘저기 젊은 친구들’이라 불리는 하대를 일삼고, 2차 토론회에서는 위계를 가르는 호칭을 삼가고, 존댓말 사용 등 수평적 대화를 위해 마련한 규칙이 ‘모욕적’이라며 문체부에 항의하는 ‘높으신 분’들이 여전히 연극계의 중요한 의사결정권자로 군림하고 있다.

미투는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시대적 변화와 창작환경의 변화에 따른 창작자들의 인식 변화 및 여성운동의 꾸준한 노력과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고, 미투는 미투 이전의 세계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외침이다. 미투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조차 보장하지 않았던 연극계의 폭력적 ‘관행’을 겨우 말할 수 있게 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미투가 연극계의 모든 성폭력을 드러낸 것도 아니다. 미투는 ‘유명한 가해자, 수많은 피해자, 문단 등 특정 커뮤니티의 관행, 미디어를 통한 폭로, 가해자의 사회적 지위와 권력이 피해자보다 압도적인 경우’1) 극히 일부의 사례를 드러냈을 뿐이다. 몇몇 가해자가 처벌을 받은 사례가 있지만, 대부분의 가해-피해는 드러나지 않았다.
2019년 4월 9일 이윤택 징역 7년 선고 후 공동대책위원회의 기자회견(출처: 한겨레)
그러나 이미 시작된 변화는 과거와 가장 멀어질 수 있는 형태로 진행될 것이고, 우리는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세계로 이동 중이다. 그렇다면 미투가 바꿔놓을 세계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첫째, 모든 창작자들이 안전한 창작환경에서 작업할 수 있어야 한다.
미투는 창작자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주요한 원인 중에 하나가 창작자들 간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작업을 지속하기 위해선 창작자의 안전을 목적으로 하는 합리적인 내부규약을 만들고 모두가 지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필자는 예술인을 대상으로 성희롱·성폭력 예방강의를 한다. 강의 중에 “상대방과 자신의 관계적 맥락을 고려하며 언행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럼 일부 수강생은 ‘그런 것들을 지키면 불편하고, 인간적인 정이 없다’는 불만(?)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런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불편해지길 원한다. 한국에서 말하는 정이란 것이 무엇인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라는 광고의 배경음악처럼, 권력을 가진 쪽에서 상대방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움직이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미투는 그런 행위를 위계폭력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그동안 타인에게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언행을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내부규약을 통해 다른 사람의 인권을 침해하지 않고, 타인을 불편하지 않게 만듦으로써 그들이 불편해지는 것이다. 내부규약은 위계를 통해 다른 사람의 불편함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었던 사람들이 불편해질 때 작동된다. 창작자들이 위계폭력과 성폭력이 만연한 위험한 창작환경 때문에 연극계를 떠나지 않도록 상식적인 내부규약이 정립되고 넓게 통용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 의사결정 과정에 다양한 목소리가 반영되어야 한다.
201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비상임 위원 후보자는 전원이 남성이었고, 평균나이는 56.1세였다. 많은 예술인들의 항의로 문체부는 성별 및 연령의 다양한 분포를 고려해서 위원을 재선출하기로 하였다. 소수의 기득권 중년 남성 예술인이 예술계의 전반적인 정책들을 좌지우지해왔던 관행에 문제를 제기하고 변화를 이끌어 낸 것이 고무적이다. 미투 이후의 세계에서 가능한 변화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구조가 바뀐 것은 아니다. 여전히 대부분 소수의 기득권 중년 남성이 정책 결정, 심사위원 등을 독식하는 세계는 여전한 것이다.
한 사람이 볼 수 있는 세계는 한정적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창작 활동을 하는 연극계를 제도적으로 지원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이 놓인 상황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소수자의 위치는 잘 드러나지 않고, 그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기도 쉽지 않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이 논의의 자리에 참여해서 그들 스스로 문제점과 대안을 이야기하게 하고 그것을 듣는 것이다. 그간 청년, 장애인, 여성, 퀴어 등 정책 결정에 아무런 목소리도 낼 수 없었고 그래서 쉽게 배제되거나 착취되었던 이들이 그 굴레에서 벗어나도록, 자신의 이익을 대표하는 자리에서 스스로 목소리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자리가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여성주의 시각을 기반으로 한 작품이 보편화되어야 한다.
지인이 심사를 받는 자리에서 “페미니즘 연극 이미 너무 많아 식상하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 심사위원이 생각한 ‘페미니즘 연극’이란 무엇일까? 또한 ‘페미니즘 연극’은 하나로 모아질 수 있는 것인가? 여성주의적 시각이란 기존에 통용되어 온 기득권의 시각이 모든 인간을 대변할 수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기존에는 보편인간인 남성적 시선이 곧 인류보편의 시선과 일치한다고 보았으며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여성주의는 중심부에 있는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하는 것이 절대적이지 않으며 현실에는 다양한 위치와 인식이 있음을 드러내는 생각이다.
페미니즘 인식론을 기반으로 연극을 만드는 것은 그동안 주변부에 놓인 사람들을 쉽게 대상화, 비인간화하는 방식으로 연극에서 ‘사용’해왔음을 인지하고, 도구적인 사용이 현실에서 이들을 혐오하는데 일조해 왔음에 분노하며, 주변부에 놓인 사람들을 더 이상 도구화 시키지 않으려는 노력을 통해 인간이 인간임에는 자격과 경계가 없음을 기반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여성, 장애인, 퀴어, 이주민 등 사회에서 약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것은 연극이 ‘시대의 정신’을 자처한다면 당연히 수행해야 할 사회적 역할이다. 여성주의 인식론을 연극에 담아내는 것은 구별된 하나의 카테고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약자를 대상화하고 혐오하던 관행에 대한 폭넓은 반성으로 봐야 한다. 앞으로는 면접에서 “또 페미니즘 연극이냐?”같은 무례하고 무식한 질문을 마주할 일이 없기를 바란다.
넷째, 미투는 창작자들의 실제적인 행동 변화가 뒷받침되어야 의미를 확장시킬 수 있다.
2018년 미투 이후 필자는 성반연 활동을 해왔다. 지인 중에는 이런 활동을 마음속으로 지지하지만 나서서 활동하기를 꺼려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이 위계폭력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가해자이기 때문에 발언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사실 필자도 그 부분 때문에 매번 내가 이런 활동을 해도 되는지, 이런 발언을 해도 되는지 스스로에게 자격을 끊임없이 물어야 했다. 부끄럽지만 미투 이후에야 위계폭력이란 말을 알게 되었고, 이전에는 내 작업 외에는 별로 관심두지 않았다.
그러나 가장 순결한 자만이 연극계 문제에 발언할 자격이 있다고 하면, 오히려 위계구조에서 가장 취약한 이들에게 연극계를 변화시키라는 책임을 떠넘기게 되는 것은 아닐까. 나의 반성은 행동을 변화 시키고 연극계 문제를 방관하지 않겠다는 목소리를 낼 때에 비로소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미투 이전의 세계는 내가 만든 게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그 이후에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할지 스스로 정할 수 있다. 당신은 변화의 기로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1. <미투의 정치학>, 권김현영, 루인, 정희진, 한채윤 공저, 교양인, 2019.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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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은

김보은 배우
문화예술계 성희롱·성폭력예방강사, <김보은 배우상> 시상자, 젠더 의식을 기반으로 한 작품창작이 가장 큰 관심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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