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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태를 보고 짧은 희곡 쓰기

극단 인어 <변태>

이오진_극작가

제80호

2015.11.19

조명 들어오면, 도서 대여점 <책사랑>. 월간지부터 만화, 무협지, 베스트셀러 소설 등 책들이 두서없이 꽂혀있다.

극단 인어 <변태>


11월. 비 오는 밤.

공간
홍익 2동 도서대여점 '책사랑'
대학로 술집 '서커스'

인물
연극 속 인물
서효석 - 40대, 시인. 도서대여점 '책사랑' 운영
오동탁 - 40대, '장수정육점' 사장

현실의 인물
장용철 - 50대, 배우. 대학로에서 술집 '서커스' 운영
이오진 - 30대, 극작가. 웹진 [연극in] 리뷰어
장우제 - 30대, 사진작가. 웹진 [연극in] 사진가

조명 들어오면, 도서 대여점 <책사랑>.
월간지부터 만화, 무협지, 베스트셀러 소설 등 책들이 두서없이 꽂혀있다.
어떤 책들은 쓰러질 듯 위태롭게 바닥에 쌓여있다. 실내 한켠에 어울리지 않게 최신형 컴퓨터가 놓여있다. 효석이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고 있다.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다. 얼굴이 상기된 효석. 포르노를 보는 중인 듯하다.
딸랑, 소리와 함께 가게의 문이 열리고, 오진이 들어온다.
효석, 급히 컴퓨터 전원을 끄고 오진을 맞이한다.

오진
안녕하세요.
효석
안녕하세요. 전화 주셨던 작가님이시죠?
오진
예. 이오진입니다. 웹진 [연극in]에서 리뷰 쓰고 있어요.
효석
반갑습니다. 시 쓰는 민효석 입니다.

효석과 오진, 악수를 한다.

효석
그런데 저를 왜 인터뷰를 하신다는 건지... 시집이 안 나온 지도 3년이나 되었는데요.
오진
연극 <변태>의 주인공이시잖아요. 그래서 왔어요. 리뷰 쓰기 전에 얘기나 좀 나눠 보고 싶어서.
효석
아… 그러시군요.
오진
(가게를 둘러보며) 아직도 이런 도서대여점이 남아있다는 게 놀랍네요. 중학교 때 만화책이랑 하이틴로맨스 같은 거 맨날 빌려 보곤 했었는데..
효석
예전엔 다 그랬죠.
오진
그런데… 가게 이름이 좀 촌스러워요. ‘책사랑’이라니.
효석
그런 이야기 종종 듣습니다.
오진
작명을 좀 더 센스 있게 하셨으면 손님들이 더 좋아했을 텐데. 요새는 사람들이 그런 거에 끌려요.
효석
촌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본질에 충실한 이름이죠. 쓸 데 없이 멋부린 작위적인 이름보다는 낫지 않나 생각합니다.
오진
월세 내기도 어려우시다고 들었는데.
효석
뭐, 그 정돈 아닙니다.
오진
(의심스럽다는 듯) 월세가, 나오나요?
효석
좀 어렵긴 합니다만ㅡ 요새 날이 추워서 그렇지, 봄이 오면 좋아질 겁니다.
오진
겨울에 안 읽던 사람들이 봄이라고 읽겠어요?
효석
봄 오면 아무래도 사람들이 뭔가를 새로 시작하는 마음이니까 책을 찾게 되지 않을까요.
오진
글쎄요. 봄 오면 놀러 다니기 바쁘겠죠. 어차피 건물주가 나가라고 한다면서요.

사이.
효석, 잠시 말을 고른다.

효석
그건 제가 알아서 할 일 입니다.
오진
전 그냥 작가님이랑 사모님 걱정 돼서 한 말이에요.
효석
작가님이 월세를 내시는 건 아니잖습니까. 좀 무례하신 거 같네요.
오진
그런 이야기 종종 듣습니다. (테이블 가리키며) 앉으실까요.

효석, 무슨 말을 하려다가 만다.
효석, 오진 테이블에 마주 앉는다.
오진, 수첩을 보며 질문을 정리한다.

오진
데뷔작 이야기부터 해볼까요? 첫 시집 제목이 뭐였죠? 『알리바바의 아라비안 나이트』 였나요?
효석
『램프 없는 아라비안 나이트』 입니다만.
오진
비슷하네요.
효석
많이 다른 것 같은데요.
오진
(수첩 보며) 신작 계획은 어떻게 되세요?
효석
틈틈이 쓰고 있습니다. 네 번째 시집 준비 중이에요.
오진
요새는 제자를 키우고 계신다고 들었어요.
효석
제자라고 말하기는 좀 그렇습니다. 제가 스승도 아니고… 시를 무척 사랑하시는 분께 일주일에 한 번씩 시를 가르쳐 드리고 있습니다.
오진
오동탁 씨 말이죠?
효석
아시는군요.
오진
예, 공연을 봤으니까요.
효석
(씁쓸하게) 덕분에 월세는 냅니다.
오진
그 분은 보통 언제 오시죠?
효석
원래는 토요일 날이 수업인데, 가끔은 좋은 부위 나왔다고 고기 갖고 들르시기도 합니다.

극단 인어 <변태>

그 때 딸랑,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동탁 등장한다.

동탁
선생님! (오진을 보고) 아이고 손님이 계시네요.
효석
마침 오시네요. 이쪽은 장수정육점 운영하시는 오동탁씨 입니다.
오진
마치 연극 같네요. 하필 이 타이밍에 우연히 등장하시다니.
동탁
아, 제 이야기를 하고 계셨나요?
오진
반갑습니다.

동탁과 오진, 악수 한다.

동탁
그런데 무슨 일로…?
오진
민효석 선생님 인터뷰를 하러 왔어요. 괜찮으시다면 오동탁 선생님이랑도 같이 인터뷰하면 좋을 거 같네요. (강조하며) 시인이시잖아요.
동탁
시인이요? 제가요? 아이고, 농담도 그런 말씀을. 제 시는 그냥 고깃덩어리에요. 우리 선생님이 훌륭한 시인이시죠.
효석
아닙니다, 동탁 씨도 시인이에요. 시를 쓰면 누구나 시인입니다. 그리고 동탁 씨 시는 변별력이 있어요. 저 같은 먹물들이 갖지 못한 진솔과 파격이랄까.
동탁
선생님 또 띄워 주시네. 그런 말씀 마세요. (오진에게) 저기 선생님, 우리 민효석 선생님은 아주 고결하신 분입니다. 저같이 천박한 놈이랑은 비교가 안 되는 분이에요. 제가 태어나서 책을 딱 두 권 읽었는데 말입니다, 처음 읽은 책이 고등학교 때 읽은 그 뭐냐, (효석의 눈치를 본다) 차… 차달… 래의 사랑?
효석
『채털래이 부인의 사랑』
동탁
예, 『채털래이 부인의 사랑』 그거하고 우리 작가님이 쓰신 『램프 없는 아라비안 나이트』 이렇게 딱 두 권 입니다. 저는 우리 동네에도 이런 아름다운 책방이 있다는 게 무진장 자랑스러워요. 실례지만 어떤 일을 하십니까?
오진
아ㅡ 저는 원래는 연극이나 뮤지컬 대본 쓰고요. 한 달에 한 번씩은 공연을 보고 창작진과 인터뷰를 해서 공연 리뷰도 씁니다. 오늘 그래서 온 거고요.
동탁
영화 극본 작가 같은 건가요?
오진
뭐 비슷한 거예요.
효석
공연 비평을 하시는 군요.
오진
비평 아니고 그냥 리뷰를 씁니다.
동탁
두 개가 다른 겁니까?
오진/효석
(동시에) 비슷해요/다릅니다.
효석
그쵸, 비슷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데.
오진
전 지금도 리뷰를 쓰고 있어요. 지금 두 분이 말씀하시는 것도 리뷰의 일환으로 다 적고 있습니다.
효석
지금 제가 하는 말을요?
오진
예.
효석
작품에 나오는 대사도 아닌데, 작가님이 그렇게 멋대로 쓰셔도 되는 겁니까?
오진
이건 제 글이니까요.
효석
아니죠. 비평은 어디까지나 객관성을 유지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비평은 일기도 아니고 작가님 연극 대본도 아닙니다. 지금 효석이라는 인물을 작가님 마음대로 재단하고, 당신의 언어로 이 인물을 오해하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안 합니까?
오진
저는 비평한다고 말한 적 없는데요. 저 그냥 공연 리뷰 씁니다. 그리고 세상에 완전한 객관성이란 건 존재 할 수가 없는 거 아닌가요…? 공연을 보고 해석을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관객의 몫이죠. 이 태도가 마음에 안 드신다면 죄송하지만, 작품의 인물이 저한테 객관성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닌 거 같네요.
동탁
(분위기를 바꾸려) 하하, 두 분이 말씀 하시는 게 아주 지적이고 뭐랄까. 고귀하다고 할까요. 뭐랄까. ‘민중과 지식인’ 이라는 책 제목이 딱 떠오르네요. 저같이 고기나 써는 무식한 놈은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지만서도…
오진
(말 끊으며) 오동탁 씨 같은 분이 그렇게 계속 띄워주니까, 민효석 씨가 자기 편한 방식으로 주위사람 괴롭히면서 사는 삶을 계속 이어가시는 거 같네요.
동탁
아, 그게. 저는 그런 뜻이…
효석
(오진에게) 나가 주세요. 인터뷰고 뭐고 더 이상 할 생각 없습니다.
오진
저도 그 쪽이랑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가겠습니다. 그리고 오동탁 아저씨, (효석 가리키며) 이 사람 하나도 안 고결해요. 포르노 중독자에다가 스페인의 왕자지 포르노 배우를 숭배하기까지 한다고요. 포르노 볼 시간에 시를 썼으면 지난 3년 동안 시집 한 권 못 내진 않았겠지. 앞으로 계속 그렇게 사세요. 어차피 이혼하고 집도 절도 없이 혼자되는 거 시간문제니까.
동탁
뭐? 이 여자가 지금…

오진, 가게를 나간다. 가게 문이 닫히는 딸랑, 소리가 아까보다 거칠다.

극단 인어 <변태>

동탁
미친년 아니야 저거? (효석에게) 저거 완전 또라이네요. 선생님 신경 쓰지 마세요.

효석,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대로 서있다.

무대 바뀌면 대학로의 술집 ‘서커스’.
용철과 오진이 마주 앉아 소주를 마시고 있다.

오진
저는요, 원망하고 싶었어요. 민효석을. 그의 순수함과 무능함이. 어딘가 익숙하달까. 어떠셨어요?
용철
글쎄… 효석이라는 인물은 제가 미워하고 미워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닌 거 같아요. 처음 저를 캐스팅하겠다고 왔을 때 연출도 제게서 민효석을 발견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대학로에서 서커스 운영하고… 연극하고… 하면서 사는 게.
우제
효석은 책방 하기 전에 삶이 어땠나요?
용철
작품에서는 전혀 과거의 것이 드러나지 않죠. 대학교 때 노래패 했다는 이야기. 학창 시절에 기타 치면서 한소영 만났고. 학생운동을 했는지, 사회과학을 했는지도 드러나지 않아요.
우제
그럼 효석은 왜 ‘책사랑’의 문을 닫고 집을 나간 건가요?
용철
전에 최원석 작가가 그랬어요, 체호프의 희곡 <벚꽃동산>을 오마주했다고. 거기에 보면 당시 시대상이 나오죠. 구태에 젖어있는 사치스러운 귀족들. 산업화에 적응 못하는 이들. 그들처럼 효석도 1kg의 책이 100원에 팔리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죠. 최원석 작가가 살던 동네에도 도서대여점이 있었대요. 어느 날 가게가 없어지고 치킨집으로 바뀌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 당연하지. 통닭에 맥주가 잘 되지. 책방이 잘 되겠어.’ 그러면서 생각했대요. 저 도서대여점을 하던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게 <변태>의 시작이었고… 작가가 그래요. 이 시대에 민효석 같은 인물도 하나쯤은 있어야지 않겠냐고. 이 말이 현실에 순응하는 오동탁을 폄하하는 말은 아니고요. 그냥, 그런 거죠.
오진
그쵸. 맞아요.
우제
그런데 집을 나간 효석은 어디로 갔을까요?
용철
글쎄요, 어디로 갔을까요. 연출에게 물어본 적이 있어요. 효석은 어디로 간 거냐고. 연출이 그러더군요. 자기도 모른다고. 어디론가 갔지 않겠냐고.
오진
인상적이네요. 작가나 배우가, 그 인물의 모든 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해요. 그냥 그 인물의 삶은 그의 삶으로 남겨두는 것도 좋네요.

극단 인어 <변태>

오진
사실 효석이라는 인물은 아내인 소영보다 훨씬 더 윤리적이에요. 자신의 제자가, 쓰레기 같은 시를 쓴다고 생각했던 푸줏간 주인이 등단을 하고 시집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걸 봤을 때. 저주하고 외면하기 보다는 고개를 숙여 축하를 전하죠.
용철
그쵸, 얼마나 시샘이 나고. 그랬겠어요.
오진
그래서 효석을 미워할 수도 없죠.
용철
맞아요.
오진
저는 민효석이 스스로 자기가 순진하다는 것까지 알고 있지 않을까. 지식인들의 특징이 아닐까 생각하는 게, 스스로에 대한 자성과 탐구일 거라는 생각을 하거든요. 민효석에게도 분명히 그런 시간이 있었을 거 같은데. 백석이 시에서 그러잖아요. '세상 같은 건 더러워서 버리는 거'라고. 백석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 자기도 부적응하고 있는 스스로를 직시할 수가 없어 그렇게 표현한 걸 텐데. 효석도 그렇게 스스로를 순진하다고 믿어 버리는 게 아닐까. 그런 식으로 견디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 했어요. 민효석의 아내인 한소영도 남편이 이 모든 걸 알고 있다는 걸 다 아니까 받아주고 안아주고 하지 않았을까, 생각했어요. 효석이 자신은 도살장에 가서 일도 못하는 놈이라는 자괴감을 이미 소영 못지않게 갖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제 해석일까요?
용철
자괴감이 없진 않죠. 그렇지만, 예를 들어, 도살장에서 5일 일하고 뛰쳐 나오는 효석은, 자괴감에 젖기보다는 골똘히 생각을 하는 사람이에요. '사람들은 안 아픈가? 왜 나만 아프지?" 효석은 진짜 무릎이 아퍼서 못 걷겠는 거죠. 제가 해석한 민효석은 순진하다, 착하다, 선하다 쪽에 더 가있어요. '소설 한 번 써봐? 인터넷 기사 보면 다 소설인데?' 라거나 '나는 포르노에 중독된 게 아니야, 순수하게 탐색하는 거야'라고 하잖아요. 그게 효석의 진심인가? 아니면 구라일까? 걸리더라고요. 연출이 그랬어요. 민효석의 진심이라고. 그래야 민효석이 탄탄해 진다고.
오진
저 같은 경우는… 글을 쓰고 연극을 하는 일이 매일 같이 고기를 써는 것과 같은 단순하고 착실한 노동 앞에서 되게 볼품없이 느껴지기도 했어요.
용철
그런 면 때문에 왜 자학하느냐고 얘기 하는 사람도 있어요.
오진
자학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 고민과 사유의 깊이가 느껴지는 텍스트였어요. 그와 동시에… 공연을 보고나서 배우님께 무슨 질문을 해야 할까, 고민하게 되기도 했어요.
용철
왜요?
오진
틈이 없는 텍스트라고 할까.
용철
너무 많이 보여주고 있다고 느낄 수도 있죠.
오진
예. 러닝 타임 자체도 길지만(120분), 그 긴 이야기 속에 인물들의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이 다 무대 위에서 드러나고 있었어요. 오동탁의 등단 소식을 전하는 것으로 작품이 끝나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사이.
오진, 시계를 본다.

극단 인어 <변태>

오진
한 시가 넘었네요. 서커스 언제 문 닫으세요?
용철
새벽 두 시 반까지는 있어요, 보통.

사이.

오진
저기, (옆에 있는 기타를 가리키며) 우리 기타 칠까요.
용철
좋아요, 얼마든지요.

오진, 기타를 치고 노래를 한다.
용철, 기타를 치고 노래를 한다.
우제, 기타를 친다.

밤이 깊어간다.

암전.

* 본 리뷰의 내용은 필자의 감상에 따라 작품의 인물들을 주관적으로 수정/변형하여 쓰여졌습니다.

[사진: 장우제 woojejang@gmail.com & 컬쳐마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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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진

이오진 극작가
한예종 연극원에서 극작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비평을 공부했다.
연극과 뮤지컬을 열심히 쓰고 있다. yavoxy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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