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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강하는 자들에 관한 연극적 보고

우란문화재단 <땅 밑에>

손옥주

제261호

2024.09.12

경험되는 극장

<땅 밑에>라는 인상적인 제목의 이 공연은 역시나 인상적인 관객의 하강에서부터 시작된다. 공연장 입구가 있는 건물 2층보다 한 층 더 높은 곳에 모인 20명의 관객은 안내원의 안내에 따라 한 명씩 차례대로 공연장 안으로 들어선다. 그리고는 제법 가파른 계단으로 이어진 무대장치를 따라 한 층 내려간 후, 머리 위로 쏟아지는 포그를 지나 본격적인 공연의 시공간으로 진입한다. 무대 중앙을 둘러싸고 있는 미지의 지형 위에 듬성듬성 놓인 객석에 착석, 머리에 헤드폰을 쓰는 시간이 뒤를 잇는다. 헤드폰의 전면에는 갱도를 비추기에 적합한 헤드랜턴이 부착되어있다. 그리고 관객의 손이 닿을 수 없는 높이의 공중에는 비정형의 운석들이 매달려있다. 그 징표는 이미 관객이 이곳을 떠나 그곳에 당도했음을 알린다. 순간, 헤드폰 너머로 주인공 윤형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지신(地神)이 함께하기를.”

<땅 밑에>의 공연 사진. 어두운 무대 상부 공간에서 한 관객이 난간에 손을 올리고 캣워크를 걸어 지나는 장면을 촬영하였다.

관객 입장에 대해 제법 자세히 언급하는 이유는 이번 작품의 경우, 관객 입장 그 자체가 공연의 실질적인 도입부를 이루기 때문이다. 몰입의 경중은 개인의 경험을 척도로 삼곤 하는데, 특히 몰입의 대상이 작가의 SF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는 낯선 설정의 서사라면 이 같은 경험은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따라서 <땅 밑에>의 경우에는 전체 서사의 축소판과도 같은 관객의 하강이 갖는 의미, 다시 말해 관객에 의해 ‘경험되는 극장’이 갖는 서사적, 공간적 의미가 자연스레 공연 전반에 대한 복선으로 환원된다. 특히 제목에서부터 ‘지하’라는 공간 조건을 전면에 내세우는 이번 작품은 텍스트와 사운드와 조명 간의 화학적 결합을 바탕으로 한 SF 이머시브 연극의 형식을 취함으로써 예측 불가능한 공간성에 대한 실험을 극대화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 요소는 동일한 시간 속에서 병치되기도 하고 결합되기도 하며 새로운 공간성을 형성해 나가는데, 이는 철학자 빌렘 플루서가 말한 “미래의 공간 조형”에 비견될 만하다. 이미 그는 1991년에 발표한 「공간들(Räume)」이라는 에세이를 통해, 경계를 특징으로 삼는 그동안의 “기하학적(geometrisch)” 공간 경험과는 달리 이제는 “상호 연결되는(topologisch)” 공간을 경험하고 있음을 강조하며 네트워크로서의 공간성을 계시한 바 있다.1) 마찬가지로 이번 작품을 공연화하는 요소들, 즉 각색된 텍스트, 사운드, 진동, 목소리, 조명, 레이저, 오브제, 무대세트, 장치로서의 헤드폰 등은 서로가 서로를 압도하기도 하고 산입하기도 하고 일체화하기도 하며 관객과 연결되고, 동시에 관객 간의 연결을 매개한다. 물론 엄연히 말해 ‘네트워크’나 ‘관계성’, ‘상호성’과 같은 키워드는 너무 익숙해 다소 지루하게 느껴지기까지 하고, 이번 작품처럼 다양한 장르 간 협업의 외양을 띤 공연예술작품을 만나는 경우 또한 생각보다 드물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 <땅 밑에>는 분명 기존의 다원적 성격의 공연작들과는 다른 고유함을 보여준다. 그 고유함의 출발점은 무엇보다도 독창적인 서사와 그로부터 비롯된 연출 방식에 있다.

<땅 밑에>의 공연 사진. 관객들의 실루엣이 어렴풋이 보이는 정도의 어두운 공간에 세 명의 관객이 등받이 의자에 앉아 각자 헤드폰을 들어 착용하고 있는 모습이다.

나락으로의 초하

<땅 밑에>는 그동안 새로운 공연언어에 기반한 실험적인 작품들로 관객과 만나온 우란문화재단이 설립 10주년을 맞이해 선보이는 ‘우란공연’의 두 번째 프로젝트로 기획되었다. 김보영 작가가 쓴 동명의 SF 단편을 원작으로 삼는 이번 작품은 아무도 가닿지 않은 땅의 끝, 즉 ‘정하(頂下)’에 이르기를 꿈꾸며 깊이, 더 깊이 내려가려는 하강자들에 관한 이야기가 중심을 이룬다. ‘초하(初下)’, 즉 아직 발굴된 적 없는 미지의 길을 찾아 내려가려는 이들의 욕망은 하강의 이유나 방법을 조건으로 삼지 않는다. 그저 더 깊은 곳으로 향하는 길이 거기에 있을 뿐이고, 고로 그 길의 방향에 순응하며 깊이, 더 깊이 내려갈 뿐이다. 이들은 분명 바닥에서 출발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또 하나의 새로운 바닥을 전제하거나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두운 지하 속에서 만나는 바닥은 어쩌면 그 뒤로도 한없이 이어질지 모를 길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진짜 어둠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들에게 실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길의 유무이다. 그리고 점차 가빠지는 숨을 이겨내며 더 깊은 곳으로의 하강을 지속하려는 몸의 의지, 그 옅디옅은 생명력이다. 땅 밑에 수직으로 뚫려있는 좁거나 넓거나 투박하거나 정제된 길들은 어디쯤에서 끊기는지,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가늠할 수 없는 지하 미로를 형성한다. 하강자들이 향하는 이 길의 이름은 다름 아닌 ‘나락(奈落)’이다.

나락으로의 초하로 시작되는 <땅 밑에>는 총 다섯 개의 장으로 구성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새로이 발견된 나락 17루트로의 초하를 위해 10인의 하강자들이 하강을 시작하지만, 도중에 부상자들이 속출하며 이들 가운데 3명(윤형, 산영, 지원)만이 남아 하강을 이어가게 된다. 그 과정 중에 이들은 원시 토굴과도 같은 땅속 공간에서 지하 도시처럼 축조된 길을 발견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하강로에 발생한 지진으로 인해 산영과 지원은 더 이상의 하강을 포기하게 되고, “이번에야말로 죽으려고 이곳에 왔다”2)던 윤형만이 남아 지국(地國)으로의 여정을 이어간다. 점차 가빠지는 숨, 빠르게 변화하는 온도와 습도, 범위를 가늠하기 힘든 땅의 진동, 미지의 루트에 대한 예측 불가능성. 그럼에도 그의 여정은 깊이, 더 깊이 이어진다. 오랜 시간 지속되던 윤형의 하강은 작품 말미에 이르러 금속의 ‘지신’과 조우하며 대전환을 맞게 된다. ‘우주거주구(스페이스 콜로니)의 메인컴퓨터’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지신과의 만남을 통해 그는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맸던 땅 밑에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음의 상태’가 아닌, “어떤 분리도 없는 것, 모든 것, 전체”3)로서의 ‘우주’라는 무한 공간이 자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특히 각색을 맡은 극작가 장영이 시도한 마지막 장에 대한 해석은 작품 전반의 서사성을 스페이스 콜로니라는 특정 맥락을 뛰어넘어 삶에 대한 보편적 사유와 태도로 도약하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게 다가온다.

봐./ 땅 밑에는./ 지금 내 눈앞에는./ 현실이 아니라,/ 진실이 있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집으로 돌아왔어.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살아 있어.)/ (…) 땅 밑에 모든 것이, 무한이 있다고./ 그러니까/ 우리가 어디에 있든/ 우리는 더 내려갈 수 있다고./ (깊이, 더 깊이, 계속 꿈꾸자고.) 4)

<땅 밑에>의 무대를 높은 곳에서 촬영한 사진. 무대 위에 있는 공간은 모두 일정하지 않은 곡선으로 디자인되었다. 갈색의 무대 바닥 위에는 꼬불꼬불한 윤곽선의 지형 같은 것이 공간 전체에 걸쳐 얇게 덧대어져 있다. 무대 중앙에는 커다랗고 평평한 돌이 하나 놓여있는데. 그 위와 주변에 크기가 좀 더 작은 돌들이 여럿 놓여있다. 객석은 무대 공간을 둥글게 감싸 위치하고, 무대 위 허공에는 일정치 않은 크기의 운석이 여럿 매달려있다. 노란 조명이 운석의 일부를 비춘다.

차이의 공존

무한한 우주 어딘가에 부양해있는 거대한 스페이스 콜로니를 외부나 공중의 시점이 아닌, 지하 시점에서 조명한 <땅 밑에>의 공연화 과정은 사실 “사운드 테크놀로지를 어떻게 스토리텔링에 접목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5)에서부터 출발한 것이었다. 그런 만큼 이번 공연의 연출은 극단 청년단의 창단 멤버이기도 한 사운드 아티스트 정혜수가 맡았는데, 그녀는 바이노럴이나 앰비소닉 등 3D 사운드 기술을 활용해 이머시브 연극에 적합한 연출적 환경을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특히 기술적인 설정을 통한 사운드의 위치 변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헤드폰 너머로까지 확장된 공간감을 즉각적으로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방법적으로 유효했으며, 지진 장면에서 관객의 하체 쪽으로 강한 진동이 울리게 한다거나 등장인물의 말이 반복될수록 목소리를 점차 기계화하여 여러 톤으로 분리시키는 등의 소리 실험 또한 주제적 맥락을 강화하는 핵심 요소로 작용했다. 물론 이 같은 사운드 실험 자체는 이번 작품을 통해 처음으로 접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매 장면에 대한 연출적 고민이 사운드 창작에 함께 반영된 까닭에 사운드 자체가 주는 효과보다도 사운드가 텍스트와 빛 등 다른 주요한 연출적 요소들과 결합하는 양상이 돋보였다.

이처럼 공연 요소 간의 효과적인 결합 양상은 주요 사건들에 견고한 인상(physiognomy)을 부여해준 레이저 디자인을 통해서도 살필 수 있는데, 주인공 윤형이 컴퓨터인 지신과 조우하는 순간에 나타나는 레이저 연출은 공연의 시공간을 압도하며 관객의 몰입도를 극대화한다. 일례로 아카이브 성격을 지닌 역사 장치로서의 지신을 시각화하기 위해, 핀 조명처럼 바닥을 향해 수직으로 떨어진 레이저가 마치 비동시적인 시간의 궤적을 공존시키듯이 무대 바닥 위의 지도(cartograph) 윤곽을 따라 점점 넓게 펼쳐지기도 한다. 사운드와 마찬가지로 이 같은 시각적 효과는 매우 독특하면서도 명확한 서사적 전개에 충실히 기반함으로써 작품 전반의 밀도를 높이는 주요 요인이 되어주었다.

<땅 밑에>의 공연 사진. 어두운 무대를 객석 높이에서 촬영하였다. 무대 상단에서 떨어지는 흰 레이저 광선은 무대 중앙에 놓인 돌들 주변으로 일정치 않은 꾸불꾸불한 모양을 그려낸다. 레이저의 궤적을 따라 허공에는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여러 개의 선이 그려진다. 관객석 뒤편에서는 가로로 길고 얇은 파란색 레이저가 천장을 향해 발사되어 빛커튼을 만든다.

어둠 속 소리로, 혹은 하강하는 빛으로 땅 밑 서사를 읽어나가던 관객은 공연 막바지에 이르러 하나의 풍경과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사방에 걸쳐 하나둘씩 희미하게 제 모습을 드러내는 별이다. 텍스트 속 지신이 열어 보여준 땅의 끝에는 그저 어둠이, 그저 어둠 속에서 빛나는 무수히 많은 별들이 있을 뿐이다. 방향을 가늠할 수 없는 그곳은 방향의 상실이 아닌, 방향이 설정되기 이전의 시간성을 구현하는 진정한 어둠의 공간이자 진정한 빛의 공간이며 땅의 끝이자 땅의 시작이다. 물론 공연에 관해서 이야기하자면, 무대 연출과 관련해 이 마지막 장면이 어둠 속에 별이 총총히 박히는 우주 공간이라는 다소 직관적인 해석 안에서 형상화된 점이 아쉬움으로 남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 <땅 밑에>는 더 깊은 곳을 향해 하강하는 자들에 관한 독창적인 서사를, 그 서사로부터 비롯된 강력한 연극적 공간성을 다양한 공연 기호들이 교차하는 이머시브 연극의 형식 안에 담아냈다는 점에서 공연의 주제적, 형식적 확장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사진 제공: 우란문화재단 ⓒ김신중]

우란문화재단 <땅 밑에>
  • 일자 2024.8.28 ~ 9.8
  • 장소 우란2경
  • 원작 김보영 원작영문번역 류승경 각색 장영 연출 정혜수 목소리 출연 김다흰, 권정훈, 최희진, 김시연, 김정화, 김주희, 백혜경, 이현석, 정희원, 주연경 드라마터그 정지수 사운드디자인·테크놀러지 Sham Chung Tat, Andreas Sommer 공간디자인 정승준 조명디자인 정유석 레이저디자인 박선유 무대감독 구봉관 홍보마케팅 박소영 프로젝트매니저 한주연 프로듀서 박예슬
  • 관련정보 https://tickets.interpark.com/goods/24011382
  1. Vilém Flusser, 「Räume」, in: Jörg Dünne und Stephan Günzel (Hrsg.) in Zusammenarbeit mit Hermann Doetsch und Roger Lüdeke, 『Raumtheorie. Grundlagentexte aus Philosophie und Kulturwissenschaften』, Frankfurt a.M.: Suhrkamp, 2006, S.283-284.
  2. 장영 각색, <땅 밑에> 대본 중에서.
  3. 위의 글.
  4. 위의 글.
  5. 우란문화재단, <땅 밑에> 홍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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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옥주

손옥주
공연학자.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연극학, 무용학 전공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공연학자라는 정체성을 바탕으로 무대 위 사건으로서의 공연에 내재하는 움직임의 양상들을 탐구해왔다. 연구방법으로는 학술연구와 현장연구를 병행 중이며, 연구대상으로는 우리 시대의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미학적 징후들을 예민하게 포착해내는 다양한 공연예술장르를 포괄한다.
okjuso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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