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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제작 활동은 아닙니다만

연극인의 커리어: 어떻게 연극하고 있나요?

정리_연극in 편집부

제257호

2024.07.11

웹진 연극in에서는 지난 3월에서 4월 사이, 약 3주에 걸쳐 서울 지역에서 활동하는 연극인을 대상으로 “연극인의 커리어: 어떻게 연극하고 있나요?”라는 주제의 설문조사를 진행했습니다. 이번 [기획]에서는 이 설문조사의 결과 분석을 토대로, 이 시대 연극 활동의 특수성을 확인하고 연극인의 지속 가능한 활동을 위한 환경을 함께 고민해보려 합니다. 이번 호에서는 ‘연극 관련 활동’에 참여하는 연극인들의 좌담을 통해 ‘연극 활동’을 통해 얻은 경험과 지식, 역량과 전문성이 ‘연극 관련 활동’에서 어떻게 발현되는지, ‘연극 관련 활동’이 연극인의 자기인식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봅니다.

일시: 2024년 6월 27일 목요일 17시-19시
장소: 서울연극센터 2층 세미나실
진행: 박하늘(웹진 연극in 편집위원)
참여: 김나정, 서재영, 이미라, 이상, 이지영

  • 설문조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연극인의 활동을 분류해보았습니다.


A. 연극 활동

직접적인 연극의 창작·제작 활동

B. 연극 관련 활동

민관 거버넌스(공적 영역의 자문위원, 운영위원 등), 파견예술인, 강의(레슨), 학업(예술 전공), 리서치와 훈련, 예술가 자조 모임, 매체 활동 등

C. 연극과 전혀 상관없는 활동

생계 유지를 위한 정규·비정규 일자리, 무불노동인 가사노동과 돌봄노동, 학업(비예술 전공), 기타 사회 참여적 활동 등



하늘
먼저, 각자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연극에서의 직무, 연극을 시작하게 된 경로, ‘연극 관련 활동’ 경력 등을 토대로 얘기해주세요. 저는 주로 배우로 활동하고, 접근성에 관심이 있어서 음성해설 관련한 협업을 합니다. ‘연극 관련 활동’을 두루 하면서 작업을 지속해오고 있습니다.
재영
저는 서재영입니다.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하고 2009년부터 배우로 활동했습니다. 현재는 다큐 퍼포먼스 형식의 공연을 창작하는 무브먼트 당당이라는 팀에서 배우로 작업하고 있고요. 연극 예술강사로 활동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나정
희곡을 쓰는 김나정이라고 합니다. 원래 소설을 쓰다가 대학원에서 극작수업을 들었어요. 그때 읽었던 희곡이 너무 좋아서, 그 계기로 대본을 쓰게 되었고요. 2009년 신춘문예로 등단하면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시민연극, 청소년연극, 예술강사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상
이상이라고 하고요. 연출, 창작, 기획 세 직무를 주로 하고 있고, 때때로 퍼포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2015년부터 3년 정도 인권연극제에서 시민극단의 연출로 참여하면서 첫 활동을 시작했고요. 2018년 서울거리예술창작센터 거리예술넥스트에 참여하면서 연극을 업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저는 예술인파견지원-예술로(이하 예술로) 사업에 계속 참여해오고 있습니다.
미라
배우, 1인 창작자로 활동하고 있는 이미라입니다. 저는 대학 동아리 활동을 계기로 연극과에 편입하고, 졸업 이후 자연스럽게 계속 활동했어요. 지금은 달과 아이 극단에 소속되어 있고요. 작업이 없을 때는 혼자 쓰고, 만들고, 출연하는 1인 극단 랄랄라로 공연을 제작해서 지역축제나 학교에 찾아가는 작업을 합니다. 저도 예술로 사업에 참여했고, 예술강사 활동도 했습니다.
지영
배우, 연출,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이지영입니다. 2006년부터 배우로 활동하다가 2020년 권리장전 프로젝트에서 연출을 맡았어요. 대학원에 다니며 뇌과학에 흥미가 생겨 관련된 작업들을 하고 있습니다. 예술로 사업에 참여했고, 연기 강사, 문화예술계 성희롱·성폭력 예방 교육 강사도 하고요. 2023년부터는 청년예술청의 운영기획단 거버넌스에 함께하고 있어요. 서울문화재단 생활문화활동가로도 참여했습니다.
좌담 전경. 좌담 진행자와 다섯 명의 참여자가 1인용 책상을 세 개씩 나란히 붙여, 가운데 공간을 띄워둔 채 마주 보고 앉아 있다.
하늘
다양한 활동을 하신 분들을 모셨네요. 본격적인 질문에 앞서 설문조사 전반에 대해 어떻게 느끼셨나요? 공감 가는 결과, 아쉬웠던 문항 등 자유롭게 생각을 나눠 주세요.
이상
먼저, 성별 선택을 이분법적으로 강요하지 않으면서, 설문에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정체성이 고려되어 있어 기분 좋게 시작했고요. 내가 누구고, 어떤 일을 해왔고, 어떤 상황이고, 필요한 건 무엇인지, 앞으로 인생이 어떻게 될지로 귀결되는 질문의 흐름이 어떤 시기, 인간의 서사를 드러내는 구성이라고 생각했어요.
지영
저는 불안이라는 키워드가 와닿았고, 자기착취, 동료착취에 대한 문항이 인상적이었어요. 저도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은 하지만, 자기착취와 동료착취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자책감에 빠질 때가 많았거든요. “연극 창작·제작 활동을 하면서 자기 착취/ 동료들과 상호착취를 경험한 적이 있다”라는 질문에 ‘매우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 40대 연극인들이 한 명도 없었는데, 그 부분이 씁쓸하기도 했습니다.
재영
20대 연극인들의 좌담을 인상적으로 봤어요. 다른 일을 해서라도 연극을 하려는 모습이 저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요즘 친구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하는 줄 알았거든요.
나정
저는 “연극의 창작·제작 활동을 노동이라고 인식하나요?”, “연극의 창작·제작 결과물을 상품이라고 인식하나요?”라는 질문이 다소 단정적이고 이분법적이지 않은가 생각했어요. 또 설문 전반이 부정적인 상황과 감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아마 이 설문조사의 목적이 성찰하고, 사태를 파악하고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서 그럴 수 있을 텐데 부정적 기억을 떠올려야 하더라고요. 그러면서도 문항과 선택지 자체에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노하우가 있어서 좋았습니다. 저도 생각해보지 못한 방안들이 문항 속에 있어서 많은 걸 얻었거든요.
하늘
문항을 설계하면서 안 그래도 전반적인 질문들이 무거워서 염려한 부분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게 현실을 담아내는 거라는 자각을 하기도 했고, ‘지금 어떻게 연극하고 있나요?’라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안부를 물을 대상을 고민했던 것 같아요. 사실 재미있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는데 막상 설계하다 보니 거리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미라
저는 이 기획 자체가 흥미로웠어요. 사실 ‘난 연기를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많이 하거든요. 혼자 생각하다가 그게 우울감이 되기도 하는데, 드러내고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어요. 구체적인 질문들이다 보니 예상보다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됐고, 생각도 더 많아진 것 같아요.

연극인의 경험과 지식, 역량과 전문성을 발휘하기

하늘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로 들어가보겠습니다. 첫 주제는 ‘연극 관련 활동’에 대한 참여 양상인데요. 어떤 계기로, 언제 어떻게 ‘연극 관련 활동’을 시작하게 되셨나요?
지영
대학 졸업하고 연극 배우 일을 시작하면서 바로 연기 강사를 겸업했어요. 연극에서 받는 사례만으로는 생활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배우 일도 큰 책임을 갖고 해야 하는데, 입시 연기 학원 강사 일도 부담이 커서 부대끼더라고요. 두 일을 병행하는 게 어려워서 다른 활동을 찾다가 예술로 사업을 알게 되어 참여했어요. 그리고 거기서 만난 다른 장르의 예술인들에게 생활문화활동가 사업에 대한 정보를 듣고 참여하면서 ‘연극 관련 활동’의 폭이 더 넓어졌던 것 같아요.
미라
저는 연극을 시작하고 7~8년쯤 후에 같이 작업하는 배우들에게 연극 강사 일을 제안받았어요. 과연 내가 누굴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인지, 일 년 정도 고민했는데, 다른 에너지를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초등학교 방과후 수업을 시작했죠. 그 이후 점차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수업을 진행했고요. 지금은 예술로 사업에 참여하고 있고, 국립 아동청소년연구소 공연평가위원 자리도 제안받아서 조금씩 조금씩 해보고 있습니다.
이상
저는 제주도 서귀포 강정마을에 살아요. 2007년 정부가 마을에 해군기지를 짓겠다고 발표한 이후 십 년간 가열한 반대 투쟁에 참여하면서 국가폭력을 경험했고요. 당시 투쟁에 연대하기 위해 마을에 갔다가 그곳에 터를 잡게 되었는데, 저처럼 이주한 동료들 30~35명이 모여 살면서 기지 완공 이후에도 평화운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동료 중에는 영화감독, 시각예술 작가, 기획자 등 예술인이 많은데요. 사실 저는 예술 작업을 할 때와 활동을 할 때의 나를 철저히 분리하는데, 강정에서 활동하는 많은 예술가들이 작업과 활동을 분리할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예술판에서는 활동가라는 이야기를 듣고, 활동판에서는 예술가 소리를 듣고, 그 사이에서 자기 정체성과 노동을 규정하는 데 고민이 많았던 것 같아요. 이런 고민을 하던 한 친구가 예술로 사업을 소개하면서 강정의 사회운동과 예술 행동을 분석하고, 그 의미를 다각도에서 해석해보자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해온 일이 무엇인지,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규정하는 과정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해서 참여했어요. 저는 정체성 혼란이 없었지만, 친구들이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 힘을 실어주고 싶었거든요. 그렇게 2020년부터 2022년까지 예술로 사업에 참여했어요. 3년 참여하면 1년 쉬어야 해서, 작년엔 쉬고 지금 다시 참여하는데요. 올해는 경제적인 이유로 사업에 참여한 것도 있어요. ‘연극 활동’ 지원사업에 많이 선정되지 않아, 먹고살 수가 없겠더라고요.
나정
저는 주로 학교 안팎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시민 강사, 자문 등을 하고 있어요. 데뷔 전부터 원래 가르치는 일을 했었는데요. 그때는 희곡 읽기를 가르치다가, 성북구 시민연극제 강사 제안을 받아 4년 정도 시민들과 함께 연극을 만들면서 활동 영역을 더 확장하게 됐습니다.
재영
제 주위에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에서 하는 학교예술강사 사업에 참여하는 동료들이 있었어요. 배우 활동을 3~4년 정도 했을 때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가 와서 저도 그 사업에 참여했고요. 처음엔 내가 할 수 있는 일인지 고민했는데, 다행히 적성에 맞더라고요. 10년 넘게 사업에 참여하다 보니 제가 부족한 부분을 발견하게 되면서, 대학원에 진학했고요. 그러면서 주위 선생님이나 관계자로부터 학생 대상 공연을 제작하거나 교육연극 수업을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오면서 여러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영역을 넓혀 대학생 대상으로 남북통일과 스타트업을 주제로 교육연극을 활용한 수업도 하고 있고요.
좌담 참여자 서재영. 하얀색 티셔츠 위에 옅은 회색 남방을 걸치고 팔꿈치까지 소매를 걷어올렸다. 동그란 안경을 썼으며, 태블릿 PC를 앞에 두고 오른손을 내밀어 이야기하고 있다.
서재영

‘연극 활동’과 ‘연극 관련 활동’의 상호 영향

하늘
다양한 계기로 활동을 하고 계시는데요. ‘연극 관련 활동’과 ‘연극 활동’ 사이에서 어떻게 자신만의 균형을 지키고 있나요? 정신적/신체적으로, 경제적으로, 할애하는 시간 등을 중심으로 이야기해주세요.
지영
일단 대부분 수입은 ‘연극 관련 활동’에서 얻어요. 그런데 정신적 스트레스와 물리적으로 쓰게 되는 시간은 연극 만들기, 배우 활동에서의 비중이 엄청 크고요. 저는 정말 균형을 못 잡는 것 같아요. 그게 고민이라, 다른 분들은 어떻게 균형을 잡는지 듣고 싶었습니다.
미라
저는 요즘 스트레스, 수입, 시간, 체력 모든 것에 있어 ‘연극 활동’과 ‘연극 관련 활동’의 비중이 거의 반반이에요. 두 활동이 되게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거든요. 이를테면 같이 연극하는 동료들과 함께 예술로 사업에 참여하는 식인 거죠. 그런데 사실 그러면서 과부하 상태를 경험하고 있어요. 계속해서 새로운 걸 개발하고 이야기 나누며 창작하는 과정이 이어지는 거니까요. 그래서 저는 피곤한 상태를 건강하게 드러내려고 노력해요. 피곤함을 숨기면 서로 더 피곤해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돼서요.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동료들과 컨디션을 이야기하고, 서로의 컨디션에 맞춰 작업하는 걸 지향합니다.
재영
저는 최근에 제안받은 일을 거절하기 시작했어요. 적성에도 맞고 재미도 있는데 둘을 병행하는 게 잘 안되더라고요. 둘 다 동시에 하는 건 너무 힘든 일이에요. 9시부터 4~6교시 수업하고 오후에 연습 들어가면 녹초가 돼요. 그러면 동료들에게 피해가 가니까 마음이 좋지 않죠. 이러다가 정말 큰일 나겠다 싶어서 거절하는 연습을 했어요. 매번 그 선택의 갈림길에 놓여요. 미안하지만 거절할 건 거절해야죠. 둘 중 하나를 택하는 경우,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는가, 어떤 도움이 되는가를 기준으로 선택하는 것 같아요.
이상
2019년부터 작년까지 벌어들인 수입을 보니까 대략 25%가 ‘연극 활동’에서 온 거고, 75%가 ‘연극 관련 활동’에서 온 거더라고요. 예술로 외에도 사회 이슈와 문화예술을 융합한 프로젝트를 기획한다든지, 장애아동을 대상으로 한 연극 수업 등을 계속해와서 그런 것 같아요. 하지만 투여한 시간은 비슷한 것 같아요. 그리고 정서적 스트레스는 ‘연극 활동’에서의 비중이 더 컸던 것 같고요. ‘연극 관련 활동’은 상대적으로 정서적 스트레스가 적었는데 그 이유는 결과에 대한 부담이 적고, 과정에서 새로운 것들을 많이 발견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예술로 사업의 경우는 예술가의 창조성이 사회의 다른 이슈나 업무와 융합했을 때 어떤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느냐를 실험하는 사업이잖아요. 결과물을 잘 내고 싶어 고민하지만 그 과정이 더 유의미하고요. ‘연극 활동’도 이런 마음으로 임하면 더 재미있을 것 같은데 막상 잘 안되죠. 사실 저는 계획형 인간이 아니었는데 두 활동을 병행하다 보니 엄청 계획형으로 바뀌었어요. 2019년쯤이었는데, 너무 많은 일을 동시에 하다 보니 몸이 안 좋아지더라고요. 이렇게 살면 안 될 것 같아서 날 지킬 방법을 찾다 보니까 계획을 세우게 됐어요. 지금은 무엇이 되었든 사업 선정 여부와 상관없이 내년의 일정까지 준비해요.
좌담 참여자 이상. 남색 반소매 티셔츠를 입었다. 옆머리를 짧게 친 투블럭 머리이며, 목과 손 등에 여러 타투가 있다. 양손을 몸 앞으로 들어 살짝 주먹을 쥔 채 말하고 있다.
이상
하늘
그렇다면 ‘연극 관련 활동’은 ‘연극 활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요? 창조적 영감 획득, 역량 강화, 네트워크 형성, 스트레스 해소, 정체성 재구성 등의 맥락에서 떠오르는 것들을 자유롭게 나눠주세요.
재영
연극을 매개로 한 교육을 하니까 수업을 준비하면서 연극 이론과 극적 관습을 찾아볼 때가 많아요. 또 제가 교육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교육학에 관심을 갖고, 연극의 교육적 기능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고요.
지영
저는 성희롱·성폭력 예방 교육 강사를 하면서 제 작업 <뇌 까리다-젠더 탐구>와 <뇌 까리다-다양성 탐구>의 영감을 얻었어요. 그리고 예술로 사업에서는 정릉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면서 <정릉사색>이라는 작업을 하기도 했는데요. 이때 예전에 함께 활동했던 선생님들과의 네트워크가 바탕이 되기도 했고요.
이상
예술로 사업에서 비수기에 감귤선과장을 문화예술공간으로 전환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요. 공간을 운영하면서 다양한 예술가들의 작업 과정을 함께하는 동안 많은 것을 배웠고요. 지역, 장르, 매체가 다른 동료들과 서로의 작업을 보고 피드백해주는 관계망이 생겨나기도 했어요. 이 네트워크를 통해 이후의 작업을 이어 나가기도 하고, 다른 직무에 도전해보기도 하고요.
나정
저는 작가이다 보니 혼자 집에서 작업하는 시간이 길어요. ‘연극 관련 활동’을 하며 밖으로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좋은 점이죠. 동시대 사람을 만나고, 관객을 만나며 다양한 목소리를 접하고 다른 시각으로 연극과 세상을 보는 게 중요하고, 또 소중한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반면 청소년이나 일반인, 연극에 종사하지 않는 분들을 대상으로 수업을 꾸리다 보니 내 목소리를 잃어가고 있다는 기우도 있어요. 쉽게 풀어서 말하다 보니 작가로서 나의 독특한 세계나 어법이 희석된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연극과 사회가 만나는 방식

하늘
각자 하고 계신 활동 안에서, 그 활동에 연루된 참여자들, 그러니까 시민, 예술가 동료, 정책·행정 담당자, 기업 등과 함께 어떤 의미와 가치들을 발견하게 되시나요?
미라
저는 코로나 이전에 망원동에 있는 한 생협 기업과 예술로 사업을 함께 했어요. 돌봄을 알리고, 돌봄기금을 마련하는 사업이었는데요. 제가 ‘돌봄 퍼포먼스’라고 계속 돌을 보는 동상 퍼포먼스 프로젝트를 제안했어요. 생협 매장 귀퉁이에서 돌을 보다가 누군가 돌봄기금함에 돈을 넣으면 그분께 돌을 드리고 같이 돌을 보는 짧은 퍼포먼스였는데요. 2년 정도 이 프로젝트를 지속하면서, 첼로 연주자와 협업하여 돌을 그냥 보는 것에서 함께 춤을 추는 방식으로 확장되기도 했고요. 그러고나서는 제가 참여했던 프로젝트가 끝난 뒤에도 그 활동을 이어가실 수 있게 사용했던 장비 같은 것들을 기업에 다 드렸거든요. 최근에 연락을 받았는데, 전 조합원이 돌봄기금을 다 내게 되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일을 계속 이어서 하신 것도, 돌봄기금이 조합의 기본값이 된 것도, 연락을 주신 것도 감사하고 뿌듯했어요.
이상
저는 지금 제주 퀴어프라이드 조직위원회와 예술로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데요. 지역에서 성소수자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힌 공간을 발굴하고 지도에 표시해서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전에 이미 제주 퀴어 퍼레이드에 참여하거나 연대한 사람들로 팀을 꾸렸는데도 퀴어와 젠더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다르더라고요. 사업이 시작되었을 때 가장 먼저 기관에 퀴어, 젠더와 관련된 교육을 요청하고, 참여 예술가들과 스터디를 시작했어요. 그렇게 한 달 정도가 지나니까, 동료들에게 각자의 관점과 언어가 생기는 거예요. 이 운동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동료도 생기고, 예술가로서 이 프로젝트를 넘어 운동에 기여할 방법을 찾고 싶다는 동료도 있고요. 마찬가지로 기관에서도 꼭 해야 하는 주어진 일 외에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해야 하는 시간을 마련하면서, 너무 즐겁게 일하시더라고요. 그러면서 사업에 한정해서 만나고 헤어지는 건 아쉽다고, 사업 없이도 자생적으로 인연을 이어갈 방법을 고민해보자고 제안을 주셨어요. 결과물을 떠나 과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서로 연대하고 변화하는 걸 발견해나가는 과정이 의미 있었습니다.
지영
저한테는 예술적 완성도, 평가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순간이 의미 있는 것 같아요. <정릉사색>을 보신 많은 지역 주민 분들이 ‘내가 사는 곳에 의미를 부여해주니 너무 좋다’고 말씀해주셨거든요. 어르신들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만드는 사회적 협동조합의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도 있는데요. 그때 어르신들이 굉장히 좋아하시는 걸 보면서, 제가 지금까지 작품의 완성도로 평가받는 것에만 너무 매몰되어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반성도 했습니다.
좌담 참여자 이지영. 팔꿈치까지 오는 소매의 베이지색 재킷에 검은색 옷을 받쳐 입었다. 가슴께까지 오는 굵은 웨이브 머리를 했으며, 앞에 노트북을 펼쳐두고 있다.
이지영
나정
청소년들과 희곡 수업을 하게 되면 아이들이 재미있는 걸 만들어내요. 지난주에는 세이브더칠드런이라는 단체의 면접 상황을 가정하고 면접관과 지원자 역할을 나눠서 해봤는데, 아이들의 질문과 답변이 정말 놀라운 거예요. ‘가정에서 학대를 당한 아이가 사람과 접촉이 어려울 때 어떻게 접근할 거냐’라는 질문을 던지니, ‘전화를 걸어서 목소리부터 친숙하게 한 다음에 편지를 써서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함께 찜질방에 가고 스포츠를 한다’고 대답하는 거예요. 아이들이 일상과는 다른 상황에 임하면서 진지한 생각을 해요. 그렇게 활발하게 생각하고 능동적으로 답하는 게 재미있고 감동적이에요.
그리고 시민연극을 하다 보면 부끄러워하시던 분들이 앞에 나와서 자기 사연을 막 이야기할 때가 있거든요. 자기 삶의 우여곡절을 이야기하시는데, 그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아카이브한다는 느낌도 들고요. 보통 사람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기록하는 것이 가진 의미를 생각해봤어요. 작년에는 지역 비평가, 그러니까 지역을 비평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양성하는 작업을 했는데, 자기가 발 딛고 사는 지역에 관심을 갖고, 무언가를 찾고 만드는 과정이 유효하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재영
저도 아이들이 진지하게 다른 사람의 삶을 이해하고 상상할 때 연극 수업의 유효함을 느껴요. 가상의 상황을 설정하고, 역할을 맡아 체험해보면 글로 배우는 것 이상으로 깨닫는 게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연극 수업을 통해 문제를 경험하고, 자기 생각을 갖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관심 없던 문제를 탐구하고, 자신의 생각과 태도를 알게 되기도 하고요. 또 연극을 통해 갈등상황을 해결하고, 딜레마에 빠져보기도 하는데요. 살면서 계속해서 어떤 선택을 마주하잖아요. 이런 선택의 순간을 대비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이 수업에서 많은 걸 느끼게 됐다고 말할 때 보람을 느껴요. 연극에 몰입해서 적극적으로 자기 생각과 문제를 이야기할 때 제가 교육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생각도 들고요. 이런 것 때문에 ‘연극 관련 활동’을 멈출 수 없는 것 같아요.

완료형이 아닌 진행형의 가치

하늘
나눠주신 말씀들을 듣다 보니 ‘연극 관련 활동’이 연극 바깥의 부차적인 활동이 아니라 ‘연극 활동’만큼이나 주요한 직무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드는데요. ‘연극 관련 활동’을 둘러싼 여러 사람에 대한 상호이해가 있어야 연극 현장에서 서로를 만날 때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편 ‘연극 관련 활동’은 단지 그 활동 하나로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파생되는 의미와 가치를 만들어내기도 하잖아요. 예를 들면 어린이청소년과의 연극 수업은 그 자체로 충만한 시간이기도 하지만, 미래의 관객과 예술가를 키워내는 일이기도 하지요. 민관 거버넌스 활동은 지금 당장 동료 예술가들의 활동 영역을 매개하면서, 또한 장기적으로 예술 생태계를 바꾸는 일이기도 하고요. 이러한 맥락에서 각자가 생각하시는 ‘연극 관련 활동’에 대해 이야기해주세요.
재영
연극을 직접 경험해본 아이들이야말로 이후에 문화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활동을 하게 됩니다. 문화예술은 즐기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하는 이런 활동을 통해 아이들이 예술을 즐길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나는 것이 가장 좋은 일 아닐까 하는 이상을 갖고 있습니다.
나정
연극의 3요소가 배우, 희곡, 관객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보통 연극 교육이나 모임을 하면 참여자들을 전문 연극인으로 만들려고 해요. 어떤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건 관객이에요. 연극을 볼 줄 알고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을 만드는 게 굉장히 어려운 일이거든요. 연극의 묘미나 문법을 알면 훨씬 재미있는데, 그걸 모르니까 어렵다고 느끼잖아요. 관객을 개발하고 관객들이 재미를 느끼게 하는 프로그램이 있으면 좋겠어요.
이상
시민극단의 역할도 큰 것 같아요. 직접 창작 과정에 참여하고 경험해보는 게 좋은 방법 같기도 하고요. 교육 이외에도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형식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올해 안산국제거리극축제에서 <십대들과의 밤산책>이라는 작품에 관객으로 참여했는데 너무 행복했거든요. 안산에 사는 10대 청소년들이 만든 작품인데 너무 황홀한 경험이었어요.
지영
저는 청년예술청 거버넌스에 참여하기 전에 성평등·탈위계 문화조성 플랫폼 <NONE: 넌> 프로그램에 참여했거든요. 예술노동이라는 키워드에 관심 있는 여러 장르의 창작자 및 기획자 등과 아투워크(artowork)라는 모임을 만들어서 활동하는데 다양한 시도와 경험을 하고 있어요. 전시를 같이 기획하기도 했고요. 그러다가 청년예술청 거버넌스 활동도 하게 된 건데요. 청년예술청이 어떤 공간이 되면 좋을지를 상상해 보면, 아투워크처럼 서로를 지지해주고 여러 시도를 하면서 자발적 모임을 이어 나가는 만남의 장이 될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아투워크도 수입 없는 자발적 모임을 3년간 해오고 있거든요. 작업이 힘들 때나, 동료를 구하기 어려울 때, 하소연도 하고 서로 토닥여주기도 하는데, 이게 정말 큰 힘이 돼요. 이런 긍정적인 네트워크를 어떻게 더 만들고 지속 가능하게 할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미라
‘연극 관련 활동’은 ‘연극 활동’에만 몰입하는 것과는 다른 시각을 갖게 해주는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새로운 시각은 다시 ‘연극 활동’에 적용되고, 거기서 또 다른 것을 발견해내며 연결이 되고요. 그래서 ‘연극 관련 활동’은 연극을 계속하게 만드는 힘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지영
실제로 저는 연극만 했을 때 제가 당당한 사회구성원이라는 생각을 잘 못 했거든요. 근데 ‘연극 관련 활동’을 하면서 그 생각을 갖게 됐어요.
나정
단지 아르바이트가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하는 중요한 일, 소중한 일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바탕이 돼주는 일을 한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편안해지더라고요.
좌담 참여자 김나정. 파란색과 흰색, 노란색의 프린트가 들어간 초록색 티셔츠 위에 남색 남방을 걸쳤다. 검은색 뿔테 안경을 썼고, 단발머리에 안쪽 챙이 회색인 검은색의 벙거지 모자를 썼다.
김나정

기회와 환경, 그리고 법과 제도

하늘
이어서 ‘연극 관련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와 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려 합니다. 정책적인 변화로 인해 ‘연극 관련 활동’의 기회는 어떻게 영향을 받나요? 법과 제도 등이 각자 하고 계신 활동에 영향을 끼친 사례가 있다면 나눠주십사 부탁드려요.
이상
저는 창작 워크숍을 기획해서 실행하는 걸 몇 년 정도 했어요. 제가 예술가를 초대해서 그 사람의 창작물을 공유받고, 그걸 토대로 다시 창작하고 발표하고 상호피드백하는 워크숍이었는데요. 이 과정을 통해 도출된 결과를 발전시켜 신작을 발표하기도 했고, 신작을 창작하는 과정에서 해당 방법론을 나만의 방식으로 적용해서 활용한 경험이 있어요. 그런데 지방정부의 문화 정책 방향이 바뀌고 문화예술기금 자체가 대폭 삭감되면서 그 사업이 없어졌어요.
재영
‘연극 관련 활동’도 국가나 지원사업에 편입되어있는 것 같아요. 예술강사 사업도 올해 예산이 반 정도 삭감된 걸로 알아요. 예산이 삭감되면 그만큼 강사들의 페이도 줄어들고, 수업도 줄고, 학생들에게 돌아가는 수혜도 없어지거든요.
미라
예술로 사업도 없어질지 모른다는 이야기가 오가고 있어요. 사실 공표된 건 없는데 그 말만으로 흔들리는 게 느껴져요. 예술인복지재단에서 활동하는 선생님도 ‘이런 이야기가 오가고 있어서 이번 사업은 결과를 잘 내야 하지 않을까’라고 조심스럽게 이야기하시더라고요. 이 사업은 결과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그 과정 중에 발견해내는 것들에 목표를 두고 있는데, 없어진다는 이야기만으로 심적인 방향성이 흔들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상
맞아요. 올해 예술인복지재단 예술로 사업 오리엔테이션에 갔을 때 직원분들이 올해도 예산이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위기가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많은 사람들의 노력 끝에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어온 사업이 몇 사람의 정책 결정 때문에 없어진 사례가 많았잖아요. 그런 게 너무 안타깝죠. 조금 다른 맥락이지만 예전에 예술로 사업에 참여했을 때 행정적으로 문제가 생긴 팀들이 있는데, 행정 처리 절차에서 재단이 예술가의 동료가 아니라 감시자 역할을 한다는 느낌을 받아 의구심이 들었던 경험이 있어요.
지영
사실 청년예술청을 제외하고는 지금 거버넌스가 거의 다 없어졌잖아요. 거버넌스 활동 중 의견을 나누고 회의를 거듭하고, 담론의 장을 만들고 또 확장해 가는 과정이 엄청 지난하다고 생각되기도 하지만, 그게 다 민과 관이 현장의 의제를 발굴하고 방향을 찾아가는 과정이거든요. 비효율적이지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거버넌스들이 없어져 애석한 마음입니다.
하늘
예술로 사업이 없어지면 다른 부정적인 영향도 있을 것 같아요. 단기 계약으로 이루어지더라도 예술인들에게 이만큼 안정적인 부수 노동 일거리도 없을뿐더러, 예술인고용보험과 원천세 신고도 이제 막 자리 잡아 가고 있었으니까요. 거버넌스가 중단되는 사례도 많은데요. 거버넌스 참여자들만 일이 없어진 게 아니라 공간을 이용하는 예술인들이 창작지원을 받고 여러 네트워크를 만들 기회를 잃어버린 셈이라, 우리 모두의 상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정
예술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 필요에 의해 가장 먼저 잘라도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이런 상황이 반복되는 거잖아요. 슬프고 화가 나요. 행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고민하지 않는 것 같아요.
이상
한편으로는 이렇게 예산을 다 깎아도 어차피 예술인들이 의견을 하나로 모아서 사회적 분란을 만들지 못할 것으로 보고 쉽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실제로 예술인들은 너무 다양한 환경에 놓여 있고, 각자의 삶의 조건은 모두를 하나로 모이기 어렵게 만들기도 하니까요.
하늘
혹시 자발적으로, 자생적으로 ‘연극 관련 활동’의 기회를 만들었던 경험이 있으신가요? 어떤 조건이 필요한가요?
지영
갈급함이 필요한 것 같아요. 저는 연극만으로는 안 되겠다는 갈급함이 있어 다른 분들을 만나고, ‘연극 관련 활동’을 찾아다녔던 것 같거든요.
이상
작년 10월에 팔레스타인 아슈타르 극장에서 세계 연극인들에게 「가자 모놀로그」 낭독회를 요청한 적이 있어요. 10월 27일에 낭독해달라고 요청이 왔는데, 제가 그 메시지를 26일에 봤거든요. 그런데 바로 다음 날 사람과 공간과 장비를 다 모아서 진행했어요.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제가 사는 마을에 활동가와 예술가가 많고 16, 17년 투쟁에서 쌓인 인적 네트워크, 그리고 공간과 장비를 무료로 지원해줄 수 있는 제반 조건이 갖춰져 있었기 때문이에요. 자생적인 활동을 위해서는 인적, 물적 네트워크가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직 ‘연극 활동’만 할 수 있다면?

하늘
전반적으로 ‘연극 관련 활동’은 연극인으로서 자신의 활동과 삶에 어떤 의미가 있나요? 연극인에게 ‘연극 관련 활동’은 꼭 필요할까요? 예술인 기본 소득 보장 등으로 ‘연극 활동’만 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진다면, ‘연극 관련 활동’을 선택하지 않게 될까요?
이상
저는 기본 소득 보장에 동의하지 않고, 현실화 가능성에도 의구심이 들어요. 모두의 삶이 덜 파편화되고 덜 바빠져야 기본 소득 보장의 기반이 마련될 거라 생각하거든요. 모든 사람에게 교육, 의료, 주택이 제공되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럼에도 만일 ‘연극 활동’만 100% 하면서 살면 어떤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그려보게 돼요. 한번도 ‘연극 활동’에만 매진한 적이 없거든요. 그 과정에서 얼마나 성장할지, 얼마나 밀도 높은 작품이 탄생할지 궁금해요. 한편으로 정말 연극만 하고 살면 행복할까? 싶기도 하고요.
재영
저도 예술인 기본 소득 보장이 크게 와닿지는 않거든요. 있으면 좋겠지만 제도에 앞서 인식의 변화가 더 필요하기도 하고요. 사회 전반이 예술의 기능, 그리고 예술 향유의 필요성을 납득한 이후에 가능한 일 같아요. 예술인들의 숙제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기본 소득이 보장된다 하더라도, 지금 느끼는 가치와 의미가 있으니 ‘연극 관련 활동’을 계속할 것 같아요.
나정
저는 작가라서 특수성이 있을 수 있는데, 동시대 사람들의 목소리나 삶을 직접 대하는 게 제 작업을 풍성하게 만들어주거든요.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다양한 삶의 양상을 본다는 게 작업을 풍성하게 하는 기회와 바탕이 되더라고요.
지영
오늘 여러 이야기를 했지만, ‘연극 관련 활동’이 저에게 너무나 큰 의미이고 사회구성원이 된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사실 기본 소득이 보장되면 하나의 작업에만 몰두해보고 싶어요. 양발을 걸치고 양쪽에 미안함을 느끼면서 조바심 내는 과부하 상태가 아니라, ‘연극 활동’이나 ‘연극 관련 활동’ 한 가지만 선택하고 집중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해요.
미라
저는 ‘연극 활동’만 해본 적이 있어요. 과정도 너무 좋았고 결과도 너무 좋아서, 이렇게만 작업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금전적 지원이 있었고, 계약서에도 이 작업에만 집중한다는 조건이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었어요. 그래도 ‘연극 관련 활동’을 병행하면서 다른 에너지를 얻고, 개인 작업을 위한 영감도 얻을 수 있어서 포기하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좌담 참여자 이미라. 베이지색 바탕에 주황색과 보라색 줄무늬가 들어간 브이넥 티셔츠를 입었다. 빨간 줄이 달린 얇은 검은 테의 동그란 안경을 썼고, 베이지색 캡을 쓰고 있다. 손바닥이 아래로 가도록 양손을 어깨 높이로 올려 이야기하는 중이다.
이미라
하늘
한편 ‘연극과 전혀 상관없는 활동’의 경험도 있으실 텐데요. ‘연극 관련 활동’은 ‘연극과 전혀 상관없는 활동’과 비교했을 때, 연극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
이상
일할 때 태도가 다른 것 같아요. ‘연극 관련 활동’을 할 때는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생각하면서 문제에 접근하는 것 같아요. 제가 하는 연극과 전혀 상관없는 활동 중에는 사회운동이 있는데요. 활동가로 활동할 때는 저의 태도나 우선순위가 예술가일 때와 많이 달라요.
나정
사명감도 다른 것 같아요. ‘연극 관련 활동’을 할 땐, 다른 사람들이 연극을 좋아하길 바라는 마음도 들고, 제가 좋아하는 일이라 잘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도 해요. 다른 노동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임하게 되는 것 같아요. 또 사람들에게 연극이 좋고, 희곡이 좋은 거라고 이야기하는 게 제게 힘이 될 때도 있어요.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연극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야 하고, 또 제가 하는 말을 제가 듣잖아요. 스스로를 북돋는 순간이 되기도 해요.
재영
실제로 ‘연극 관련 활동’에서는 사명감, 욕망이 드러나는데, 전혀 상관없는 활동에서는 그런 걸 느끼지 못해요.
지영
연극 작업이 없을 때 연극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 중에 이런 게 있어요. ‘연극 관련 활동’을 하면서 ‘내가 아직 연극과 접점이 있다, 곧 연극을 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거죠.
미라
저는 백화점에서도 일하고 막걸리 집에서도 일했던 경험이 있어요. 그렇게 일하면서 버려지는 그릇과 막걸리 병을 모아 뒀거든요. 나중에 제 창작물에 그걸 소품으로 사용하거나 수업에서 악기로 사용하게 됐어요. 이런 경험이 있으니까 나중에 연극과 전혀 상관없는 활동을 할 때 무얼 발견할지 기대하게 되더라고요. 또 일했던 곳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보는데 캐릭터를 발견하고 관찰하는 일이 배우 작업에 도움이 되기도 했고요.
좌담 진행자 박하늘. 단발머리에, 하얀색과 파란색 이미지가 들어 있는 흰색 반소매 티셔츠를 입었다. 앞쪽에 노트북을 열어두고 있다.
박하늘
하늘
이제 마지막 이야기를 나누면서 오늘 좌담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들려주신 이야기들을 통해 ‘연극 활동’뿐만 아니라 ‘연극 관련 활동’을 통해서도 많은 의미를 발견하신다는 것을 알게 됐는데요. 앞으로 더 나은 환경에서 연극하기 위해 어떤 인식적, 제도적 변화가 필요할까요?
나정
저는 젊은 예술가와 원로 예술가 사이에 낀 존재 같아요. 이도 저도 아닌, 방황의 시절을 겪고 있는 거죠. 저랑 친한 시인이 마흔에 등단했더니 어떤 예술기금도 신청할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데뷔하자마자 중견이 된 거예요. 그에 비해 20대인데도 막강한 경력을 쌓은 분들도 있거든요. 연령의 기준이 다소 기계적이지 않나 생각이 들기도 해요.
지영
서울문화재단 예술창작활동 지원사업의 A, B, C트랙은 경력을 기준으로 하고 있는데, 말씀하신 대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지원제도 같은 경우, 끼인 세대는 어디 갈 데가 없어요. 천편일률적으로 지원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제도에서 소외되는 사람들이 없는지 세심하게 살피면 좋겠어요. 또 연습시간까지 고려한 사례비를 재단에서 책정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해요. 작품의 완성도와 노고에 보답하는 것 사이에서 갈등하는 게 너무 힘들거든요.
이상
동의합니다. 고용보험에서 제가 사업주가 되어버리니까요. 저는 동료들과 사업주-고용자 관계가 아닌데, 제도적으로 그런 관계가 맺어지는 것도 불편해요. 그리고 사람들이 창작의 과정에 참여하는 걸 직접 지원하는 사업이 많아지면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이 많아질 거예요. 마지막으로 무상진료, 무상주거, 무상교육이 이루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미라
공식적인 공연 사례비 책정 기준도 있으면 좋겠어요. 최저임금처럼, 창작에 몰두하는 시간이 사례의 기준이 되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계약 시에 몇 회, 몇 시간 작업을 한다는 연습 내용도 정해질 수 있을 것 같고요. 저는 연습을 좋아하는데, 작업하다 보면 연습을 멈출 수 없을 때가 있거든요. 그러다 보면 신체적으로 지치고 몸과 마음이 힘들기도 해요.
지영
연극 할 때 연습 시간까지 고려해서 사례비를 책정하고, 그걸 지원 기관의 담당자분께 공유했더니 말도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으셨다는 한 연출가의 사례가 떠오르네요. 연습시간 사례비를 최저시급으로 계산했는데, 너무 과도하게 책정했다고 했대요.
미라
그 부분이 노동하고 연관될 텐데, 어렵습니다. 한편으로 인식적인 부분에서 제안하고 싶은 것은 모두가 수평적이고 안전한 창작환경을 만들어가는 작업을 시도해보면 좋겠어요. 제도적으로는 기본 소득 보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연극인들에게 안정적인 경제력이 갖추어지면 더 나은 환경에서 작업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하늘
오늘 많은 이야기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현실적 문제의 고충을 공감하며 나눌 수 있어 위로가 되기도 했고, 또 다른 가능성을 타진해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고요. 덜 외롭게 안부도 묻고 주변도 챙기며 연극과 삶을 위한 궁리를 이어가고 싶습니다. 그럼, 오늘 좌담은 이렇게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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