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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의 저항, 저항의 연극성

저항의 각자

윤수련

제240호

2023.08.24

저항에 대해 이야기할 때, 연극(계)는 자주 묻습니다. 우리의 저항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그러나 줄곧 묻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너의 저항은 어떤 모양인가. 전자의 질문에 답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대상이 있는 저항은 강하고 분명하며 대상의 크기와 우선순위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후자의 질문에 답하는 일은 까다롭습니다. 삶의 부당한 조건들은 목록화할 수 없이 서로 엉키어 있고, 개인의 저항은 제각기 다른 모양을 갖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온도가 높고 욕망이 개입되며 공공선과의 접합부가 불분명하므로 종종 투덜거림, 칭얼거림, 사사로운 것으로 여겨집니다.
웹진 연극in은 ‘저항’에 대해 사유합니다. 저항의 대상으로부터 아니라 저항하는 주체의 특수한 환경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몸에 기입되어 습관이 된 저항을, 구호나 선언이 되지 않는 저항을, 그 특이성으로 인해 연대를 요청하기에 적절치 않은 저항을, 대상의 실체가 희미하거나 불분명한 저항을-나는 싸운다. 그러나 무엇과?- 기록하고자 합니다. 이 기록을 통해 동시대 연극의 문제의식 바깥에 있는 인기 없는 문제들을 확인하고, 저항의 안과 바깥을 나누는 경계에 대해 고민하려 합니다.

뉴욕 맨해튼 타임스퀘어에 위치한 스웨덴계 다국적 의류브랜드 H&M 플래그십 스토어 앞에 한 아시아계 여성이 앉아 재봉틀로 미화 1달러 지폐 두 장과 삼분의 이가량 되는 조각을 이어 붙이고 있다. 미화 2.33달러, 우리 돈으로 약 3,195원. 최근 인플레이션과 금리 인상으로 인한 환율 변화를 감안하더라도 적은 돈이다. 타임스퀘어를 가득 메운 보행자들 그 누구에게도 눈길 하나 주지 않고, 매서운 뉴욕 추위에 곱은 손으로 여성은 묵묵히 지폐들을 바느질한다.

캄보디아계 미국인 작가 캣엥(Kat-Eng)의 <3달러보다 적은(Less than Three)>이라는 2014년 솔로 듀레이셔널(durational) 퍼포먼스이다. 같은 해 1월, 임금인상 및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캄보디아 봉제공장 노동자들이 벌였던 시위를 정부가 강경 진압하면서 유혈사태가 발생하였고1), 이 과정에 5명이 사망, 20여 명이 중상을 입었다. 캣엥은 당시 노동자들의 하루 임금 2.33달러를 기억하며 글로벌 자본주의와 소비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뉴욕의 중심에서 하루 동안 (정확히는 8시간 내내) 이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재봉틀 돌림바퀴를 돌리고 있는 여성의 뒷모습을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이다. 
          재봉틀은 콘크리트 바닥 위에 놓인 플라스틱 상자 위에 얹어져 있고, 돌림바퀴는 여느 재봉틀에 달린 것보다 훨씬 큰 수레바퀴 같은 모양이다. 
          여성이 재봉질하고 있는 것은 1달러짜리 미국 지폐이고, 재봉틀 앞쪽으로는 캄보디아 국기가 깔려 있다.
캣엥, <3달러보다 적은> (2014), 뉴욕 타임스퀘어 (유튜브로 보기)

얼핏 한국 시위현장에서 더러 볼 수 있는 연좌농성(sit-in)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이 퍼포먼스는 단순한 시위는 아니다. 그러면서도 무대화한 ‘순수한’ 의미에서의 미학적 표현에만 그치지도 않는다. 동포들이 생존권을 주장하다 국가폭력에 의해 죽어가는 현장을 직간접적으로 목격했을 때, 예술가는 이에 어떤 저항적 자세를 취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은 어떤 형태일 수 있는가?

퍼포먼스 학자 켈리 정(Kelly Chung)은 캣엥과 같은 예술가들이 현장의 여성노동자, 특히 아시아계 여성의 몸과 연결 지은 저항적 퍼포먼스를 펼칠 때, 기존의 시위나 저항전략과는 다른 효과가 드러난다고 보았다. 이 같은 작업은 피켓을 들고 파업을 선언하고 농성을 벌이는 기존의 시위 및 저항전략 문법을 낯설게 하고, 저항의 익숙한 속도, 순서, 리듬을 거스른다. 켈리 정이 지적하듯, 8시간 동안 이어진 느릿느릿한 노동의 움직임은 실제 캄보디아 H&M 하청업체 공장에 10시간에서 12시간가량을 앉아 재봉틀을 돌리는 봉제노동자와 연결되어 있다. 이를 지켜보는 관객이 ‘이것이 라이브 퍼포먼스일까, 진짜 노동일까’ 헷갈리게 만듦으로써 재현과 프레젠스 사이의 경계를 교란하고, 뻔한 미학적 저항의 범주에 의문을 갖게 한다2).

물론 예술가만이 가능한 저항에 대해 얘기하는 과정에서 예술의 예외성을 강조하는 오류를 범할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이때 깊이 고려할 것은 일상적 저항의 연극성이다. 여기서 ‘연극성’은 ‘가짜’, ‘과장’, ‘허위’를 뜻하는 부정적인 단어가 아니다. (‘연극성 성격장애’라는 이름 역시, 현실과는 동떨어진 과장되고 극적인 연극의 전시성을 뜻하는 histrionic이라는 단어에 뿌리가 있다) 그보다는 연극이라는 개념을 통해 자칫 사소한 일상의 한 부분으로 지나칠 수 있는 행동들의 외연을 확장하고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는 의도가 있다. 일상적 저항을 연극이라는 프레임으로 이해한다면, 미처 보지 못했던 일상의 정치성이 어떤 식으로 새로이 드러나는가?

퍼포먼스학자 마르셀라 푸엔테스(Marcela Fuentes)가 분석한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시위방식이 한 사례가 될 수 있겠다. 2001년 아르헨티나 디폴트(국가 부도) 선언 당시 금융 불안정과 외국인 투자자본 유출이 연이어지면서 은행에는 말 그대로 현금 자체가 동이 나는 웃지 못할 사태가 일어났다3). 시민들은 페소 가치 하락으로 평생 모은 예금이 휴지 조각이 되는 과정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면서도, 은행 현금보유분이 동이 났기에 인출조차 할 수 없는 이상한 상황에 묶였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민이자 배관수리공인 마르셀로 왁스타인 씨는 “은행 때문에 이번 여름 아무 데도 갈 수 없게 되었으니 우리가 갈 수 있는 유일한 장소에서 휴가를 보내겠다. 바로 은행에서!”라는 선언과 함께 가족들을 대동하고, 파라솔, 캠핑 의자, 선크림, 보온병, 비치볼을 들고 다국적 금융기업 HSBC 로비에 나타났다. 이 점거시위를 위해 가족들은 전날 밤 휴가 짐을 꾸리듯이 좋아하는 드레스를 고르고, 플립플롭을 신고, 비키니를 챙겼다. 매일 은행 영업시간이 종료되면, 왁스타인 가족들은 휴가철 옷차림 그대로 대법원으로 향하여 냄비와 프라이팬을 두들기며 시위하는 다른 시민들에 동참하였다.

선글라스를 끼고 캠핑 의자에 앉아있는 중년의 여성과 남성, 청소년이 보인다. 그 뒤로 사람들이 길게 줄을 지어 늘어서 있다. 
          작은 이미지를 확대해서 선명하지 않은 흑백 사진이다.
2001년 다국적 금융기업 HSBC의 부에노스아이레스 바리오 노르떼 지점 로비에서 왁스타인 가족이 ‘휴가’를 보내고 있다. 왁스타인 가족 뒤에는 은행 창구 앞에 길게 줄 선 시민들이 보인다4).

‘바까시오네스 엔 엘 방꼬’(은행에서의 휴가)라는 이름의 이 ‘퍼포먼스’를 분석한 마르셀라 푸엔테스는, 왁스타인 가족의 ‘휴가’ 점거시위가 유령처럼 사라진 자본의 형체를 다시 소환하고, 이 과정에서 평범했던 시민들이 다국적 금융그룹, 정부, 자본주의의 결탁을 비판하는 능동적인 지식생산자이자 시민운동가가 되어가는 모습에 주목했다. 은행 창구에서 번호가 불리길 기다리며 수동적으로 앉아있던 은행 고객들의 일상적이고 별것 없는 습관이, ‘은행에서의 휴가’라는 독특한 점거시위를 통해 적극적 개입의 행동으로 탈바꿈한 것이었다5).

이 두 저항전략은, 연극 현장의 저항과 무대 밖 ‘현생’의 저항이 각자 특수하면서도 동시에 서로에게 침투하고 공존하고 경계를 확장하는 것임을 실감 나게 보여준다. 연극은 저항을 통해 일상에서 명명되지 않은 몸들을 소환하여 가시화하고, 일상에서의 저항은 연극이라는 틀에 힘입어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부여받는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미처 사유하지 못한 저항의 다양한 형식들, 그리고 ‘연대’, ‘정의’, ‘저항’이라는 추상적인 목표들이 어떻게 구체적인 물질성을 갖게 되는지 깨닫는다.

  1. 시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재욱·김명진, 「한국 공장에 배치된 군인들 “노 포토!” 총부리」, 『한겨레』, 2014.1.15 참고.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asiapacific/619813.html.
  2. 켈리 정(Kelly Chung), 「느리게 수면보행하기: 캣엥과 공동시간 속 ‘살아있는 노동’의 페미니스트적 기술(Sleepwalking Slowly: Kat Eng and the Feminist Art of Living Labor in Common Time)」, ASAP/Journal, 4권 3호, 2019, 601-618쪽.
  3. 2001 아르헨티나 경제위기에 대해서는 이성형, 「아르헨티나 국가부도 위기 – 국가신용도 또 떨어져, 세계 최하위」, 『프레시안』, 2001.10.12 참고.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41133.
  4. 이미지 출처: https://www.pagina12.com.ar/diario/sociedad/3-1197-2002-01-25.html.
  5. 마르셀라 푸엔테스(Marcela Fuentes), 『퍼포먼스 별자리: 라틴아메리카의 시위와 액티비즘의 네트워크(Performance Constellations: Networks of Protest and Activism in Latin America)』, 미시건대학교출판사, 2019, 60-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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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수련

윤수련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학술연구교수. 퍼포먼스와 인종·민족·국가의 상관관계에 대해 연구하고, 이를 바탕으로 노스웨스턴대, 예일대, 링난대, 이화여대에서 강의하고 다수의 학술지에 논문과 에세이를 실었다.
홈페이지 sooryonyo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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