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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보 받기

저항의 각자

전혜인

제239호

2023.08.10

저항에 대해 이야기할 때, 연극(계)는 자주 묻습니다. 우리의 저항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그러나 줄곧 묻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너의 저항은 어떤 모양인가. 전자의 질문에 답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대상이 있는 저항은 강하고 분명하며 대상의 크기와 우선순위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후자의 질문에 답하는 일은 까다롭습니다. 삶의 부당한 조건들은 목록화할 수 없이 서로 엉키어 있고, 개인의 저항은 제각기 다른 모양을 갖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온도가 높고 욕망이 개입되며 공공선과의 접합부가 불분명하므로 종종 투덜거림, 칭얼거림, 사사로운 것으로 여겨집니다.
웹진 연극in은 ‘저항’에 대해 사유합니다. 저항의 대상으로부터 아니라 저항하는 주체의 특수한 환경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몸에 기입되어 습관이 된 저항을, 구호나 선언이 되지 않는 저항을, 그 특이성으로 인해 연대를 요청하기에 적절치 않은 저항을, 대상의 실체가 희미하거나 불분명한 저항을-나는 싸운다. 그러나 무엇과?- 기록하고자 합니다. 이 기록을 통해 동시대 연극의 문제의식 바깥에 있는 인기 없는 문제들을 확인하고, 저항의 안과 바깥을 나누는 경계에 대해 고민하려 합니다.

‘나는 무대에서 안정감을 느끼나?’ 공연 연습이 한창일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등장 전까지 너무 긴장한 채로 있다 보니 정작 무대 위에서 어떤 상태로 내가 존재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상대 배우는, 연출은, 기획자는, 관객들은 과연 극장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있을까. 갑자기 떠오른 질문을 시작으로 혼자 묻고 답하기를 하다 보면 가장 기본적인 것들에 의구심이 든다. 우리는 관객을 극장에 초대한다. 우리는 준비한 게임을 하기 위해서 관객을 환대한다. 이런 태도는 공연 작업자와 관객의 관계를 만들어내고 공연이 지속되는 동안 계속해서 극장이라는 공간에 영향을 미친다. 실제로 공연 작업자들이 ‘우리가 관객을 충분히 반기고 있는가’를 얼마나 신경 쓰는지에 따라 관객이 느끼는 안정감이 미묘하게 달라지는 것을 느낀 적이 있다. 그럼, 배우와 관객이 서로를 충분히 환대한다면 나는 무대에서 안정감을 느낄 수 있을까?
연습을 끝내고 집에 거의 도착했을 즈음 연극 작업이 나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사실이 무대 위에서의 안정감을 담보하는 것 같은 환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보다 명확한 답을 내리기 위해서는 ‘그랬던 것 같아’ 하는 어렴풋한 감각이 아니라 지금까지 해온 작업을 차근히 살펴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각 작업에서 어떤 논리로 존재하고 있었지? 바로 직전의 공연과 이전 공연은 어떤 차이가 있나? 처음 무대를 밟을 때 관객과 나는 어떤 관계를 형성하고 있지? 나는 내 시간에 충실했나? 여러 고민 끝에 적어도 지금의 나는 무대에서 일종의 안정감을 느끼고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때의 안정감은 불안을 딛고 정확하게 살아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넘치는 생동감과 삶의 감각이라기보다 명료한 근거를 가지고 필요한 만큼의 시간을 살아낼 때의 감각. 근거 있는 삶, 이보다 더 안정적인 순간이 있을까?
반면 연극 밖의 내 삶에서는 안정감을 느끼기 힘들다. 항상 옅고 모호하고 근거를 찾아볼 수 없는 불안감으로 가득 차 있다. 어느 날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시간이다가 어느 날은 너무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또 어느 날은 너무 많은 일을 해야 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인다. 책을 읽는 동시에 운동해야 할 것 같고, 다음 작업을 준비하는 순간에도 돈을 벌어야 할 것 같다. 곳곳에 퍼져있는 몸의 감각은 오히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어디에도 딛고 일어설 땅이 없어서 허우적거리다가 잠을 자고, 급하지 않은 결정들은 최대한 미뤄본다. 이건 ‘아무것도 선택 안 하기’라는 새로운 저항이야 변명을 해보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불안이 닥치면 ‘눈앞의 물질들을 재확인하며 전전긍긍하기’라는 소심한 저항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 어느 때보다 각성해서 모든 것에 저항해야 할 것 같은데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것에도 저항하지 못할 것만 같다. 갑자기 “넌 되게 우유부단한 면이 있어”라던 고등학교 친구의 말이 생각난다. 당시엔 친구에게 화를 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친구는 꽤 정확하게 나를 보고 있던 게 아닐까. 공연을 하고 있지 않은 나는 선택을 계속 유보하고 최소한의 책임만을 지고 싶어 하는 우유부단―맨이니까. 일상에선 저항을 빙자한 아무것도 안 하기를 선택해도 그 업보 미루고 회피할 수 있을 것만 같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업보를 긴 시간에 걸쳐서 느슨히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스테인리스 냉면 그릇 하나가 놓여 있고, 그 위에 똑같은 냉면 그릇을 뒤집어 얹어두었다. 그릇이 빛을 받아 희미하게 주변을 반사한다.
점심으로 먹은 평양냉면 그릇. 점심 식사 메뉴를 결정하는 것도 유보할 수 있음.
이런 일상의 업보는 돌아와도 흐릿하다고 생각하지만, 아닐지도.

하지만 연극 안의 삶에서 이러한 선택 안 하기 - 업보 피하기는 통하지 않는다. 이곳에선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좋든 싫든 공연이라는 업보의 시/공간이 마련된다. 주어진 업보의 시/공간에 아무런 준비 없이 내던져지지 않으려면 무조건 저항해야 한다. 정확하게 이해하고 명료한 근거를 찾고 선택하고 행동을 설계해야 한다. 불안감을 건져내서 살펴보고 깎아내고 계속해서 뚜렷하게 만드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렇게 해야만 무대 위에서 관객을 만나는 동안 존재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야만 극장에는 ‘피드백’ 혹은 다른 이름으로, 업보들이 관객과 배우 사이를 오갈 것이다. 이 삶에도 분명히 출처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존재한다. 선택을 유보하기 위한 무수한 변명거리도 준비되어 있다. 내가 하는 결정과 행동이 누군가를 공격하는 건 아닐까, 내 가시범위 밖에 더 중요한 것들이 있지는 않을까, 혹시 내 의도와는 다르게 오해가 발생하면 어떡하지. 하지만 연극에서 그런 이유로 아무런 선택도 하지 않는다면 그에 대한 책임을 무조건 져야 한다. 이곳에선 업보를 피하고 미루고 느슨히 받을 수 없다. 오히려 절대로 도망칠 수 없는 순간에 뭉쳐서 한 번에 받는 방법만이 가능하다.
한번은 공연을 마치고 커튼콜을 하러 동료 배우들과 다시 등장해야 하는데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던 적이 있다. 차라리 무대 위에 내가 없었으면 했던 것 같다. 약 한 시간 동안 업보의 시간을 겪고 난 후였다. 당시에는 그게 조금 억울했는데 모든 일정이 끝나고 돌아보니 내가 주저하고 모호하게 남겨둔 선택들 사이로 구멍이 송송 나 있었다. 차곡히 쌓인 업보가 그 구멍을 비집고 들어와 나에게 안착했던 것이다. 이렇게 작은 틈도 놓치지 않는 업보는 관객과 배우, 극장 사이에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않음으로 찾아온다. 서로가 만나 그 어떤 관계도 맺지 않고 헤어지는 방식으로 받게 된다. 극장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것도 작동하지 않고 아무런 관계도 형성되지 않는, 놀랍도록 그 어떤 가능성조차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 되어버린다. 참 신기하게 연극 밖의 삶에서 업보는 현상 유지로 다가오기도 하는데, 이곳에선 철저히 현상 없음으로만 발현된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무대 위에서 나는 안정감을 느끼고 정확하게 살아 있을 수 있다. 연극을 하는 내내 안개 속에 덮여있는 불안을 꺼내 보며 이름 지어줬기 때문에. 계속해서 저항하고 선택하고 기꺼이 책임을 지는 연습을 하기 때문에.

[사진: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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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인

전혜인
음이온의 팀원으로, 배우 및 퍼포머로 활동 중이다. 느슨하게 덮쳐오는 불안감에 은근히 빗겨나가기를 항상 시도해 본다. 덕분에 일상의 미뤄둔 선택들은 연극에 모두 쏟아붓고 있다.
@jhy_ein(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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