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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의 이후를 상상하기

서울문화재단 예술지원사업 선정작 조사: 다른 연극을 “상상하기”

김슬기

제213호

2022.01.27

*본 원고의 내용은 서울문화재단 예술지원사업의 현재 방향성과 다를 수 있으며, 웹진 편집위원회의 논의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지난 몇 년 사이 연극 현장은 분명, 이전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는, 비가역적인 변화를 만들어왔다. 자발적인 움직임과 실천들이 모여 생겨난 흐름이 있었고, 그 흐름은 가까이서 멀리서 연극계를 구성하는 여러 행위자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 시대, 그 고유한 목소리들에 귀 기울이고 살아있는 경험을 기록하는 일, 그리하여 현상 이면에 내포된 의미를 찾아 해석하는 일은 변화의 실행과 더불어 반드시 수행해야 할 과제다. 그런데 어쩐지 그것만으로는 해소되지 않는 갈증이 남아 있었다. 정말 변했나? 얼마나 변했나? 어떻게 변했나? 이번 기획은 그러한 본질적 호기심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글에서는 일정 기간 정해진 범위 안에 축적된 개별 작품들의 실태를 조사해 그 변화의 동향과 현주소를 분석한 결과를 공유한다.

조사 대상 및 조사 방법

처음 ‘‘이후’의 이후를 상상하기’ 기획을 시작했을 때 편집위원회에서는, 온갖 방식을 동원해 지금의 연극계 지형을 포착해보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우리가 여전히 어떤 이행기나 전환기를 통과하고 있는지, 좀처럼 이동하지 못하고 멈추어 있는 것은 아닌지, 혹은 이미 어딘가에 도착해있는지, 웹진의 나아갈 길을 묻기 위해서라도 한 번쯤은 연극계 전반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경로로도 현장에서 공연되는 모든 연극의 구체적인 정보를 한눈에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애초엔 웹진에서 실행 가능한 선에서, 지난 1년간 올라간 모든 연극을 조사할 수 있는 창구를 찾아보려고 했다. 그러나 공연 티켓 사이트를 기준으로 하기엔 구글폼을 이용하는 등 예매 방식 자체가 이미 너무 다변화되어 있었고, 공연장 리스트를 만들자니 공연장이 아닌 곳에서 올라가는 다양한 형식의 연극들이 적지 않았다.
결국, 누락되는 자료를 최대한 줄이면서 근거가 확실한 정보를 얻기 위해 서울문화재단 예술지원사업 선정작을 분석하는 것으로 조사 대상의 범위를 좁힐 수밖에 없었고, 대신 최근 한 해 연극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 지난 5년간 공연된 연극들을 전수 조사해 그 변화 양상을 살피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구체적으로는 2016년부터 2020년까지 서울문화재단 정기공모 지원사업 연극 분야 중, 지원선정자가 그 결과물로 공연을 발표한 경우로 자료 수집을 한정했다.1) 예술작품지원(2020년의 경우 창작활동지원 A, B, C), NEWStage, 장애예술인창작활성화지원, 최초예술지원, 서울청년예술단 선정자의 공연이 그 조사 대상에 포함되며, 공연장상주단체 육성지원의 경우, 재공연할 작품을 선정하는 맥락이 있었을 것으로 사료되어 선정 단체의 신작 공연은 물론, 레퍼토리 공연까지 모두 조사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분석 자료로는 서울문화재단 후원이 명시된 온라인 웹전단을 활용했는데, 이는 모든 공연의 결과물을 분석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을 고려한 선택이었다. 공연 홍보물은 관객이 연극에 관한 기본 정보를 얻는 1차 출처라는 점에서, 창작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가장 충실히 포함된 자료일 것으로 판단했다.
서울문화재단 홈페이지 ‘예술지원선정자 검색2)’과 지원사업 결과발표를 교차 검토해 조사 리스트를 만들었으며, 사업포기 및 공연취소 등을 반영해 최종적으로 조사 대상이 된 공연은 총 569작품이다. 조사 방법은 세 단계로 이루어졌다. 1단계에서는 편집위원 중 1인으로 성수연 배우와 외부에서 이리 배우가 조사자로 참여해 온라인상에 게시되어 있는 조사 대상의 웹전단을 수집해 그 내용을 분석했다. ‘누구의 서사를 무대화하는가’와 ‘어떻게 전달하는가’ 두 가지를 파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으며, 전자의 질문에 대해서는 연극의 중심인물과 주요 이슈를, 후자의 질문에 대해서는 젠더―프리, 크로스, 벤딩, 블라인드―캐스팅과 트리거 워닝, 배리어프리 등 구현이나 전달에 있어 다른 고민이 반영된 경우를 조사했다. 이후 2단계에서는 웹진 편집부에서 1차 분석 결과를 한 번 더 검토했고, 마지막 3단계에서는, 조사자와 편집부가 종합 토론을 통해 최종 결과를 도출했다.

중심인물이 여성인 연극들

여성이 중심인물로 등장하는 연극은 2016년부터 2020년까지 총 80작품, 전체의 14.05%를 차지한다. 2016~2017년에 비하면 2018년 그 비율이 상대적으로 증가하는 듯 보이고 2019년에는 20.49%까지 올라가지만, 그렇다고 이것을 절대적으로 높은 수치로 판단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2018년 연극계 미투 운동 이래, 조사 대상이 된 모든 지원사업의 심사평에는 페미니즘, 미투, 젠더, 여성 등의 이슈를 다루는 공연이 증가했다는 언급이 빠짐없이 등장하는데, 이번 조사 대상만을 놓고 봤을 때 여성은 여전히 연극 무대에서 과소 재현되고 있었다. 더불어 공연 홍보물만으로 젠더―프리, 크로스, 벤딩, 블라인드―캐스팅을 파악할 수 있는 연극은 많지 않았다. 실제 그러한 시도를 한 공연이 적었던 것인지, 홍보물에 명시하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없으나, 2018년에 1작품, 2019년에 2작품, 2020년에 2작품이 확인되었다.
조사의 시작점으로 잡은 2016년과 비교해 2017년 선정작부터는 여성 인물을 중심으로 한 연극들에 훨씬 다양한 키워드들이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2016년의 연극들이 여성노동자, 여성예술가, 여성이주민, 위안부 피해자-성상납 피해자, ‘모녀가 아닌 스승과 제자’ 등의 인물을 다루었다면, 2017년의 연극들은 다양한 위치에 있는 여성들을 통해 데이트폭력, 성폭행, 가정폭력 등을 이야기하고, 몸과 외모, 임신과 출산 등 여성의 경험을 보다 구체적으로 가시화했다. 이러한 결과에 대해서는,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과 그에 이은 추모의 연대로부터,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감각하는 억압과 폭력을 연극 무대에서 공유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2018년의 경우, 연극계 미투 운동 이전에 공모 접수가 완료된 사업의 선정작들과 미투 운동 이후 공모 접수가 진행된 사업 선정작들 사이에서 다소간의 차이를 볼 수 있었다. 후자에서는 명백히 페미니즘을 지향점으로 삼는 연극들이 나왔는데, 이 중 일부는 제1회 페미니즘연극제에 참가한 작품들이다. 한편으로 이는, 미투 운동 이후 공모 접수가 진행된 사업이 서울청년예술단과 최초예술지원에 국한되는 바, 상대적으로 젊은 창작자들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경향으로 파악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2019년과 2020년에도 여타 지원 영역과 비교해, 청년예술지원 혹은 창작활동지원 A(신진) 영역에서 여성을 중심인물로 그리는 연극의 비율이 더 높았다.
또한, 2018년부터는 여성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퀴어, 이주민 등 서로 다른 소수자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함께 서사를 이끌어가는 연극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이들의 관계맺기와 상호작용 등으로부터 이 사회의 규범 혹은 질서가 누구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좀 더 광범위한 시각으로 탐색해나가는 작업들이 시도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동시에 한 인물에게서 여성, 장애, 청소년 등 보다 다양한 소수자 정체성이 교차하는 경향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작업들은 개별 인물이 놓인 복잡한 맥락을 읽어냄으로써 억압의 다층성을 가시화하고, 다변화되는 사회적 모순과 그로 인한 불평등을 새롭게 들여다보기 위한 기획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여성이 중심인물로 등장하는 전체 연극의 78.75%는 여성들이 경험해왔고 직면해있는 사회의 구조적 억압과 폭력을 이야기했다. 여기에는 데이트폭력, 가정폭력, 스쿨미투, 가스라이팅, 혐오범죄 등 미투 운동이 직접적으로 촉발했을 성폭력과 관련된 서사뿐만 아니라, 다양한 위치와 상황에서 여성들이 경험하는 차별과 이에 저항하는 움직임을 다루는 서사가 모두 포함된다. 이밖에, 아주 낮은 비율로 여성의 몸에 대한 경험, 여성들 사이의 우정과 사랑을 이야기하는 연극이 있었고, 고정된 성역할과 스테레오타입을 벗어난 보편적 존재로서 여성 인물을 그리는 연극은 10%의 비율을 차지했다. 마지막 카테고리의 분류 기준은 해당 인물을 다른 성으로 바꾸어도 서사가 성립하는지 여부였으며, 이러한 연극들은 여성 배우가 연기할 수 있는 인물의 다양성을 확장해나가는 또 다른 방식의 실천을 보여준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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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의 속성을 반영한 연극들

“누구의 이야기를 다루는가?”라는 맥락에서 고려한 ‘이후’의 속성이란, 그동안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았던 목소리들을 들리게 하고 보이게 하려는 시도들, 그럼으로써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동료 시민으로서 그 목소리들의 자리를 인정하고 가시화하려는 시도를 의미한다. 조사 결과 장애인, 퀴어, 노동자, 입양인, 이주민, 난민, 노인, 청소년, 전쟁 피해자, 국가폭력 희생자 등의 이야기를 무대화한 연극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세월호 참사 이래 연극이 고민하고 질문해온 극장의 기능과 예술가의 위치성이 이러한 시도들의 초석이 되었다는 점에서,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세월호 관련 연극들 또한 ‘이후’의 속성을 가진 작업들로 분류하였다.
하지만 단순히 청소년의 이야기를 다룬다고 해서, 혹은 공연의 중심인물로 노동자가 등장한다고 해서 그러한 연극들을 모두 ‘이후’의 속성을 가진 것으로 분류한 것은 아니다. 조사와 토론의 과정에서 발견한 바에 따르면, 특히 2018년을 기점으로 많은 연극들이 등장인물을 하나의 단일한 정체성으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교차하는 억압적 상황을 통과하는 주체로 그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들은 해고노동자의 십 대 자녀, 스쿨미투와 고등학생, 세월호 유가족이 된 파업노동자와 같이, 지금 이 시대의 복잡한 구조적 모순을 다양한 맥락과 관계 속에 증언하는 인물들이었다.
이러한 연극의 비중은 2016년 7.04%, 2017년 7.69%에서, 2018년에 이르면 14.66%로 2배 가까이 증가한다. 공연의 홍보물을 분석하는 이 조사만으로는 이와 같은 변화 양상에 대한 실체적 근거를 찾는 것이 불가능했다. 다만 연극계 미투 운동 이후 체현한 감수성, 말하자면 동료와 이웃, 내 일상의 모든 폭력에 섬세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동시에, 지지와 연대를 기반으로 현실을 바꿔냈던 경험이 있었고, 그것이 연극 창작의 방향성으로 이어진 게 아닐지 조심스레 추측해볼 뿐이다. 대체로 이러한 연극들은 한 명의 중심인물이 역경을 헤쳐나가는 이야기를 넘어, 그 주변 인물들, 나아가 동등한 비중을 지닌 여러 인물들을 자기 삶의 주체로 호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3)

관객의 다양성을 인식하는 연극들

한편 이러한 감수성의 연장선상에서 연극의 내용과 관련한 트리거 워닝이 공연 홍보물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다는 것도 눈여겨봐야 할 변화 중 하나다. 트리거 워닝이란 어떤 작업이 누군가에게 고통스러운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글이나 이미지, 콘셉트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경고하는 메시지이다. 다양한 억압과 폭력을 이야기하는 연극에 노출될 관객들을 위한 이러한 사전 안내는 2019년 처음 시도되었고, 2020년 그 수가 급격히 증가한다. 흥미로운 것은, 심리적이고 정서적인 자극에 대한 주의로서 일반적 의미의 트리거 워닝을 포함해, 상당히 다양한 맥락에서 관객의 안전을 헤아리는 안내가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수집된 사전 공지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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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사전 공지는 관객을 하나의 균질한 집단으로 가정하지 않는다는 인식의 변화를 보여준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객석에는 다양한 심리적, 정신적, 신체적 고유성을 가진 개인들이 있다. 나아가 연극이 현실의 구체적 억압과 폭력을 이야기하는 만큼, 이제 관객을 만나기 위한 기본값은, 누구라도 그 피해자―생존자로서 당사자일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방향으로 이동해가고 있다. 이를테면 “공연 중 혐오발언이나 공연방해 행동 시 즉각 퇴장조치합니다”와 같은 사전 공지는, 객석에 있을 당사자를 예상치 못한 폭력으로부터 보호하려는 대책으로 읽어낼 수 있다. 무엇이 위협 요소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려는 무대와 객석 사이를 넘어 이렇게 객석과 객석 사이로 확장된다. 아마도 이러한 연극들은, 단순히 거리를 둔 감상자로서가 아닌, 충분한 안전이 담보된 시공간 속에 함께 경험을 나누는 적극적인 참여자로서 관객을 상상할 것이다.
이에 더해 지난 몇 년 사이 연극에서, 공연 접근성과 관련해 배리어프리에 대한 안내가 현저히 늘어났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2017년에는 장애인 극단의 연극 두 작품과 장애 예술인이 참여하는 접근성 워크숍의 결과 발표 및 그 연계 공연 한 작품만이 배리어프리를 공지했다. 2018년에는 공연 홍보물에 문자통역, 수어통역, 음성해설, 휠체어 이동지원 등 구체적인 배리어프리 내용을 안내한 경우가 단 한 건도 없었다. 다만, 장애인 극단이 공연한 연극 두 작품의 경우, 휠체어 접근 가능성을 가장 우선적으로 표방하는 극장(대학로 이음센터 이음홀, 성북마을극장)에서 공연이 올라갔다는 점을 감안해 배리어프리를 실천한 것으로 간주했다. 장애인 극단의 공연에 대한 이러한 기준은 다른 모든 해에 동일하게 적용했으며, 더불어 배리어프리에 대한 별도의 안내가 없어도, 스태프 리스트에 수어통역사가 있는 경우 배리어프리를 공지한 것으로 분류했다.
그러던 것이 2019년 21작품, 2020년 23작품으로 그 수치가 늘어났는데, 비율로 따지자면 각각 전체의 17.12%와 27.71%를 차지한다. 한편으로 이러한 결과는 관객의 다양성은 물론, 장애예술에 대한 현장의 논의가 본격화하면서 장애연극인들을 동료 창작자로 인식하기 시작한 영향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배리어프리를 공지한 연극의 72.72%는 휠체어 이동지원과 관련한 안내를 한 경우이며, 문자통역, 수어통역, 음성해설은 극히 제한된 일부 창작자들만이 분명한 의지를 가지고 꾸준히 실천하고 있었다. 문자통역, 수어통역, 음성해설의 배리어프리는 공연을 만드는 것과 연계된 또 다른 전문성과 그만큼의 시간, 비용, 에너지가 요구되는 영역이다. 물론 그렇다고 휠체어 이동지원에 전문성과 시간, 비용, 에너지가 투여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이러한 변화 추세에는, 연극이 다양한 관객들과 만날 수 있는 방식을 모색하는 과정 중에, 지금 우선할 수 있는 것들을 시도해보려는 움직임이 반영되었으리라 추측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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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사는 공연 홍보물의 내용만을 분석한 것이므로, 실제 공연 결과물이 얼마만큼 그 의도를 충실히 달성했는지를 판단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현장에서 발생하는 여러 복잡다단한 맥락들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이를테면 페미니즘을 그저 홍보 마케팅의 도구로 활용하는 공연이 있었을지도 모르고, 그것을 일상의 실천으로 수행하고 창작의 원동력으로 삼으면서도 공연 홍보물에는 굳이 내세우지 않는 연극인이 있었을 수도 있다. 한편으로 관객의 다양성을 인식해 제공한 트리거 워닝을 누군가는 스포일러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고, 실제로 휠체어 이동지원 안내를 확인했으나, 공연 예매와 관람 시 불쾌하고 불편한 경험을 한 사례들도 적잖이 접하게 된다. 하지만 창작자나 단체, 작품, 공연 장소 등에 대한 아무런 사전 정보가 없는 관객들은 결국 공연 홍보물을 보고 연극을 판단한다. 조사 과정에서 새삼 홍보물을 만드는 일의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었는데, 특히 사전 공지와 배리어프리 안내가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배치되어 있어 실질적인 전달의 기능을 하기 어려워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이 조사 결과만으로 섣불리 연극계 전반을 미루어 짐작하는 것도 경계해야 할 일이다. 현장에는 지원금 없이 공연을 이어가는 많은 창작자들이 있고, 다른 공공지원금이나 공공·민간 제작극장과 여러 재단, 기업의 후원을 받아 관객을 만나는 연극의 수도 상당하다. 무엇보다 이 조사는 서울 이외의 지역을 전혀 고려하지 못했다. 그러한 모든 연극들의 사례를 조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번 조사 결과를 단정적으로 해석하는 글쓰기를 되도록 피하려고 했다. 독자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더 다양한 방식으로 이 조사 결과를 읽어주길 기대한다. 한 가지 더, 위에서 미처 언급하지 못했지만, 지금의 변화를 말 그대로 ‘하드 캐리’하는 이들이 있었다는 것도 밝혀 두어야겠다. 혜화동1번지의 세월호 기획과 배리어프리 실천, 페미니즘연극제와 기획사 플레이포라이프의 여성을 중심인물로 한 연극들, 그리고 관객의 다양성을 인식하는 사전 공지들은 압도적인 비중으로 이 조사 결과가 보여주는 모든 영역의 수치를 끌어올렸다.

‘이후’의 이후를 “상상하기” 위하여

이 조사는 일종의 통계 수치를 보여준다. 그간 현장과 지면에 유통되던 수많은 말과 글들은 페미니즘 연극, 여성 서사를 다룬 연극이 많아졌다고 ―고무적으로든 냉소적으로든― 바쁘게 이야기해왔다. 이런 경우 그러한 말과 글이 체감한 현상은, 오히려 이전에는 얼마나 그런 연극이 없었는지를 방증하는 증언이나 진술에 가깝다. 때론 객관적인 데이터가 말해주는 것이 있고, 어떤 현실을 진단할 때 그것은 가장 확실하고 유용한 근거가 된다. 그렇다고 이 조사 결과를 그저 단순한 수치로만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통계 수치 안에 들어와 있는 연극들은 그저 더 많은 몫을 갖기 위해 투쟁하는 게 아니라 몫 없는 이들의 곁에 있길 선택했고, 기존의 질서와 규범에 편입되길 욕망하는 개인의 서사를 넘어, 그 질서와 규범의 정당성을 심문하고 해체하려는 여러 시선과 입장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웹진 연극in에서 마련한 ‘‘이후’의 이후를 상상하기’라는 기나긴 기획이 막을 내린다. 기획의 시작 단계에서는 세 차례의 좌담을 통해 연극 현장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감각하는 현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어서 동시대 관객들이 어떻게 연극을 만나고 있는지, 그 구체적인 관극 경험을 질문하는 설문조사를 실시했으며, 젠더 감수성 관점에서 지난 5년간 제도권 연극상 수상작들을 분석하는 두 편의 글이 연재되었다. 그리고 이번 기획에서는 같은 기간 서울문화재단 예술지원사업의 선정작들을 추적해 비록 제한된 범위일지언정, 양적으로 결코 적지 않은 수의 연극이 누구의 이야기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이전과는 얼마나 다른 방식으로 관객과 만나고 있는지, 그 변화의 흐름을 읽어내 보고자 했다.
부족하고 아쉬운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궁금한데 어디서도 알려주지 않으니 직접 알아보는 수밖에, 라는 마음으로 편집위원 모두가 책임감을 가지고 각각의 기획을 담당했으나, 편집위원들은 현장의 창작자이지 조사와 분석을 아우르는 연구 영역의 전문가가 아니다. 이 기획을 마무리하면서 편집위원회는 웹진 연극in이 도모하고 실천해야 할 과제가 어쩌면 “상상하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데 의견을 모았다. 앞으로는 이번 기획을 토대로 조금은 다른 방향에서 현장의 창작자들이 만들어갈 수 있는 담론을 이야기해볼 예정이다. 대신 어딘가에서 조사와 분석, 연구 영역의 전문가들이 좀 더 깊이 있는, 또 다른 논의에 착수해주었으면 한다. 시의적절하게 참조할 수 있는 다른 지표가 없다면, 연극in이 탐험하고 실험해볼 “상상하기”는 언제든 현실에 발붙이지 못한 유희와 놀이에 머물 위험에 노출될 것이다.

  1. 다만 매해 서울문화재단 지원사업의 분류 체계에 다소간 변동이 있었던 바, 같은 지원사업이 해가 바뀜에 따라 정기공모에 포함되거나 포함되지 않았던 경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2016년도에는 거리예술지원이 정기공모에 포함되어 있으나, 그 이후 거리예술센터의 자체 공모로 바뀌었고, 장애예술인창작활성화지원은 2017년 신설되어 정기공모로 지원자를 모집하였으나, 2020년부터는 잠실창작스튜디오에서 별도의 공모를 진행하고 있다. 이에, 조사 대상의 체계를 일원화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거리예술지원은 조사 대상에 포함하지 않았고, 장애예술인창작활성화지원은 조사 대상에 포함했음을 밝혀두는 바이다. 또한 예술축제지원은 축제 플랫폼 전체에 대한 지원이라는 점에서 조사 대상에서 제외했다.
  2. https://www.sfac.or.kr/business/artsupport/artsupport_winner.do
  3. 조사자들과 편집부는 ‘이후’의 속성을 반영하는 연극에 대한 기준을 찾기 위해 오랜 토론을 거쳤다. 이 글을 쓰는 동안 편집위원인 이연주 연출가와 이야기를 나누며 그 기준을 조금 더 구체화할 수 있었다. 그의 의견에 따르자면, 실마리는 연극의 여러 등장인물들을 단순히 주인공의 서사를 뒷받침하는 기능적인 존재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맥락과 조건 안에 살아있게 만드는 것에 있었다. 다만, 공연 홍보물의 짧은 텍스트만으로는 그러한 경향을 확언하기에 한계가 있었고, 이러한 속성은 이와 같은 개괄적 조사가 아닌, 보다 해석적인 연구를 통해 차차 밝혀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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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슬기

김슬기 본지 편집장
창작을 위한 읽기와 기록을 위한 쓰기를 한다. 공연예술의 창작과 수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가치에 주목한다. 일상과 연극, 연극과 사회가 만나는 방식 및 예술의 사회적 가치와 예술가의 역할에 대해 고민한다. 공연 드라마투르그를 비롯해 각종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soolsoolg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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