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메뉴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하단메뉴 바로가기

Ω 옴 - 기다란 손톱, 투명테이프, 트로이의 목마, 푸른 알약

저항의 각자

안정민

제233호

2023.05.11

저항에 대해 이야기할 때, 연극(계)는 자주 묻습니다. 우리의 저항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그러나 줄곧 묻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너의 저항은 어떤 모양인가. 전자의 질문에 답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대상이 있는 저항은 강하고 분명하며 대상의 크기와 우선순위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후자의 질문에 답하는 일은 까다롭습니다. 삶의 부당한 조건들은 목록화할 수 없이 서로 엉키어 있고, 개인의 저항은 제각기 다른 모양을 갖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온도가 높고 욕망이 개입되며 공공선과의 접합부가 불분명하므로 종종 투덜거림, 칭얼거림, 사사로운 것으로 여겨집니다.
웹진 연극in은 ‘저항’에 대해 사유합니다. 저항의 대상으로부터 아니라 저항하는 주체의 특수한 환경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몸에 기입되어 습관이 된 저항을, 구호나 선언이 되지 않는 저항을, 그 특이성으로 인해 연대를 요청하기에 적절치 않은 저항을, 대상의 실체가 희미하거나 불분명한 저항을-나는 싸운다. 그러나 무엇과?- 기록하고자 합니다. 이 기록을 통해 동시대 연극의 문제의식 바깥에 있는 인기 없는 문제들을 확인하고, 저항의 안과 바깥을 나누는 경계에 대해 고민하려 합니다.

나는 제법 간신히 살아남은 편이다.
나는 모두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하늘에 구름이 통통하고 땅에 건강한 꽃들이 피어오르는 불평할 것 없는 봄날에는 특히 더욱더 모든 것이 잘못되었고 위태롭다고 느끼는 사람이다.
살다 보면 모든 것이 좋은 날, 정말이지 모든 것이 완벽한 날이 오기도 한다. 모두의 볼에 붉은 핏기가 돌고 모든 문제가 손에 잡힐 듯 명확해 보이는 기적같이 명랑한 날도 일 년에 한 번씩 오기 마련이다. 그런 날이면 인간은 당연한 권리처럼 특별해 보이고 우리 모두가 태양의 자손으로서 사랑받고 있는 것 같다. 대체로 비가 그친 다음 날 인간은 이러한 찰나의 특권의식에 사로잡힌다. 나는 그런 날에 그늘진 곳에 혼자 앉아 알러지가 올라온 얼룩덜룩한 피부를 간신히 가린 채 검은 눈 밑으로 코를 연신 풀며 세상에 내려앉은 행복을 부정한다. 행복하다고 믿는 찰나의 확신에 콧물을 뿌린다. 나는 눈 밑이 검고, 어두운 곳을 찾아다니고, 빛이 내리쬐면 피부가 아프고, 사람들이 행복해 보이면 괜히 언짢고,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 앞에서 마음껏 아프고 또 아프고 연신 코를 풀고 또 코를 푼다. 아마 나를 본다면 무언가에 맞서고 있다는 생각을 못 할 수도 있다. (실제로 나 역시 특별히 맞선다는 생각을 하지 않지만) 그렇지만 나는 언제나 ‘존재’했다. 맑은 날씨에는 먹구름으로, 건강한 모두에게는 질병으로, 무언가에 대해 입을 모아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불편하고 까끌까끌한, 눈썹이 올라간 침묵으로.
조금 당돌하고 음침한 느낌으로 말하자면, 나는 무언가에 저항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바로 저항이다. 마치 버지니아 울프가 죽은 새를 장미 장식의 침대에 올려놓으며 “댈러웨이 부인은 죽은 새가 아니야, 그녀는 장미 장식의 침대 자체야”라고 속삭였던 것처럼, 나는 저항하는 투사가 아니라, 저항 자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억압받지 않거나 억압받을 수 없다. 오히려 ‘내가’ 무언가를 방해할 뿐이다. 그렇게 거창한 방해도 아니다. 그렇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다시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끼처럼 간신히 살아남는 편이다. 즐길 수 없으면 피해 가면서 부지런하지도 게으르지도 않고, 화를 내거나 그다지 행복하지도 않게 이끼처럼 고요히 몸을 부풀리면서 살아간다.

어둠 속에 동그란 스탠드 불빛으로 밝혀진 테이블이 보인다. 테이블 위에는 다기 세트, 꽃이 꽂힌 화병, 그리고 책들이 세워져 있고, 그 뒤로는 하얀 창틀의 큰 창이 있다. 창문이 조금 열려 있다.

나의 일생, 아니 하루 일과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해가 뜨기 직전의 새벽. 나는 햇볕이 들지 않는 곳에 이끼처럼 앉아서, 기다란 손톱이나, 드릴을 이용해서 튼튼해 보이는 벽에 구멍을 낸다. 내가 절대로 하지 않는 일은 벽에다가 다이너마이트를 던지거나, 귀도 없는 벽에다가 괴성을 지르는 것이다. 아토피로 범벅이 된 내 피부를 벽에다가 뭉개가면서 몸을 던지거나 하는 일도 하지 않는다. 대신 나는 벽에다가 기다랗고 기다란 손톱으로, 혹은 제법 소음이 없는 드릴을 사용해 구멍을 뚫는다. 그러고 다시 그늘 속으로 숨어 들어간다. 해가 뜨기 직전의 새벽은 곧 졸린 속눈썹처럼 파닥거리는 푸름을 맞이한 후, 결국 아침이 온다. 이윽고 내가 뚫어놓은 구멍으로 아침 해가 쏟아진다. 벽은 나약한, 간신히 살아남은 이끼 한 점일 뿐인 내가 몰래 뚫어놓은 구멍에 의해, 이제 더 이상은 벽이 아니게 된다. 벽의 중간의 작은 구멍을 통해 개미들이 다닌다. 씨앗들이 운반된다. 벽은 어쩌다 보면 허물어질지도. 아니면 그 벽은 적어도 뚫려버린 자신의 피부를 매만지며, 스스로 벽인 것을 의심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런 방식으로 벽을 무너뜨린다.
둘째, 해가 중천에 뜬 낮. 나는 다시 안전한 아지트로 돌아온다. 아지트는 습기로 가득 차도 되고, 이상하다고 치부 받았던 위험한 냄새들로 가득 차도 상관없다. 변기통이 있는 화장실이어도 좋다. (물론 나만의 방이 있다면 더욱이 좋겠다) 앉을 곳만 있다면, 나는 그렇게 쉽게 그 유명한 옴의 법칙을 지배하는 주인공 옴Ω이 된다. 우하하. 내가 언제나 들고 다니는 공구가 있다. 투명테이프다. 나는 투명테이프와 가위로 연결되지 못했던 모든 것을 연결한다. 그렇다, 꼴라주를 시작한다. 나는 할머니에게 엄청난 기억력을 꼴라주한다. 얼굴이 빨갛게 취한 50대 회사원의 손 부분에 강아지풀 꽃다발을 꼴라주한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여자의 탁자에 안동 간 고등어를 놓아본다. 힙하게 옷을 입고 클럽에 향하는 사람을 1930년에 붙여 본다. 소위 ‘삼성맨’의 호주머니에는 빨간색 곰돌이푸 젤리만 모은 비닐봉투를 넣어둔다. 죽은 건물에게 생선의 눈알을 붙인다. 버려진 가구에게 입술을 붙인다. 한국 여신에게는 힙합을 꼴라주한다. 캠퍼스의 그늘진 곳만 찾아다니는 외로운 학생의 얼굴을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속 유디트 얼굴에 꼴라주 한다. 나는 그렇게 이끼가 보송송 피어오르는 나만의 세상을 꼴라주 해서 만든다. 세상의 장면들, 인물들, 사물들을 도둑질해 온다. 그것들은 이 옴의 창조 속에서 새로운 법칙으로, 완전히 다른 존재로 거듭난다.
셋째, 저녁 식사 시간. 극장들에 불이 켜지고, 영화관에서는 팝콘이 구워진다. 여유가 되는 사람들은 저녁을 신경 써서 먹을 것이다. 꽤 많이 먹을 수도 있다. 여유가 되지 않는 사람이라도 무언가를 먹을 거다. 나는 약간 음흉하게, 순박하게 입을 열고 밥을 먹는 사람들 옆으로 가서, 아주 기똥차게 예쁜 알약을 하나 둘 것이다. 찬란한 푸른색으로 당의정을 마구 덮은 단 하나의 눈을 뜬 듯 똘망한 알약이다. 그들은 물을 것이다. ‘이게 뭐야?’ 나는 주저하면서 말할 것이다. ‘알약이야. 소화에도 좋고, 정력에도 좋고, 암튼 좋대. 피로도 풀린대. 하나 먹어봐’ 그들은 ‘그래?’ 하면서 입안에 예쁜 알약을 털어 넣을 것이다. 달달할 것이다. 그것은 당의정을 두텁게 입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은 매우 쓴 약이다. 그들은 아무 생각 없이 훌륭한 저녁을 먹고, 처음 봤지만 그다지 위험해 보이지 않는 알약을 먹은 채로 잠이 든다. 다음 날 아침, 그들은 발견한다. 왜인지 이유를 도저히 알 수 없지만 세상이 이전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걸. 내가 건넨 푸른색 당의정의 알약은 그들의 몸에 은밀히 들어가 퍼져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한 것이다. 트로이 목마처럼.
이게 내 일과의 전부이다. 구멍을 내거나 이어 붙이는 일이 전부이다. 하지만 성실하게 꾸준히 이렇게 살길 바란다. 별거 필요한 것도 없지 않은가. 기다란 손톱 (손톱이 부러지거나 괴혈병에 걸린 상황이라면 전동드릴), 투명테이프, 가위. 알약.
넷째, 삶에 대해서 얼마 말 안 했지만, 좀 성급하게 말하자면 결국 나는 죽을 것이다.
간신히 살아남았으니까 아쉬울 것도 없지만 그럼에도 언젠가 그런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하지만 꽤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 (별로 할 일도 없지 않은가! 구멍 내거나 이어 붙이기, 그리고 알약을 건네기. 별로 필요한 것도 없지 않은가! 손톱, 드릴, 투명테이프, 가위, 알약) 버지니아 울프처럼 죽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은 유일하고도 대체 불가능한 것이다) 그녀는 물에 빠졌다. 돌덩이를 주머니에 넣고 물에 들어갔다. 버지니아 울프가 물에 있을 때, 그 몸은 다만 하나의 숨진 몸이 아니었다. 수면은 그 몸 위로 진동하고 있었고, 그 진동은 세상의 모든 것을 연결했다. 전쟁 트라우마를 가진 시인과 한 귀족 여인의 우울과 하인의 사랑과 고기파이까지도. 그러니까 그 몸은 숨진 몸이 아니라, 죽은 새가 올려진 장미 침대 그 자체였고, 그 몸 위에 많은 사람들이 누웠다. 그들은 서로의 침대가 되었다. 나도 그렇게 중첩될까? 나의 죽음도 죽음 자체가 아니라 장미 침대 그 자체이도록. 내 위에 어떤 삶이 눕고, 내 위에 어떤 죽음이 눕는 엉킴 말이다.
여기까지가 축약한 하루들과 삶의 결말이다. 나는 무엇에 저항할지 고민하지 않는다. 무엇에 대해서 저항하는 거냐고, 저항의 대상에 대해 규명하라는 말에 흔들리지 않고 그저 입꼬리를 올린다. 그리고 나지막이 속삭인다. ‘정신차리세요. 저항하는 것은 그쪽 몫이고. 내가 바로 그거에요. 옴Ω’.

[사진: 필자 제공]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좋아요 선택 버튼

안정민

안정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연극의 마법을 믿는 작가, 연출가. <달걀의 일>, <유디트의 팔뚝>, <당곰이야기>를 쓰고 연출했으며, <고독한 목욕>, <어린 노인>, <뼈와 꽃> 외 다수의 작품을 썼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