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연극, 저항의 형식들
거부와 추동의 힘으로 ‘이후’의 이후를 다시 쓰기
김연재, 이산
제259호
2024.08.08
2018년 연극계 미투 운동 이후 웹진 연극in에서는 해마다 ‘미투 이후 1년, 연극은 달라졌는가?’, ‘미투 이후 2년, 무엇을 ‘더’ 바꾸어야 하는가’, ‘미투 이후 3년, 우리의 연극을 돌아보다’라는 기획을 마련해 연극 현장의 변화를 기록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미투 이후 3년을 넘어서는 시점인 2021년, ‘‘이후’의 이후를 상상하기’라는 기획을 통해 보다 종합적인 관점에서 현실을 진단함으로써 도래할 연극의 미래를 그려보려 시도했습니다. 이를 위해 연극인 좌담에서부터 관객 설문조사, 제도권 시상제도 분석, 그리고 예술지원사업 선정작 조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맥락에서 변화를 추적하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모색했습니다. 그 후 다시 3년이란 시간이 흐른 2024년, 연극in은 다시 한번 질문합니다. 지금의 연극은 어떤 현실을 맞닥뜨리고 있는지, 이전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듣고 말해보려 합니다. 그 첫 번째 기사로, 지난 3월 있었던 제9차 대학로X포럼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 이 글은 좌담 참여자 김연재가 정리하고, 이산이 감수했다.
2018년 연극계 미투 운동과 각자의 자리
- 김연재
- 오늘은 이산 님과 함께 지난 3월 열렸던 제9차 대학로X포럼 <연극계 백래시, 어떻게 맞서나갈 것인가 - <두 메데아> 보이콧 운동을 경유하여>를 중심으로 성폭력 가해자 복귀 문제와 이에 대한 공공기관의 역할을 살펴보고, 미투 운동 이후 6년이 지난 지금, 각자의 자리에서 어떤 실천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이산 님께서는 배우, 마임이스트, 창작자이면서 또 성폭력 예방교육 강사로도 일하고 계시죠. 성폭력, 위계폭력이 발생했을 때 사건을 조정하고 피해자를 상담, 지원하는 활동도 하시는데요. 지난 6년간 페미니즘 연극 운동의 자리에서 저는 늘 이산 님을 만났던 것 같아요. 산 님께서는 이렇듯 다양하게 교차하는 역할들을 어떻게 가지게 되셨는지요.
- 이산
- 대학에서 총여학생회 활동을 하다가 졸업 후 성폭력 상담소에서 여성단체 활동가로 일했어요. 성폭력 상담소를 퇴사한 뒤에는 극단 활동, 문래 창작촌 스튜디오에서 마임이스트 동인 활동을 했고요. 연극을 하면서 소속 집단에 대한 ‘충성’이나 연극에 대한 ‘진정성’이 중요한 가치라고 배웠거든요. 같이 연극하는 동료에게 윤리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수용되지 않았죠. 2018년 미투운동은 이러한 문화의 한계를 인식하게 했어요. 그동안은 여성운동을 그만두고 연극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 계기이기도 했고요. 연극을 하면서도 그 안에서 성폭력 문제를 얘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처음 본 거예요. 그때를 기점으로 제가 상담자로 호명되기도 하고, 제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내가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얘기하기도 했고요. 그렇게 지금의 위치성이 만들어진 것 같아요.
- 김연재
- 오늘 산 님을 만나러 오면서 우리의 대화에 각자의 위치성이 잘 드러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2017년 말에 극작가로 데뷔했고 데뷔하자마자 미투가 시작되었어요. 당시 스물세 살 대학생이었고요. 현장에 나오자마자 처음 경험한 공동체가 각종 대책 회의, 성폭력 반대 모임들이었죠. 페미니스트 연극인 연대에 속해 있기도 했고요. 피해자, 지지자, 연대자, 작가, 학생, 사회초년생 등의 정체성이 뒤섞여서 굉장히 긴장도 높은 시기를 보냈어요. 그때 처음 산 님을 뵈었고요. 이후에 저는 성폭력 문제 대응에 직접 뛰어드는 등의 실천은 하지 못했는데요. 다만 여성주의를 기반으로 작품 활동을 하려고 노력했지요. 반면 산 님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창작자로서뿐 아니라 현장 활동가로서도 꾸준히 활동해오셨습니다. 그렇기에 사안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언어가 분명 다를 것인데, 이 차이를 웹진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산 님께서 미투 이후 연극계에서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 조금 더 듣고 싶어요.
- 이산
- 2006년부터 2009년 초, 2018년부터 2020년 말까지 한국성폭력상담소에 있었어요. 2018년부터 2019년까지는 ‘성폭력 반대 연극인 행동(이하 성반연)’ 활동을 병행했고요. 연극계 미투에 대응하고자 2018년 2월 21일, 극단 고래 연습실에서 백여 명의 연극인들이 모였고 그다음 날 새벽 성반연이 결성되었죠. 그날 바로 상담 창구를 열었어요. 1~2주 만에 30여 건의 메일을 받았고 그중 사건에 대한 법적 대응을 원하신다거나 심리치료가 필요하시다거나 이렇게 요청하신 분들은 성폭력상담소로 연계했습니다. 그즈음에 마침 제가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다시 활동을 하게 되어, 일부 사건은 상담소 활동가로 담당해서 지원했어요.
- 김연재
- 제보를 받는 데서 나아가서 실질적인 지원이나 상담까지, 가진 자원 안에서 최선을 다하셨던 거네요. 이윤택 사건1) 공판은 어떻게 참여하게 되셨나요?
- 이산
- 이윤택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 사무국이 한국성폭력상담소였어요. 저는 상담소에서 활동하고 있었지만 성반연 쪽에서 참여했고요.
- 김연재
- 최근에는 관련 주제로 연구논문을 쓰셨다고 들었어요. 어떤 논문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 이산
- 「여성 연극인의 성폭력 대응 경험 연구」라는 연구입니다. 미투 운동을 통해 만났던 분들에게 인터뷰를 요청해서 쓰게 되었어요. 어떤 사건이 터지면 그에 대한 대응과 문제 해결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6년이 지나서 보니, 사건 대응이나 문제 해결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는 듯 보여서 넘겨버린 것 중에 여전히 충분히 공유되지 않은 이야기가 많다고 생각했어요.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해소될 수 없는 것들,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동료들의 통찰을 청해 들을 수 있다는 게 좋았어요.
- 김연재
- 그럼 우리 이제, 미투 이후 계속 불거져온 문제였죠, 가해자가 공공의 자원을 활용해서 복귀하는 문제, 그리고 미투를 비롯한 소수자 운동에 대한 반동으로서의 백래시 문화에 대해 이야기해볼까요. 최근에는 제9차 대학로X포럼 <연극계 백래시, 어떻게 맞서나갈 것인가 - <두 메데아> 보이콧 운동을 경유하여>(이하 ‘포럼’)에서 이러한 문제들이 더욱 가시화되었습니다.
2024년 제9차 대학로X포럼
<연극계 백래시, 어떻게 맞서나갈 것인가 - <두 메데아> 보이콧 운동을 경유하여>
2024년 1월 3일, 예술인 연대체는 성범죄 피의자 안 모 씨와 이윤택 성폭력 사건의 2차 가해자 김소희 씨의 공공극장 공연 참여에 대하여 쿼드 측에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쿼드는 김소희가 2018년 연희단거리패 경찰 조사 당시 ‘혐의없음’ 처분을 받았으므로 대관을 취소한다면 ‘역차별’이 될 수 있으며 오히려 서울문화재단이 법적으로 위험해질 수 있다, 성범죄 피의자 그래픽디자이너 안 씨의 크레딧을 삭제하겠다, 라는 내용의 입장을 내놓았다5). 이에 예술인 연대체는 1월 6일 대학로X포럼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공연 <두 메데아>와 극장 쿼드에 대한 보이콧을 선언하고 관객 서명을 받기 시작했다.6) 3일 동안 공연예술 관계자와 363명의 관객이 연명하였으며 그 결과, 1월 9일, 쿼드는 공연 취소를 공지하였다.7) 쿼드가 밝힌 공연 취소 사유는 ‘프로덕션의 내부사정’이었다. 이후 극단 서울공장의 대표이자 <두 메데아>의 연출가 임형택 씨가 자신의 SNS에 입장문을 게재했다.8) 이어서 1월 11일, 김소희 전 대표가 자신의 SNS를 통해 입장을 표명했다.9)
2월 26일, 김기일, 김민조, 김진아, 박선우, 박주영, 신재훈, 심지후, 유연주, 이산, 전서아, 진해정, 하지은, 홍예원은 제9차 대학로X포럼 <연극계 백래시, 어떻게 맞서나갈 것인가 - <두 메데아> 보이콧 운동을 경유하여>를 공동으로 발의하였다.10) 이들은 “<두 메데아> 사태가 촉발한 보이콧 운동을 경유하다 보면 그간 해결되지 못했거나 오히려 역행 혹은 퇴행을 의심하게 되는 연극계의 다양한 맥락들”이 있다며 가해자 복귀 문제를 논의하고 현재 연극계의 성폭력 대응 시스템을 점검해보기를 제안했다. 포럼은 3월 9일 대학로 예술가의 집에서 개최되었다.
- 김연재
- 저는 이 보이콧 운동이 안전한 창작 환경을 조성하고 지원하라는 예술인들의 요청을 공공기관이 외면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공공이 책임을 방기하였을 때 연극 생태계 일원으로서의 문제제기는 소비자로서의 보이콧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는 것이죠. 쿼드가 공연 취소 조치를 내리는 데서 운동은 끝날 수 있었다고 봐요. 그러나 보이콧이라는 최후의 수단을 포럼이라는 공론장으로 탈바꿈시켰다는 점이 저는 굉장히 급진적이었다고 생각했어요.
- 이산
- 연극인은 연극 생산자이면서 동시에 중요한 연극의 소비자이기도 하잖아요. 비중 높은 관객 집단이고요. 이러한 위치성을 활용해서 관객들에게 연대 요청을 한 것이었죠. 저는 보이콧 운동을 시작할 때 성명서를 내는 단계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이후 포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합류했는데요. 보이콧 운동의 근거로 김소희 씨의 행위를 일일이 나열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이윤택 사건을 면밀히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정보가 불충분하다고 느낄 가능성이 있었죠. ‘우리에게 구체적인 사정을 말하지 않았으나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라는 신뢰를 갖고 보이콧 운동에 동참하신 분들도 있을 거예요. 이 동력을 모아 보이콧 운동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면 좋을까 고민하던 중에 갑자기 <두 메데아> 공연이 취소되었어요. 그러면서 쿼드나 프로덕션 내부에서 이 사건에 대해 어떤 논의를 했는지, 어떤 입장인지 구체적으로 알 길이 사라져버린 거예요. 공론장이 필요하다고 의견이 모아졌죠.
- 김연재
- 이산 님께서는 공연 취소의 원인을 보이콧 운동만으로 볼 수는 없다고 말씀하신 바 있죠. 저도 동의합니다. 쿼드 측에 자체적 매뉴얼이 있었다면, 극단 내부적으로 성폭력 사건에 대한 문제해결 의지가 있었다면 공연을 취소하지 않으면서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있었을 거예요. 사안에 따라 다르겠지만 무언가를 전면 취소하고 멈추는 일은 오히려 섬세한 문제 해결의 가능성을 막기도 하지요. 이산 님께서는 포럼을 공동 발의하셨고 포럼의 사회자이기도 하셨죠. 이 과정에서 어떤 것들을 기대하고 목표하셨나요?
- 이산
- 보이콧 운동의 주된 요구사항은 김소희 씨가 공공극장 무대에 서지 않는 것이었지만 사실 우리는 이보다 더 넓은 논제들을 가지고 있었죠. 폭력의 문제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민해온 연극인들을 만나서 공공기관에 요구할 입체적인 사안들을 논의해보고 싶었고요. 성폭력 사건의 법적 절차가 끝났다고 해서 피해자들이 활동 영역을 확보했냐 하면 그렇지 못했잖아요. 가해자 및 2차 가해자와 떨어져서 활동할 수 없다는 것이 피해자에게 어떤 일인지에 대해 얘기할 수 있기를 바랐어요. 그리고 이들이 공공극장의 무대에 서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의 의미에 대해서 더 풍부하게 의견을 나누고 싶었죠.
- 김연재
- 그런데 공론장의 실상은 조금 달랐습니다. 김소희 씨를 대리, 옹호하거나 보이콧 운동 발의자 및 이윤택 사건의 피해 고발자들을 비난하는 발언이 절반 이상이었던 것 같아요.
- 이산
- 우리에게 공론장이 필요했던 것은 맞는데 가해자 및 2차 가해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을 공적 담론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김소희 씨를 옹호하는 일이 자신의 이해관계와 연관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은 채, 그러니까 김소희 씨의 활동이 자신의 활동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스스로의 위치를 밝히지 않은 채, 김소희 씨의 심정이나 성취가 마치 공적 가치인 것처럼 이야기하니까 ‘사회적인 낙인을 가지게 된 사람이 활동을 지속해도 되는가’가 의제가 되어버린 거예요. 김소희 씨와 자신의 거리를 굉장히 좁힌 상태로 대변하시는 경우 토론을 하기에 적절한 거리감이 형성되지 못했죠. 제가 김소희 씨의 사과문에서 가장 놀랐던 점도 무언가를 쉽게 대리하는 태도였어요. 본인이 연희단거리패, <두 메데아> 공연팀, 심지어 쿼드까지도 감쌀 수 있는 위치를 점하잖아요. ‘나는 누군가를 지키는 사람이지 해치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식으로요. 이들을 향한 비난이 정말로 과하다고 느껴서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사람들이 적확한 의견을 낼 수 있도록 자신의 과오와 사건의 실상을 밝혀줘야 하는데 그건 하지 않았잖아요.
포럼에서 김소희 씨를 대변했던 사람들도 어떤 가치를 수긍하고 통합하는 자리에 자신을 위치 지었어요. ‘연극계의 분열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공연을 취소했다’는 식으로요. 이런 식의 태도는 얼마나 쉬운가요. 얼마나 부정확한가요. 쉽고도 부정확한 선택을 왜 부끄러워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저는 들었어요. 반면 포럼 주최측이나 피해자의 동료들은 본인이 피해자를 대변하는 사람으로서 발언권을 쥐려고 하지 않았었죠. ‘통합’이나 ‘연극’ 같은 일반론적인 말들을 가져오면서 우위를 점하지 않으려고, 위치성이 있는 진짜 자기 얘기를 하려고 계속 고민하며 말을 못 하고 있었고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대리할 수도 있었던 거 아닌가 싶어요. 그 자리에 있었던 피해자들은 너무 취약했을 테니까요. 각자가 어떤 위치에 있어야 했을까요.
- 김연재
- 말씀하신 것이 굉장히 중요한 태도의 차이였던 것 같습니다. 저도 저의 위치성을 계속 고민하면서 현장의 발언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고민했어요. 특히 과거 연희단거리패 소유였던 부산 가마골 소극장의 배우들께서 ‘우리는 이윤택을 기다리지 않는다’며 이윤택을 기다리는 사람으로 취급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선언하셨잖아요. 저는 이러한 입장표명이 반가웠던 한편, 이윤택을 선생님이라 칭한다거나 ‘우리는 연극을 하고 싶을 뿐’이라는 말들에서는 한계를 느끼기도 했습니다. 구조적인 권력형 성폭력을 용인했던 연극관, 맹목적인 언술을 재생산하고 현장의 피해자들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요. 그런데도 이분들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낼 수는 없었어요. 김소희나 이윤택을 비롯한 당시 극단 대표격들이 지금까지 묵묵부답인 반면 극단 해체 이후 남아 있는 사람들, 미투 이후 가마골 소극장에서 연극을 시작한 분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으니 우선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 이산
- 저에게도 막연하게 ‘이윤택의 출소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라고 상상된 집단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나 그날 대면을 해서 서로의 입장을 확인했고 따라서 이후의 논의를 섬세하게 해나갈 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피해 고발자나 연희단거리패에 소속되어 있었던 분들에게는 굳이 다시 맞닥뜨릴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을 텐데 그 자리에서 아무런 보호도 받을 수 없었던 점이 가장 안타깝죠. 또 ‘우리는 연극을 하고 싶었을 뿐’이라거나 ‘김소희 씨가 연극을 통해 참회할 것’이라는 말에도 모두가 착잡한 마음을 가졌던 것 같아요. 언어를 뺏긴 기분도 들었을 거고요. 낙인과 복귀를 이야기해야 할 사람은 피해자인데 자리가 바뀐 거죠.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는 이미 권력 구도가 명확하게 있는데 피해자가 성폭력을 고발한다고 해서 이 구도 자체가 바뀌지는 않거든요. 그런데 구도의 역전이 가능한 것처럼, 가해자가 억울한 희생양인 것처럼 이야기되곤 하죠. 성폭력 가해자가 자꾸 복귀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이 업계가 가해자가 돌아올 곳임을 전제하는 거잖아요. 애초에 피해자는 들고 남이 티 나지 않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으니까요.
연희단거리패 전 대표 김소희의 복귀에 반대한다
- 김연재
- 쿼드의 대응과 김소희 씨의 사과문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가볼게요. 쿼드 측은 김소희 씨가 경찰 조사 결과 법적으로 혐의 없음 처분을 받았다며 그를 배제한다면 서울문화재단이 오히려 법적으로 위험해질 수 있다는 입장을 내놓았습니다. 이에 저는 몹시 분노합니다. 미투 운동은 성폭력 사건에 있어서 법적 해결이 얼마나 불충분한지를 확인한 계기였습니다. 성폭력이 사법기관의 증거주의를 넘어서 공동체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임을 강력하게 시사했죠. 성폭력은 신고율, 기소율, 기소 후 유죄율이 모두 매우 낮은 범죄잖아요. 성범죄를 처벌하는 것은 법의 영역이지만 성폭력 문화를 바꾸는 것은 공동체의 몫입니다. 김소희 씨에게는 이윤택 성폭력 사건에서 극단 대표로서 이행해야 할 분명한 책임이 있었어요. 우리는 공동체 차원에서 그의 반성 없는 복귀를 거부하는 것이고요. 문화예술계 미투는 기존의 창작 환경이 폭력과 위계에 얼마나 취약했는지를 보여주었고, 예술인들은 성폭력 문화를 근절하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미투 이후 지난 6년간 서울문화재단의 성인지감수성과 성폭력 대응 체계가 제자리걸음이었음을 여실히 드러냈어요. 피해자의 증언과 가해의 정황이 있더라도 실형을 선고받지만 않았다면 공적 자원을 동원한 예술 활동을 얼마든지 허용한다는 것인가요? 쿼드의 대응은 사법기관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마련했어야 할 내규의 빈자리를 다시 사법기관에 의탁하는 재단의 무능력을 반증하는 처사였어요.
- 이산
- 그래서 저희가 이걸 ‘백래시’라고 부른 거예요. 미투를 계기로 나아갔던 지점에서 퇴행하는 결정이기 때문에요. 김소희 씨의 사과문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무엇에 대해 사과를 하는지 사건의 정황과 잘못을 밝히지 않는다는 거였죠. 그러면 피해자가 용기를 내어 직접 피해 내용을 상술해야만 해요. 공동체가 섬세한 요청을 하기 어렵게 됩니다. 김소희 씨는 자신의 무혐의 처분을 주장하면서도 어떤 죄명으로 고소·고발되었는지는 말하지 않아요. 무혐의라는 것은 피의자 신분으로 경찰 조사를 받은 뒤에 나오는 결과인데 김소희 씨는 참고인 신분으로 경찰 조사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 사과문에 보면, 경찰서에 가서 경찰 조서를 확인해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또한 잘못된 정보입니다. 경찰 조서는 본인밖에 볼 수 없어요. 이러한 점을 확인도 하지 않고 본인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한 수사적 표현으로 썼다는 점이 사과문의 신빙성을 떨어뜨립니다. 분명히 극단 내부적으로 폭력이 용인되는 조직 문화가 있었을 것이고 이 문화가 구조적인 성폭력을 가능하게 했을 것인데 사과문에서는 이러한 성찰 또한 담겨있지 않죠.
- 김연재
- 오히려 연희단거리패를 성폭력 방조집단으로 보지 말아달라 호소하고 있죠. 저는 그러한 시선을 가중시킨 데는 김소희 씨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요. 피해자들이 이윤택 공판을 이어가던 중에 남아있던 단원들과 활동을 재개했기 때문에요. 또 사과문에 보면 이윤택 측에도 피해 고소인단 측에도 증인으로 서기를 거부했다고 말하고 있어요. 중립과 신념을 지켰다는 어조지만 법정에서는 피해자를 외면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 이산
- 그렇죠.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겠지만 도덕적 상식선에서라면 피해자들에게 하다못해 보상이라도 하거나 재판 과정에서 이윤택 처벌에 기여할 수 있는 어떤 활동을 하거나 했어야죠. 그래야 이 사람이 책임을 졌다 정도의 이야기를 할 텐데, 그냥 남아있는 단원들을 데리고 어떻게 보면 이윤택이 소유했다고 볼 수 있는 자원들을 활용하면서 연극을 하는 게, 그것‘만’ 했다는 게 문제인 것 같아요. 또 사과문에 인용된 기사도 저는 질문할 여지가 많다고 생각해요. 경찰 관계자가 김소희 씨에게 억울한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요. 우선 이 말이 공식 브리핑도 아니고요, 경찰 관계자가 수사 담당자인지 어떤 위치의 사람인지도 부정확해요. 게다가 김소희 씨는 당시 어디까지나 참고인 신분이었는데 경찰이 참고인에게 억울한 면이 있다고 말한다는 것이 굉장히 이상합니다. 범죄피해를 입었거나 무고한 죄명으로 고소를 겪은 사람에게도 경찰이 쉽게 하지 않을 표현입니다.
- 김연재
- 부정확한 정보들이 섞여 있는 데다 사건의 정황, 자신의 잘못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아요. 따뜻한 선배가 되어주지 못했다고 거듭 말할 뿐입니다. 성폭력 범죄를 인격적 결함, 실수 정도로 축소시키면서 피해자의 행위자성을 지우는 말하기죠. 『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11)이라는 책에서 이런 문장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과거를 망각하는 자들은 그것을 되풀이하는 형에 처해진다”. 가해자의 자성 없는 복귀, 특히 공적 자원을 활용한 활동에 제도적으로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요?
공공기관의 성폭력 대응 매뉴얼
- 이산
- 공공기관에서 자체적으로 내규를 만들고 사건을 처리해야 해요.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가해자와 피해자의 분리, 가해자 배제의 절차를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지, 판단 근거를 어디서 가져와야 하는지에 대한 내규를 만들어야 합니다. 공공기관이 의지만 가지고 있다면 현재의 제도로 충분히 할 수 있어요. 직장 내 성희롱 예방이나 사건 처리 제도가 2017~2018년경에 많이 개선되었거든요. 2차 가해 또한 사건 처리의 대상이 될 수 있고요.
- 김연재
- 그런 모범적인 기관, 사례가 어디 있을까요?
- 이산
- 부산 성폭력 상담소가 부산문화재단으로부터 부산문화예술계 성희롱‧성폭력 예방센터를 위탁받아 운영하고 있어요. 여기서 피해자 상담 및 지원도 하고 가해자 지원배제를 결정할 수 있는 부산문화재단의 조사‧심의 절차를 지원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가해자가 이 과정을 통해 공공지원금에서 배제된 사례가 있고요. 영화진흥위원회도 비슷한 방식으로 (사)여성영화인모임이 개소한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에 예산을 지원하면서 협력하고 있어요.
- 김연재
- 그렇군요. 포럼 자리에서 공공기관이 내규를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있었지요. 부끄럽지만 저는 이 주장이 어떤 면으로는 이상적으로 들리기도 했던 것 같아요. 말씀을 들으니 훨씬 구체적인 방향이 그려집니다.
- 이산
- 물론 지원 사업 신청자들에 대한 구속력의 한계는 분명히 있어요. 가령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혹은 서울문화재단의 경우 보조금을 횡령하거나 부정행위가 있으면 해당 사업자를 제재하잖아요. 그런데 사업자를 바꾼다거나 다른 사업자의 프로젝트에 참여한다거나 하는 일에 대해서는 제재가 어렵죠. 그럼에도 저는 가해자의 공공지원금 수혜 제재를 자체적으로 판단하고 의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자원을 투자해서 조사, 심의를 하고 나면 이 결정례를 피해자가 계속 활용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문화체육관광부 예술인권리보장법에 의거해서 특정 사업자가 불공정 행위를 했다, 성희롱·성폭력을 했다는 결정이 예술인권리보장위원회에서 나온다면, 이를 근거로 다른 예술지원기관에도 가해자 지원배제를 요청할 수 있겠죠. 다만 성폭력 사건 처리는 분쟁의 소지가 많고 또 기관의 성과로도 측정되지 않기 때문에 쉽사리 시도하지 않는 것뿐이에요. 또 성폭력 가해자를 지원하지 않기로 결정할 때는 피해자들의 진술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기관들이 피해자들에게, 진술을 하면 사건처리가 될 것이라는 믿음을 전혀 주지 못한 거죠. 미투 이후 6년이 지났는데도 잘 처리되었다고 평가되는 선례가 없어 선뜻 나서기가 어려우실 거예요.
- 김연재
- 지난 호 웹진의 기획 기사, 이양구 작가님과 윤형중 랩2050 대표님과의 대담을 통해 ‘정책 리터러시’라는 말을 알게 되었어요. 공연을 만들거나 피해자를 지원하는 일 외에도, 정책을 읽는 일, 제도에 대한 상상을 구체적으로 하는 일 또한 여성운동의 중요한 부분임을 새삼 깨닫게 돼요.
- 이산
- 우리가 피해 당사자들의 삶이나 성폭력 사건에 대해 말할 때는 비교적 언어가 풍부해지지만 제도에 대해 말할 때는 그렇지 않잖아요. 잘 모르니까 답답하고, 공부해야 하고, 좀 더 많이 아는 것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것 같고… 이런 과정을 거치는 게 힘들죠. 피해자와 조력자의 거리가 멀수록 포괄적인 제도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으니 공허하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제 생각은 이 힘듦을 좀 버텨주는 사람들이 필요하지 않나. 지난 포럼 때도 제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많은 분들이 필요성에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 자신 없어 하시는 거예요. 이게 조금 답답해서 어떻게 길을 내야 하나 싶었어요. 현장에서 제도에 관심을 갖고 접근하는 것 자체가 정말 어려우니까요.
- 김연재
- 말씀 들으니 내규 마련이 더 이상 공허한 말로 들리지 않는 것 같아요. 권력에 투쟁하고 제도의 한계를 지적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 면면을 들여다보며 제도를 바꾸고 활용하고 생성하는 일 또한 몹시 중요하겠습니다.
- 이산
- 제도 쪽에서는, 기관들에서는 그게 현실성이 없다, 법적 근거가 없다, 이런 얘기를 계속 할 거거든요. 근데 법적 근거가 없으니까 우리도 얘기하는 거잖아요, 그래도 필요하다고. 계속 얘기해야죠. 계속 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2024년 저항과 연대의 형식
- 김연재
- 연극in에서 2021년 하반기, 미투 이후의 이후를 살펴보자는 기획을 했을 때, 저의 관심사는 동일시 정치를 통한 연대라는 전략의 한계를 직시하고 혁명 이후의 맨얼굴을 바라보는 데 있었어요. 무엇이 변했고 변하지 않았는지, 어떤 과제들이 남았는지를요. 저의 문제의식은 페미니즘 연극 운동 내에 갈등과 충돌, 위치성의 차이가 희박했다는 생각에서부터 출발해요. 페미니즘 연극에 대한 백래시로서 ‘연극이 사회운동이냐’ 같은 말을 하잖아요. 연극이 정말 사회운동이 되려면 충돌과 논쟁과 복잡다단한 진영들이 만들어져야 하는데 미투 직후 많은 이들이 분노와 죄책감에 차 있었던 데다 비판받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가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가장 윤리적인 위치에 서서 동의해 마땅한 의제에 대해 동의와 연대를 구하는 언어를 사용했죠. 물론 동의와 연대는 중요하지만 이는 봉합의 제스처이기도 하니까 모순과 차이들을 닫고 기존의 담화방식을 재생산하게 되잖아요. 따라서 창작자로서 저의 실천은 어떤 식으로든 봉합을 거부하는 것이었어요. 글쓰기의 차원에서든 연기를 비롯한 연극 만들기의 차원에서든 제대로 좌표 찍고 쓰겠다, 기존의 담화방식을 깨면서 쓰겠다, 같은 태도를 가지려 했죠. 다소 거창하지만…
- 이산
- <계절을 잃은 숲>이라는 작품을 만들면서 고민했던 것들이 떠올라요. 성폭력 피해 경험에 대한 작품이었어요. 이전까지는 마임 특성상 어디서든 모두가 볼 수 있는 소위 가족극이라 불리는 작품을 만드는 데 집중을 했었거든요. 그런데 2018년을 거치면서 성폭력 피해와 그 이후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하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어요. 강간 피해 장면을 마임으로, 다소 직접적으로 표현했는데요. 공연을 다 마친 뒤 ‘만약 다른 배우를 캐스팅해서 공연을 한다면 그 장면을 수행하게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되었어요. 못 할 것 같더라고요. ‘다른 사람한테 하게 하지 않을 거면 너도 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고 나니까 공연의 방식에 있어서 내게 주어진 선택의 폭이 굉장히 넓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당시에는 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오히려 선택이 제한되어 있다고 느꼈거든요. 그리고 관객은 예상보다 훨씬 깊이 몰입하잖아요. 표현의 선택지가 넓은 만큼 그것을 선택했을 때 관객에 대한 책임 또한 가져야 한다는 것을 무대에 서는 경험을 통해 배웠어요.
- 김연재
- 산 님의 경험이 저에게는 새로워요. 아무래도 몸으로 직접 관객을 만나시기 때문에 퍼포먼스의 선택에 있어서 더 많은 사유를 하셨을 것 같아요. 우리의 작업을 비롯해서 미투를 기점으로 굉장히 많은 페미니즘 연극이 만들어졌죠. 안타까운 건 이 연극들이 한 덩어리로 묶여서 이야기되곤 한다는 거예요. ‘요즘의 페미니즘, 퀴어 연극의 흐름 속에서 이 연극은 어떻게 특별하다’는 식의 태만한 비평적 수사가 산재하죠. ‘요즘의 페미니즘, 퀴어 연극’이 무엇인지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서요. 저는 시장이 거의 없는 한국 연극계에서 자원의 배분이 호명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거든요. 지금의 거대 주제, 가장 유명한 사람, 누가 인정한 사람, 뭐에 뽑힌 사람, 이런 명패들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거죠. 호명의 권력은 곧 자원 분배의 권한이기도 할 텐데 이 주체가 다양하지 않다는 문제도 있고요. 어느 업계나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연극계는 그 외부가 너무 가시화되지 않아요. 미투 운동은 강력했고 페미니즘 연극은 많아졌지만 아버지 만들기, 아들 찾기는 건재하죠. 이렇듯 전체를 통틀고 대표하려는 힘이 강한 현장에서 여성들의 다양한 예술적 실천은 한데 묶여 축소되고 남성 창작자들이 과잉 호명돼요. 저는 이것이 연극계 유리천장이라고 생각합니다.
- 이산
- 저는 자원이 남성에서 남성으로 승계되는 방식에 관심이 있어요. 교수 성비가 거의 바뀌지 않는 이유도 남성 교수진이 계속 남성을 선택해서 자원을 주기 때문이잖아요. 그리고 지원사업을 받을 때 소위 ‘시의성’을 보는 평가 기준이 있잖아요. 미투 직후에 페미니즘은 이 기준을 충족시키는 개념으로 자리잡는 듯했지만 결국 일시적이었던 이유 중 하나도, 여성들에게는 크고 중요한 자원을 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 김연재
- 너무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당시에는 시의성을 어필해야 한다는 압박, 여성의 메시지를 담되 남성의 목소리로 깃발을 꽂아야만 자원을 얻는다는 인지부조화를 느끼기도 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얻은 자원 역시 한시적이었고요. 『참고문헌 없음』에 실린 윤이형 작가님의 글이 떠올라요. “‘문학’을 떠올리면 특정한 성별이 떠오르지 않거나, 각각의 작가와 개별 작품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문단’을 의인화해보면 저에게 그 성별은 분명 남성입니다”.12) 저에게는 문학인 정체성도 있기 때문에 이 말에 공감했어요. 그런데 연극을 생각해보면, 연극계의 성별도, 연극의 성별도, 남성이더라고요?
- 이산
- 여성이 훨씬 많은데도요.
- 김연재
- 네. 그래서 왜 그럴까 생각을 해보니, ‘연극’이라고 하면 장르의 몸체가 상상된다기 보다는 연극을 만드는 구체적인 노동과 과정이 떠오르는데 이 과정 자체가 굉장히 선형적이고 근대적인 거예요. 연극 구성원의 생물학적 성별과 별개로 남성적인 모델인 것이죠. 희곡이라는 글쓰기도 우리가 ‘공연화 가능한 희곡’이라 이르는 텍스트 모델이 있고 이는 연극을 만드는 과정을 반영해서 개발되어왔을 거고요. 희곡이 연극으로 옮겨가는 단계도 어느 정도 고정되어 있잖아요. 저의 목표 중 하나는 연극의 성을 바꾸는 것입니다. 희곡의 성을 여성으로 만들고 싶어요. 연극 모델의 외부를 발명하고 싶어요.
- 이산
- 그게 혼자 할 수가 없잖아요.
- 김연재
- 그렇죠. 그렇죠.
- 이산
- 사람들은 연출가에게, 프로덕션이 이루어지는 공간과 관계에 대한 장악력을 가지고 평가 기준을 독점하는 능력을 기대하죠. 이 능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혼란스러워하고요. 연극 작업 자체가 아무것도 없는 불안과 혼란 속에서 시작되는데 의사소통 방식까지 바꾸면서 간다는 게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겠더라고요. 실제로 여성 연출들이 이중적 기대를 받기도 하잖아요. 연출로서 장악도 해야 하는데 한편으로는 민주적인 소통을 해야 하는 거예요. 양립하기가 어려운 부분인데도요.
- 김연재
- 공감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존의 연극 바깥을 실현하기 위한 사고실험일지도 모르겠어요. 조약이나 규율을 지키는 것을 넘어서 공통의 태도를 발명하는 일이 더 본질적일 겁니다. 자원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면, 저는 자원이 한쪽에 치우친 것은 맞지만 연극계 내에서 소수자 운동이 가졌던 권력, 그러면서 만들어진 경쟁구도 또한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미투 이후 백래시에 대응하면서 이 점을 부정할 때 저는 좀 어리둥절해지거든요. 운동의 전략과 운동 주체의 욕망을 인정해야 그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 이산
- 저는 소수자 운동이 권력을 지향하기도 했다고 생각해요. 진영 구도를 전략적으로 만들기도 했고요. 페미니스트가 권력을 쥐었다는 말은 현실을 왜곡하는 표현일 수 있지만 권력이 행사되는 장에 기꺼이 뛰어들었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 같아요. 그러니 권력을 진짜로 지향했고 자원을 탈환하려 했다는 점을 인정하고 전제한 뒤에 논의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죠. 일정 정도의 권력을 한시적으로 얻었던 것은 성취의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해야만, 그 자리에서만 할 수 있는 실천들이 있잖아요. 지금까지의 역사, 어떤 고리를 끊을 수 있고요. 긴즈버그 대법관이 ‘대법관 중에 몇 명이 여자였으면 좋겠냐’는 질문에 ‘9명 전원’이라고 답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권력의 주체가 단일하다고 느끼는 것이에요. 우리가 가부장제에 맞선다고 할 때, 가부장제를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사람들도 단일하지 않고 우리도 단일하지 않잖아요.
- 김연재
- 정말 중요한 지적이네요. 단일한 주체로 보지 않는 것. 미투 이후 저의 또 다른 문제의식은 화자/창작자의 위치성을 소거하고 어떤 사안에 대하여 ‘가장 윤리적인 자리’에서 말하는 태도에 대한 것인데요. 다수의 동의를 얻는 전략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운동 주체를 단일하게 만듦으로써 안전하고 권위적인 자리를 점하는 말하기라고 생각해요. 관련한 경험을 하나 공유하고 싶은데요. 실은 제가 3월에 <두 메데아> 보이콧 운동과 포럼에 대한 글을 웹진에 싣기로 했었어요. 아홉 장을 썼는데 마감 직전에 파일을 날려 원고를 펑크 냈어요. 이 일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계속 곱씹었는데요… 글을 싣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왜냐하면 당시에 빠듯한 기한에 맞춰 밤낮 없이 글을 쓰고 있었는데 그러다보니 글을 쓰는 저의 자리를 점검할 기회가 없었거든요. 급진적으로 쓰겠다는 포부, 누구보다 먼저 발언하고 싶은 마음, 그리고 어쩌면 ‘가장 윤리적인 자리’를 점하려는 욕망이 글쓰기를 추동하는 중요한 힘이었고요. 만약 글이 발행되었다면 당사자들은 이런 점을 민감하게 느끼셨을 거예요. 하지만 글쓰기에는 욕망이 개입되기 마련이죠. 중요한 것은 이 욕망을 어떻게 책임지느냐인 것 같아요.
- 이산
- 진실을 밝히는 자의 원형 모델 같은 게 있고 우리는 너무 그게 되고 싶죠. 그런데 저는 피해자로서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거든요. 다른 사람이 내가 겪은 일에 대해 진실을 밝히는 자가 되고 싶어 할 때 그게 지금 내게 필요한 안정감과 좀 어긋나는 느낌을 받아요. 그 어긋남이 나를 대단히 힘들게 하지는 않지만 소통하기는 어려운 문제인 거죠. 연대한다는 건, 때로는 과잉으로 대변하고 때로는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일이에요. 피해자 지원이 욕망과 욕망의 만남이기도 하다는 것은 저에게도 어려운 문제예요. 미투 운동 당시에 어떤 분들은 피해자와의 거리를 갑자기 줄여서 조력자 역할을 하려고 했죠. 가끔 위험해 보일 때가 있었어요. 피해자의 곁에 누구라도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누가 어느 정도의 거리에서 무엇을 할지 피해자가 선택하도록 정보를 제공하고 협상할 여유가 없어 보일 때요. 우리가 피해자나 조력자가 아닌 다른 위치를 잘 상상하지 못하더라고요. 공동체 구성원, 사회 시민으로서도 연대할 수 있는데 다소 불안정한 위치라고 느껴지죠. 여성 예술가가 갖는 이등 시민 지위 때문이기도 할 거예요.
- 김연재
- 운동 주체의 지위가 운동의 지위에도 영향을 미치잖아요. 최근 한국 연극장에서 가장 중요했던 사건을 꼽아보자면 블랙리스트와 미투 운동일 것 같은데요. 몹시 젠더화된 두 사건이라고 생각해요. 블랙리스트 때는 피해자와 활동가들이 운동의 주체로서 존경과 인정을 받았던 것 같아요. 그러나 미투 운동을 이끈 여성들은 운동의 주체로 가시화되지 못했죠. 피해자들이 전면에 나서기 어렵기도 했고요. 그런데 사건의 지위를 단순 비교하는 일이 생산적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여성 운동을 다양하게 의미화할 가능성을 오히려 지울 수도 있으니까요. 미투 이후 저의 중요한 변화는 세상을 인식하고 바라보는 시선에서 (그전에는 탈부착이 가능했던 것 같은데) 페미니즘을 분리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에요. 저는 제가 여자이기 때문에 가지지 못한 자원과 지위를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분노해요. 남성이 누리는 것들을 뼈가 닳도록 질투해요. 처음에는 이런 제가 힘에 부쳤는데요, 지금은 진창 같은 정동들을 저항의 형식 삼아 새로운 길을 내는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이산 님께서는 저와는 또 다른 경험들을 갖고 계실 것 같아요. 피해자 지원 활동을 하시면서 피해자, 가해자를 비롯해 여러 사람들을 만나실 텐데요. 그러면서 가지게 된 페미니즘의 근육은 무엇인지 궁금해요.
- 이산
- 갈수록 느끼는 것은 페미니즘은 중요한 렌즈지만 그 외에도 너무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페미니즘은 성폭력에 작동하는 가부장제의 메커니즘을 간파하는 관점으로 피해 상황들을 해석해서, 그것을 사회적 문제로 얘기할 수 있는 언어를 주는 거거든요. 그런데 성폭력 사건 해결 과정에는 당사자들 삶의 아주 많은 면면이 다 작동하고 있어요. 가해자들은 대부분 정말 평범해요. 가해를 가능하게 하는 일상의 요인들이 많고요. 오히려 문제제기하는 피해자가 특별하고 용기 있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죠. 문제제기를 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에요. 저는 조력자, 지원자이기 때문에 결국 매개를 하는 사람이거든요. 어떤 진술들에 논리를 만들고 해결 방향을 고민해서 아웃풋을 내는 거죠. 이 과정에서 피해자와 나의 권력 관계라든지 이 사건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나의 지원 방식과 피해자의 일상 회복에 혹시 어긋남이 있지는 않은지 이런 것들을 고민해요. 그러다 보니 사람들의 삶의 구체적인 면면을 이해하는 일이 중요하고 페미니즘 공부와 페미니스트 운동 사이에 균형이 있어야겠더라고요. 균형을 잡기가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해요. 피해자와 가해자의 삶을 읽어낼 때 판단의 여유를 두려고 하고요. 결국 이러한 태도가 페미니즘과 연관이 있는 것 아닐까요?
- 김연재
- 실천과 사유는 함께 만들어지는 것일 텐데 이 둘을 동시에 하기란 참 어려워요. 작가로 지내다 보면 실천하고 책임지는 방법을 스스로 찾지 못하면서 실천을 촉구하고만 있다는 부끄러움이 밀려올 때가 있거든요. 저는 이산 님이 책임지는 사람, 기다려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곤 했는데요, 이산 님의 삶 속에서 창작과 활동과 연구가 자연스럽게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 그러면서 스스로 어떤 삶의 태도를 쟁취했다는 것이 저에게 정말 귀감이 됩니다.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었어요. 오늘의 종횡무진한 대담이 독자분들에게도 좋은 화두로 가닿으면 좋겠습니다.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 이윤택은 극단 연희단거리패 전 예술감독으로, 극단의 폐쇄적 구조, 위계와 권력을 이용하여 상습적인 성폭력을 가한 혐의가 인정되어 2019년 징역 7년을 구형받았다. 1년여 동안 지속된 재판에는 21명의 고소인단, 101명의 변호인단, 141개 단체가 참여하였다. 다음 기사를 읽어보길 권한다. 류운정, 「이윤택 #미투 극장전 – 한겨레21 르포작가 지원 공모제 당선작 ‘연희단거리패: 예술은 어떻게 악이 되었는가’」, 『한겨레21』, 2020.4.5., https://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48489.html
- 강예슬, 「[단독] “극단대표 강제추행에 연극 꿈 짓밟혀”…학생 단원의 호소」, 『KBS 뉴스』, 2024.1.3.,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7857037
- JTBC 뉴스룸 앵커브리핑, 「2018년 2월 19일 (월) 뉴스룸 다시보기」, 『JTBC News』, 2018.2.20., 45:50-1:03:05 https://www.youtube.com/watch?v=F3ARTP_f9VA
- 디지털콘텐츠팀, 「‘JTBC 뉴스룸’ 이윤택 성폭력 피해자 “성추행 종용한 여자 선배들이 더 원망스러워”」, 『부산일보』, 2018.2.19., https://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180219000383
- 이 내용은 서울문화재단이 예술인 연대체에 구두로 전달한 것이며, 「두 메데아 보이콧 관객 서명」, 2024.1.6., 문서에 정리되어 있다. https://docs.google.com/forms/d/e/1FAIpQLScSjg610qgm983LSS_W8dpDt8_WRQHmebTRjyn61FkZIFKYUA/viewform?fbclid=IwY2xjawEfufdleHRuA2FlbQIxMQABHYKJhRw-f73c-cHSGBA7kFfyOwu4_jnAA4VSZGUP9F1G-qJLQlAz-17dig_aem_N8TThdPwGOu4PmZtAY-mXQ
- 위와 같은 문서.
- 대학로극장 쿼드 공지사항, 「[대관] 극단 서울공장 <두 메데아> 공연 취소 안내」, 2024.1.9., https://www.quad.or.kr/community/notice/50742?q=NTAwMjNiNzRlYzFmNGIyNzgzMzQ5MWRjOWRiMmE0Yjc=
- 이 입장문에서 임형택 연출가는 본 사안에 대한 사과와 공연 취소 의사를 전했다. 안 모 씨의 이름을 크레딧에서 삭제하였다고 밝혔으며, 김소희 배우가 해당 공연을 통해 연극에 대한 진심을 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서 “서로가 서로를 보듬기 위한 소통과 화합의 공론장이 공연계에 만들어지기를 바란다”며 글을 맺었다. 현재는 게시글이 지워진 상태로 보인다.
- https://www.instagram.com/p/C18z0L4y8eD/?igsh=ZXMybm9pdmEwMjQ0
- 공동 발의자 13인, 「제9차 대학로X포럼 <연극계 백래시, 어떻게 맞서나갈 것인가 - <두 메데아> 보이콧 운동을 경유하여>를 제안합니다」, 2024.2.26., https://www.facebook.com/share/p/EVzYcbBL3qQaKwrp/
- 마리아 투마킨, 서제인 역, 『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 을유문화사, 2023.
- 윤이형, 「나는 여성작가입니다」, 『참고문헌 없음』, 2017, 『문학과 사회』, 2016, 겨울호에서 재수록.
- 김연재 본지 편집위원
- 극작가. 희곡에서의 여성적 글쓰기를 실천하며 문자, 말, 몸의 사이를 탐구한다. 극단 동 월요연기연구실에서 인류세 이후의 연극을 실험하고 있다. <없는 시간>, <낙과줍기>, <상형문자무늬 모자를 쓴 머리들> 등을 쓰고 공연했다.
- 이산
- 배우, 성평등교육활동가. 플래이백씨어터, 마임, 연극을 거쳐온 배우이자 페미니스트 창작자.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활동가로 일한 경험이 있다. 현재 예술인권리보장위원회 위원이며, 문화예술계와 비영리단체를 중심으로 성평등 교육을 한다. 최근 학위논문 「여성 연극인의 성폭력 대응 경험 연구」를 발표했다.
- 해시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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