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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연극 읽기: 장애의 경험과 관점, 전문성을 바탕으로

정리_연극in 편집부

제245호

2023.11.09

웹진 연극in 편집부에서는 장애연극 비평과 관련한 좌담을 기획하면서, 좌담 참여분들이 미리 서로의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보고자 했습니다. 이에 모든 참여자분들께 <생활의 비용>과 <미래의 동물> 두 편의 연극에 대한 짧은 글을 요청드렸고, 모두는 각자의 글을 읽고 좌담에 참여했습니다. 참여자분들의 동의를 구해, 양근애, 임대륜, 하은빈 님의 글을 게재합니다.

보이(지 않)는 장애

양근애

대비되는 몸과 돌봄의 비대칭성

마티나 마이옥의 <생활의 비용>(정지수 연출, 미아리고개예술극장, 2023. 9. 6 ~ 10)에는 두 개의 관계가 나온다. 에디와 안나 그리고 존과 제스. 에디와 안나는 헤어진 사이지만 안나가 교통사고로 인해 척수가 마비되면서 에디의 도움을 받게 된다. 뇌병변 장애인인 존은 제스를 고용하여 자신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도움을 받고자 한다. 이들은 돌봄으로 이어져 있다.
존과 제스는 고용인과 피고용인 관계로 제스는 존의 가사 활동을 지원하고 돈을 받는다. 연극은 존이 다소 무례하게 제스를 대하는 모습을 통해 그가 학력이 높고 많은 자산을 가졌음을 과시한다는 점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반면 제스는 명문대학을 나왔지만 밤새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으면 노숙을 해야 하는 처지로 나온다. 두 사람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라는 차이 외에도 남성과 여성, 미국인과 이민자, 그리고 자산의 규모에 따른 계층 차이가 있지만, 제목에서 강조하듯 이 연극의 플롯에서 두 사람의 계층 차이는 장애/비장애 차이보다 크게 작동한다. 이 차이들은 교차하기보다 하나의 차이가 다른 차이들을 압도해버리는 형국이다. 특권의식을 지닌 존의 모습이 일견 ‘나쁜 장애인’이라는 재현이라는 점에서 다르게(새롭게) 보인다면 그것은 일종의 착시가 아닐까. 장애인을 착하게만 묘사하는 것은 온당하지도 자연스럽지도 않겠지만 나쁜 장애인의 등장이 다양한 장애의 재현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의 ‘나쁨’이라는 성격적인 묘사가 몸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일라이 클레어의 말처럼 몸과 마음은 불가분한 관계이며, 몸과 마음이 별개라는 이분법은 치유 이데올로기를 작동하게 만든다.1) 이 연극은 취약한 신체를 둘러싼, 그러나 거의 일방적인 돌봄의 문제를 그려내느라 존과 안나의 몸과 마음이 함께 작동하는 모습을 자주 놓치게 했다. 제스가 존의 목욕을 도와주는 장면에서 관객이 존의 몸을 오래도록 보게 만들었을 때, 그것은 무엇을 위한 ‘재현’이었을까. 장애는 가시화되어야 하지만 어떤 가시화는 더 중요한 응시를 빼앗는다. 이 연극에서 다른 ‘몸-마음’을 가진 인물들이 서로를 돌보는 모습은 끝내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모두 외로워 보였다.

다른 세계의 장애

<미래의 동물>(김상훈 작, 박해성 연출,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2023.9.8~17)에서 장애는 전면화되지 않는다. 다소 관념적인 이 연극에서 장애는 다양한 세계의 부분으로 존재한다. 일상의 소리들과 넘쳐나는 단어의 활자들이 인간, 동물, 다른 사물들과 ‘함께’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 관객은 그 모든 것을 동시에 보고 있지만, 무대 위의 존재들은 서로 다른 시간/세계 속에 있다. 따라서 이 공간은 가득 찬 공동(空洞)이다. 나의 시선을 가져간 것은, 다른 세계에 있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을 다른 몸들이 아니라 불투명한 막에 점철된 단어와 문자 이미지들이었다. 무대 위에서 배우의 몸은 의자들이 놓인 좌표 사이사이를 부유한다. 그들은 너무 멀리 있다. 세계의 겹과 경계를 강조하는 이 연극에서 물성이나 부피감보다 기억이나 꿈,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 시간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은 그 때문이다. <미래의 동물>에서 ‘동물’이 존재하는 ‘미래’라는 시간은 감각되는 현실과 흐르지 않는 현재를 분열시킨 후에 가까스로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린다.
연극에서 지호를 연기하는 인물은 여러 명이다. 복자 역을 맡은 배우 외에 모두 지호를 연기한다. 그들은 모두 다른 몸을 가졌다. 그러나 그 다름의 고유성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 코로나 이후 우리가 절감하게 된 ‘연결’에의 감각이 강조되면서 몸들의 ‘다름’은 희석되고 만 것일까. 베튤의 지호도 하지성의 지호도 박하늘의, 김현의, 김슬기의, 아니 그 누구의 지호여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하나이자 여럿인 지호가 존재한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몸은 언제나 다른 몸들에 둘러싸여 있으며, 단지 창조물이 아니라 창조자2)라는 점에서, 다른 세계를 창조하는 다양한 몸들을 더 가까이, 더 자세히 보고 싶어졌다.

장애 수행성

무대 위에 장애인이 등장한다. 그가 연기하는 인물은 다양하다. 장애인일 수도 있고 비장애인일 수도 있고 할아버지일 수도 있고 사공일 수도 있고 고용주일 수도 있고 아르바이트생일 수도 있고 동물일 수도 있고 털실일 수도 있다. 비장애인 배우가 그러하듯 장애인 배우 역시 자신의 고유성과 개성을 통해 인물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연극에서 장애인 배우는 장애를 연기하지 않더라도 “장애라는 예상된 ‘문제’가 언제 등장할지 궁금해하는” 관객의 시선 속에 존재한다.3) 어쩌면 장애를 연기하지 않아도 장애인의 등장만으로 장애는 ‘드러난다’.
무대 위의 장애에 관해 이야기할 때, ‘차이’를 강조할 것이냐 아니면 ‘동일성’에 호소할 것이냐는 여전히 어려운 문제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공존하는 연극에서, 장애에 가해지는 차별과 배제와 취약성에 집중하면 장애가 비장애 중심주의의 구성적 외부로 존재한다는 환원적 경향을 반복하게 된다. 반대로 장애인 역시 비장애인과 다를 바 없다는 점을 강조하게 되면 비장애에 ‘대항’하는 장애의 정치성은 드러나지 않는다. 결코 좁힐 수 없는 차이를 의식하게 만들면서도 주류사회나 규범적 질서에 동화되는 것을 거부하고 규범 자체를 심문하는 장애의 수행성(혹은 ‘불구의 정치성’)은 어떻게 가능할까.

연극 1. 극단 청년단 <생활의 비용> @미아리고개예술극장
연극 2. 상상만발극장 <미래의 동물>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을 보고.

임대륜

<생활의 비용> 연극은 제가 관심 있어 하고 듣고 싶어 하는 부분을 드러내고 탐구하는 연극으로 보였습니다. 사람들의 입장이나 상황은 다 각기 다르지요. 불행의 근원이 될 수도 있지만, 안 하려고 해도 남과 비교하게 되는 순간들도 있고요. 이런 상황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있었기에 다음과 같은 격언도 있다고 생각해요.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법이다”.
존은 뇌성마비로 인해 선천적인 지체 장애를 가지고 있고, 휠체어 이용자입니다. 안나는 사고로 인해 사지마비가 생겨 중도 지체 장애를 가지게 되었지요. 대한민국에서는 알콜 중독 등 물질 남용 장애를 가진 사람이 그 증상만으로 등록 장애인이 될 수 없지만, 여러 다른 나라에서는 그런 경우도 등록 장애인이 될 수 있습니다. 에디도 어느 나라에서는 등록 장애인이겠지요. 에디는 안나의 활동을 보조합니다. 경제적으로 매우 취약성을 지닌 제스는 존의 활동을 보조합니다.
에디, 안나, 제스, 존. 4명의 주요 캐릭터들은 삶의 필요에 의해 각기 다른 비용을 지불해가며 교류를 해나갑니다. 그러면서 자신과 타인의 취약성과 특권을 마주하지요. 존은 제스에게 말합니다. “당신도 특권이 없는 건 아니잖아요”. 자신에게 있는 특권을 인지하면서도, 타인이 가진 취약성과 특권을 두루 살펴보았을 때, 그 살펴봄이 감정을 동요하게 만들었을 때 할 만한 이야기라 생각합니다.
안나의 물건이었던 레드블랙 체크 담요를 에디가 제스에게 건네줄 때 저는 관객으로서 조금은 당혹스러우면서도 그 ‘안전 담요(security blanket)’가 가진 온기로 채워줄 수 있는 정서적 신체적 따스함이 기대가 되기도 했습니다. <생활의 비용> 연극이 끝나고 텅 빈 무대에 흐르는 하우스 장르 음악은 연극에 대한 여운을 더욱 증폭시켰습니다. 한국에서 직간접적으로 하우스 음악을 들을 때 쌓여온 인상과 <생활의 비용> 연극 전반에 대해 받은 인상이 비슷했어요.
나무 톤의 무대 디자인에 주홍색 불빛이 내려왔던 연극 <생활의 비용>과는 또 다르게, 연극 <미래의 동물>은 무대 위에 있던 많은 의자와 흰빛과 검은 어둠, 검은 스크린에 나타나는 흰 글씨 등이 또 다른 인상을 주었습니다. 상당히 포스트모던한 연극이라는 인상, 코로나19 시대 이후의 연극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미래의 동물> 공연예매 정보 페이지에서 보았던 “다세계극장 연작”이라는 표현이 참 와 닿았어요.
선형적인 시간이 아니라 비선형적인 시간, 다차원적인 공간이 만들어내는 다세계극장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다른 시공간에 접점이 되는 버섯, 털실 등의 소재들, 여기저기 나타나는 지호 등 등장인물이 아리송하면서도 현대사회이자 미래사회 그 자체로 느껴졌습니다. 커뮤니케이션 방식 등에서 그러했고, 빛과 그림자라는 보편적 성질에 등장인물들이 잘 융합된 느낌이었습니다.
연극 <미래의 동물>에 등장하는 대사 중에 이런 내용이 있죠. “죄송해요. 떠나온 세계는 대체로 잊어버려요”. 그들이, 우리가, 떠나온 세계는 무엇일까요? 떠나온 세계는 잊어도 되는 걸까요? 그 세계를 떠나는 게 옳은 일이었을까요? 그 세계를 떠나는 게 좋은 일이었을까요? 떠나온 세계여도 잊지 말아야 하는 것들이 있지 않을까요? 많은 것들이 궁금합니다.

무대 위 장애의 몸과 이어지는 질문들:
연극 <생활의 비용>, <미래의 동물>

하은빈

이 좌담, 장애예술을 주제로 하는 연극in 좌담이 다룰 공연으로 이 두 작품이 선정된 이유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아마도 각각의 공연에 황철호와 하지성이라는 두 장애인 배우가 존재하기 때문이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장애인 배우가 등장한다고 해서 그 작품을 장애예술작품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저는 이 두 작품 모두에 대해 장애인예술가들이 비장애예술가들과 협력한 작품일 수는 있겠으나 장애예술작품이라고 여기지는 않으면서 관람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기 위해서는 제가 생각하는 장애예술이란 무엇인지를 함께 밝혀야만 하겠지요? 장애예술의 정의를 둘러싼 복잡한 논의를 잘 알지는 못합니다만, 거칠게 말해보자면 저는 주체와 주제의 측면에서 장애를 주요하게 포함하는 작품을 장애예술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작품 내에서 장애정체성을 가진 이가 주권적 위치에 있으면서, 내용적으로든 형식적으로든 장애와의 연관을 갖는 작품을 장애예술이라고 규정합니다. 저는 두 작품 모두 장애인 주체를 공연의 일원으로서 주요하게 포함하고는 있지만, 주제적 차원에서는 각각 장애를 소외하는 지점이, 혹은 장애와 무관해지는 지점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연극 <생활의 비용>에서 황철호 배우가 연기한 ‘존’ 장면은 전반적으로 흥미롭게 보았습니다. 황철호 배우가 갖춘 신체적 조건은 존이라는 인물에 더없이 잘 부합했으며, 존이 장애에 대한 ‘제스’의 선입견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쳐내는 장면이나, 제스의 능숙한 활동지원을 통해 존이 몸을 씻고 외출을 준비하는 장면 등은 장애에 대한 깊은 경험과 이해가 없이는 만들어지기 어려운 장면들이라고도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작품이 인물이 요구하는 바로 그러한 몸을, 그리고 그 몸에서 비롯한 삶과 역사를 가진 배우가 그 인물을 체화하여 존재하고 발화하고 있는 광경을 충분히 오래 바라볼 수 있어 의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중요한 장면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저는 <생활의 비용>이 작품 안팎으로 비장애중심주의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거나 그리로 귀결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웠습니다. 우선 이 공연에는 존 이외에도 장애를 가진 또다른 배역 ‘안나’가 등장하는데, 안나는 다른 비장애인 배우가 맡아 연기하고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다소 혼란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장애를 가진 배우 자체가 많지 않다는 점, 그러므로 현실적인 여건 상 캐스팅이 쉽지 않았으리라는 점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장애인이 장애인 배역을 연기하는 관행에 대한 비판적 관점과 그러한 연기가 앞뒤 가리지 않고 찬사를 받곤 하는 유구한 현상에 대한 회의가 작품의 감상을 줄곧 어지럽혔습니다.

또한, 저는 결국 이 희곡의 초점이 최종적으로는 두 장애인 인물인 ‘안나’와 ‘존’이 아니라, 이들에게 돌봄을 제공하는 두 비장애인 ‘에디’와 ‘제스’에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안나의 중도장애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안나와 에디 부부의 서사는 기존의 유구한 서사적 전통이 장애를 활용해온 전형적인 방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나라는 인물이 가진 장애와 그로 인해 촉발되는 죽음의 사건은, 에디라는 비장애인을 인간적으로 성장시키고 각성시키는 기능을 한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존과 제스를 둘러싼 일화의 경우 비교적 덜 전형적인 장애 서사를 전개하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 극의 진행상 관객은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존보다는 겨울밤 속으로 뛰쳐나간 제스의 이야기에 집중하게 됩니다. 공연의 마지막 장면 또한 에디와 제스라는, 각각 장애인의 돌봄을 막 끝마친 두 비장애인의 조우를 그리는 데 길게 할애되고요. 저는 이 작품의 이야기가 여전히 기존의 서사에서 장애가 ‘구사’되어온 문법을 어느 정도 변주하여 반복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으며 그리하여 결국 비장애인의 입장에서 바라본 장애에 대한 관념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한편, <미래의 동물>은 무대 위에 있는 주체와 신체의 범주를 매우 광활하게 열어젖히고 있는 공연이었습니다. 그 확장이 너무나 넓은 영역을 아우르는 나머지, 이 무대 위에서는 장애라는 정치적 범주가 그다지 유의미하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무대 위에서 장애를 가진 신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질문하기에 앞서, 장애를 막론하고 배우들의 몸 자체가 이 공연에서 정말 필요한지를 질문하게 되는 공연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공연의 가장 중요한 출연자는 배우들이 아닌 텍스트라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텍스트의 프리젠테이션이 이 공연의 주된 미적 전략이며, 배우들의 신체와 그 발화는 부차적인 위치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이 공연에서 배우의 존재 자체가 제게 의문에 붙여졌다보니, 장애인 배우가 출연했다는 사실 또한 제게 어떤 구체적인 의미로 잡히지 않고 부유했습니다. 장애 자체가 어떤 역할을 하지도 않고, 그 장애를 통해 관객에게 무언가 말하려 하고 있지는 않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생활의 비용>에서는 적어도 황철호 배우가 존으로서 무대 위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분명했다면, <미래의 동물>에서는 반드시 하지성 배우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다른 비장애인 배우들과 마찬가지로) 설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늘 특수한 것으로 여겨지곤 하는 장애가 이 공연에서 무차별적인 차이의 신체로서 존재한다는 생각은 들었고 그것이 어떤 긍정적인 함의를 가지리라는 생각도 어렴풋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조금 회의적인 관점에서 말해보자면, 적어도 이 캐스팅이 ‘다양성 쿼터’ 이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고 싶기도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반드시 이 두 작품이 장애예술로 읽혀야만 하는지에 대한 질문도 품었던 것 같습니다. 해당 작품들이 장애예술이 아니라고 해서 그렇게 문제가 될까요? 혹은 무언가 결여한, 모자란 작품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장애인 예술가들의 작업이 반드시 장애의 맥락에서만 독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고, 장애인 예술가들이 여러 영역을 아우르는 것을 더 많이 보고 싶습니다. 장애인 예술가들이 더 큰 무대에 서거나 보다 좋은 기회가 많이 주어지는 환경이 보장되었으면 좋겠고, 그런 점에서 두 배우분들의 왕성한 외부 작업 소식이 반갑고 즐겁기도 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장애예술이 아니라면 어떤 작품이 장애를 가진 몸을 오롯이 존중하고 사유할 것이며, 이 몸들의 정치적이고 미적인 가능성을 향해 급진적으로 나아갈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점에서 여전히,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다채롭고 풍성한 장애예술의 세계를 상상하고 기다립니다.

  1. 일라이 클레어, 『눈부시게 불완전한』, 하은빈 옮김, 동아시아, 2023, 11쪽.
  2. 샹탈 자케, 『몸』, 정지은, 김종갑 옮김, 그린비, 2021, 342쪽.
  3. Carrie Sandahl, “The Difference Disability Makes: Unique Considerations in Casting Performers with Disabilities”, eds. Claire Syler, Daniel Banks, Casting a Movement, Routledge, 2019, pp. 9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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