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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 번아웃을 대하는 자세

저항의 각자

윤수련

제241호

2023.09.07

저항에 대해 이야기할 때, 연극(계)는 자주 묻습니다. 우리의 저항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그러나 줄곧 묻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너의 저항은 어떤 모양인가. 전자의 질문에 답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대상이 있는 저항은 강하고 분명하며 대상의 크기와 우선순위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후자의 질문에 답하는 일은 까다롭습니다. 삶의 부당한 조건들은 목록화할 수 없이 서로 엉키어 있고, 개인의 저항은 제각기 다른 모양을 갖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온도가 높고 욕망이 개입되며 공공선과의 접합부가 불분명하므로 종종 투덜거림, 칭얼거림, 사사로운 것으로 여겨집니다.
웹진 연극in은 ‘저항’에 대해 사유합니다. 저항의 대상으로부터 아니라 저항하는 주체의 특수한 환경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몸에 기입되어 습관이 된 저항을, 구호나 선언이 되지 않는 저항을, 그 특이성으로 인해 연대를 요청하기에 적절치 않은 저항을, 대상의 실체가 희미하거나 불분명한 저항을-나는 싸운다. 그러나 무엇과?- 기록하고자 합니다. 이 기록을 통해 동시대 연극의 문제의식 바깥에 있는 인기 없는 문제들을 확인하고, 저항의 안과 바깥을 나누는 경계에 대해 고민하려 합니다.

‘저항’에 대한 기획 글 두 편을 청탁받은 뒤 소재 생각에 한동안 골몰했다. 그 중 첫 글은, ‘저항의 양식’은 연극을 통해 어떻게 사유할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이었다. 평소 국내 소개되었으면 했던 퍼포먼스, 시민시위, 학자들의 글을 다루며 저항이 통상적인 연극무대 밖에서 물질성을 가지면 어떤 형태일지 일례를 제공해주길 기대하고 썼다. 문제는 두 번째(이자 기획을 마무리하는), 바로 이 글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저항을 사유한 대부분의 다른 기획 글들과 달리 내가 쓴 글들은 전지적 관찰자 시점을 견지하는 학자의 ‘유체이탈’ 화법으로 쓰여진 글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리고 이것이 실은 스스로 저항에 대해 고민하기를 회피하는 전략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어쩌면 편집위원들이 기대한 역할이었을 수는 있겠다. 연구자로서 그러모을 수 있는 지식과 연극사적 정보들을 통찰력 있게 독해하고, 그래서 연극이라는 테두리 안팎을 기준으로 저항의 윤곽을 보다 날카롭게 그려내는 것. 그런 목적을 위해 연극인들이 실행한 다양한 쟁의들의 역사를 정리할 수도 있고, 저항에 대한 연극적 실천의 연대기를 이론화해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다른 성격의 글, 정확히는 저항을 둘러싼 피로와 번아웃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보기로 한다. 저항의 선형적 역사를 추적하기보다, 지금 시점에서 저항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 말이다. 그것은 과연 결국에는 오롯이 정의롭고 해방적일 수 있을까. 아니면 저항이라는 단어가 가진 당위성에 우선순위를 내어주고 미처 하지 못한 불편한 얘기들이 안에서 곪고 있었던 건 아닐까. 이건 연극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연극이 속한, 아니 연극이 담아내고 있는 사회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또는 저항에 대한 피로감을 겪고 있는 연구자 스스로를 연극현장의 현실에 투사하면서 해답을 모색해보려는 시도일 수도 있다.
철학자 수전 브라이슨은 2016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 당시 나라 전역에서 일어났던 저항운동을 보며 참여자들이 소위 ‘시위 피로(protest fatigue)1)’를 호소하는 현상을 흥미롭게 관찰했다. 시위 피로는 법학자 리처드 톰슨 포드가 제안한 개념으로, 역시 트럼프 당선 직후 이어진 저항이 제대로 된 사회변혁으로 실현되지 못한 채, 형식적인 시위의 연속으로만 이어질 것을 냉소하고 의심하는 태도를 뜻한다2). 대통령 당선자가 내뱉은 시대착오적인 여성혐오, 인종차별 언사에 대해 뭇 시민들이 “내가 아직도 이딴 X같은 일로 시위를 해야겠어?(I Can’t Believe I Still Have to Protest This Shit)”라는 구호를 외치게 된 것이 대표적인 시위 피로의 표현이다. 반 세기 가깝도록 흑인민권운동, 여성인권운동, 반전시위 등 수없이 많은 시위를 해왔음에도 ‘도돌이표인가, 그것도 21세기에?’ 하는 반문은 피로와 답답함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3).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시위 현장. 
          한 참여자가 들고 있는 팻말에 “I CAN’T BELIEVE WE STILL HAVE TO PROTEST THIS SHIT”이라고 쓰여 있다. “STILL”이라는 단어에 밑줄이 그어져 있다.
2017년 3월 세계여성의날을 기념함과 더불어 그 해 막 임기가 시작된 트럼프 대통령의 여성혐오에 저항하며 미국여성들이 시위를 벌였다4).

최근의 연극현장, 아니 좀 더 넓게는 공연예술 현장의 창작자, 기획자, 비평가, 현장 스태프들 역시 비슷한 피로감을 알게 모르게 겪고 있는 것은 아닐까 주제넘게 짐작해본다. (그 피로감을 유발하는 최근 일련의 ‘사건들’을 여기서 굳이 되새김질할 필요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저항에 대한 피로감이 유의미한 창작활동의 가능성을 차단한다는 뜻은 아니다. 현재의 연극인들은 퀴어, 페미니즘, 비인간, 접근성, 감각, 환대, 커뮤니티, 스페큘러티브 씨어터, 다큐멘터리 씨어터, 버베이텀 씨어터, 이머시브 씨어터 등, 모든 것들을 아우르며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도 윤리적, 이데올로기적, 양식적 실험과 성찰을 활발히 해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저항이 주는 피로감 내지는 저항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겪는 상실감과 좌절들이 자연스럽게 소거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저항의 메시지를 공연 안팎으로 드러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번아웃(소진)을 걱정하게 하기도 한다. 이것을 저항 번아웃이라고도 할 수 있을까? 일상과 연극 창작 사이의 각자의 자리에서 저항의 가치와 의미를 협상하면서 시간과 에너지가 소진되어가는 경험 말이다.
이런 저항 번아웃은 이겨낼 수 있다거나 일시적인 일이라고 섣불리 얘기하고 싶지 않다. 다만 수전 브라이슨은 결국 시위 피로 같은 건 저항의 형태를 지나치게 도식화해서 생긴 (허위의) 현상이라고 보았다. 저항은 언제나 일어나고 있고, 가장 사소한 행위마저도 저항의 의미를 지닌 선택적 움직임이라고 볼 때, 우리 모두의 존재는 비가시화되고 소외된 서로를 가시화시켜주고 연결시켜주는 목소리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의 저항은 그 결과물이 무엇이 되었건 일종의 안티포니(antiphony), 즉 메기고 받는 (call-and-response) 관계의 단초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5). 어떤 면에선 저항의 핵심이 연희에서 곧잘 쓰이는 메기고 받는 관계를 상정한다는 점에서 연극적이기도 하다. 각자의 자리가 안티포니적 관계망으로 이루어진 우주의 한 부분이라고 상상할 때, 저항 번아웃을 조금은 더 가감 없이 직시할 수 있지 않을까. 개인적으로는 해외에 오래 있다가 오랜만에 귀국하여 갈급함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다양한 연극작품들을 관람했다. 완성도와 수준을 떠나 대부분의 작품들이 이미 안티포니적 관계를 어떤 식으로든 성찰하고 시도하고 있었다. 어떤 작품들은 미래에도 지속가능한 연대의 형식을 상상하고 있었고, 또 다른 작품들은 소리와 촉감을 통한 대안적 방식의 관계맺기를, 집 없음을 자조하며 비슷한 처지에 처한 청년들에게 위로의 말 건네기를, 규범으로 통치되지 않는 삶들의 본질에 대해 절규하기를 시도하는 중이었다. 어쩌면 이 같은 관계망들 속에 자신을 위치시키고 그 경험을 성실하게 언어화하는 역할을 잘 수행하는 것으로부터 이 연구자의 저항 번아웃은 조금씩 해소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1. 저항이 곧 시위를 뜻한다고 보지 않는다. 다만 저항의 가장 확고하고 익숙한 형식 중 하나가 여전히 시위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이에 수반되는 ‘피로감’이 저항이 주는 피로감에도 유효하다는 판단에서 ‘시위 피로’라는 개념을 중요하게 다루기로 한다.
  2. 리처드 톰슨 포드(Richard Thompson Ford), 「시위 피로(Protest Fatigue)」, 『노모스(Nomos)』 62호, 2020, 164쪽.
  3. 수전 브라이슨(Susan Brison), 「‘내 사전에 피곤함은 없다’: 트럼프 시대의 시위 피로를 위한 해독제(‘No Ways Tired’: An Antidote for Protest Fatique in the Trump Era)」, 『노모스(Nomos)』 62호, 2020, 189쪽.
  4. 이미지 출처: Ravi, CC BY-SA. https://theconversation.com/international-womens-day-yes-we-still-need-to-protest-this-shit-73794.
  5. 수전 브라이슨, 같은 책 1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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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수련

윤수련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학술연구교수. 퍼포먼스와 인종·민족·국가의 상관관계에 대해 연구하고, 이를 바탕으로 노스웨스턴대, 예일대, 링난대, 이화여대에서 강의하고 다수의 학술지에 논문과 에세이를 실었다.
홈페이지 sooryonyo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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