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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것과 은폐된 것을 질문한다

연극 읽기: 장애의 경험과 관점, 전문성을 바탕으로

정리_연극in 편집부

제246호

2023.11.30

웹진 연극in 편집부에서는 장애연극 비평과 관련한 좌담을 기획하면서, 좌담 참여분들이 미리 서로의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보고자 했습니다. 이에 모든 참여자분들께 장애인문화예술 판의 <숨 쉬는 바닷말>과 장애인문화예술극회 휠의 <생일파티> 두 편의 연극에 대한 짧은 글을 만들어주십사 요청드렸고, 좌담 전 모두가 모두의 글을 읽어보실 수 있도록 보내드렸습니다. 참여자분들의 동의를 구해, 김지수, 양근애, 하은빈 세 분의 글을 좌담 현장의 이야기와 더불어 게재합니다.

<숨 쉬는 바닷말>과 <생일파티>

김지수

<숨 쉬는 바닷말>

2023 함께 만드는 공감 뮤지컬 <숨 쉬는 바닷말>은 극단 판의 좌동엽 대표가 처음으로 작, 연출한 작품이다. 연출가의 고향이 제주라는 걸 알고 있었고, 배우들이 해조류로 출연한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상연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휠체어를 탄 배우들의 춤

<숨 쉬는 바닷말>의 첫 장면은 톳, 미역, 파래, 김 역할을 맡은 배우 네 명이 모두 전동휠체어를 타고 등장해 노래와 휠체어 움직임을 하면서 시작한다. 네 배우는 모두 고유성이 다르다. 톳 역할의 김진옥 배우는 평소에는 수동 휠체어를 타면서 평지에서만 발로 휠체어를 조금씩 움직이던 모습이었는데 처음으로 발가락으로 전동휠체어를 운전하면서 무대에 올랐다. 파래 역할의 김미란 배우는 파래의 부드러운 움직임만큼이나 신체의 섬세한 떨림과 목소리를 가졌고, 미역 역할의 박미용 배우는 신체 움직임의 범위가 가장 넓었으며, 김 역할의 임일주 배우는 대중음악을 하는 가수이기에 선명한 목소리로 대사와 노래를 전달했다. 모두 다른 신체의 고유성과 디자인이 다양한 전동휠체어를 탄 사람들이 같은 방식으로 휠체어 움직임을 표현하는 장면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성북마을극장 무대는 전동휠체어를 탄 네 사람이 움직이기에는 좁은 편이라서 정확한 각도에서 움직여야 부딪히지 않는데 걱정과 달리 모두 여유롭게 춤을 췄다.

배우들의 호흡과 조화

해조류 마을에 찾아와 이웃과 친구가 되어 달라고 말하는 김과 소녀. 생각해 보겠다는 해조류들과의 첫 만남에서 시작해 함께 살기로 합의하게 되는 과정이 담긴 줄거리만큼이나 배우들이 만들어내는 호흡과 조화를 눈여겨보았다. <숨 쉬는 바닷말>에는 여섯 명의 배우가 출연하는데 세 명의 해조류는 전동휠체어를 사용하는 여성이고, 김은 전동휠체어를 사용하지만 남성이다. 소녀 역할의 금민정 배우는 발달장애인이고 엄마와 바다쓰레기 역할을 맡는 주은아 배우는 비장애 배우다. 다르게 말하면 발달장애 배우 1명, 비발달장애 배우 5명, 비장애인 배우 1명, 장애배우 5명, 남성 배우 1명, 여성 배우 5명이다. 이렇게 다양한 조건을 갖고 있는 배우들이 호흡을 맞추는 것에는 비장애인과 장애인, 혹은 장애인과 장애인, 비장애인들이 호흡을 맞추어가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공연을 보면서 연습 시간이 짧지 않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지만 몇 가지의 아쉬움이 남았다.

먼저 발달장애가 있는 금민정 배우는 판의 많은 공연에서 코믹하고 밝은, 다양한 캐릭터를 선보이면서 여러 배우와 출연했는데 이번 공연에서 대사가 가장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금민정 배우가 대사할 때 다른 배우들이 조금씩 긴장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는데 그 상황이 이해되면서도 안타까웠다. 발달장애인과 함께 공연하면서 그가 대사를 잊을까 걱정하기보다는 기억할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더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배우들 각자가 자신과 상대 배우를 믿을 수 있는 상황이어야 안정적으로 서로의 대사를 듣고 반응하는 연기를 펼칠 수 있지 않을까.

다른 한편 임일주 배우는 척수 장애가 있어서 노래할 때 호흡을 깊이 하기 위해, 오른쪽 팔은 전동휠체어의 등받이 시트 뒤에 있는 손잡이를 팔 안으로 감싸고 왼쪽 팔은 다리가 벌어지지 않게 무릎과 무릎을 연결해 놓은 밴드를 위로 당기듯이 상체를 숙이는 자세를 만든다. 하지만 그런 신체적인 모습에서 관객은 배우에 대해 ‘장애 극복’이나 ‘감동’의 이미지를 갖게 되곤 한다. 관객이 느끼는 감정이야 각자의 몫이라 해도 같은 무대에서 임일주 배우가 노래나 연기를 하기 위해 몸을 이용하는 방식을 보고 ‘안쓰러움’이 담긴 눈길로 바라보는 배우가 있다는 것은 ‘장애예술’의 격을 떨어뜨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숨 쉬는 바닷말>은 함께 만드는 공감 뮤지컬에 걸맞게 홍보물도 쉽고 친근한 디자인과 문장으로 제작되어 있었다. 대본 또한 누구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쉬운 문장으로 썼다고 생각했지만, 배우들의 연기와 말투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쉽게 쓴 대사와 어린아이처럼 표현하는 것은 다른데 전체적으로 배우들의 연기와 분위기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 조금 더 명확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공연이 기대되는 공연

<숨 쉬는 바닷말>은 배우들의 장점을 잘 살린 캐스팅을 했지만, 배우 한 명 한 명을 잘 살리려다 보니 조화가 잘 맞지 않았다는 아쉬움이 컸다. 임일주 배우는 음반을 내기도 한 가수이지만 다른 배우들은 노래의 경험이 없다 보니 함께 코러스를 넣거나 한 소절씩 부르는 대목에서 기량 차이가 많이 나서 만듦새가 헐겁게 느껴졌고, 다른 배우들이 노래하거나 대사를 할 때 서로에게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이 보여 몰입감이 떨어졌다. 하지만 그 모든 아쉬움은 다음 공연에 대한 기대로 옮겨간다. 지금까지 극단 판은 재공연을 많이 하지 않았는데 <숨 쉬는 바닷말>은 분명 다시, 여러 무대에서 공연될 거라는 확신이 든다. 그 이유는 환경 이야기이면서 ‘우리’와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담고 있는 내용이 좋고, 등장인물의 설정과 역할이 배우들의 특징과 잘 맞는 캐스팅이기 때문이다. 노래나 대사에 있어서도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을 것이라 믿는다. 조금 더 넓은 무대에서 전동휠체어를 탄 배우들의 멋진 안무와 서로를 믿고 마음껏 연기하는 판의 무대를 보고 싶다.

<20년 전 생일파티>

장애인문화예술극회 휠의 <생일파티>는 탄생 20주년을 맞아 20년 전에 올린 창단 공연 작품을 다시 공연한다는 것으로 관심을 모았다.

필자도 처음 본 장애연극이 휠의 <생일파티>였고 극단 애인의 창단 공연도 제목은 <함께 부르는 노래>였지만 원작은 「생일파티」였다. <생일파티>는 극단 산의 대표이자 연출가인 윤정환이 극단 휠의 창단 구성원으로 활동하면서 대본을 쓰고 연출했던 작품이다. 그렇다. <생일파티>는 20년 전의 작품이다. 인물과 환경의 설정, 성인지 감수성과 장애 인식 자체가 20년 전의 상황을 기반으로 한다. 장애인에게 자립 생활이나 독립적인 삶이 허락되지 않았던 시기이고 인권의식이나 소수자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었던 그 시기에 올렸던 작품을 조금의 각색도 없이 2023년을 사는 관객들에게 선보인다는 것은 대체 어떤 이유와 의미가 있는 것일까?

장애인 배우가 다른 장애를 연기한다는 것

장애인 배우가 자신의 장애와 다른 장애를 연기한다는 것은 얼핏 듣기에는 배우니까 당연하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보면 그것은 이미 가능성보다 제한을 더 많이 느끼게 한다. 휠체어를 사용하고, 일어서거나 보행을 할 수 없는 배우가 할 수 있는 장애인 연기란 휠체어를 타면서 시각장애가 있는, 발달장애가 있는 등의 중복 장애를 보여주는 것으로 한정된다. 또한, 발달장애인이 비발달장애인 역할을 맡기는 어렵고 시각장애인이 청각장애인의 역할을 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고 본인의 조건에서 장애가 심한 장애인지 심하지 않은 장애인지도 중요한 가능성과 제한인 것이다. 게다가 일반적으로 장애 인물을 표현할 때 신체의 일부를 ‘사용할 수 없음’을 단편적으로 보여주거나 비장애인의 신체 모습과 다르게 보이는 하나의 신체 부분만을 부각하기 쉽다. 하지만 ‘다른 몸’이라는 것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몸 전체와 환경이 담겨 있는 것이다. 휠의 이승규 배우는 저시력 장애인 배우다. <생일파티>에서는 민수 역할로 출연하면서 수동 휠체어를 타고 나온다. 휠체어를 타면 못 걷나보다, 하는 일반적인 생각으로만 연기를 보면 알 수 없겠지만, 저시력 장애가 있는 이승규 배우의 시선은 극 중 지체 장애인 민수의 시선과는 다른 지점들로 나타난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지체 장애가 아닌, 다른 몸의 상태를 보이기도 하는데, 자신과 다른 장애를 연기할 때 한 가지의 특징을 선택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일관적이지 않을 때는 연기가 아닌 흉내일 뿐이다.

기대의 폭을 넓히자

20여 년 동안 꾸준히 활동하는 장애인 극단의 공연 두 편을 보고 난 마음이 혼란스럽다. 어떻게 장애 연극에 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 있을지 실마리를 찾지 못해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각 극단의 공연을 보러 가면서 가졌던 기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서울에 열 개가 넘는 장애인 극단이 존재하고 각 극단마다 특징이 있다. 휠은 우리나라 최초의 장애인 극단이고 극단 애인, 다빈나오에서 중추적으로 활동하는 연극인이 휠 출신이라는 것에 대해서 자부심이 있다고 들은 바 있다. 사실이다. 휠은 그렇게 많은 사람이 경험해 본 극단이다. 그리고 휠에는 20여 년 가까이 활동해 온 배우들이 있다. 그 배우들 중에는 오직 그만이 표현할 수 있는 고유한 연기를 펼쳤던 작품에 출연한 이들이 있었다. 나는 때로 중장년 배우들의 연기를 보면서 존경심과 경의를 갖곤 하는데 휠의 무대를 보면서 벅찬 경외감을 품고 공연장을 나설 그날을 간절히 기다린다.

한편 극단 판의 공연을 보러 갈 때는 항상 새로운 발견을 기대한다. 판은 해마다 다양한 분야의 예술과 협업을 이루는 공연을 펼쳐왔다. 초연을 보완한 재공연이 없어서 단편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한 번의 무대를 만드는 협업의 기간은 짧지 않아서 서로에 대한 신뢰감이 담긴 작품을 여러 번 보아왔다. 이제 필자도 개인적인 기대에서 벗어나 극단의 상황과 특성을 고려하면서 장애연극의 다양한 무대를 즐기는 유연함을 가져야겠다.

장애는 재현할 수 있는가

양근애

다름을 보여주는 방식

<숨 쉬는 바닷말>(장애인문화예술판, 좌동엽 작·연출, 성북마을극장, 10.26~29)은 ‘환경 뮤지컬’이라는 수식어에 맞게 바닷속 해조류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는 공연이다. 평화로운 바닷말에 사는 미역과 톳, 파래에게 어느 날 김이 찾아와 같이 살게 해달라고 한다. 김과 톳과 파래는 갈조류, 녹조류인 자신들과 다른 홍조류인 김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고 판단을 유보한다. 이윽고 엄마와 함께 해변을 거닐다가 혼자 있게 된 아이 ‘아자’가 나온다. 아자는 미역이 말을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미역에게 친구가 되어 달라고 말한다. 그리고 바닷말 친구들은 아자의 집에 초대받는다. 그런데 생각보다 집에 일찍 도착한 엄마가 해조류를 발견하고 이를 요리 재료로 쓰려고 하는 소동이 벌어진다. 해조류들이 다시 바다로 왔을 때 바다에 버려진 쓰레기들로부터 위협받는 상황이 벌어진다. 지난 일을 사과하러 온 아자는 바다 쓰레기의 위협으로부터 해조류들을 구해낸다. 동화 같은 이야기와 다정한 노래가 어우러진, 재치 있고 즐거운 공연이었다.
미역(박미용), 톳(김진옥), 파래(김미란), 김(임일주) 역할을 맡은 배우들은 모두 휠체어 사용자들이었고 아자(금민정) 역도 장애배우가 맡았다. 엄마와 바다쓰레기 역을 맡은 주은아 배우가 무대에 함께 했지만, 장애인 배우의 비중이 훨씬 높은 공연이었다. 그래서인지 해조류에 관한 편견을 바로잡는 노래를 할 때, 미역 등이 ‘우리와 다른’ 김을 받아들이는 일을 주저할 때, 이 이야기가 장애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말하고 싶어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자연을 파괴한 인간을 겨냥하면서도 캐릭터의 특성을 살려 생물 개체들 고유의 상황을 보여준다는 점이 좋았고 마지막에 함께 노래하는 장면에서 배우들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생각이 복잡해진 대목은 미역, 파래, 톳이 인간 (장애인) 친구는 받아들이지만 김을 받아들이는 것에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다는 점과 그에 대해 김에게 사과를 하는 장면이었다. 장애는 무해하고 선한 것으로 그려지고 비장애인과 바다쓰레기는 해조류에게 해를 가하는 존재로 그려진 이 공연에서 비현실적인 세계(해조류가 말을 한다!)와 현실(장애인에 대한 차별)의 교호는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아자가 처음 등장했을 때 미역이 그를 ‘장애를 가진 아이’라고 연민하는 장면은 현실에서 ‘다름’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환기하는데 이것은 해조류들의 다름을 통해 쌓아온 이야기들을 조금 혼란스럽게 만든다. 어쩌면 나는 이 공연을 통해 ‘장애’를 발화하지 않고도 장애를 드러내는 방식을 보고 싶었던 것 같다.

지나친 낙관에 기댈 때

극단 휠의 <생일파티>(윤정환 작, 최문주 연출, 11.10~12)는 창단 20주년을 맞아 창단 공연을 다시 올린 것이다. 창단 공연을 보지 못했지만, 지난 기사들을 통해 당시의 분위기를 조금은 가늠할 수 있었다. 장애연극의 선두에서 다양한 공연을 올린 극단 휠의 20주년을 축하하는 파티에 가는 마음으로 극장에 갔다. 그러나 이십 년의 세월이 가져온 낙차 때문일까. 공연을 재밌게 만들기 위해 배우들이 애를 쓴다는 걸 너무 잘 느꼈지만 정작 공연을 보는 내내 한 번도 웃을 수가 없었다. 우선 주인공 민수가 고민상담을 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고민을 털어놓는 사람들의 사연이 다 극단적이고 과장되어 있다.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은 민수에게 고민상담은 세상을 경험하는 창이기도 할 테지만, 이들의 특이함은 작위적인 설정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민수 역 외에도 장애인 배우가 맡은 역할들이 많았지만, 기능적인 인물로만 잠깐씩 등장하는 것도 아쉬웠다. 엄마와 도둑, 경찰 캐릭터의 억지스러움도 불편했다. “몸이 성치 않다”라는 아들의 말을 언짢아하는 엄마는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거리낌 없이 내뱉고 활동지원인으로 착각한 손님(도둑)에게 무례한 질문과 오해를 일삼는다. 경찰 역시 민수와 도둑을 부부로 오해하면서 ‘대단하다’라는 말로 장애에 대한 편견과 혐오를 드러낸다.
창단 공연을 다시 올리는 일은 물론 의미가 있지만, 이십 년 전 공연을 다시 ‘그대로’ 올리는 것은 조금씩 변화해온 장애에 대한 사회적 인식, 장애연극의 새로운 시도와 발전 등을 괄호 치는 일이 아닐까. 무엇보다 아쉬웠던 것은 이 연극이 지나친 낙관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장애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 다른 혐오(여성혐오, 퀴어 혐오 등)를 무감각하게 끌어오는 방식이었다. 고민상담 편집을 하다가 잠이 든 민수의 집에 도둑이 들어오고 민수의 장애를 몰랐던 도둑의 오해가 발생하고 민수를 화장실에 가도록 도와주는 약간의 소동이 일어나고 엄마가 등장해 둘 사이를 오해하고 고민상담을 들어주었던 사람이 경찰을 대동해 집으로 찾아오는 등의 소동 끝에 민수의 생일파티를 하는 장면으로 극이 마무리되지만 정작 이들의 다정한 이해가 진짜 현실을 가리는 가짜로 보였다. 구태의연한 희망은 사회가 만들어낸 질서에 순응하게 하지만 냉철한 절망은 그 질서를 바꾸고 더 나은 쪽으로 행동하게 만든다. 극장을 나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드러내며 사회적 차별을 직시하게 하는 장애연극의 어떤 장면들이 몹시 그리워졌다.

장애는 재현할 수 있는가

장애연극은 장애를 재현할 수 있는가. 두 공연을 보고 나서 아주 당연한 듯 보이는, 그러나 쉽지 않은 이 질문에 사로잡혀 있다. 재현은 원본이 아니라 다시 표현된 세계를 믿게 만드는 일이라는 점에서, 또 실재 앞에 세운 대리물의 표상이라는 점에서 장애를 재현하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며 도리어 무용한 일이 아닐까. 혹은 재현하려고 하면 할수록 원본으로부터 미끄러지는 일이 아닐까. 알레고리나 비유, 판타지나 동화의 세계에 문득 끼어든 현실이 어색하게 느껴진 이유는, 또 현실과 무관하게 극적 세계에서만 유지되는 낭만적 화합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유는 그 때문이다.

명랑한 장애예술과 웃(지 않)는 관객

하은빈

다른 분들께서는 어떤 마음으로 공연을 보셨는지 궁금해요. 제 경우 두 공연 모두 관람을 하는 동안 많은 생각이 지나갔습니다. 큰 차이가 하나 있었는데요, ‘판’의 공연은 웃으면서 볼 수 있었던 반면 ‘휠’의 공연에서는 도무지 웃을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장애인문화예술판 <숨 쉬는 바닷말>

거의 모든 배우들이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가장 먼저 감각했던 것 같습니다. 장애가 디폴트값으로서 존재하고 있고, 그것이 대체로 문제가 되거나 그 자체로 차별의 이유가 되지 않는 공동체와 생태계가 그려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생겨나는 미묘한 관전포인트도 즐거웠습니다. 극이 주는 허구적 설정과 그것을 체화하는 물리적 실제가 충돌하거나 틈새가 벌어질 때에 생기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가령, 청정해역의 ‘건강’해야 할 바닷말 배역들을 이른바 ‘건강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장애인 배우들이 맡아 연기하고 있다는 점이라거나, 이들의 친구가 되는 소녀 ‘아자’가 장애로 인해 친구들로부터 배제되고 배척당한다는 경험을 털어놓을 때 중증장애를 가진 신체로 체화된 바닷말들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는 장면이 소소하게 재미있었습니다.

한편으로, 이것이 주 관객을 아동으로 상정하는 뮤지컬이라는 사실에 대해 자꾸만 상기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아동이 볼 수 있도록 이야기를 쉽고 단순하게 만드는 과정에서 깎이는 것들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플롯이 필요로 하는 권선징악의 구도 속에서 장애인 배우들은 자주 선하고 무해한 주인공 배역을 맡게 되고, 비장애인 배우들은 이른바 ‘빌런’을 맡게 되는 경향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장애 여부를 떠나 모든 존재가 가지고 있을 모나거나 별나고 거친 면모들이 있을 텐데, 이런 종류의 이야기 속에서 장애인 배우가 맡는 배역의 이야기는 너무 빨리 매끈해지고 둥그레지는, 아주 쉽게 아름답고 무결해지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오히려 조금 더 입체적이고 도드라지는, 자신의 욕망에 따라 움직이고 당위와 규범으로부터 자유로운 쪽은 비장애인 배우가 맡는 배역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숨 쉬는 바닷말>에서도 내내 무대를 종횡무진 휘저으며 에너지를 발산한 배역은 비장애인 배우가 열연한 ‘바다쓰레기’ 역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편 공연 외적으로 환경과 장애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장애는 기후위기의 악영향을 가장 먼저 받아내는 최전선의 영역으로서 환경 문제와 긴밀한 관계를 가집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장애는 환경파괴로 인해 얻게 될 악영향에 대한 경고의 메타포로 자주 동원되기도 합니다. 환경파괴로 인해 생겨날 질병과 장애를 경계하고 삶에 대한 더없는 위협으로 인식하는 각종 캠페인의 메시지는, 지금, 여기를 살아가고 있는 장애인이나 질환을 가진 사람들을 쉽게 대상화하고 배제합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숨 쉬는 바닷말>은, 장애인 배우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환경파괴의 위험성을 부각하고 환경보호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 공연은, 그러한 캠페인이나 광고들로부터 얼마나 가깝고 또 멀까 하는 고민이 다녀가기도 했습니다. 더군다나, 많은 장애인들은 비장애인 중심적으로 조성된 사회와 환경 속에서 불가피하게 비장애인에 비해 더 많은 자원을 소비해야만 최소한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상황에 처해 있기도 한 만큼, 환경과 장애의 관계는 이 공연에서 그려지는 것만큼 깔끔하고 산뜻하지만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애인문화예술극회 휠 <생일파티>

사실, <생일파티>에 관해서는 무슨 말을 보탤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명랑하고 해맑은 표정의 공연을 저는 줄곧 낭패감을 느끼며 관람했습니다. 이 공연이 2023년에 오르고 있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장애인 극단의 20주년 기념 공연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공연의 많은 선택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그중에서도 제 마음을 가장 불편하게 한 것은 이 공연이 장애인 배우들을 일종의 양념이나 토핑처럼 사용하는 것 같다는 의심이었습니다. 장애인 배우들은 주요한 배역을 맡기보다는 주로 주인공 ‘민수’의 주변 인물, 혹은 민수가 진행하는 상담 속 에피소드의 인물들로 출연합니다. 그들의 비중은 매우 적을뿐더러, 주어진 대사와 장면이 있더라도 대개 만취한 상태 내지는 심신이 미약한 상태로 등장합니다. 배우들이 가진 장애는 취객이 구사하는 특유의 뭉개진 발음을 표현하는 데에, 사기를 당할 정도로 순진하고 사리 분별 능력이 없는 이의 어리숙함 내지는 어눌함을 그리는 데에 사용됩니다. 그들의 장애는 각각 ‘신스틸러’로서 공연에 재미와 즐거움을 더하기 위해 기능하고 그것은 관객의 웃음을 유발합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차별적인 맥락에서만 발생하는 웃음인 것 같습니다. 장애를 열등하고 미숙한 것으로, 일종의 결함으로 만듦으로써만 가능해지는 웃음으로 보입니다.

지난 1차 좌담에서는 어떤 유형의 장애를 가진 배우가 다른 유형의 장애를 가진 배역을 연기하는 일의 전복성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것 같습니다. 이 공연에서 실제로 시각장애를 가진 이승규 배우는 (아마도 뇌병변으로 짐작되는) 지체장애를 가진 배역 ‘민수’를 연기합니다. 그러나 공연 자체가 장애에 대한 차별적 맥락 위에 놓여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교차가 어떤 전복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 저로서는 찾아내기 어려웠습니다. 이 공연의 메시지는 ‘장애가 있다고 해서 자신 속으로만 도망 다니는 것 역시 자신의 영혼을 스스로 도둑질하는 것’이라는 ‘모순’을 민수가 스스로 깨닫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나 민수는 사실 상담을 통해서 계속해서 세상과 접속하는 등 자신 속에만 머무르고 있지 않다는 점, 그러한 깨달음을 주는 이들은 거의 전적으로 비장애인으로 보인다는 점, 이 세계에서 변화해야 하는 것은 오로지 민수의 마음뿐인 것처럼 제시되고 있다는 점 등이 이 공연에서 기이하게 느껴졌습니다. 그 외에도 이 공연이 웃음을 유발하고 극에 생동감을 더하기 위해 여성적 특성 혹은 여성 인물들을 활용하는 방식이 구시대적이고 문제적이라고 여겨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