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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에 몇 번 사지도 않는 로또를 두고 당첨금으로 뭘 할지 이야기한다

저항의 각자

정호진

제238호

2023.07.27

저항에 대해 이야기할 때, 연극(계)는 자주 묻습니다. 우리의 저항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그러나 줄곧 묻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너의 저항은 어떤 모양인가. 전자의 질문에 답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대상이 있는 저항은 강하고 분명하며 대상의 크기와 우선순위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후자의 질문에 답하는 일은 까다롭습니다. 삶의 부당한 조건들은 목록화할 수 없이 서로 엉키어 있고, 개인의 저항은 제각기 다른 모양을 갖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온도가 높고 욕망이 개입되며 공공선과의 접합부가 불분명하므로 종종 투덜거림, 칭얼거림, 사사로운 것으로 여겨집니다.
웹진 연극in은 ‘저항’에 대해 사유합니다. 저항의 대상으로부터 아니라 저항하는 주체의 특수한 환경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몸에 기입되어 습관이 된 저항을, 구호나 선언이 되지 않는 저항을, 그 특이성으로 인해 연대를 요청하기에 적절치 않은 저항을, 대상의 실체가 희미하거나 불분명한 저항을-나는 싸운다. 그러나 무엇과?- 기록하고자 합니다. 이 기록을 통해 동시대 연극의 문제의식 바깥에 있는 인기 없는 문제들을 확인하고, 저항의 안과 바깥을 나누는 경계에 대해 고민하려 합니다.

일 년에 몇 번 사지도 않는 로또를 두고 당첨금으로 뭘 할지 이야기한다. “나는 로또 당첨이 되면 옷으로 돈 버는 일은 당장 그만두고 취미로 할 거야”라고 이야기하면 늘 이야기를 듣는 상대방은 “야! 그 돈으로 인생 역전은 안 돼”라고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이대로의 미래라면 로또 당첨금액이 내가 평생 옷을 만들어서 벌 수 있는 돈보단 훨씬 많을 테고, 노동으로부터 내가 좋아하는 일을 알맞은 형태로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지난 6년 동안, 오후 5시 30분부터 10시 45분,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식당에서 일을 했다. 공연 스케줄이 잡히면 미리 가게에 이야기해 출근 스케줄 조정이 가능하고, 약속된 근무시간이 지나면 초과한 시간은 분 단위로 계산되어 월급으로 들어온다. 뿐만 아니라, 가장 좋았던 것은 식당에서 일을 하는 시간만큼은 내가 디자이너가 아니어도 된다는 것이다. 손님들에게 정해진 서비스를 제공하고, 손님이 주문한 음식만큼 금액이 부가되어 계산이 끝나면 관계는 종료된다. 이 일이 꽤나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일을 생계를 위한 아르바이트라고 말하지 않는다.
식당 일은 부모님으로부터 독립을 하고 안정적인 수입이 필요해서 시작한 것이었다. 옷과 관련된 일은 늘 있었지만, 손에 쥐어지는 돈은 살아남기를 가능하게 하지 않았다. 이 시기, 내게 맡겨지는 일들은 커다란 타이틀과 함께 아주 자그마한 돈을 인질 삼아 헌신을 요구하는 것들이었는데, 주로 하는 일은 경청과 지시에 충실히 따르는 것들이었다.
친구의 추천으로, 서울시에서 심리상담을 무료로 지원하는 청년 마음건강 프로그램을 등록하고 심리상담사를 만났다. 내 얘기를 듣고 있던 상담사는 이야기한다. “호진 씨가 원하는 작업의 방식과 금액, 작업 컨디션을 요구하면 어때요? 어차피 식당에서 안정적으로 버는 돈도 있겠다, 크게 욕심나는 작업이 아니라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몸과 마음 다쳐가며 괴롭게 일하는 것보단 낫잖아요?”
때마침 공연 의상 의뢰가 들어왔고, 용기 내어 아주 구구절절하게 말을 했다. “제가 상담을 받고 있는데요”로 시작해서 “이런 건 하기 싫고”를 지나 “그래서 저는 이만큼은 받아야겠습니다”라고 끝나는. 다소 거칠게 정돈되지 않은 요청은 다행히 받아들여졌고, 식당으로 출근하는 시간을 지켜내며, 디자인을 간섭받지 않고, 책정된 금액도 아주 잘 받았다. 나를 입증하는 방법이 “나는 이렇게 하고 싶어요”였다니. 이 간단한 원리가 허탈했다. 이 이후로, 다시 생각해도 민망한 구구절절 설명의 방법을 다신 쓰지 않았다. 대신 일을 하면서 내가 발견한 문제점들은 한 줄의 문장이 되어 다음 일을 할 때의 계약서 조항으로 추가되어 갔다. 계약서는 단지 형식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식당과 옷 만드는 일을 병행하며 오는 문제들이 종종 발생했다. 작업에 더 많은 열정을 할애하지 않는다는 소리를 듣는다거나, 의논할 것(a.k.a 일감)을 가지고 일하고 있는 식당에 찾아온다거나, 바뀐 디렉션을 전달받지 못한다거나, 다른 사람에 의해 옷이 난도질이 되어있다거나, 뿐만 아니라 계획에 없던 스케줄이 갑작스럽게 생겨나 식당에 폐를 끼치기도 한다. 당황스럽다. 나는 하루에 정해진 시간을 성실하게 디자이너로 살았는데, 디자이너가 아닌 시간까지 디자이너이길 강요받아야 한다니.
생각해 보면, 이 문제는 단지 디자이너로 사는 시간에 있는 게 아니라 작업을 만드는 구조에 있다. “연출가/안무가의 요구에 따라 제작한다”, “진행에 있어 납품에 차질이 없도록 한다” 계약서에 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항목이다. 데드라인이 이미 정해진 상태에서 프리프로덕션의 과정도 없이, 앞뒤를 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 작업들이 데드라인을 향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단단한 코어 아래 좋은 교집합으로 만나는 행운도 있는가 하면, 시행착오를 겪을 시간도 없이 작업을 하다 보면 종종 바뀐 디렉션을 만난다. “납품”을 해야 하는 내겐 바뀐 디렉션이나 회의가 추가적인 수당을 보장하는 경우도 드물지만, 그것에 대해 더 깊게 고민을 해보기 위해, 혹은 변화된 디렉션에 따라 또 다른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보장되어야 할 작업시간은 없다. 데드라인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더 좋은 공연을 만들기 위해서’ 행해지는 이 행위들은 누구를 위한 것이며, ‘연출가의 요구에 따라 진행하여 차질 없이 납품해라’로 읽히는 이 항목들은 왜 무겁게 늘 그곳에 있는가?
최근 나는 ‘식당을 그만두겠다’는 결심을 하고, 그 변화를 두렵게 준비하고 있다. 그 결심을 하게 된 것은, 지속적으로 피해를 보고 있는 가게에 대한 마음의 짐이 늘 있었고, 더 이상 공평하게 두 가지 일이 공존할 수 없다고 판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더 좋아하는 일을 고르는 것과는 무관하다. 더 헌신하겠다는 의지도 아니다.

그런 결심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오랜 업력을 가진 안무가를 우연히 마주쳤고, “늘 바쁘지? 공연 의상은 혼자 다 하는 것 같아~”라는 말을 들었다. 1년에 많게는 11개쯤, 제작환경이 안정적이고 홍보 능력도 있는 규모의 공연들을 주로 하다 보니, 크레딧에서 내 이름이 자주 보일 테고, 그렇게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5월 종합소득세를 신고하며, 지난 한 해 내가 옷을 만들고 얼마를 벌었는지를 본다. 여전히 가게에서 하는 일은 나의 생활을 큰 몫으로 지탱하고 있는데, 식당을 그만두는 게 정말 맞을까? 한 번 더 고민하게 되었다. 이제 가게를 떠나게 되면, 더 많은 일을 받아야 할 텐데… 오히려 내게 더 많은 헌신을 요구하면 어떡하지? 아슬아슬한 이 구조 속에서 나를 이곳에서 어떻게 지켜야 하지? 생각했다.
저항에 대한 원고를 요청받았을 때, 이 글을 써야 한다고 너무 당연하게 생각이 들어 글을 빠르게 써 내려갔다. 산만하게 나열되어 있어서 어떤 것을 위한 저항인지도 모를 이 글이 마무리를 향할 때 글쓰기가 멈췄다. 아슬아슬하게 쌓인 구조 안에는 나도 있는데, 이 기둥의 연약한 부분들을 내 손으로 힘껏 때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이 글로 나도 다치게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여러분이 딛고 있는 이 구조는 이상해요!”라는 글을 써도 괜찮을까? 홀로서기를 앞두고 후회하지는 않을까?
결심이 서지 않아 한참을 닫아놓았다가 마감일이 가까워 커피를 내리고 쑥떡과 얼린 바나나를 차려놓고 글을 완성하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로또 당첨이 없다면, 살기 위해 이 구조의 취약한 부분에서 나를 지켜야 한다. 천천히 다시 읽어보았고, 저항의 글이라면 이대로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한 구조 속에서 열 받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계신 여러분께 이 글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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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진

정호진
PAUS artisanal의 디자이너, 만듦새와 미적 요소들을 보여주는 것 이외에도, 뼈대와 본질이 되는 철학과 기능, 미의식과 가치의 균형을 이룬 것들을 고민하며, 다른 영역의 브랜드, 아티스트들과 협업을 통해 패브릭을 기반한 넓은 스펙트럼의 작업을 하고 있다.
https://www.instagram.com/paus.offic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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