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TV에 박제된 NPC의 비바리움
극단 철인 <무단거주자>
이의자
제261호
2024.09.12
극장에서는 지하실 특유의 습한 물비린내가 났다. 벤치를 떠나지 않고 노숙하는 필현에게서 나는 냄새일까. 필현은 처음 보는 재희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작은 수족관을 운영한다고 한다. 과거 어느 시점에서 그의 말은 사실일 수도 있다. 그에게는 비바리움을 장식하듯 결혼해서 아이들을 낳고 키우며 아기자기하게 살았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돌보지 않은 수족관에서는 무엇도 살아갈 수 없다. 마포대교를 기준으로 합정동 집과 데칼코마니처럼 대척점에 있는 보라매공원 벤치는 그에게 남은 마지막 비바리움이다.
<무단거주자>는 50년대 미국 사회를 배경으로 한 에드워드 올비의 부조리극 「동물원 이야기」를 동시대 대한민국에 맞추어 각색한 작품이다. 원작이 화이트 컬러(피터)와 블루 컬러(제리)에 속하는 인물을 통해 세계대전 이후 소외된 인간의 소통 부재를 다루는 데 반해 <무단거주자>는 비자발적인 이유로 사회로부터 격리당한 인물들을 통해 사회적인 책임에 좀 더 무게를 싣는다. 중산층인 피터에게 센트럴공원 벤치가 휴식을 위한 공간이라면 가족으로부터 오래전 밀려나 잊힌 필현에게 벤치는 물러설 곳 없는 마지막 보루이다.
한때 고속 성장의 주역이었으나 자영업과 재취업 과정을 거치며 공원을 배회하는 처지에 놓인 필현과 같은 중년 인물들은 같은 자리에서 과거를 되새기며 말을 반복하는 NPC를 연상시킨다. NPC들 사이에서 재희는 신중하게 대상을 물색한다. 재희는 필현이 벤치에 잠든 사이, 자리를 떠나지 않는 그를 위해 김밥이나 크림빵 따위를 몰래 놓고 온다. 다음날, 망설이다가 김밥을 뜯는 필현의 손길이 어색하다. 김밥이 얼마나 빨리 쉬는지 모르는 어리숙한 그는 곧 붙박이처럼 지켰던 벤치에서 일어나 화장실을 찾는다.

유준원 배우가 연기하는 필현은 극사실주의 회화에 가깝다. 가족의 일원으로 돌아가려는 의지와 그러지 못하는 현실 사이 갈등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몸에 밴 습관처럼 삭힌다. 이를테면 ‘각’이 그렇다. 날짜가 지난 신문을 바닥에 깔고 자거나 덮는 대신 반듯하게 접어서 정독하는 자세로부터 배낭 대신 각이 진 캐리어, 양복 재킷의 어깨선, 꽁초뿐인 하드보드 담뱃갑, 안경집을 비롯해 그를 구성하는 모든 것이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곽유평1) 배우는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치료시기를 놓친 심각한 결핵과 우울증을 앓고 있는 30대 재희를 연기한다. 재희는 머지않은 죽음을 직감하지만, 뒤처리를 해줄 가족이 없다. 집주인이 특수 청소를 했다는 얘기를 들은 재희는 자신의 죽음을 상상한다. 큰 방을 합판으로 나눈 월세 20만 원짜리 틈새 같은 단칸방에서 쓰레기봉투에 실려 나가고 싶지는 않다.
두 사람은 대화 도중 전날 프로야구 경기 결과를 말하듯 자연스럽게 마포대교를 화제에 올린다. 투산자살율 1위, 자살 예방 문구, 생명의 전화, 동상이 소용이 없더라는 얘기를 나눈다. 죽음이 바짝 다가섰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공감대를 확인한다. 필현은 재희가 내미는 칼을 보고도 두려워하는 대신 빵을 갈라 먹자는 제안을 할 만큼 친밀한 동질감을 보인다. 벤치 외에 무엇도 없는 필현은 노숙자로 치면 형편없는 적응력을 가졌다. 필현은 휴대폰을 빌려 가족에게 전화를 건다. 낯선 번호라면 가족 누군가 전화를 받지 않을까, 회의적이지만 한때 자신의 것이었던 번호보다 높은 확률로 받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재희는 의미 없이 오가는 대화를 그만두고, 필사적으로 버티는 필현을 집으로 돌려보낼 결심을 한다. 무단거주자를 내쫓는 스스로 정한 NPC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기로 한 것이다.

재희가 시비를 걸 때, 필현은 재킷이 상하거나 더러워질까 반팔 러닝셔츠 차림으로 맞선다. 재희의 거친 우격다짐에 목이 죽 늘어난 속옷 뒤로 비쩍 마른 가슴팍이 드러난다. 승산이 없는 게임이지만 재희의 거센 도발에 이번만은 물러서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드러난다. 두 사람의 열의를 다한 실랑이에 낡은 바닥 매트가 뜯겨 일어난다. 단단해 보이는 아스팔트 블록이라는 설정이 낡은 요마냥 뜯기는 불안한 무대는 현실에서 공원의 그럴싸한 풍경이 언제고 쫓겨날 불안한 거처라는 반증처럼 보인다.
부러 칼을 피하지 않은 재희는 공원 밖으로 달리는 필현이 가족과 상봉하는 상상을 하며 햇살 아래 넓은 공원에 누운 채 죽음을 맞이한다. 필현은 재희의 바람대로 NPC가 아닌 자유도 높은 플레이어로 승자의 기분을 안고 집으로 돌아갔을까. 1958년 센트럴파크와 다르게 2024년 보라매공원에는 CCTV가 있을 것이다. 재희가 시비를 걸었고 칼이 재희의 주머니에서 나왔으며, 마지막에 재희가 칼자루에 묻은 필현의 지문을 닦는 행동이 정상참작이 될 테지만 높은 확률로 필현은 동물원 우리와 같은 철창 안에 갇힐 것이다. 가족은 필현이 살인을 저지르는 등 폭력성을 드러냈다며 강한 처벌을 요구할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집에 가기 위해서는 마포대교를 통과해야만 한다. 다리에 설치했다는 투신 방지용 안전 펜스는 자리에서 벗어나 일탈을 시도한 NPC를 지켜줄 수 있을까.

[사진 제공: 극단 철인 ⓒ조용범]
- 일자 2024.8.30 ~ 9.1
- 장소 양산박 스튜디오
- 작 에드워드 올비 각색 김여래 연출 김은정 출연 유준원, 곽유평 예술감독 조수연 드라마닥터 강지수 기획 임해승 홍보 위풍당당 성없뚱(이동훈) 촬영&미디어콘텐츠 조용범 진행 신소영, 장서연 주최·주관·제작 극단 철인
- 관련정보 https://playticket.co.kr/nav/detail.html?idx=3206
- ‘늘 연극을 해나감에 있어 끝없는 부딪힘과 무너짐 그리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이 공연이 마지막일 수 있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당신들을 기다렸고 뜨거운 포옹을 하였습니다.(후략).’ 극단 철인 대표로 곽유평이 작품 소개란에 남긴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