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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 뱃속에서의 끈적한 밤이 우리에게 남기는 것들

윤미희 <물고기 뱃속>

이지현

제261호

2024.09.12

물고기 뱃속. 이곳은 고통과 구원을 경계 짓는 은유적 장소이다. 성경에서 주님으로부터 도망친 예언자 요나가 바다에 던져진 뒤 물고기에게 잡아먹혀, 사흘 밤낮을 갇힌 채 구원을 외쳤던 곳.
연극 <물고기 뱃속>(윤미희 작·연출)은 성경 속 요나의 이름을 연상시키는 ‘유나(김수아 분)’와, 스스로 ‘미정’이라는 이름을 붙인 복자(김채원 분)가 외딴 부둣가에서 조우하여 우연히 같은 배에 타게 되면서 일어나는 여정을 보여준다. 모르는 사이였던 두 사람은 각자의 기억을 교차시키며 엄마와 딸의 관계, 임신과 출산에 대한 고민과 같은 여성들의 공통분모를 무대 위에 풀어낸다.

<물고기 뱃속>의 공연 사진. 보라색 긴 코트를 입고 빨간 테의 선글라스를 쓴 복자가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다. 그의 뒤편으로 에스닉 무늬 반소매 원피스를 입은 유나가 서서 손바닥만 한 종이를 들어 바라본다. 무대에는 굵고 흰 밧줄이 길 모양으로 늘어져 있고, 무대 뒤편에는 흰 원 띠와 투명한 구, 불투명도가 다른 동그란 아크릴이 겹친 장식물들이 가득 걸려 있다. 유나의 뒤쪽으로 두꺼운 밧줄을 동그랗게 묶은 형태의 오브제가 걸려 있다.

유나와 복자, 우연의 일치 혹은 동기화

“물고기 뱃속 같네. 진짜 물고기 뱃속은 아니고 물고기 뱃속 같다고. 진짜 물고기 뱃속이면 지금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말하고 숨 쉬고 그러겠어. 그냥 하는 말이지.”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복자의 대사는, 연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유나의 입을 통해 다시 발화된다. 두 사람 사이에서 발생하는 이 같은 동기화는 여러 갈래로 나타난다. 이를테면 딸을 법조인으로 키우고 싶었다는 복자에게 유나가 “딸이 법조인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기 전에, 아줌마가 먼저 법대에 들어가서 법 공부 해보세요”라는 조언을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래서 지금 대학 다니고 있어요”라고 하는 복자의 반응이나, 자신의 딸 또래인 유나를 보고 임신했냐고 질문하는 복자를 향해 머뭇거리다 “이신(이중 임신) 했어요”라고 대답하는 유나의 반응과 같이 말이다. 처음 만난 중년의 ‘아줌마’에게 딸 대신 대학에 가서 법 공부를 하라고 무심코 제안했는데 우연히도 그녀가 갓 법대에 입학한 신입생이었다는 것이나, 상대방에게 대뜸 임신했냐고 물었을 때 이중 임신을 했다는 대답으로 말문을 막아버리는 것과 같은 초반부의 전개는 두 인물 간의 연결고리를 다소 인위적으로 생성한다.
두 사람 사이에 나타나는 동기화는 극 중 현실과 꿈, 환상의 시공간을 교차시키는 장면들을 통해 이어진다. 꿈속 과거 회상 장면에서 유나 역할의 김수아 배우가 복자의 딸로 등장하고, 유나가 두 번째 애인과 출산에 대한 견해 차이로 다투는 회상 장면에서는 복자 역할의 김채원 배우가 애인으로 나타난다. 또한 복자가 바다 수영을 하다 익사할 위험에 처해 사경을 헤맬 때 물고기 뱃속에 갇힌 것으로 묘사된 그녀의 꿈속에 유나가 등장하자, 복자는 “같은 꿈을 꾼다는 건 엄청난 인연이야”라며 서로의 동기화된 상태를 적극적으로 인식한다. 복자의 엄마 혹은 과거의 기억을 상징하는 누군가로 등장하는 순금(이주협 분)은 축축하고 끈적한 물고기 뱃속에 남기를 선택하지만, 유나는 있는 힘을 다해 물고기의 배를 갈라 복자를 데리고 빠져나온다.
연극은 극 중 환상과 회상이 뒤섞인 장면들을 통해, 세대를 아우르는 여성 서사의 맥락을 형성하면서 배에 탑승하기 이전까지 유나와 복자의 삶에서 고통스러웠던 순간들을 끄집어낸다. 무대 바닥에는 하얀 밧줄이 뱃머리 모양으로 둘러쳐져 사선 방향을 향하고 있고, 인물들은 밧줄로 구획된 안쪽과 바깥쪽을 오가며 시공간의 경계를 넘나든다. 극 중 현실의 바다 수영과 맞물려 물고기 뱃속으로 빨려 들어간 복자는 “이 세상이 아주 커다란 물고기 뱃속 같다는 생각”을 해왔다면서, “세상은 알 수 없는 물고기 뱃속 같아”라는 말을 한다. 복자와 유나, 그리고 그 속에 침잠한 채로 살아가는 순금에게 ‘세상의 가장 깊숙한 곳’인 물고기 뱃속은 어떤 의미일까?

<물고기 뱃속>의 공연 사진. 무대 바닥에 놓인 밧줄이 무대 우측 관객석 쪽을 가리키는 뾰족한 모양으로 놓여있다. 뾰족한 공간 안쪽에 두 눈을 감은 유나가 무릎을 가슴에 모으고 양팔로 다리를 감싸 쪼그려 앉아있다. 무대 반대편 뒤쪽 허공에 걸려 있는 원 모양의 밧줄 오브제 뒤로 순금이 서 있다. 그는 상체를 앞으로 살짝 숙여 유나를 바라본다.

물컹거리는 감각이 주는 익숙함에 대한 고찰

성경의 「요나서」에서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구원은 주님의 것”을 외친 덕분에 물고기가 요나를 도로 뱉어내어 다시 생명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연극에서는 복자가 처음 유나의 이름을 듣고 성경의 요나를 떠올리며 신앙에 관한 대화를 주고받는 것으로만 물고기 뱃속에 관한 모티프가 어렴풋이 암시되는데, 이후 극의 전개를 통해 두 인물 또한 함께 탄 배 속에서, 혹은 물고기 뱃속에서의 여정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얻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하늘 혹은 물고기가 구원해줄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유나가 직접 물고기를 죽여 뱃속을 찢고 나아갔다는 점에서 삶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대에서 쌓아 올린 극 중 현실과 환상의 교차들이 두 인물을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힘으로 나타났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우선,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는 위기 상황 이전까지 이들의 꿈과 환상 장면은 유나와 복자가 겪어온 갈등과 고통의 내용이 무엇인지 관객에게 인식시켜주는 역할을 했고, 이때 주요한 내용은 동시대 여성들이 각 세대를 거치면서 겪는 보편적인 고민이었다. 한편 이들이 갇힌 물고기 뱃속은 어둡고 축축하고 끈적하고 물컹거리고 빠져나오기 어려운, 삶을 짓누르는 거대한 감각으로 묘사되었는데, 이후 물고기 뱃속을 찢고 나오는 환상 장면과 연결되는 극 중 현실은, 유나가 물에 빠져 응급 상황에 처한 복자를 구조한 상황이었다. 이를 거칠게 정리하면, 동시대 여성의 고민과 갈등을 짊어진 인물들이 고통에 뒤엉켜 침잠하는 상황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현듯 삶에 대한 의지를 발휘하여 죽음으로부터 빠져나오는 전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나의 의지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복자가 여정에서 찾고자 했다던 시작점은 무엇을 통해 어떻게 만나졌는지 등에 관한 질문들은 물음표로 쌓인다.
유나가 물고기 뱃속을 찢고 탈출하기 전 순금은 “어디에서 들어본 것 같은 이야기는 다 잊어버려”라고 말하며 “새로운 너의 이야기를 찾아”라고 충고한다. 어쩌면 이 대사는, 스스로의 이름과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 연극이 관객들에게 전하려는 핵심일지 모른다. 관객 중 한 명인 나 역시 순금의 말에 공감하고 싶지만, 이 축축하고 끈적한 세계가 새로움보다는 어딘가 익숙한 감각으로 다가오는 것은 왜일까.

<물고기 뱃속>의 공연 사진. 순금, 유나, 복자가 나란히 쪼그려 앉아있다. 순금과 유나가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있고, 정면을 향한 채 양팔을 무릎에 기대어 앞으로 쭉 뻗은 복자의 왼손에는 반으로 접힌 종이가 하나 들려있다.

[사진 촬영: 엄현석]

윤미희 <물고기 뱃속>
  • 일자 2024.8.23 ~ 8.31
  • 장소 신촌문화발전소
  • 작/연출 윤미희 출연 김수아, 김채원, 이주협 무대/이미지 허연화 음악/사운드 정의석 의상/사진 이윤진 조명 김수려 무대감독 이라임 음향오퍼 김장호 조명오퍼 고민주 접근성 윤다올 촬영 엄현석 홍보 장정아 기획 오유리, 정아름 주최,주관 윤미희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 관련정보 https://tickets.interpark.com/goods/24010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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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현

이지현
연극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 illang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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