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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리즘 시대, 연극의 과제

국립극단 <천 개의 파랑>

이경미

제253호

2024.05.16

우여곡절 끝에 김도영이 각색하고 장한새가 연출한 천선란의 소설 <천 개의 파랑>이 연극 무대에 올랐다. 아무리 기술적 조건들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장편소설, 특히 SF 소설을 지금/여기라는 물리적 제한을 받는 연극의 무대로 가져온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래서 늘 더 호기심을 갖고 기대하게 된다. 소설의 언어가 배우의 발화와 움직임, 조명과 사운드, 사물 및 영상 이미지 등으로 구성된 무대 공간의 언어로 어떻게 매체적인 전환을 이룰 수 있을지, 그때 발생하는 감각은 소설을 읽을 때의 감각과 어디까지 같으면서 또 다를 수 있을지 말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휴머노이드 로봇 콜리라는 존재도 시각화되어야 하지 않은가.
기대를 품고 입장한 크지 않은 홍익대 아트센터 소극장의 무대는 이번에 유난히 좁아 보였다. 긴 공간 한쪽에 무대를 만들고, 반대쪽으로 객석을 유례없이 최대한 꽉꽉 채워 배치했는데, 맨 뒷줄에 앉은 내가 바라본 정면 무대는 더 좁고 더 멀게 느껴졌다. 공연을 기다리다 문득, 서계동의 ‘백성희장민호극장’이 생각났다. 그 극장이라면 공연의 조건이 더 낫지 않았을까. 사라진 극장. 결국 그로 인해 피해를 보는 것은 연극의 미래 언어를 모색하는 현장의 창작자들과 연극을 사랑하는 관객들이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천 개의 파랑>의 공연 사진. 무대 중앙에 콜리 역을 맡은 로봇 배우가 서 있고, 그 앞에 콜리 역을 맡은 인간 배우가 두 손을 들어 고삐를 잡은 모양을 한 채, 몸을 낮춰 기마자세를 하고 정면을 바라보며 말한다. 로봇 콜리는 은색과 초록색 몸체를 가졌고, 얼굴 부분에는 표정을 나타낼 수 있는 초록색 LED가 빛난다. 콜리를 맡은 인간 배우는 반짝이는 초록색 무늬가 들어간 검은 전신 수트를 입고 초록색 신발을 신었다. 로봇 콜리의 좌우로 각각 두 명씩, 노랑, 보라, 파랑, 주황색 옷을 입은 기수들이 각자 말고삐를 쥔 자세로 서서 로봇 콜리를 바라보고 있다.

불완전함과 결핍: 타자를 향한 열림의 포텐셜

모두는 아니지만 소설 속 존재들은 인간/비인간 할 것 없이 모두 정서적으로 혹은 신체적으로 완전하지 않다. 그러나 세상을 향해 자신을 주장하지도, 자신의 결핍과 상실로 인해 억울해하거나 좌절하지도 않는다. 시선과 감각을 자기가 아닌 자기의 바깥을 향해 열어놓고 있다. 그들에게는 결핍이 완전하지 못한 것에 대한 억울함과 상실, 절망이 아니라, 타자를 배려하고 존중하며, 진심으로 소통하고 관계 맺는 포텐셜인 것이다. 휴머노이드 로봇 콜리는 경주마 투데이가 달릴 때 가장 기뻐한다는 것을 데이터가 아닌 감각으로 알고 있다. 투데이가 넘어지면서 함께 넘어져 다리가 산산이 부서지고, 함께 폐기당할 상황에 놓여 있을 때에도 계속 투데이에게 아픈지 묻는다. 연재는 마방 구석에 폐기된 상태로 방치되어 있는 콜리를 보자, 그에게 기계 다리를 다시 만들어주기로 마음먹고 알바로 번 돈을 전부 내어주고 집으로 데리고 온다. 휠체어로 이동이 불편해 홈스쿨링을 하는 은혜는 조만간 안락사당할 처지에 놓인 투데이를 찾아가 연신 살피고 보듬는다. 마방 관리자인 민주 역시 은혜와 연주, 투데이와 콜리 모두에게 열린 사람이다. 수의사와 함께 안락사 위기에 놓인 투데이를 살릴 방법을 열심히 찾는다. 은혜와 연재의 엄마인 보경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죽은 남편도 마찬가지다. 소방관이었던 남편은, 오래전 엄청난 붕괴사고로 며칠 동안 건물 잔해더미에 깔려 있었던 그녀를, 구조로봇을 비롯한 모두가 이미 죽었다고 이야기했지만, 끝까지 지키며 구조해줬던 사람이다. 연주의 같은 반 친구 지수 역시 자신에 대한 거북한 감정을 숨기지 않는 은혜에게 묵묵히 다가간다. 콜리의 다리 제작에 필요한 부품들을 구해주고, 보경이 오래전 배우였음을 기억해준다. 지수의 엄마는 보경이 한때 배우였다는 것을 기억해 보경으로 하여금 그녀가 잃어버린, 하지만 소중한 또 하나의 정체성을 찾게 하는 안내자가 된다. 이것은 연재와 은혜로 하여금 엄마 보경이 아닌 배우 보경을 발견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비용절감을 이유로 연재를 해고하고 로봇을 들였던 편의점주 역시, 투데이에게 다시 달릴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연재가 도움을 요청했을 때, 투데이가 절대 빠르게 달릴 수 없음을 알면서도 흔쾌히 베팅을 한다. 물론 특히 인물과 인물 사이에 갈등과 대립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상대를 더 존중하며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문턱 같은 것이다.

<천 개의 파랑>의 공연 사진. 사진 중앙에 로봇 콜리가 서 있고, 그 왼편에 인간 배우 콜리가 로봇 콜리를 등진 채 무릎을 감싸 쥐고 쪼그려 앉아 있다. 로봇 콜리의 오른편에는 밝은 갈색 카디건에 검은 바지를 입고 왼손에 소방관 모자를 든 보경이 서서 오른손으로 로봇 콜리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무대에는 투명 아크릴 상자와 의자가 놓여 있고, 뒷벽에는 구름 모양의 영상이 투사된다.

“기계-되기”

이렇듯 원작 『천 개의 파랑』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야기의 축이 되는 인간, 비인간 종들 모두가 자기 아닌 바깥 타자들과 맺는 열린 리듬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관점으로 보면, 소설은 어떤 위계나 분절도 없는, 그야말로 계속 넓어지는 따스한 평야 같다. 누구도 자신을 상대보다 우위에 두거나 자기 관점에서 상대를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다. 서로의 다름을 그 자체로 인정한다. 콜리가 이런 말을 한다. “생명은 저마다 삶의 시간이 다르대요. 그렇게 느껴지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고요”. “그렇다면 생명체는 함께 있지만 모두가 같은 시간을 사는 건 아니네요. 맞나요?”
소설에서 콜리가 갖는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그는 인간이 도구로 만든 기계, 기계학에서 말하는 그 기계가 아니라,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가 인간/비인간을 모두 아울러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객체들에게 이름 붙인 열린 ‘기계’, 도나 해러웨이가 말하는 ‘사이보그’이다. 서로의 다름을 그 자체로 존중하면서 ‘다양한 방향에서 다양한 다른 것과 접촉하며 움직이는 기계’ 말이다. “투데이가 계속 달리면 바람도 흩어지지 않고 계속 흐를 수 있겠죠?” 그는 인간과 동물, 하늘 색깔, 바람과 공기 등등 모든 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 점에서 콜리는 다른 인간, 비인간 종들과 함께 있는 객체인 동시에, 끊임없이 서로 관계와 소통의 리듬을 만들어내는 소설 속 모두를 대변하는 집합체가 아닐까 싶다.

<천 개의 파랑>의 공연 사진. 콜리 역을 맡은 인간배우가 상체만 남은 로봇 콜리를 양손으로 받쳐 들고 그의 얼굴을 응시한다. 그 뒤편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희미하게 촬영되었다.

문학에서 연극으로

김도영의 각색을 거쳐 장한새가 연출한 연극 <천 개의 파랑>은 각색이나 연출, 연기 모두 원작을 존중하고 있었다. 동시에 제한된 기술적 조건을 최대한 활용해 인간배우가 중심인 무대를 인간, 비인간의 경계를 지운 SF적 공간으로 확장시키기 위해 힘쓴 흔적들이 곳곳에서 드러났다. 기술적으로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콜리를 소설의 지면으로부터 무대 위로 소환하기까지 창작진들이 쏟은 고민과 시도가 돋보인다. 콜리 외의 다른 로봇들은 인간배우들을 통해 재현되었는데, 기계에 대한 도구적 모방과는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면서 인간과 기계의 이분법을 지우고 있었다.
그러나 주체적인 연극적 해석이나 개입은 다소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원작이 이미 확보한 안정적 기반에 기대어 따라가는 느낌이랄까. 관객의 입장에서는 이미 알고 있는 소설의 내용을 재확인하는 정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연극의 밀도는 뒤로 갈수록 이완된다. 앞서 나름 들뢰즈나 해러웨이 등등을 끌어들여 ‘기계’, ‘사이보그’ 운운했지만, 그건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생각일 뿐, 원작도 그렇고 연극도 그렇고 결과적으로 인간들의 “따스한” 이야기, “착하고 귀여운” 로봇 이야기로 수렴되는 점이 없지 않다. 객석의 관객들이 연신 눈물을 흘리거나, 로비에서 그나마 원작과 달라진 것들을 지적하며 불만스러워하는 관객들을 보며 여러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천선란의 ‘그 소설’이 아니라, 장한새가 연출한 ‘이 연극’을 기대한 입장에서는, (저작권 문제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었겠지만) 각색이나 연출 차원에서 물리적으로 연출한 연극이라는 환경에 맞는 무언가 물질적이고 입체적인 표현방식들을 좀 더 적극적으로 찾아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놓아버릴 수 없었다. 좁은 무대로 인한 물리적 제약도 매우 컸다. 무대 뒤쪽의 스크린 영상을 이용해 SF적 공간성을 한층 확장하고자 했지만, 의도와 달리 배경 이미지의 차원에 머물렀던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함께 연극 역시 기술적 환경 변화가 가져오는 일련의 상황에 주체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때가 되었다. 이번 <천 개의 파랑>도 그에 대한 실천의 일환이었던 바, 질문에 대한 대응 방향은 여전히 다양하게 열려있다. 그럼에도 한 가지 제안하자면, 연극에서 중요한 것은 기술과 기계에 기대어 연극의 외연을 스펙터클하게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알고리즘이 인간종을 포함해 세계의 모든 것을 통제하기 시작한 이 “블랙박스 사회(black box society)” 안에서 진정한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되짚어 생각할 수 있는 장(場)이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 로봇을 무대에 등장시키는 것은 그다음 문제이다. 더불어,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소설을 무대에 올리는 것도 좋겠지만, 인간/비인간, 인간과 과학기술이란 화두를 무대와 공간, 배우의 몸과 발화에 대한 감각으로 품은 희곡 혹은 연극적 실천들에 대해 더 뜨겁게 고민해야 할 때이다.

<천 개의 파랑>의 공연 사진. 남색 교복을 단정히 입은 단발머리 연재가 양손을 활짝 펼쳐 가슴께에 들고 정면을 바라보며 무언가 말하고 있다. 그 뒤편으로 그의 가족들이 각자 앉거나 서서 말하는 연재를 응시한다.

[사진 제공: 국립극단]

국립극단 <천 개의 파랑>
  • 일자 2024.4.16 ~ 4.28
  • 장소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
  • 원작 천선란 각색 김도영 연출 장한새 출연 김기주, 김예은, 김현정, 류이재, 윤성원, 이승헌, 장석환, 최하윤, 허이레 드라마투르기 전강희 무대 김혜림 로봇/소품 김예슬 조명 김지우 의상 EK 영상 신민승 음악 베일리홍 음향 이현석 분장 김남선 조연출 정예진
  • 관련정보 https://www.ntck.or.kr/ko/performance/info/257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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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미

이경미
한편의 연극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이 극장, 저 극장을 기웃댄다.
'잘 만든' 연극 보다는 꿈틀대는 파동이 느껴지는 연극을 좋아한다.
http://blog.naver.com/purun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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