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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요, 거기 누구 없어요?

저항의 각자

이경미

제234호

2023.05.25

저항에 대해 이야기할 때, 연극(계)는 자주 묻습니다. 우리의 저항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그러나 줄곧 묻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너의 저항은 어떤 모양인가. 전자의 질문에 답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대상이 있는 저항은 강하고 분명하며 대상의 크기와 우선순위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후자의 질문에 답하는 일은 까다롭습니다. 삶의 부당한 조건들은 목록화할 수 없이 서로 엉키어 있고, 개인의 저항은 제각기 다른 모양을 갖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온도가 높고 욕망이 개입되며 공공선과의 접합부가 불분명하므로 종종 투덜거림, 칭얼거림, 사사로운 것으로 여겨집니다.
웹진 연극in은 ‘저항’에 대해 사유합니다. 저항의 대상으로부터 아니라 저항하는 주체의 특수한 환경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몸에 기입되어 습관이 된 저항을, 구호나 선언이 되지 않는 저항을, 그 특이성으로 인해 연대를 요청하기에 적절치 않은 저항을, 대상의 실체가 희미하거나 불분명한 저항을-나는 싸운다. 그러나 무엇과?- 기록하고자 합니다. 이 기록을 통해 동시대 연극의 문제의식 바깥에 있는 인기 없는 문제들을 확인하고, 저항의 안과 바깥을 나누는 경계에 대해 고민하려 합니다.

공연 관련 키워드를 인터넷 검색창에 입력하고 엔터를 누르면 인플루언서 관객들이 운영하는 블로그들이 거의 상단을 차지한다. 뭐 하는 사람인가 싶게(직업) 꽤 많은, 다양한 공연을 관람한 뒤, 그 공연들에 대한 후기들을 포스팅해 놓았는데, 해당 공연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꼼꼼히 기록해 놓았다. 게다가 공연을 보고 얼마 안 되어 올리는 글들이라, 나는 종종 해당 공연에 대해 아직 내 안에 식지 않고 남아 있는 생각들을 슬며시 꺼내어 견주어보곤 한다. 좋아요를 클릭한 횟수도 많고 익명의 다수가 댓글로 응대한 내용도 꽤나 흥미롭다. 인플루언서가 달리 인플루언서일까. 솔직히 부럽다.
그럼에도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그들을 대개 ‘일반’ 관객군으로 분류하곤 한다. 그렇다면 다른 한 편에는 소위 ‘전문’ 관객이 있다는 것. 매체의 발달이 큰 영향이겠지만, 이제 어느 영역에서건 ‘일반’과 ‘전문’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는 지금, 그래도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전문관객의 실체는 무엇일까. 자연스럽게 소위 ‘평론(가)’란 존재가 떠오른다. 평/론/가. ‘그리스어 krinein(음식의 썩은 부분과 썩지 않은 부분을 가른다)’. ‘평(評)’. ‘론(論)’. 그리고 ‘가(家)’. 그 단어들이 뿜어내는 위엄 가득한 아우라 때문일까. 아니면 지난 100년이 넘은 연극사 속에 평론 스스로 새겨 넣은 어떤 흔적들, 그리고 그에 대한 학습 때문일까.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그의 저서 『비미학』 서두에서 자크 라캉이 말한 ‘히스테리 주체’와 ‘주인’(기표)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히스테리 주체1)가 주인(기표)을 향해 쉬지 않고 질문을 던진다. “진리는 내 입을 통해 말하고, 나는 여기 있어요. 당신은 알고 있을 테니 내가 누구인지 말해봐요”. 질문을 받은 주인은 온갖 지식을 동원해 답을 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히스테리 주체는 그것은 답이 아니고, 자신의 여기는 절대 붙잡을 수 없을 것이며, 자신을 만족시키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면서 거듭 주인을 쥐고 흔들어댄다. 바디우는 예술과 철학의 관계 또한 이런 것이라고 말한다. “예술은 언제나 이미 여기에 있으면서, 사유하는 자에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반짝이는 무언의 질문을 던진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끊임없는 창조와 변신을 통해 철학자가 자신에 대해 말한 모든 것에 대해 실망스럽다고 말한다”.2) 책을 읽다가 연극과 평론의 관계가 이렇지 않을까 싶었다. 관람객들의 평점도 평점이지만, 그래도 소위 평론을 바라보는 연극의 기대에 찬, 실망하는, 그러면서도 여전히 기대하는 어떤 눈길.

무수한 시간 동안 연극을 움직이게 한 것은 극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세계와 인간을 ‘정확하게’ 보여주고자 하는 욕망이 아니었을까. 눈이 있어도 제대로 볼 수 없는 눈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며 오이디푸스로 하여금 스스로 눈을 찌르게 했던 소포클레스도, 성난 운명의 돌팔매를 그냥 참고 견뎌야 할지 아니면 끝까지 맞서 싸울 것인지를 놓고 햄릿을 고민하게 했던 셰익스피어도, 그 점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정확함’의 기준을 놓고 연극 안에서 여러 다른 의견들이 오고 갔다. 밖으로는 더 이상 어느 하나로 지시되고 재현될 수 없게 점점 모호해지는 세상에 저항하면서, 안으로는 그 저항에 부응하는 연극의 언어들을 다시, 새롭게 찾으려는 시도들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제 더 늦기 전에 ‘휴먼’과 ‘모던’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이 구축해 온 자기 서사 자체를 그것도 인간 스스로 뒤집어야 하는 상황에서, 연극은 또 한 번 세상과 인간의 굳어진 감각에 맞서는 저항을 진행 중이다. 그 저항은 이제껏 연극 안에서 진행된 그 모든 저항들을 몇 배로 넘어서는, 절대 쉽지 않지만 더 이상 지연시킬 수 없는 저항이 될 것이다.

사람 얼굴을 옆에서 본 일러스트레이션. 목에서부터 턱과 입, 코, 이마, 뒤통수의 윤곽선으로 사람 얼굴임을 확인할 수 있다. 윤곽선 안쪽은 크고 작은 온갖 영문 단어들로 가득 차 있으며, 바탕은 검은색이고, 텍스트는 흰색과 회색이다. 한눈에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는 큰 텍스트의 영문 단어들은 다음과 같다. Evaluate, Measure, Admire, Blame, Detract, Justify, Excuse, Analyze, Judge, Assess.

평론을 바라보는 연극의 시선으로 다시 돌아와 보자. 연극은 평론을 향해 질문한다(아직 평론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다면). ‘이런 나를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나를 통해 너는 무엇을 보고 있니? 너라면 이것을 가지고 무엇을 할 생각이니?’ 점점 신뢰를 잃어가는 세상에 맞서면서 한편으로는 이런 자신의 행동이 적절한 것인지, 적절하지 않다면 어떤 다른 방법이 있을지에 대해 스스로 묻고 또 물으면서 연극이 슬쩍 보내는 시선 끝, 거기가 평론의 자리다. 평론의 정체성이란 것도 처음부터 정해진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이 절대 연극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그 시선에 응대하는 행위 자체, 그것이 평론의 정체성이다. 지금/여기의 평론을 다시 살핀다. 나는 저만치서 나를 바라보는 연극의 시선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 걸까. 아니 연극이 나를 바라보고 있기는 한 걸까.

저항 중인 연극을 거울삼아 나라는 평론을 비춘다. 거울 속이 텅 비었다. 내가 없다. 연극의 시선 밖으로 밀려난 나라는 평론, 평론을 고민하지 않는 평론가. 순간순간 달라지는 연극의 질문에 응대하면서 그 질문이 연극으로 하여금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제2, 제3의 질문으로 확장될 수 있도록 하는 대신, 자기 세계에 빠져 딱딱하게 굳어버린 말들만 반복하고 있다. 평론‘가(家)’로서 나의 전문성은 지시하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연극이 ‘제대로 해방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는 걸 나만 모르고 있다. 평론을 잃은 평론가로도 모자라 그냥 나이 먹은 꼰대로 자기 안에 쌓인 온갖 감정을 여과 없이 뿜어내면서, 나와 비슷한 동업자 무리들과 깊숙한 웅덩이 안에 웅크리고 있다. 모든 연극의 언어들을 존중하며 그 언어가 스스로 자신을 계속 추동시킬 힘을 발견할 수 있게 하는 대신에, 특정 언어만을 존중하고, 특정 공동체에 속한 자들만 지지하고 연대하고 있다. 극장 바깥에 난무하는 혐오 발언을 자신과 다른 언어를 가진 이들을 향해 서슴지 않고 뿜어내고, 일반 관객보다 더 극장을 찾지 않으면서도 평론가라는 이름을 꽉 붙들고 놓으려 하지 않는다. 어쩌다 주어진 평론의 공간을 생명력 없는 언어들로 채워 넣으며, 그저 양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려고 한다. 이미 연극이 더 이상 나를 바라보지도, 질문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만 모른다. 냉소에 가득 차 나를 바라보는 연극의 시선이 내 답이 오래전에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나만 알지 못한 채 그냥 억울해한다. 나의 언어는 오래전에 낡아버렸고, 그래서 스스로 노력할 힘이 없다면 기꺼이 사라질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을 나만 인정하지 않는다. 나에게 평론가로서의 전문성을 부여하는 것은 나 자신도, 같은 무리 안에 모여 있는 사람들도 아닌, 나를 바라보는 연극이라는 것을 나만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다.
내 안에 꺼지지 않고 남아 있는 이 끔찍한 환상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나에 맞서지 않으면, 내 스스로 나에게 저항하지 않으면, 나는 영원히 연극의 시각 밖으로 사라질 텐데 말이다. 연극의 저항에 제대로 응대하지 않는 나는 늙,었,다. 연극은 나를 바라보지도, 질문하지도 않는다. 똑똑똑! 거기 누구 없어요? 나 평론이에요!

  1. 참고로 라캉이 말하는 히스테리적 주체는 의학적 질병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절대로 타자에 의해 규정되고 지시되어지는 것을 거부하면서 동시에 그 이상으로 타자의 유일한 대상이 되고자 계속해서 타자를 향하며 그를 욕망하는 존재”이다.
  2. 알랭 바디우, 장태순 옮김, 『비미학』, 이학사, 201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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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미

이경미
한편의 연극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이 극장, 저 극장을 기웃댄다.
'잘 만든' 연극 보다는 꿈틀대는 파동이 느껴지는 연극을 좋아한다.
http://blog.naver.com/purun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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