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서울프린지페스티벌2024 푸른수염 X ITA <나는 일종의 ITA 같은 것을 하고 싶은 위대한 연극인이 될 계획인데 말이지>
정다현
제260호
2024.08.29
*글의 제목은 2005년에 개봉한 미키 사토시 감독의 일본 영화 제목을 인용하였다.
얼마 전 우연히 바다 거북이의 삶에 대해 듣게 되었다. 아기 바다 거북이는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오자마자 상대적으로 안전한 바다로 향한다. 가는 길에 독수리에게 잡아먹히거나 사람들이 켜놓은 불빛을 바다로 착각하여 바다행이 좌절되기도 하지만, 살아남은 거북이들은 육지에서보다 바다에서 더 빨리 자신의 발길질로 헤엄치며 살게 된다. 육지에서의 인고의 시간을 경유하여 바다에서 자신만의 속도대로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서울프린지페스티벌2024 자유참가작인 <나는 일종의 ITA 같은 것을 하고 싶은 위대한 연극인이 될 계획인데 말이지>(이하 <일종의 ITA>)는 아기 거북이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공연이었다. 이 작품은 창작집단 푸른수염의 신입단원들이 리서치를 통해 공동창작하고, 이 집단을 이끄는 안정민이 쓰고 구성한 작품이다. 연극의 중심에는 ‘위대한 연극인’이 되겠다는 포부를 가진 신입단원들이 있다. 이 연극은 바다로 향하는 아기 거북이처럼, 막 연극인으로서 발돋움한 신입단원들에 대한 작품이다.

인정투쟁 없이 예술가-되기
공연 시작 전 연남동 끝에 위치한 복합문화공간 뉴페이즈(New Phase)에 걸그룹 뉴진스의 곡들이 크게 울려 퍼진다. 공연 시간에 이르자 뉴진스의 노래 ‘ETA’가 배경음악으로 삽입된 오프닝 영상이 한쪽 벽면에 투사된다. ‘What’s your ETA’라는 후렴구가 ‘What’s your ITA’라고 들려 웃음이 나오고 만다. 이러한 의외성에 의한 웃음이 이 연극을 이끄는 동력이다. 기존의 질서를 신입단원들만의 질서로 재구성함으로써, 이들만의 규칙을 만드는 것이다.
이내 이예진 배우가 관객들에게 자기소개를 하고, 극단 입단 계기와 이보 반 호프(Ivo van Hove)를 알게 된 경위에 대해 설명한다. 국제적인 연출가 이보 반 호프가 예술감독으로 재직 중인 서양 유명 극단, 일명 ITA(International Theatre of Amsterdam)에 대해서 벽 한 면에 시각자료를 투사하여 설명한다. 옆에서 정고운 배우는 우리나라 국립극장에서 분기마다 상영되는 공연 영상 프로그램 ‘ITA Live’를 통해 봤던 ITA 작품들에 대해 말하며 상기된 모습을 보인다.
예진은 이보 반 호프를 ‘천재’라고 칭하며 그들처럼 규모가 크고, 대단한 예술적 수준의 연극을 만들고 싶어 한다. 하지만 유럽 유학생 출신인 안정민 연출은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연극은 할 수 없다고 한다. 예진은 ITA로 대표되는 유럽 연극과 한국연극에 대해 고찰한다. 유럽연극은 68혁명 이후 ‘표현을 표현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태도’와 ‘실패 가능한 작업 환경’을 갖추고, 연극에 대한 지원금이 우리나라의 약 100배 정도 되기 때문에, 한국의 연극 제작 환경과 다른 조건 위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신입단원들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연극에 대해 탐구해간다. 다각도로 현상에 접근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상상하고 표현해낸다. 가령 천재 연출가 이보 반 호프를 만나는 브이로그(vlog)를 찍기도 하고, ‘천재론’을 살피기 위해 관객을 학생 삼아 극적 공간을 교실로 탈바꿈하고, 때로는 연극의 원형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로 변신해 연극의 신과 대화를 시도한다. 이러한 상상은 극단에 치달아 디스토피아적인 미래까지 뻗어 나간다. ‘마법의 돌’을 통해 자신의 타고난 예술적 재능을 진단받고, 그 결과에 따라 예술 지원 여부가 결정되는 미래에 대해 상상하기도 한다.
신입단원들은 고정된 서사나 전통적인 연극 양식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담아내는 방식으로 연극을 해나간다. 이를 통해 이들은 주변부(fringe)에서 시작해, 자신들만의 연극 언어와 세계를 구축해나가며 예술가가 되어간다(becoming).

천재가 아니기에(아니어도) 될(할) 수 있는 것
연극은 천재에 대해서 고찰하지만, 결국 천재적인 예술가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예술가로서 성장할 수 있는지를 말한다. 신입단원들은 천재가 아니기에 오히려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며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예술을 창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 스스로의 방식으로 연극을 만들어가야 함을 알게 되고, 기존의 틀을 깨면서 자신들만의 표현방식을 찾게 된 것이다.
연극의 마지막에서 성민경 배우는 처음으로 자신의 언어와 목소리로 관객에게 이야기한다. 비록 연극을 통해 아무것도 변한 게 없을지라도 연극은 그저 ‘간단한 걸 발견한 뒤 흩어져가는 과정’임을 말한다. 그동안 연극에서 어떠한 인물을 연기하며, 연극을 통해 위대한 연극인이 되기 위해 달려왔지만, 결국 자신이 진정으로 되어야 했던 것은 바로 자기 자신임을 깨달았던 걸까? 더 이상 무언가가 되려 하지 않고, 자신으로서 페이스를 찾게 된 모습 같았다. 이 연극은 단원들이 단순히 위대한 연극인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게 아니라, 연극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길과 속도를 찾아가는 여정을 받아들이는 마지막 장면을 보여준다.
극장을 빠져나오며 “반짝반짝”이라는 부사와 “예쁘다”라는 형용사가 먼저 떠올랐다. 마지막 장면에서 성민경 배우의 대사로 무수히 많은 장면들이 떠올랐다. 연극에 관해 뜨겁게 토론했던 그 많고 많았던 밤과, 가장 좋아하는 연극에 대해 묘사하다가 동기가 내 눈이 반짝이고 있음을 말해줬던 날, 시적인 대사가 흩어지다가 내 맘속에 각인되었던 공연의 무대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날 등이 한꺼번에 생각났다. 이렇게 하루를 진심으로 겪어내다가, 우리가 천재가 아니어도, 아기 거북이 같은 의연함을 어느새 가지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진즉 알에서 깨어나 찬란한 바다로 가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사진 제공: 서울프린지페스티벌]
푸른수염 X ITA <나는 일종의 ITA 같은 것을 하고 싶은 위대한 연극인이 될 계획인데 말이지>
- 일자 2024.8.17. ~ 8.18
- 장소 뉴페이즈(New Phase)
- 작·구성작가 안정민 공동창작·배우·리서치 윤희민, 정고운, 전찬형, 이예진, 성민경
- 관련정보 https://www.seoulfringefestival.net:5632/load.asp?subPage=270.view&search_gubun=&orb=%B0%F8%BF%AC%B8%ED&search_section=&search_category=&search_idx=5176&search_day=&pag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