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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이후 2년, 무엇을 ‘더’ 바꾸어야 하는가?

#미투 이후 연극계의 변화 - 독일의 사례를 바탕으로

오수진_무대미술가

제178호

2020.04.16

2017년 설립된 독일의 연극조합 ‘프로 크보테 뷔네(Pro Quote )’는 2017년 할리우드에서의 하비 웨인스틴(Harvey Weinstein)에 대한 고발사건과 관련해 의미 있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대부분이 국영화되어 있는 독일의 연극 및 오페라, 발레 극장들의 극장장 및 예술감독의 성비를 따져보니 78%가 남성이고, 또한 한 해에 발표되는 공연의 75%가 남성 극작가에 의해 쓰인 작품들이며, 78%가 남성 연출가에 의해 무대화되었다는 사실이다. 그에 반해, 프로덕션을 보조하는 역할인 조연출의 여성 비율은 51%이고, 급여가 가장 낮은 프롬프터의 여성 비율은 무려 80%에 달했다. 피라미드적 위계구조가 뚜렷한 공립극장 공연예술 프로덕션의 특성을 고려할 때, 피라미드의 윗부분을 차지한 자리에는 절대적으로 남성의 수가 많고, 아래 부분에는 여성이 있다는 것이다.1)
프로 크보테 뷔네는 극장 및 극단의 대표자인 예술감독 혹은 극장장이라는 자리, 한 프로덕션의 예술적 책임자라는 연출가라는 자리의 절반은 여성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럼으로써 이들은 여성의 창작활동이 대중에게 더 많이 노출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만약 이 요구가 현실화되어 연극계에서 책임자의 자리를 차지한 여성의 비율이 50%의 수치까지 달했을 때, 대중이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개인적으로 바라는 것은 지금까지 너무나 자연스럽게 관습화되어 버린, ‘남성 응시(male gaze)’에 의한 여성 묘사가 아닌, 여성과 세계를 보는 ‘시선의 다양성과 포용성’이다. 여성을 희생자, 성적 오브제, 주변인 혹은 여신 등으로 전형화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경험하는 무한한 이야기에 대해 여성이 직접 느끼고 사유하는 방식, 즉 여성의 관점을 재현하는 것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거쳐야 할 가장 기본적인 단계는 여성의 창작활동 참여를 확대하기 위한 실질적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다.
파격적이나 타당한 시도
독일의 연출가 아나 베어그만(Anna Bergmann)이 칼스루에 주립극장(Badisches Staatstheater Karlsruhe)의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이 극단의 연극단장 직책을 수락하면서 가장 먼저 추진한 일은 부임 첫 해인 2018/2019년 시즌을 위해 새롭게 제작할 예정인 11개의 공연을 모두 여성 연출가에게 맡기는 것, 즉 여성 연출가 비율 100%를 추진함과 동시에 11개의 공연 모두 여성인물이 주인공인 작품을 올리는 것이다. 이 11개의 공연 중에는 헨릭 입센의 세 극을 하나로 각색한 <노라, 헤다 그리고 그녀의 자매들 Nora, Hedda und ihre Schwestern>이라는 아나 베어그만 자신이 연출한 작품을 포함해,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왕의 길 Am Königsweg>,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헛소동 Much Ado about Nothing>, 괴테가 각색한 에우리피데스의 극 <이피게니아 Iphigenie>를 비롯해 동시대의 신진·중견 여성 극작가들이 쓴 다수의 극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정책은 현재 독일 연극계가 얼마나 부당하게 남성 중심적인지를 상기시킨, 매우 파격적인 시도로 받아들여졌고,2) #미투 이후 다른 여러 이슈들과 더불어 독일 연극계의 성비 불균형 문제에 관한 토론을 본격화했다.
프로 크보테 뷔네가 요구하는 ‘50%’라는 구체적인 숫자는 남성에 대한 역차별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의 절반을 구성하는 여성의 사회 참여 기회와 표현의 자유, 즉 여성의 기본권을 보장하라는 요구이다. 그동안 배제됐던 여성들의 목소리를 모은다면 남성 중심적 사회에 의해 외면당한 수많은 주제들이 무대 위에 올려질 것이다. 다양한 체형, 목소리, 피부 톤을 가진 여성, 성소수자, 종교적 소수자, 장애인, 다양한 직업군과 계층의 여성들, 그리고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남성들의 이야기 또한 무대화될 것이다. 남자 주인공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기나긴 독백을 읊는 동안, 어두운 무대 한 구석에서 인조 피를 묻힌 채 죽은 듯 누워 있는 여성이 아닌, 목이 쉬도록 침을 튀며 대사를 하고 땀을 닦는 여자 주인공을 보게 될 것이다.
아나 베어그만이 연출한 <노라, 헤다 그리고 그녀의 자매들>의 트레일러 영상 (출처_유튜브)
물론, 가부장적 사회의 수많은 공모자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누군가는 선입견을 가진 채 (혹은 자신도 모르게) 젊은 여성 연출가에게 날을 세울 것이다. 여성 연출가의 지시를 듣지 않고 자존심을 내세울 것이다. 또 누군가는 이 주요직의 여성들이 일터를 떠나 가정을 돌봐야 한다고 헛소리를 해댈 것이다. 이런 위계화된 환경에서 어시스트들은 무시당하고, 공연의 질 향상과 관련 없는 일에 - 가령 배우와 연출부를 위해 커피와 다과를 준비하는 - 시간을 할애하게 된다. 새롭게 연출직 혹은 예술감독 자리를 맡은 여성 창작자는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같은 일을 하는 동료 남성 창작자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급여를 받을 것이다(독일과 프랑스의 공영방송 아르떼(Arte)의 보도3)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여성 영화감독의 연출료는 별다른 이유 없이 남성 감독이 받는 연출료의 절반에 불과하다).
결국 여성 창작자들의 창작활동 참여 확대와 의사결정권을 가진 상층부 진입은 필연적으로 남성 중심적 사회의 위계화된 권력구조를 바꾸는 움직임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이상 이 봉건적인 가부장적 구조에 편입되어 구조화된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일을 멈추고 - 설사 이 구조를 이용하여 권력을 얻게 되었다 할지라도 - 수평적 관계를 지향하는 새로운 리더십 구조를 모색해 제시해야 한다. 이는 여성에게만 주어진 의무가 아니라, 폭력적인 성별 권력구조의 피해자가 되고 싶지 않은 사람들, 나아가 연극이라는 예술이 우리의 삶을 반영·포용하고 민주적으로 기능해야 한다고 믿는 모든 구성원들이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다.
비민주적인 구조의 문제
‘#미투’가 드러낸 문화예술계의 민낯은 주요직의 성비 불균형 문제뿐 아니라, 공연예술계 전반에 여전히 존재하는 시대착오적이고 비민주적인 권력구조 자체와 관련된다. 프로덕션이 연출가를 비롯한 디자이너 및 여러 스태프들과 배우들의 공동 창작물이라는 인식은 연극의 역사가 깊은 독일에서조차 좀처럼 기대하기 힘들다. 연출가는 고성을 지르며 부당한 요구 - 초과근무 강요 혹은 재계약 시의 불이익 예고 - 를 하는 등의 ‘갑질’을 일삼는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연출가의 ‘천재적 발상’이라는 미명하에 양해되어야 하며, 이 과정에서 스태프 및 배우들은 연출가의 세계관을 구현하기 위한 ‘서비스 제공자’로 전락한다. 이 전락은 한 명의 ‘천재 예술가’를 탄생시키고 그를 지지하려는 영웅주의에 기대 합리화된다.
한편, 국가의 보조를 받지 않거나 소위 ‘대안문화’를 표방하는 대안무대(Freie Szene)에서는 예술가들이 팀의 형태로 결합해 만든 ‘콜렉티브(Kollektiv)’를 통한 공동창작의 형태가 많다.4) 이는 대개 연출가가 독단적으로 아이디어를 가져와 각 디자이너 및 부서에 역할을 분담하는 기존 방식과 달리,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는 단계에서부터 팀원들과 의견을 공유하고 구성원 각각의 전문 분야에 맞게 역할을 나누며 결과물에 대해 공동 책임을 갖는 방식이다. 이때 각각의 역할을 투명하게 분배하고, 연구의 결과물을 수평적으로 공유하는 것이 ‘콜렉티브’라는 형태의 집단을 유지시킨다. 이는 주로 신진 연출가 혹은 디자이너들이 기존 연극계에 진입하기 위해 선택하는 대안적인 경로로서 고려되지만, 기존 시스템에도 적용할 수 있다.5)
이와 비슷한 양상을 무용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본래 왕정 하에 생겨난 예술양식인 발레는 경력과 실력에 따라 무용수들의 서열을 엄격하게 구분하고 솔로 무용수들만이 극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그러나 최근 현대무용의 발전과 함께 안무의 내용 및 형태가 다양화됨에 따라 이러한 위계와 서열이 공연의 질을 형성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해 이 같은 구조를 없앤 단체들이 늘어나고 있다.6) 이 방식을 택한 단체에서는 솔로 안무를 출 수 있는 기회가 모든 무용수들에게 균등하게 주어지고, 공연의 질을 높이기 위한 책임을 나눈다. 또한 배역 캐스팅은 팀원들이 함께 상의해 가장 합리적인 방식으로 진행한다.
2018년 1월, 일자리 평등을 주장하는 베를린의 시위 (사진_Adam Berry/출처_LA타임즈)
권력구조의 투명성
이러한 움직임이 지향하는 바는 공연계 권력구조의 투명성이다. ‘연출가와 배우’ 혹은 ‘안무가와 무용수’, ‘주연과 조연’, ‘솔로 무용수와 앙상블(군무 무용수)’, ‘무대감독과 크루’, ‘헤드 스태프들과 어시스트’ 등의 관계에서 전자들은 후자들에 비해 훨씬 강력한 의사결정권을 가진다. 이들이 자신들의 파트너, 즉 후자들에게 신뢰할 수 있는 노동환경과 다각적이고 실질적인 합의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그들의 직책에 부여된 ‘의무’다.
연출가는 창작상의 특정 목적을 위해 배우나 스태프들의 비규범적·비관습적인 노동을 필요로 할 경우, 일방적으로 그 노동을 강제할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설득을 통해 그들의 합의를 얻어야 한다. 물론, 각각의 배우와 스태프들은 스스로 허용·합의 가능하다고 여기는 정도, 즉 나름의 ‘선’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보통 후자들은 불이익을 받을 것이 두려워 자신의 ‘선’이 어디까지인지 표현하기 어렵고, 상대가 ‘선’을 넘은 경우에도 이를 제지하기 위한 목소리를 내기 힘들다.7) 그러나 서로 동등한 당사자 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건전한 작업 환경에서라면 후자들은 용기를 낼 것이다. 연출가의 필수 자격요건은 힘과 강압적 카리스마가 아니라, 동료에 대한 배려심과 논리적인 의사소통 기술이다. 전자들이 논리적이고 정당한 합의과정을 통해 후자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면 그 누구의 ‘창작의 자유’도 위협받지 않을 것이다.
  1. www.proquote-buehne.de/wollen/
  2. Sally McGrane, At this theater, all of the directors will be women, The New York Times, 27. 9. 2018(www.nytimes.com/2018/09/27/theater/female-directors.html); Martin Halter, Alles muss man selbst machen am Karlsruher Theater, Frankfurter Allgemeine, 10. 10. 2018(www.faz.net/aktuell/feuilleton/buehne-und-konzert/frauenoffensive-am-badischen-staatstheater-in-karlsruhe-15829455.html).
  3. Aliénor Carrière, Ein Jahr danach: Was hat #MeToo bewirkt?, Arte, 5. 10. 2018(www.arte.tv/de/videos/085366-000-A/ein-jahr-danach-was-hat-metoo-bewirkt/).
  4. 콜렉티브 형식을 택해 활동하는 창작단체로는 베를린을 기반으로 한 퍼포먼스 콜렉티브인 쉬쉬팝(She She Pop)과 3명의 연출가가 모여 만든 리미니 프로토콜(Rimini Protokoll)을 예로 들 수 있다.
  5. 실제로 스위스 취리히 연극 극장(Schauspielhaus Zürich)에서는 연출가 니콜라스 슈테만(Nicolas Stemann)과 드라마투르그 벤야민 본 블롬베어그(Benjamin von Blomberg)가 여러 스태프들과 함께 팀 체제로 역할을 분담해 극장을 운영한다. 1인 리더체제를 택하지 않은 이유는 일의 효율성과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6. 프랑크푸르트 발레단을 이끌었던 윌리엄 포사이스(William Forsythe)는 자신의 이름을 건 무용단(구 The Forsythe Company, 현 Dresden Frankfurt Dance Company)을 만들면서 이러한 서열을 없앴고, 칼스루에 주립극장에 2020년 새로운 발레단장으로 부임한 브리짓 브라이너(Bridget Breiner) 역시 오랫동안 전통적인 위계서열을 가지고 있던 칼스루에 발레단을 민주적으로 개선했다.
  7. 이 과정에서 인티머시 코디네이터(Intimacy coordinator)가 투입되기도 한다. 이들은 영화나 연극에서의 노출, 섹스 장면 현장에서 배우들과 연출 사이의 의사소통을 돕고 합의를 도출할 수 있도록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 배우가 심리적 압박이나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 연기를 할 수 있도록 돕고, 배우들이 부당한 대우를 당했을 경우에 대비하며, 해당 장면 리허설 및 촬영이 마무리 된 뒤 배우들의 일상 복귀를 돕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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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진

오수진 무대미술가
서강대학교에서 영미어문학과 독어독문학을 전공했고, 독일 드레스덴 조형미술 대학Hochschule für Bildende Künste Dresden에서 무대미술 및 무대의상 디자인Bühnen-/Kostümbild 디플롬Diplom 과정을 마쳤다. 2019년까지 칼스루에 주립극장 Badisches Staatstheater Karlsruhe에서 무대미술 어시스트 경력을 지냈고, 2019년부터 독일을 중심으로 연극, 오페라, 무용 영역에 걸친 무대미술 및 무대의상 디자인 프리랜서로 활동 중이다.
홈페이지: soojinohstagedesign.wix.com/soojinoh
이메일: theatre.soojin.oh@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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